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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는 주린 배를 쓰다듬으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저녁 8시 반이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퇴근 후 엄마의 힘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몇 시에 오는지 물으려다 그만두고 간이침대에 잠든 동생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 가래를 빼주기 위해 아빠에게 몸을 기울이는데 간호사가 소등했다. 모두 침대 머리맡의 취침 등을 켜고 커튼을 쳤다.
“반딧불이 같아…….”
언젠가 7살 동생이 아득하고 조금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6인실은 빛과 소리로 서로에게 신호를 보내는 반딧불이의 세상이었다. 너무나 쉽게 사라져가는 하루살이들.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은 왜, 자꾸만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하는지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다.
아빠가 쓰러지고 처음 의식이 돌아왔을 때였다. 엄마는 아빠에게 당신이 착한 사람이라 살아났다며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빠는 완전히 의식을 잃어버렸다. 의사는 연명 장치 선택을 결정할 시간을 주겠다고 했다. 엄마는 생각할 게 어디 있냐고 당장 해달라고 소리쳤다. 그때 아빠는 아무것도 모른 채 옆에서 입을 벌리고 잠만 자는 것처럼 보였다.
아빠는 고목처럼 되어갔다. 나무를 말린 리코더의 몸체처럼 단단해졌다. 한 번도 불리지 못한 악기를 그러쥐듯 엄마는 아빠의 손을 감싸며 자신이 어떻게든 살리겠다고 말했다. 지난 일 년 가까이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전셋집을 줄이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병실 생활을 이어왔다. 이제 엄마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병실 생활을 시작할 무렵, 지우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적의를 가졌었다. 어른들이 그 시선 안에 자신을 가두고 희망 없는 삶이라고 판결을 하는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병실 생활이 길어지면서 지우는 그들의 언뜻 무례하고 단순해 보이는 질문들이 싫지만은 않았다.
그런 것도 없니, 엄마는 어디에 있니, 라고 묻는 말들이 대상을 관찰하며 상대적으로 자신들이 안심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었음을 알았을 때, 지우는 그들을 따르게 되었다. 그들의 질문들은 매번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형제를 위한 보살핌으로 다음 말을 이어갔다. 무언가를 오래 견뎌온 사람만이 해줄 수 있는 서글픈 위로 같았다. 자신에게도 그러한 호의를 베풀어주기를 막연히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맞서기보다 받아들이면서 지우는 이 병원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래도 지우는 엄마가 오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좋았다. 병실 사람들의 호의가 보호막이 되어줬음에도 벗어나고 싶었다. 병원이라는 거대한 괴물이 뿜어내는 기운이 그곳에 감돌고 있었으므로.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술집의 노상 테이블에 앉아 있다. 기분 좋게 취한 사내 하나가 형제의 뒷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 눈길이 발끝에 머물다가 그림자처럼 사라져 간다는 느낌을 들자 지우는 돌아섰다. 그들은 한 점 시름없이 여유로운 생활 속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서로 다른 삶이 하나의 길 위에서 스쳐 가고 있다. 지우는 아빠도, 동생도 없이, 무엇을 지켜야 한다는 느낌 없이, 그들처럼 자유롭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이 지금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았음을 뚜렷이 느꼈다.
“아파…….형”
동생은 또 졸린 지 업어달라며 지우의 팔을 잡아당겼다.
업혀있는 동생의 온기가 지우의 등으로 전해졌다. 집으로 다가갈수록 마른 나무 향이 짙어졌다. 소꿉놀이하는 동생이 돌로 빻던 잎새의 비릿한 내음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집인데 어깨가 아파졌다. 어서 내려놓을 수 있기만을 바라는 마음이 되어버렸다. 말 못 하고 병상에 누워있는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병원에 입원했던 첫 달, 아빠는 중환자실과 일반병실을 몇 날 간격으로 옮기고 엄마는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었다.
“마음의 준비를 해두셔야 합니다.”
아빠의 병실 위치가 바뀔 때마다 듣던 말이었다. 그럴 때면 소년의 가족은 서로 껴안고 울었다. 점차 그 말이 간호사가 하는 형식적인 말로 변해가면서 마음 한편, 이 생활이 언제 끝나나 셈하기 시작했다.
