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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왕록(賓王錄)
이승휴 지음-진성규(번역)
이승휴 선생의 <제왕운기>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빈왕록>에 대해 아는 분들이 있겠지만, 모르는 분을 위해 블로그에 올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성규 교수가 번역한 <빈왕록>의 개요를 문우들을 위해 올려봅니다. 참고가 되면 좋겠습니다. 몸이 망가져 글쓰기 힘들지만, 한자 한자를 컴퓨터로 쳐서 올립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귀중한 것입니다.
빈왕록>은 이승휴가 서장관으로 임명되어 1273년 원나라 수도 대도(현 북경)를 다녀온 후 1290년 10월에 편집해 남긴 사행기록(使行記錄)이다. <동안거사집> 권 4에 수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내용으로 보아서는 문집 안에서 독립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승휴의 모든 저작물이 지금 남아있었다면 독립된 책으로 간행되었을 것이다. 빈왕의 의미는 “천자에게 사신으로 간다.” 또는 “천자를 보필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따라서 <빈왕록>은 <사신록> 또는 <사행록>이란 의미로 볼 수 있다. <빈왕록>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사행록>이다. <빈왕록>은 크게 서문(序文)과 본문(本文)으로 구분된다.
1273년(원종14년) 원(元) 세조(世祖) 쿠빌라이가 황후와 황태자를 책봉하고 그 사실을 고려에 알려왔다. 책봉 사실이 고려에 알려지게 된 것은 <고려사>에 의하면 1273년 5월 21일이다. 원종(元宗)은 아들 순안후 王悰을 賀進使로 삼고 송송례, 이분성, 정인경 염승익 등으로 사행단을 구성했다. 이승휴는 서장관으로 뽑혀 그해 사행길에 올라, 원나라 수도 대도에 도착했다. 대도에 도착해 원 황제, 황후, 황태자 등을 만나 禮數를 치를 때 황제에게 올린 표문(表文)이 격식에 맞는 문장이라 하여 칭송이 자자했다. 그 표문 때문에 이승휴는 문장으로 중국을 감동시킨 사람이라고 지칭되었다. 1274년 원종의 승하(昇遐)를 알리기 위한 사신으로 다시 원나라를 다녀왔다.
사행단의 여로(旅路)
원 세조가 1273년 3월 13일 황후 홍길랄씨에게 옥책옥보를, 황태자 진금(眞金)에게 옥책금보를 주고, 18일에 황후와 황태자를 책봉했다는 조서를 천하에 반포했다. 5월 21일 사신을 통해 조서(詔書)가 고려에 전달되자, 원종(元宗)은 축하 사절단을 구성했다. 원종은 자신의 아들 순안후 왕종을 하진사로 삼고 수행관원으로는 지추밀원사 어사대부 상장군 송송례, 상서 좌승 이분성, 정용장군 정인경, 내시호부원외 염승익, 내시보승별장 김의광, 역어행수 김부윤, 지유별장 조함, 정용산원 지선, 반행사 상조천호중랑장 김보성 등을 선발했다. 사행단의 꽃이라고 볼 수 있는 서장관에는 이승휴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서장관을 선발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中書門下省과 中樞院에서 서장관을 세 번이나 선발해 추천했으나 거부당한 일이 있었다. 본래 이승휴는 관직이 없다 하여 추천되지 못했으나, 1270년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할 때 이승휴의 忠勤함을 눈여겨 본 원종의 선택으로 서장관에 발탁되었다. 서장관은 사행중 하루하루의 사건을 기록하는 기록관이며 외교 문서를 담당해야 함으로 문재(文才)가 있는 사람을 필요로 했다. 원종이 이승휴를 서장관으로 임명할 때, “다만 재주로써 추천하면 되지, 관직이 있고 없음을 상관할 필요가 있는가?” 라고 했던 것을 보아도 문재(文才)가 선발 기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장관에 임명되자 이승휴에게 표(表). 전(錢). 장(狀) 등과 노자(路資). 집물(什物)이 맡겨졌다. 서장관의 의무는 사행 중에 일어나는 사건을 일일이 기록하는 것이지만, 잡무도 일부 맡겼던 것으로 보인다. 즉 사행에 필요한 반전과 도구인 집물등을 다 관리했던 것 같다. 조선시대의 서장관도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것 이외이 일행을 감찰하고 강을 건널 때 필요한 인마(人馬)와 복태(말에 싣는 짐) 등을 확인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원종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았던 이승휴는 술과 과일을 대접받고 ,노자로 백금(百金) 세근을 하사 받은 뒤 1273년 윤 6월 9일(양력 7월 24일) 사행길에 오르게 된다.
