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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31일 - 주일 2부 예배 (요한복음 1장 43-51절)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여러분과 제가 오늘 가진 성경본문과 헬라어 성경본문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헬라어 본문의 직역을 들어보시면 좀 더 분위기가 뚜렷이 드러납니다. 오늘 이 본문에는 뭐가 흐려졌느냐면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려 하시다가 우연히 빌립을 만난 것처럼 번역이 잘못됐습니다. 이 번역의 원래 뜻은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려고 소원하셨다 그리고 빌립을 찾아서 만났다’ 이런 뜻으로 돼야 합니다. 또 예수님 하시는 말씀 대부분이 현재직설법으로 표현돼 있습니다. 현재직설법으로 표현돼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돌아가신 분, 옛날에 말하신 분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제자공동체에서 얼마나 강력하게 현재에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알려졌고 믿어졌고 체험되어졌는가를 암시하는 본문이죠. 예수님은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현재형으로 말씀하십니다. 보겠습니다. ‘이튿날 그는 갈릴리 깊숙이 들어가기를 소원하셨다.’ 갈릴리 깊숙이 들어가기를 소원하신 겁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빌립을 만나신다. 빌립을 찾으신다. 빌립을 발견하신다.’ 빌립을 우연히 만난 게 아닙니다. 빌립을 만나러 갈릴리로 갔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왜 갈릴리 깊숙이 갔을까? 빌립을 만나러 갔다 이런 느낌이 드는 본문이에요.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 깊숙이 들어가기를 소원하셨다. 그리고 빌립을 만나신다. 그리고 그에게 바로 말씀하신다. 나를 따라오너라.’ 이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갈릴리로 간 목적이 빌립을 찾으러 가서 제자삼기 위함임을 알 수 있죠. 그러면 예수님이 갈릴리에 가기 전에 어디에 계셨는가? 1장 2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기 전에 어디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한 번 볼까요? 1장 28절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요한이 어디서 세례를 주었느냐면 예루살렘에서 60km 떨어진 요단강 하류에서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집트 쪽으로 내려간 요단강 하류에서 세례를 줬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요단강 하류와 갈릴리는 160-200km 정도 떨어져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1장 28-42절까지 오늘 본문 직전까지는 어디서 일어난 일이냐면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봐야 해요. 그래야만 말이 돼요. 그러면 초창기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어디서 만났느냐면 세례요한이 세례를 주던 장소에서 만난 거예요. 세례요한이 장기간 체류하면서 이스라엘 민족들 구성원들의 죄를 회개하라고 다그치던 그 요단강 요한의 세례 현장에서 예수님 초창기 제자들이 형성된 거예요. 그 자리에 예수님이 갔고요. 거기서 예수님이 누구를 인수인계 받았습니까? 안드레와 또 한 제자, 이 또 한 제자는 요한복음의 저자라고 보통 알려집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라고 알려진 요한은 사도요한이니까 사도요한과 안드레가 둘째아들, 동생들이죠. 야고보의 동생이 요한이고 베드로의 동생이 안드레거든요. 동생들이 누구를 따라다녔어요? 세례요한의 추종자로써 갈릴리에서 어디까지 갔어요? 요단강 세례 받는 데 가서, 아예 거의 full time 추종자답게 거했죠. 그런데 그 자리에서 바로 즉시 누구를 만났어요? 베드로를 만났으니까 베드로는 그러면 또 어디에 가 있던 거예요? 요단강에 가 있던 거예요. 요단강에 간 일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죠. 약 160-200km 떨어진 거기서 장기간 투숙하면서 세례요한의 세례운동의 현장에 있었다는 말은 부활적인 의미로 세례요한의 직접제자군 또는 간접제자군이라고 말할 수 있죠. 세례요한의 영향권 내에 있는 젊은이들이다. 누가? 요한 안드레 베드로가, 이 세 사람을 만난 곳이 어디냐? 요단강 베다니 못, 예루살렘 밑을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 계시다가 예수님 어디로 갔어요? 다시 갈릴리로 북상을 하신 거예요. 갈릴리로 북상을 하신 이유가 뭔지는 몰라요. 갈릴리로 북상, 북쪽으로 갔단 말이에요. 북쪽으로 가면서 소원이 있으셨는데, ‘갈릴리 깊숙이 가시기 원하셨다’ 어떤 소원인지는 몰라요. 