군데군데 패인 골목길로 들어서며 지우는 어르듯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누가 이렇게 우는 거야, 하는 고함이 환청처럼 들렸다. 불 꺼진 창들을 올려다보았다. 동생이 설핏 든 잠에 깨어 울어버릴까 지우는 제발, 이라고 되뇌었다. 지우는 졸음 따위로 칭얼거리지 않을 만큼 동생이 컸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빠가 깨어나지 못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모를 만큼 동생이 크지 않았으면 좋겠다.
엄마의 냄새가 배어있는 요 위에 동생을 눕히고 가방 안에서 리코더를 꺼냈다. 3학년으로 올라갈 무렵 지우는 음악 시간에 악기를 배운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여느 때처럼 아빠는 지우와 뒷동산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엄마에게 남기고 등산복 차림으로 낙원상가에 갔다. 상가 입구에 들어서니 마른 나뭇가지 냄새가 났다. 체리 빛깔의 리코더에, 밤새고 용접하며 아빠가 버는 일당이 들어 있었다. 아빠는 지우와 눈을 맞추려고 키를 낮추며 엄마에게는 비밀이라고 일렀다.
사고를 당하기 전에 아빠는 주말마다 지우와 동생을 데리고 남한산성으로 등산을 갔다. 수어장대까지 이르는 길이 동생 때문에 멀어져만 갔다. 힘들다고 가다가 그만두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처음에는 동생에게 화가 나다가 나중에는 언제까지 재미없게 산만 오르내려야 하는지 화가 났다. 다른 친구들처럼 부모님과 체험학습에 참여하거나 멀리 여행을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통로조차 아빠가 모른다는 사실을 지우는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계절마다 숲은 다채로운 얼굴을 내보이며 한없이 감미로운 정화로 이끌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산속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는 준비 의식을 하는 것처럼 아빠는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 옆에서 동생도 잠시 조용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지우는 징징거리는 동생을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여유 있게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아빠만큼 자란 것만 같았다.
아빠는 늘 쇼를 준비했다. 그날도 형제에게 앉아보라며 나란히 있는 그루터기에 등산 방석을 올려놓았다. 아빠가 어떤 재미난 모습으로 형제를 웃길까 기대에 찬 눈빛을 하고 속으로, 어서! 어서!, 라고 외쳐댔다. 지우는 더욱더 커지는 마음을 한꺼번에 빵, 터트릴 요량으로 꾹꾹 무릎만 눌러댔다.
리코더였다. 아빠의 리코더 소리는, 친구들이 수업 시간에 삑삑거리는 플라스틱 리코더와는 다른 차원의 소리를 냈다. ‘섬집아기’의 곡조는 숲을 일렁이는 바람에 실려 물 위에 번지는 물결처럼 부드럽게 퍼져나갔다. 노래에 젖어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으니 엄마를 기다리는 아기의 모습이 그려졌다.
바닷냄새과 파도 소리, 홀로 엄마를 기다리는 아기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날의 소리는 잠든 아기를 덮어주는 햇살처럼 지우의 가슴에 남았다. 아빠가 사고를 당하기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이후에 엄마는 지우의 학교 준비물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으므로 아빠가 리코더를 사준 건 확실하게 비밀로 남았다.
엄마가 알지 못하게 하라는 아빠와의 약속을 지켜오다가 리코더를 숨기는 습관이 생겼다. 일 년이 지난 지금도 리코더를 이불로 둘둘 말아 장롱 깊숙이 찔러 넣는다. 이 리코더를 아빠가 사준 걸 알면 엄마는 그만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집에 여유가 없으면 악기를 전공하기 힘들다는 말을 지우도 들어보았다. 지우의 짝꿍은 특기생으로 기악대회 일정 때문에 가끔 결석했다. 짝꿍이 부는 플루트는 아빠가 불어주었던 리코더 소리가 초라하게 느껴질 만큼 유려했다.
끝내 지우는 아무것도 모르고 앞으로 나아가는 그 아이의 시간이, 공간이 나쁘다고 생각을 해냈다. 짝꿍의 주변을 감도는 편안하고 안정된 공기가 부러웠다. 그런 마음이 자랄수록 자신은 질투나 하는 아이가 되어가는 것만 같았다. 속으로 사나운 표정을 지어보았다. 들어본 적 없는 경시대회 일정, 기술을 익히지 않으면 결코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은 소리의 깊이를 지우는 그제야 부끄러움 없이 마주할 수 있었다.