원종의 출발 명령을 받은 사행단은 1273년 윤 6월·9일 연경을 향해 출발했다. <빈왕록>에 기록된 첫 번째 기록은 1273년 윤 6월 11일 浿江을 배로 건너면서 읊은 시에 나타난다. 패강은 예성강으로 개성 바로 위쪽에 있는 강이다. 이때 비가 억수로 쏟아져 고통이 많았음을 다음 시(詩)에서 알 수 있다.
어두운 골짜기 동이로 퍼붓듯 쏟아지는 비,
갈림길에 이르자 붉은 황토물 괄괄 흐르네.
일엽편주 작다고 얕보지 말라.
만경의 거센 물결 단번에 건너리.
동이로 퍼붓듯 쏟아지는 비지만 의기양양하게 떠나는 사행길을 결코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의지가 엿보인다. 사행 출발 초기라 그 의지가 약동함을 보여준다. 6월 12일(양력 7월 27일)에는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을 통과하고, 6월 29일(양력 8월 13일)에는 요하 하류인 동경(東京: 요양(遼陽)에 도착했다.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읊고있다.
온종일 거센 바람 불고 비 내리니,
평지가 내가 되어 조천(朝天) 길 막는구나.
다시 묻노니 요하를 어떻게 건너리.
하늘도 삼칼 성난 물결 넓고도 넓어라.
누간의 병든 나그네에겐 온갖 흥취 다 생기고,
외마디 가을소리 뜰 앞 나무에 먼저 찾아드네.
천 년을 두고도 이 심정 알아줄 이 없어,
이래도 저래도 마음 펼 곳은 전혀 없어라.
하루 종일 비바람 불고, 요하의 물결은 하늘을 삼킬 듯하다. 사절단의 고달픈 심정이 그대로 전해온다. 그러나 6월 9일 떠날 때부터 쏟아진 비는 동경인 요양에 도착해서도 계속되어 8일 간 숙소에 머물게 되었는데, 춥고 병까지 걸려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동경에서 비 때문에 8일간 머물다가 7월 9일에는 사로(斜路)를 떠나 심주(심양)에 도착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많은 비 때문에 며칠 간 머물며 고생했다. 그 상황을 다음 같이 읊었다.
여름비 10일간이나 이어져 추워지더니,
길을 재촉하던 나그네, 한가로움 얻었네.
曛水의 온갖 생각만도 견딜 수 없거늘,
요하보다 백배의 고난을 또 어떻게 말하랴.
염여(灩澦) 구당(瞿塘)도 오히려 험난하지 않고,
꼬불꼬불한 촉도(蜀道)도 어리럽지 않네.
길 떠난 지 수개월 동안 무슨 일을 이루었는가.
이 심정 하루도 편할 날이 없어라.
비가 10일이나 연이어져 추위도 이어지고, 심양의 동강(東江)인 훈수는 건너기 어렵기가 양자강의 험준한 구당협이나 촉도보다 심할 정도라고 했다. 그래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고 했다. 개경을 출발한 사행 첫날이 6월 9일인데 심주에 도착한 7월 9일까지 1개월 간 쏟아지는 비 때문에 고생이 너무 많았던 걸 알 수 있다. 7월 16일(양력 8월 29일)에는 악두참(渥頭站)에 도착하여 그동안 고통스러웠던 사행길을 되돌아볼 여유가 생간 듯하다. 경유 했던 곳의 고통스러운 체험을 바탕으로 50 운(韻)의 장문 고시(古詩) 한 편을 지어 박항(朴恒). 송송례. 이분성. 정인경. 염승익에게 바쳤다. 개성을 떠나 1개월이 넘도록 지속되던 장마가 악두참에 도착하면서 끝났기 때문이다. 악두참은 원 제국 때 요양행성 대녕로 안에 있던 참역(站驛)이다.