왜 갈릴리로 가려고 하셨는지 모릅니다. 다만 빌립을 만나서 ‘나를 따라오너라’라는 말을 전광석화처럼 터트려놓는 것을 볼 때 빌립을 만나러 갔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죠. 예수님은 요단강 베다니 사해근처에서, 지도를 보면 사해라는 Dead Sea를 보세요. 밑에 있습니다. 예루살렘보다 더 밑에 있어요. 지금 세례요한이 세례주던 곳의 위치는 요르단 근처에 있어요. 거기서 갈릴리로 북상했다가 가장 만난 것이, 유레코, 만나다, 유레스카,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유레카를 외쳤다고 하죠? 유레카가 뭡니까? 유레코, 발견했다는 동사입니다. ‘예수가 빌립을 발견하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따라오너라’ 얼마나 간결하면서도 막힘이 없어요. ‘예수께서 갈릴리로 가시기를 소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리로 가셔서 빌립을 만나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나를 따라오너라.’ 자 이 말을 볼 때 예수님이 갈릴리에 가신 목적 중 하나가 제자 삼으시러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거죠. 예수님 초창기 제자는 제1제자 안드레와 요한 그다음 제3의 사람 베드로, 세 사람입니다. 4번째 제자는 빌립입니다. 빌립은 아무리 군소리 없이 따라갑니다. 이유는 빌립과 예수님 사이가 이미 알고 있는 사이였음을 암시하는 구절이 바로 44절입니다. 이런 식의 설교가 힘들죠? 바로 예화가 나오면서 재미있어야 하는데 자꾸 국어선생님같이 이렇게 하니까, 저도 이렇게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셔서 하는데 이렇게 해야만 감동이 오래 남습니다. 예화를 주고 메시지를 빨리 적용시키는 것은 그 순간은 좋은데 너무 내적인 influence가 없습니다. 저는 이런 방식으로 해서 계속 뜨겁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하거든요. 저는 말씀을 맥락에 맞게 이치에 맞게 해석을 해야만 오래갑니다. 44절 보십시오. 삽입 구절입니다. 예수님이 빌립에게 이렇게 말할 때 독자들이 무슨 마음이 들겠어요? 참 거 실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잖아요. 갑자기 어떤 사람을 만나더니 임의동행식으로 끌고 갑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니까 독자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서 괄호 안에 그들은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그들이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임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이 벳새다 고라신 가버나움 이 세 도시에 목수 일을 많이 하러 다니신 것 같고요. 벳새다 고라신 가버나움에 토목공사, 이명박 대통령이 좋아하는 일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산을 깎아서 마을을 많이 만들었는데 전부 다 산이 비버리 힐즈입니다. 갈릴리의 비버리힐즈로써 부자들이 많이 사는 동네입니다. 강남 3구랑 똑같은 벳새다 고라신 가버나움은 전부 다 중산층들이 살고 있는 도시입니다. 예수님이 벳새다에 일을 많이 가면서 목수 예수가 일을 했을 가능성이 많아요. 그래서 만약 예수님이 빌립을 만나자마자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했을 때 이렇게 말할 수 근거가 있었습니까, 라는 독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예 그는 원래 예수님이 자주 일하러 다니던 벳새다 출신 안드레와 베드로의 고향 마을 사람이었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이들이 서로 알고 지냈음을 암시해줍니다. 직시해주지 않고 암시합니다. 그래서 44절은 과거시제로 돼 있습니다. ‘예수께서 빌립을 만나신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신다. 나를 따라오너라’ 괄호하고, 놀랬죠? 하면서 그들은 서로 알고 지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겁니다. 45절 또 현재직설법입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만난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한다.’ 전부 다 현재진행형입니다. 이걸 만약에 원전 그대로 번역한다면 뜻이 훨씬 더 잘 깨달아졌을 거예요. 지금 우리 한글번역 성경보다도요. 이렇게 번역합니다. ‘빌립을 나다나엘을 만난다. 찾아다닌다. 그리고 그에게 말한다.’ 이번에도 똑같습니다. 휴리스케이,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서 의도적으로 찾은 겁니다. 우연히 만난 게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찾아가서 만납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합니다. 중요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썼고 예언자들이 썼던 바 된 그 사람을 우리가 찾았다.’ 