“너는 이런 곳에 다녀야 한다.”
작년 여름 아빠는 석조건물이 가득했던 대학교로 지우를 데려갔다. 숲처럼 녹음이 우거진 캠퍼스에서 굵고 힘찬 나무들은 굽은 데 없이 솟아있었다. 햇살이 반짝이는 가로수 길을 따라 10분여 걸어가자 웅장한 건물이 나타났다.
석조건물 내부에는 차고 습한 기운이 감돌았다. 투명한 방패를 든 것처럼 작은 동작만 내보이는 사람들이 어색한 데 없이 정해진 공간을 우아하게 누비고 있었다. 그 틈에서 아빠는 티켓과 리플릿을 한 손에 모아쥐고 눈에 띄게 큰 동작으로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렸다. 인터넷으로 겨우 찾은 만 원짜리 티켓이었다. 서투른 손짓으로 리플릿의 앞뒷면을 연신 들춰보다가 이제 알겠다는 표정으로 다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흰 장갑을 낀 안내원 누나가 손바닥을 보이며 공연장으로 들어가려는 아빠를 제지했다. 아빠는 당황하며 주눅 든 표정으로 고개를 앞으로 뺐다. 그때 지우는 기죽지 말라는 뜻으로 어쩌면 오기였는지 모르게 아빠 손을 꼭 잡았다. 아빠는 지우를 향해 돌아보며 익살스럽게 눈을 찡긋 감았다. 그리고 한없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우는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처럼 해맑게 답하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표정이 자꾸 어색해져만 갔다. 아빠의 숨기고 싶은 뭔가를 엿보았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사전에 암호를 주고받은 것처럼 사람들은 시간이 되자 일제히 이동했다. 예배당으로 보이는 장소로 엉겁결에 따라 들어갔다. 고악기 연주회가 시작되었다는 안내가 들리자 청중석은 고요해졌다. 연주자는 곧은 자세로 걸어 나와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리코더는 르네상스 이후로 발달한 관악기 때문에 주류에서 밀려났습니다. 기계문명에 의해 자연이 파괴되어가면서 현대인들은 숲이 우거진 곳에서 태어난 이 악기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리코더 연주자가 말을 마치고 협주하는 사람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비발디의 리코더 협주곡이 시작되었다. 아침에 새들이 힘차게 날갯짓하며 숲을 가르는 모습이 그려졌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해 들어오는 빛에 의해 맑고 높은 음색이 여러 색으로 조각나며 예배당 안에 퍼져나갔다. 떨어져 나온 소리는 다시 날개를 달고 무지갯빛 사이를 날아다녔다. 그날, 지우의 마음은 숲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숲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아빠와 다니던 산에서 자란 것이었다. 아빠를 지금 여기로 부르기 위한 주문처럼 지우는 리코더를 불었다.
“형……. 배고파…….”
짧게 한 호흡을 뱉었을 뿐인데 깊이 잠든 줄로만 알았던 동생이 깨어났다.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할 때마다 어김없이 일어나는 동생에게 짜증이 났다. 빨리 먹으라고 재촉하고 나서 지우는 무감한 얼굴로 동생의 이를 닦였다. 엄마가 해주었던 것처럼 재우기 전 마지막 단계로 동화책을 들었다.
“형! 근데… 엄마가 우리를 떠나면 어떡하지……?”
엄마를 잃어버리는 내용이 담긴 동화책을 읽을 때마다 동생은 이렇게 물었다. 동생이 아직 유치원생이라 그런가 싶다가도 어느새 지우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엄마가 병원에서 자는 날이 지속되었다. 그때부터 지우는 동생이 길을 잃더라도 혼자 집으로 찾아오게끔 열심히 가르쳤다. 산업재해 처리가 늦어지면서 마냥 앉아서 결과를 기다릴 수 없었던 엄마는 파트타임을 풀타임으로 바꿨다. 말을 못 알아듣는 게 답답했지만 정말 둘만 남게 되고, 그때 동생마저 잃어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지우의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지우는 자세를 고쳐 앉아 더욱 엄한 표정을 하고 어깨에 힘을 주었다.
“엄마는 봐주는데… 형은 얄짤 없어.”