50 운(韻)의 시에는 장마로 인한 고통이 심하지만 결국 극복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산등성이에서 노숙하니 모기 때가 달려들어 귀찮게 하니 두 다리 베고 싶도록 아프다. 물을 건너는 사이 물벌레들이 신 속을 다 메웠다. 요하를 조각배로 건너는데 약한 밧줄이 끊어질 듯해 일행의 얼굴에는 한 점 핏기도 없었다. 끝내 하백과 강신의 도움으로 강을 무사히 건너게 되었으니, 각자 충절을 지켜 천제의 궁전에 나아가 황제의 뜨거운 은총을 받고 기쁜 마음으로 귀국하여 마냥 이야기 나누기를 희망하는 내용으로 맺어졌다. 7월 29일 신산현에 도착했다. 신산현은 만주 열하성 객라심 오른쪽에 위치한 곳이다. 여기서 소나무를 바라보고 개성 부소산의 낙낙 장송을 연상할 정도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7월 30일에는 병풍산을 경유하여 황애봉에 올라 누각에 모셔진 석가모니의 열반와상을 바라보고 예불까지 했다.
사행단(使行團)의 의전(儀典)
윤 6월 9일 개경을 출발한 지 55일이 되는 8월 4일에 드디어 대도(북경)에 도착했다. 이때 중서성(中書省)에서 보낸 역관(譯官)인 선사와 총관 등이 먹을 음식을 갖고 중도성(中都城) 5리 되는 곳에서 맞이했다. 누총관의 사저로 안내되어 숙소가 정해졌는데, 한림학사 후우현(侯友賢)과 현충(顯忠)이 관반사(館伴使)로 와 있었다. 이때 황제인 세조는 행궁(行宮)이 있는 개평부(開平府)에서 돌아오지 않아 대도에 도착한지 6일 만에 황후가 먼저 대도성 만수산(萬壽山) 동편전(東便殿)에서 진하(陳賀)를 받았다.
황후를 만나는 과정을 보면, 봉어(奉御) 마노(瑪瑙)와 임선사가 궐문 밖까지 인도하자 관반사 후우현이 뜰 안으로 인도했다. 다음으로 서장관을 시켜 전문(牋文)을 받들고 앞에 서 있게 한 다음, 후우현과 다른 속관들도 뒤에 죽 줄지어 서 있었다. 원외랑(員外郞) 염승익이 무도(舞蹈)의 예식이 끝났다고 전갈하자 전각 위로 오르는 것이 허락되고 위로연이 벌어져 한낮이 되어서 파했다. 황후 접견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자 후우현으로부터 아래와 같은 시(詩)를 받았다.
사해의 교통과 문화가 하나로 통하기에,
좋은 때를 타고 풍운처럼 서로 만날 수 있었네.
만 리 머나먼 길에 상국의 빈객으로 오셔서,
광주리에 넘치는 옥백(玉帛)으로 중궁(中宮)을 축하했네.
아이들은 언어가 다르다고 괴이하다 하지만,
군자들은 도의가 서로 같음을 다 알도다.
스스로 말하기를 “재주도 없고 견문도 얕아,
거친 시를 동방의 기록에 올리기 부끄럽다“ 하네.
천하의 교통과 문화가 하나로 되었으니, 고려가 상국(上國)인 원(元)을 찾아와 옥백(玉帛)으로 중궁(中弓)인 황후를 축하하게 되었다고 했다. 고려와 원나라가 말은 통하지 않지만 도의는 같다고 했다. 이 시는 원나라에 복속한 고려가 축하 사절을 보낸데 대한 찬사지만, 고려의 비애가 숨어있고, 원나라 체제 안에 고려가 편입되어 그 질서를 잘 지키고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시를 받고 이승휴도 차운(次韻)하여 후우현에게 아래와 같은 시를 전했다.
육경(六經)의 의미를 묘령(妙齡)에 통달한,
후우현을 기회 맞춰 조석(朝夕)으로 만났네.
적석(赤舃)의 제후들 토산품을 보내오고,
붉은 구름 만 갈래 천궁(天宮)을 에워싸네.