동생은 잔뜩 억울한 표정을 하고 따라 읽었다. 지우는 그 표정에 그만 웃음이 나고 말았다. 속으로, 어서 자라, 라는 주문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며 건성으로 읽어주는 날도 있었다. 동생은 다시 천천히 읽으라고 하고, 그래도 지우가 꿋꿋이 같은 목소리 톤으로 부러 재미없게 읽어 내려가면, 동생은 자신이 읽겠다고 책을 끌어당겼다. 그러면 지우는 괜히 한글을 가르쳤다는 후회가 들기도 했다. 졸린데, 숙제도 해야 하고 리코더를 불 시간마저 사라지고 있었다.
동생을 겨우 재우고 돌아와 지우는 리코더를 다시 입에 물었다. 침이 고일까, 한번 꿀꺽 삼켰다. 소리에 동생이 또 깰지 몰라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을 보며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서서 눈을 감았다. 호흡에 주의하며 연주를 시작했다. 리코더의 청아한 소리가 타일 벽에 반사되어 흘러내렸다. 화장실이 거대한 울림통이 되어 지우가 원래 내고팠던 것보다 멋있게 소리를 키워냈다. 울림이 커질수록 소리의 거친 질감은 오히려 옅어졌다.
우물 한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소리가 울린다. 맑은소리가 가득했던 곳에 물이 차오른다.다. 달빛인지 그물 모양으로 펼쳐진 빛이 물결을 따라 수놓아져 있다. 지우는 어느새 깊고 푸른 바닷속을 자유롭게 떠다니는 기분이 든다. 그때 하나의 소리가 잡힌다. 돌고래가 된 자신이 누군가 보내는 신호음을 듣고, 그 의미를 풀어낸 것만 같다. 어느 책에서인가 돌고래는 초음파로 이야기를 나눈다고 읽은 적이 있다. 지우는 그 속에서 헤엄치며 놀았다. 소리가 자신인지, 자신이 소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새들은 교회처럼 보이는 건물 안을 날고 있다. 지우가 아빠와 함께 갔던 예배당과 닮았다. 색색의 가느다란 빛줄기가 건물 내부를 거미줄처럼 여러 줄기로 가르며 그물을 쳐놓는다. 그 빛은 새들의 퍼덕임을 보듬는 것 같으면서도 그들이 더욱 밖으로 나가고 싶도록 부추겼다. 새들의 날갯짓은 점점 더 빨라지고 이제 그들은 맹목적으로 창을 향해 돌진한다. 유리창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는데 부딪힘은 멈추질 않는다. 밖을 나가지 못한 채 지우는 식은땀을 흘린다. 이러다 새들이 죽을 것만 같다. 손을 뻗어보지만, 깃털들만 손에 쥘 뿐이다. 그 보드라운 촉감에 안도하는 찰나, 지우는 꿈에서 깼다.
새벽 5시 반이었다. 아직 숙제할 시간이 남아있다. 지우는 눈을 비비며 숙제 거리를 꺼냈다. 4학년 들어 사회과목이 갑자기 어려워졌다. 자신이 사는 마을을 조사해 오는 탐구 활동이었는데 대충 메모를 해둔 것만으로 무언가를 써내기에는 약했다. 오늘 방과 후 동생을 데리러 가기 전까지 동네를 한 번 더 돌아봐야겠다. 일단 지역신문에서 오려두었던 마을 사진을 탐구 활동지에 붙이려는데 딱풀이 떨어졌다.
지우는 검지로 심지에 남은 부분을 긁어 종이에 펴 발랐다. 파워포인트로 준비한 친구들의 깔끔한 숙제가 떠오르자 갑자기 자신의 것이 더없이 초라해 보였다. 간병인 아주머니가 출근하는 시간에야 집으로 돌아오는 엄마에게 지우는 차마 숙제를 도와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등교 시간이 되면 지우는 엄마에게 동생을 물건처럼 건네주고 학교로 향했다. 하교 후에는 동생을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 사이 소년은 하루 중 제일 꺼리는 시간을 마주해야 했다.
유치원 입구에 들어서면 아이들을 기다리는 엄마들이 한 무리를 지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지우의 엄마는 마트에서 말없이 바코드를 찍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러면서 동생을 데려오는 것은 자연히 지우의 차지가 되었다. 엄마들 사이에서 처음에 지우는 기특한 아이였다가, 나중에는 애 엄만 뭐하길래 맨날 동생을 데려오는 아이가 되었다가, 결국 모든 사정이 알려진 다음에는 조금 거리감을 두고 싶은 아이가 되어 있었다.
동생은 같은 반 아이들이 놀이에 자신을 잘 끼워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 해님반 친구들은 견학이랑 키즈카페도 함께 가고 서로의 집에서 번갈아 논다고 했다.
“우리도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면 안 될까…….”
새 학기가 되어서 동생은 이런 얘기를 가끔 했다. 지우는 지나가는 투정이라고 무시했다. 아빠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판국에 어떻게 집으로 친구를 초대할 생각을 하는지, 동생이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생각했다.
유치원 엄마들은 매번 형제를 주의 깊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정작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지우가 뭘 보냐는 반발심 어린 눈빛으로 시선을 마주하자 당황하는 눈치를 보이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몇몇 사람은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곧 자신들의 이야기에 몰두했다. 눈치가 늘어난 것인지 동생은 이제 지우의 팔을 끌고 서둘러 유치원을 나선다.
얼마 전 엄마들로 북적거리는 현관에서였다. 동생의 신을 신겨주고 있는 지우에게 해님반 선생님은 걱정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유치원 졸업 사진을 곧 찍어야 하는데 준비하기 어렵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 말에 지우는 그만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동생의 운동화 끈만 바라보았다.
동생은 병원이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을 늦추었다. 놀이터에 가고 싶다고 했다. 지우가 안 된다고 하니 왜 맨날 형 마음대로 하냐고 투덜거렸다. 엄마와 지우가 힘든 것을 모르는 동생에게 발칵 화가 났다.
“내가 무엇을 마음대로 하는데? 엄마가 힘든 게 좋아? 너가 자꾸 귀찮게 하면 동화 속에 나온 부모처럼 우리 놓고 떠날지도 몰라!”
“의찬이가 그랬어……. 자기 엄마가 ‘맨날맨날’ 그런다고…….”
동생은 주춤 물러났다. 지우의 눈길을 피하며 발끝으로 땅바닥만 톡톡 찼다.
지우는 하굣길에 곧장 유치원으로 가는 대신에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탐구 숙제를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초등학교 뒤편부터 남한산성까지 작고 야트막한 집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길은 아빠의 손등에 나 있는 구불구불한 혈관 모양이다. 그곳에 지우와 동생이 엄마를 기다리는 집이 있다. 교문을 빠져나오면 경사가 나오는데 그 길만은 반듯하게 정리되어 대로까지 이어졌다. 그 길 건너에 새로 들어선 아파트 단지가 거대한 공룡처럼 무리 지어 서 있다. 비탈길을 내려오자 대로변 건물의 입면에는 법무사 간판들이 빼곡했다. 사무실들은 성남법원을 둘러싸며 호위하고 있었다.
“형……. 저것도 병원이야?”
사고가 나서 얼마쯤 지났을 무렵 동생이 하얀 법원 건물을 가리키며 물었다. 지우는 동생에게 사람들이 가서 죄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는 곳이라고 했다.
“나는 가끔 거짓말을 하는데……. 그럼 나도 저기 가야 하는 건가…….”
동생은 조금 멍한 얼굴을 하고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무렵, 오늘 친구들이랑 잘 놀았어, 라고 물으면 동생은 늘 고개를 주억거리며 재밌었다고만 대답했다. 아빠는 누워있는데도 동생은 어떻게 매일 재미있을 수 있는지, 지우는 동생이 아직 유치원생이라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무엇이 재미있는지 궁금했다.
법원 맞은편 남한산성입구역 앞의 과일가게는 원래 아빠와 엄마가 장사하던 곳이었다. 엄마는 등산객들의 손에 잡히기 쉽도록 과일을 작은 꾸러미들에 담아놓았다. 등산복 차림의 아저씨들이 과일을 사며 엄마에게 이따금 농을 던졌다.