풍운의 흡족한 경사 요황(要荒)까지 미치고
일월의 밝은 빛은 원근이 똑 같구나.
장수를 비는 충성 누가 더 간절하던가.
단하(丹霞)가 조각조각 요동 땅에서 피어오르네.
후우현에게 보낸 답서 형식의 이 시(詩)에서 이승휴의 심사를 액면 그대로 수용하기는 어렵지만, 조공을 바치는 제후들의 모습과 천자의 감화가 일월(日月)처럼 미개한 지역까지 두루 미치자 충성스런 마음이 요동 땅에 피어오른다고 찬양하고 있다. 그러나 사절단의 서장관으로 참여했던 이승휴의 착잡했던 심정을 헤아려볼 수 있을 것 같다. 중추절인 8월 15일에는 천복사에 갔다가 당두노숙(堂頭老宿)의 작시(作詩) 요청을 받고 <목암선사어록(木庵禪師語錄)>의 <산당신흥시(山堂晨興詩)>를 차운하여 주기도 하고, 21일에는 순안후 종과 같이 여강 석교에 놀러갔다가, 후우현의 요청을 받고 고시(古詩) 한 편을 읊어주기도 했다. 여강의 석교는 북경시 영정하에 놓인 그 유명한 노구교(蘆溝橋)로, 천안문에서 서남쪽으로 15km 떨어져있다. 여강은 조수, 청천하, 노구하, 혼하 소항하, 무정하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가 청나라 강희(康熙) 37년(1698) 칙명에 의해서 영정하(永定河)로 개명되었다. 여강 위의 석교는 외국 사행단이나 여행객이 오면 꼭 한 번 왕래하는 코스였다.
드디어 이 사행의 하이라이트인 세조와의 첫 만남이 8월 25일(양력 10월 7일)에 이뤄졌다. 사행단이 대도에 도착한 것이 8월 4일(양력 9월 16일) 이므로 20여 일이 지나서 세조를 만난 것이다. 세조 쿠빌라이가 8월 24일 여름 궁전인 개평부(開平府)에서 순수(巡狩)를 끝내고 대도 만수산 광한궁의 옥전으로 되돌아와 진하를 받았기 때문이다. 8월 10일 황후를 만날 때와 같이 강(姜), 임(任) 두 선사의 안내로 표문(表文)을 바치는데, 예수는 황후를 만날 때와 똑 같았다. 세자(뒷날 충렬왕)는 1272년 12월 이미 입관(入館) 상태였으므로 일을 같이 맡았다. 예수가 끝나자 옥전에서 잔치를 베푸는데, 인시(寅時)에 시작해 신시(申時)까지 열두 시간이 지나서야 끝나는 성대한 잔치였다. 8월 26일 순안후 종이 표문을 올려 진사(陳謝)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장이 길지만 최대의 예우와 찬사와 격식을 갖춘 표문이고 그 내용이 절절하여 그대로 인용한다.
천상의 풍운이 도움을 주는 경사스런 모임의 잔치(...)
바다 한구석 보잘 것 없는 신(臣)이
벌써 은덕에 배가 부르네.
영광이 그지없거니,
감격스러움 어찌 끝이 있으랴.
한 사람이 중심에서 자리를 잡으매
사해(四海)에 외지가 따로 없구나.
원근이 찾아와 기뻐하매
화하(華夏)와 만맥(蠻貊)이 모두 순종하고,
베풂이 두텁고 사랑이 넘치니,
조수(鳥獸)와 어별(魚鼈)까지도 하나같이 환호하네.
만국에 태평을 이루고 나서,
양궁(兩宮)께 아름다운 호(號)를 더해주시네.
곤도(坤道)는 한층 더 빛나고,
천둥 같은 위엄은 더욱더 빛나리라.
기쁨에 찬 열국들 앞 다투어 옥백을 가지고 달려가고,
작은 삼한(三韓)도 별도로 만수무강을 빌었네.
엎드려 생각하니 배신(陪臣)은,
문왕 때부터 우악한 성권을 받아,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품에서 재롱을 부리는 것 같다네.
이때 큰 경사의 소식을 듣고서,
조촐한 행장을 서둘러 꾸려서 조근을 왔었네.