아빠는 엄마가 자신에게는 과분한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 엄마는 장사하는 곳에 어울리지 않게 차분한 분위기를 지녔다. 지우는 왠지 모르게 그 고요함이 꺼려졌다. 엄마가 아빠와 형제를 어느 순간 놓아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지우가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했을 때, 엄마가 동생을 임신했다. 그때부터 아빠는 저녁 마 다 용접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남은 과일은 배가 나온 엄마와 지우가 팔아야 할 몫으로 남겨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만삭의 엄마와 유치원생을 보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검은 비닐 꾸러미를 집어 갔다.
“내가 마감하는 것보다 예쁜 당신이랑 지우가 더 성적이 좋아. 이제 나는 필요 없겠네.”
그을린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는 엄마를 내려다보며 아빠가 말했다. 비켜서서 아빠의 상처를 눈으로 더듬는 지우에게, 오늘 머리가 홀라당 타버릴 뻔했는데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아빠는 과장해서 말했다. 하나도 아프지 않은데 엄마가 약을 발라서 오히려 뜨끔하다며 또, 그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빠는 동생이 두 돌이 지날 무렵, 과일가게를 접고 본격적으로 용접일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박하지만 경력이 쌓이면 금세 일반회사의 월급쟁이들보다 많이 벌 수 있다며 아빠는 들떠있었다. 특수 용접은 밤샘 근무가 많았다. 아빠는 두껍고 무거운 쇠와 쇠를 잇는 비드 작업을 했다.
아빠는 조각가처럼 이음새에 아름다운 무늬를 새겨 넣었는데 작업의 완성도가 높을수록 무지개무늬를 띄었다. 이따금 용 비늘 모양의 비드를 배경으로 아빠는 활짝 웃는 사진을 밤늦게 엄마의 휴대전화 보내왔다.
“동생 잘 돌보고 엄마를 도와야 한다. 아빠가 용 한 마리 그려놓고 올게. 아빠 없으면 네가 대신이다!”
아빠는 지방으로 원정을 나갈 때면 그 투박한 손으로 소년의 머리를 덥수룩하게 만들며 말했다. 언제부터인가 이 말이 지우에게 하는 마지막 인사처럼 느껴졌다. 아빠가 없어지면 어떡하지. 아빠의 트럭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하고 돌아오며 지우는 불길한 생각을 털어내기 위해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엄마 품에 안긴 세 살배기 동생이 재미있다는 듯이 형의 고갯짓을 따라 했다. 지우는 자기도 모르게 아빠처럼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팔꿈치와 손목을 구부린 채 한 쪽 발을 번갈아들고 춤을 추며 돌았다. 탈을 쓰고 춤을 추는 광대라도 되는 듯이. 그러다가 갑자기 춤을 멈추고 동생에게 다가가 어르며, 괴물이다, 라고 소리쳤다. 동생은 용케 요리조리 도망 다니면서도 뒤를 자꾸만 돌아보며 넘어갈 듯 웃어댔다. 그러면 지우는 더욱 잡기 힘든 듯이 연기하며 동생을 뒤쫓고, 결국 엄마에게 밖으로 나가 놀라는 말을 받아내곤 했다.
동생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동생은 신호로 양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면 지우는 몇 계단 먼저 내려가 동생의 가슴께를 안았다.
“빠아, 아빠…….”
“아니 형이라고 해야지.”
“빠…허엉…….”
두 돌이 못 된 동생은 아빠가 멀리 떠난 자리에서 지우를 아빠처럼 생각하는 건지도 몰랐다. 소년은 어깨가 으쓱했다.
지우는 전철역부터 남한산성 공원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걸었다. 결국 아빠와 거닐곤 했던 숲까지 오고야 말았다.
“어린이 혼자,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니?”
등산복을 입은 아저씨와 함께 있는 아주머니가 지우에게 오이를 건네며 물었다. 그때 아저씨가 아주머니의 허리를 잡았다. 지우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엄마를 사랑하는 아빠의 손짓과는 다른 느낌이 들며 화가 났다.
그러면서도 지우는 엄마의 품이 그리웠다. 한적한 오후, 엄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손길에 머리를 맡긴 채 나른한 졸음에 빠져들고 싶었다. 무엇을 찾기 위해 사회 숙제를 하다 말고 이곳까지 올라온 것일까, 숨을 고르기 위해 팔베개를 하며 벤치에 누웠다.
지우는 아빠의 호흡기를 떼는 꿈을 꾼다. 가래를 빼주다가 잘못 건드렸다고 사람들이 생각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동생과 어린이집 엄마들은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며 지우를 손가락질한다. 병실 사람들은 지우가 착한 줄 알았는데 사실 나쁜 아이였다고 비난한다. 엄마가 보인다. 엄마는 등산복 차림의 아저씨와 팔짱을 끼고 지우를 떠나간다. 지우는 동생의 손을 잡고 서 있다. 엄마가 사라질 때까지. 동생은 배가 고프다고 한다. 지우는 법원에 가서 우리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한다. 법원은 미로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어떻게 할지 하루의 시간을 준다고 한다. 지우는 다른 모퉁이로 가서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본다. 사람들은 소년을 공처럼 가볍게 이리저리 던진다. 어느새 간판처럼 네모진 머리를 단 사람들이 소년을 둘러싸고 서 있다. 그리고 지우가 아빠를 아프게 해서 그 벌로 엄마에게 아저씨를 주었다고 판결문을 읽어 내려간다. 엄마는 선고를 들으며 슬프게 고개를 든다. 그 순간 지우는 안도했다. 그 슬픈 표정은 여전히 엄마가 지우를 사랑한다는 징표 같았다.
눈을 떴을 때 유치원으로 동생을 데리러 가야 하는 시간이 이미 지나 있었다. 아빠의 가래를 빼주지 않으면 아빠는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모르고, 동생은 울며 기다릴 텐데 어디부터 가야 할지 몰랐다. 아빠에게 가야 하는 게 맞는다고 판단했지만 지우는 동생에게로 달려갔다.
잔무가 남은 선생님 곁에서 동생은 혼자 놀고 있었다. 선생님은 이제야 놓여났다는 듯이 자리를 떴다. 동생은 형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동생의 고분고분한 태도에 오히려 지우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지금 무언가를 조르면 좋겠는데 동생은 괜찮다는 표정만 지어 보였다. 그 모습에 지우는 더욱 화가 나기만 했다. 지우는 동생의 손을 잡고 아빠가 있는 병원으로 달렸다. 오늘따라 동생은 잘 따라오는데도 지우의 걸음은 한없이 늦춰지고, 병원은 점점 뒤로 물러나는 것만 같았다.
“왜 이렇게 늦은 거야.”
건너 침상을 지키는 할머니가 소년의 행적을 물으며 달래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우는 아무런 대답을 못 하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내, 대신 가래를 빼줬지. 이 양반이랑 하는 게, 다를 게 있나.”
할머니의 누그러진 목소리에 지우는 그만 눈물이 날 뻔했지만 참을 수 있었다. 침상에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병실 한가운데에 고정된 채 서 있기만 했다. 자신이 조금만 노력하면 늦지 않을 수 있었다. 한가함에 빠지지 않으면 더 빨리 올 수 있었다. 지우는 지금 자기 생각이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동생은 보호자 침대에 앉아 반제품으로 나온 종이 자동차를 조립하다 풀고 다시 만들기를 거듭했다. 지우는 옆트임이 나 있는 아빠의 환자복 매듭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욕창을 방지하기 위해 체위를 바꿔주려고 아빠의 어깨를 잡았다. 힘을 주다가 그만 무게 중심을 잃으며 기도삽관을 건드렸다.
오후의 마지막 햇살이 아빠의 앙상한 허벅지에 남은 화상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지우는 인공호흡기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아 바로잡기 위해 호스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깊이 고정되어 잘 빠지지 않았다. 소년은 무엇에 홀린 듯 호스를 만지작거렸다.
“형……. 이게 잘 안돼. 해 줘!”
지우는 동생이 부르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호흡기에서 손을 뗐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동생을 돌아보았다. 동생은 형이 도와주기를 기다리며 꼼짝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병실을 나설 때 아빠의 심장박동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엄마를 보기 위해 지금까지 시간을 견뎌온 것처럼 경련은 힘주어 뭔가를 말하려는 사람의 마지막 몸부림 같았다.
“집에 가서 기다려!”