처음 오른 먼 길이기에 마음은 붕정보다 더 빨랐으나
때마침 장마를 만나서 길은 도리어 경해로 변하고 말았네.
파도는 끝없이 거세고,
빗물 또한 질펀했네.
발걸음은 급히 앞으로 나가려 해도,
움직일 때마다 지체되어 뒤처지고 말았네.
벌써 개평부에는 제때 닿을 수 없었고,
어느덧 대도성으로 직진하게 되었네.
멀리서 행궁을 바라보매 운소 아스라니 눈이 모자라더니,
이윽고 보련(寶輦)이 돌아오자 몸소 일월의 광명을 우러러 보았네.
어떻게 하면 남다른 은총에 보답하여,
경사스런 연회에 참석을 허락받을까.
중도에서 지연되던 어제는 저절로 마음만 초조하더니,
황제를 시종하는 오늘 아침에는 황홀하기 꿈과 같아라.
위엄 있는 얼굴을 지척에서 모시고 떨어지지 않으니,
이 감명 참으로 보통의 갑절일세.
위의 표문을 읽고 있노라면 원(元) 중심의 국제질서 속에 안주하지 않고서는 살아가기 어려운 현실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가슴 저려오는 비애(悲哀)는 어쩔 수 없다. 사행단의 역할이 양국 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것이니 피해 갈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사람들이다. 세조에게 올린 표문을 선미사(宣美使) 보라달(甫羅達)이 번역하여 세조에게 보고했더니, 세조가 내용은 잘 알겠는데 격식은 어떤가, 라고 질문했다. 영사(令史)들이 문장이 격식에 알맞다고 보고한 결과, 순안후가 세 번이나 황제를 만났는데 그 때마다 표문에 대해 치사했다는 것이다. 표문을 작성할 때, 혼신의 힘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우리 사행단이 1273년 8월 27일 장조전에서 두 번 째로 세조를 만날 때의 의식 장면을 보기로 하자.
세조를 만날 때의 의식(儀式)
연(燕)의 세력 범위인 중도성(中都城)이란 대금국(大金國)의 도읍지다. 여기서 5 리를 가면 만수산이 있는데, 금나라 장종황제(章宗皇帝)가 건축한 것이다. 모두 36동(洞)으로 위에는 광한국이 있고 남쪽에는 원춘전(元春殿)이 있다. 지금 상국(上國)이 이산을 에워싸고 새로 성을 쌓았다. (...) 이 성의 사면이 각각 40 리인데 (...) 만수산 동쪽에 새로 궁전을 세웠는데, 이것이 장조전(長朝殿)이며 (...) 웅장한 규모와 극치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황제폐하께서(1273년) 8월 27일 날 제후들을 대대적으로 불러모아놓고 낙성식을 하는데, 깃발, 일산 등의 일체 의장이 창공에 펄럭여 해를 뒤덮어서 사람의 눈을 현란케 했다. 여러 대왕 및 대원의 관원에서부터 백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새벽에 모여들어, 조복(朝服)을 입고 장화를 신고 홀(笏)을 잡지 않은 사람 없이 차려 입고 구름처럼 중전에 모여 서니, 각문사(閣門使)란 사람이 각기 서열대로 인도하여 배위(拜位)로 나아가는데, 황단(黃丹)을 지면에다 칠하고 흰 용수(龍鬚)로 된 자리를 깔아서 방괘(方罫)를 이루어 배위를 구별 짓고 거기다가 벼슬 이름을 써놓았다. 배위로 인도하여 서 있게 하고는 관반 후 학사와 강(姜) 선사를 시켜 우리 영전과 후저 및 관속들을 인도하여 반열(班列)의 중심 지점 아래쪽에 줄지어 세우고, 그 나머지 여러 나라에서 온 사절들은 옷 빛깔에 따라 가장 뒤 열 말미에 세웠다.
잠시 후 황제께서 편전(便殿)에서 나와 전상(殿上)으로 나아가서 황후와 함께 보좌(寶座)에 올라앉아서 하례를 받았다. 그 예수(禮數)는 우리 본조의 예수와 대동소이한데, 이른바 다른 점은 각문사가 “국궁(鞠躬), 배흥(拜興)” 하고 외치면 반수(班首)가 조금 앞으로 세 발짝 나아가서 선 다음 절하고 일어나고 절하고 일어나서 몸을 펴고, 홀을 꽂고 국궁을 하고, 무도(舞蹈)를 세 번 한 다음, 왼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세 번 조아리고 “산호(山呼), 산호, 재산호”를 하는 것이다. (...) 예식을 마치고 나서는 모두 부동자세로 서 있는데, 각문사가 (...)원외랑 염승익이 통갈(通喝)을 하여 거행했다. 예식을 마친 뒤 (...) 모든 시신(侍臣)에게 전해주고 군복(軍服)으로 갈아입고 상전(上典)에 올라가는데, 우리 일행에게는 갈아입지 말라고 명령했다. 정해 준 좌석의 위치는 서편 제1행은 황태자, 한 위차를 건너서는 대왕 여섯, 두 위차를 건너서는 우리 영전, 그 뒤 열에는 대왕 일곱, 또 두 위차를 건너서는 우리 후저, 그 뒤 열에는 안(安)데, 동(董) 승상(丞相)을 수석으로 십여 명 정도의 관원, 여기서 두 위차를 건너서 우리 열인데, 재신(宰臣)과 재신 다음 제관(諸官)들의 뒤 열 중심도 우리 열, 상서(尙書)와 시랑(侍郞)의 뒤 열 중심도 우리 열이었다. 참상(參上), 참외(參外)의 뒤 둘째 열은 자세히 알 수가 없었으며, 맨 뒤 열 끝에는 여러 나라의 사절 보좌들이 앉았다. 동편에는 여러 궁주(宮主), 공주(公主) 20여 명이 각기 시녀 두세 명씩 데리고 띄엄띄엄 앉고 좌석이 없는 자로서 선사, 붕어, 수재(秀才), 영사(令史) 무리들은 앞에 벌려 섰는데 전내(殿內)는 하도 넓어서 지면이 남아돌았다.
후학사가 “이 전정(殿庭)은 만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데, 이번 시연 인원이 겨우 7천 명이오.”라고 말했다. 황태자가 일어서서 헌수(獻壽)를 하는데 당상(堂上)과 당하(堂下)에서는 피리와 쇠북을 간간히 연주하고, 증산(繒山)과 수악(繡嶽)에서 기악들이 앞 다투어 정재(呈才)를 하니, 춤과 노래가 끝이지 않고 조화를 이루어 장엄하고도 경건했으며, 앞 열에서는 여섯 대왕이 차례대로 헌수했다. 신시(申時) 초에 끝났는데, 부로(父老)들의 말이 “병란 이후 이 같은 예수는 아직까지 있었던 적이 없었다.”고 했다. 아, 나는 지금 얻어 보았도다! 그 이튿날 후저께 표문을 올려 전하려 하는데, (...) 새벽을 지나서 날이 밝은 뒤에 가서 아뢸 수 있었다. (...)
8월 29일(양력 10월 11일)에는 황태자가 대도성 진국사(鎭國寺) 북쪽 고량하(高梁河)의 언덕에 전막(氈幕)을 치고 하례(賀禮)를 받는데, 임 선사가 안내했다. 영전이 고려의 예수로 배견(拜見)하고 사행단은 전막 밖에 죽 늘어섰다. 염외랑 염승익이 예식이 끝났음을 전갈하자, 임(任) 선사가 순안후를 인도하여 전막 안으로 들어갔는데, 영전과 후저, 재신(宰臣) 송빈(宋份)은 전막 안에 앉게 하고, 다른 여러 관속(官屬)은 모두 전막 밖에 앉게 하여 잔치를 베풀고 곧바로 끝났다. 사절단은 숙소로 들아 왔다가 호천사(昊天寺) 관광길에 나섰는데, 일행이 2백여 명이나 되었다. 이승휴는 9층 목탑 꼭대기까지 올라가 도성을 굽어보니 인마(人馬)가 개미떼 같다고 했다.