엄마는 고함을 치며 아이들을 병실에서 내쫓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얼어있는 지우와 동생을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다독이며 끌고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무섭다면서 노래를 불러달라던 동생은 어느새 지우의 품에서 잠들어버렸다. 난방을 켜지 않은 채 하루 종일 방치되어 있던 방은 싸늘했다. 지우는 동생을 더욱 꼭 안았다. 아빠는 저번처럼 중환자실에 갔다가 다시 일반병실로 옮겨올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번이야말로 마지막 치료일지 몰랐다. 가족의 바람을 알고 아빠가 떠나기로 결심한 것인지도 몰랐다.
용서를 빌듯이 지우는 아빠를 되돌려 달라고 엎드린 채 흐느꼈다. 옆에서 아무 걱정 없이 맑은 표정으로 잠들어있는 동생보다 자신이 더 어리석게 느껴졌다. 기도하듯 모은 두 손에는 왠지 간절함이 빠져있는 것만 같았다. 손에 깍지를 낄 수도, 손바닥을 펴서 맞댈 수도 없다는 엉뚱한 생각만 오갔다. 자신의 모든 동작이 어정쩡하게만 느껴졌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자신이 지금의 상황을 기다려 왔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지우는 생각했다.
지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아빠는 어쩌면 지금 숨을 거두고 있는지 몰랐다. 지우는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었다. 지금 달려가지 않으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생은 집에서 자고 있고, 자신은 다리가 떨려 병원까지 동생을 업고 갈 자신이 없었다. 지우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려다 말고 공중전화 부스에 힘없이 기대섰다. 뜨거운 것이 두 뺨을 타고 흘러 내려와 지우의 목덜미를 적셨다. 새벽의 찬 기운에 으스스했다. 엄마가 보고 있지 않으니 이대로 더 있어도 될 것 같았다.
병원으로 가는 대신 지우는 어느새 산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자신을 빨아들이는 숲길로 걸어 들어갔다. 산으로 난 길은 캄캄함 앞날처럼 숲속의 어둠을 향해 뻗어있었다. 해가 떠오르기 전,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밤 속에서 한없이 추위를 견디는 동물들이 떠올랐다. 순간, 손에 들려있는 리코더의 꺼끌꺼끌한 감촉이 느껴졌다. 두려웠지만, 등불을 비추는 것처럼 리코더를 한 손에 들고 지우는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지우는 발바닥으로 전해오는 감각에 기대어서 숲의 더 깊은 곳을 향해 한발씩 내디뎠다. 낙엽이 밟히는 소리, 나뭇가지가 서로 스치는 소리에도 소스라쳤다. 돌부리가 발끝에 챌 때마다 멈칫했다. 잠시 고개를 돌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쉽게 되돌아갈 수 없는 길로 보였다. 오랜 추위에 눈이 시렸다.
짙은 어둠에 푸른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얼마 떨어진 곳에서 새벽 달빛에 그루터기가 희미하게 형체를 드러냈다. 지우는 몸을 틀어 그곳으로 다가갔다. 푸드덕, 댓바람에 일어난 새의 날갯소리가 들렸다. 날갯짓은 물결치는 수풀 소리에 이내 묻혀버렸다. 그렇게 아빠의 생명도 바람에 휩쓸려 갈 것이다.
지우는 조심스레 리드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입술이 떨려왔다. 모두가 잠든 새벽이지만 아빠가 예전에 지우에게 리코더를 연주해 주었던 것처럼 지금 리코더를 불어야만 할 것 같았다. 지우의 볼을 따라 눈물이 흘렀지만,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그럴수록 지우는 목울대에 힘을 주고 손가락 마디 끝을 주의 깊게 누르며 하나씩 음을 이어갔다. 멜로디가 만들어졌다. 동생이 따라 부르던 노랫말처럼 아기를 달래는 빛과 바람에 의해 어둠은 점점 옅어져 갔다. 길고 오랜 숨을 머금은 리코더의 마지막 음이 새벽 공기를 울렸다. 그 떨림은 지우의 마음 안에 고여 있던 어떤 감정 깨웠다. 그 이름 붙이지 못한 마음에서, 소리에서 여린 빛이 스며 나왔다.
“괜찬타……. 괜찬타…… .”
서서히 번져가는 아침 햇살 속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지우는 사라져가는 목소리를 자신 안에 깊이 담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몸을 웅크려 가슴께에 고스란히 번지는 아픔을 감쌌다. 새벽이 품고 있던 서늘함이 어느새 다가와 지우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식혀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