9월1일에는 중서성(中書省)의 명령을 받은 새(賽) 단사관(斷事官)이 나와서 사행단에게 잔치를 베풀어 날이 저물어 끝났는데, 중서성의 승상들은 기무(機務)가 있어서 직접 나오지 못했다. 후저가 대표로서 그 다음날 계사(啓辭)로 사례했다. 9월 7일(양력 10월 19일)에는 중서성 낭사(郎舍)의 안내를 받아 순안후가 궁궐을 향해 절을 올리고, 고려로 돌아갈 사람은 명령을 듣고 작별의 예를 올렸다. 두 낭사를 위해 잔치를 열고 토산물을 전달해 신표로 삼았다. 두 낭사가 복명(復命)한 뒤에는 강. 임 두 총관과 더불어 늦도록 술자리를 가졌다. 9월 8일(양력 10월 20일)에는 가볍고 따뜻한 좋은 옷을 하사한 데 대한감사의 사의대표(謝衣代表)를 관반(館伴)인 학사 후부(侯傅)를 통해 세조께 아뢰도록 하고 말을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행차가 계문(薊門) 동쪽 교외로 나오자 영전이 먼저 나와 석별의 자리를 마련해 놓고 기다리고 있고, 후 학사, 누 총관, 강. 임 두 선사가 진귀한 물건들을 갖고 와 잔치를 베풀어주어 작별 인사가 길어졌다.
대도에서의 공식 일정이 모두 끝나고 귀국길에 오른 사행단은 9월 25일(양력 11월 6일) 압록강에 도착했다. 약 1주가 지난 10월 2일에는 황해도 우봉현(牛峰縣) 소재 흥의역(興義驛)에 도착하니, 내장(內將) 김자정(金子廷)과 급사 허입재(許立才)가 선전관(宣傳官)을 모시고 마중을 나왔다. 10월 3일 개경으로 들어가려는데 재추(宰樞)들이 서보통문(西普通門) 앞으로 나와 위로연을 거행했다. 그런데 마주앉아보지도 못한 채 후저(候邸)를 선두로 궁궐로 들어가 원종에게 숙배(肅拜)를 올리는 것으로 사행(使行)의 의무가 끝났으니, 장장 112일의 일정이었다.
<빈왕록>의 끝부분은 이승휴가 원종(元宗)의 승하를 원에 알리기 위해 개평부(開平府)에 갔다가, 새로 부임하는 충렬왕(忠烈王)을 모시고 개경에 도착하는 내용이다. 즉 1274년 6월19일(양력 7월 24일) 원종이 승하하자, 이승휴는 원에 고부(告訃)하라는 명령을 받고 6월 21일에 개경을 출발하여 7월 12일에 개평부에 도착했다. 13일에 <고애도표(告哀悼表)>를 올리자 18일에 “궁주(宮主)는 뒤에 떠나고 국왕은 먼저 본국으로 돌아가서 집상(執喪)을 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받게 된다. 19일 이승휴는 어가(御駕)(충렬왕의 수례를 말함)를 호종(扈從)하고 개평부를 떠나서 8월 24일(양력 10월 6일) 충렬왕이 개경 남산궁(南山宮)에 입어(入御)한 후 숙배하고 물러난 것으로 책무를 완성했다.
<군말> 이상으로 <빈왕록>을 마무리 합니다. 이 글을 읽어보았으면 잘 아시겠지만, 이승휴 선생은 고려를 대표해서 사행단의 일원으로 원나라에 두 번을 다녀왔습니다. 그 첫째는 원(元)의 세조(쿠빌라이)가 황후와 황태자를 책봉하고 그 사실을 고려에 전해왔기에 축하사절단의 일원으로 갔으며, 두 번째는 원종(元宗)의 승하를 원(元)에게 알리기 위해 갔습니다. 여기서 첫 번째 사행 기록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두 번째 사행 기록이 빈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점이 아쉽습니다. 또한 선생의 역작으로 사료되는 내전록(內典錄)이 1287년(충렬왕 13년)에 저술되었는데, 찾을 수 없는 것도 아쉽습니다. 동안 선생보다 56년 전에 태어난 이규보는 강화도에 묘지가 있는데, 묘소도 찾지 못하고 영정 하나 없는 선생께 죄만 짓고 사는 것 같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