유레카멘, 이때도 발견했고 찾았다, 의도적인 지향성이 뚜렷한 동사입니다. 절대로 이건 우연히 만난 게 아닙니다. 우리가 만났다, 발견했다는 똑같은 동사를 쓰는데, 휴레카멘, 우리가 오랫동안 찾고 있었던 사람, 이런 뜻입니다. 모세가 율법에서 말했고 예언자들이 말했던, 우리가 오랫동안 찾고 있었던 그 사람을 찾았다, 라고 말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빌립이 구약성경을 매우 많이 알고 구약성경을 메시아 대망의 관점으로 읽어 온 것을 알 수 있죠? 그리고 구약성경을 빌립만 이렇게 읽은 게 아니라, We have a found, 1인칭 복수로 썼기 때문에 빌립과 나다나엘 한 동아리인 걸 알 수 있죠? 빌립과 나다나엘은 어떤 동아리입니까? 모세가 말한 그 예언자, 예언자들이 그렇게 말했던 메시아를 대망하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죠. 열망이 고조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 그룹에 동참했죠.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예수님에 관하여 열망이 고조돼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많이 알고 있는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 구속사에 쓰임 받는 겁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구약성경 의존적이고 신약성경 텍스트 의존적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텍스트를 가지고 하나님 구원역사의 다음 단계에 골똘하게 묵상하는 사람을 탁 불러내신다는 말이에요. 여러분 성경 말씀을 골똘하게 읽고 있는 사람을 불러내신다는 거예요. 모세의 글과 예언자의 글, 이 말은 뭐에요? 모세오경과 율법서라는 말이에요. 이것에서 메시아에 관한 모든 구절을 줄 딱 치고 간절하게 기다리던 그 젊은 동아리에게 예수님이 나타난 거예요. 이건 뭘 가리켜요? 어제 제가 읽었던 <괴테 자서전-시와 진실> 제 3부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젊은 날 강력한 소망은 미래에 내가 바꿀 미래에 대한 비전의 선취다.’ 젊은 날의 강력한 열망은 미래에 내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간절하게 보여주는 거예요. 여러분이 젊은 날 예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텍스트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줄 치면서 간절하게 기다리는 그 사람에게 예수님이 홀연히 나타나고, 그런 사람의 인생의 도상에 예수님이 나타나는 거예요. 너무 중요해요. 제가 돌이켜 볼 때 제 인생이 그랬던 것 같아요. 제가 <일리아드> 호머를 읽으면서, 니체를 읽으면서 정말 목이 말랐어요. 정말 목이 말랐을 때 예수님이 나타나셨어요. 제가 목이 너무 말랐을 때 제 인생의 도상에 나타나셨어요. 우리가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모세가 말하고 예언자가 말했던 그 사람을 간절하게 열망했던 그 제자 빌립과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이 나타났단 말입니다. 우리는 무얼 암시받을 수 있어요, 여러분? 내가 열망하는 바가 내가 거의 소유한 거나 마찬가지다, 내가 열망한 것은, 이건 남녀관계에는 함부로 적용하면 안 됩니다. 남녀관계는 괄호하고 예외가 많음, 써 놓으세요. 그러나 남녀관계가 아닌 한 대부분이 열망과 소유 성취의 관계는 매우 간단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망이 간절한 사람이 실제로 하나님 나라의 역군이 돼요. 이게 너무 중요한 거죠. 제가 79년 11월부터 80년 2월까지 극동방송을 새벽 4시부터 몇 달 동안 림인식 목사님과 김장환 목사님 이런 분의 설교를 제가 간절히 들었어요. 그런데 이 두 분의 설교가 너무 내 마음속에 메아리를 치면서 내가 그 설교를 그대로 따라할 만큼 암송이 잘 되는 걸 보면서 내가 79년에 내가 처음으로 내 앞날에 대해서 예언을 했어요. 혹시라도 이러다 설교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이러다 내가 목사가 되는 것은 아닌가, 라는 불길하고도 애먼 생각이 들어요. 내가 그게 너무나 이해가 잘 되는 바람에, 어떻게 이렇게 될까, 림인식 목사님 북한 말로 설교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그 말씀 하나하나가 그렇게 내 가슴속에 파고드는 거예요. 림인식 목사님 설교, 김장환 목사님 설교가, 여러분 2,30대 젊은 날에 강렬한 열망덩어리 불덩어리가 내 가슴속에 안 생기면 어떻게 할까? 그 사람들은 남이 시키는 일을 하고 살아야죠. 불의 열정덩어리가 20대 때 폭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지향성 있는 비전을 향해서 추구하는 사람이 절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비전은 텍스트 의존적으로,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의 열망이 충족돼야 합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은 모세가 썼고 예언자가 말했던바 우리 앞에 이루어져야 할 구원의 역사, 이런 것을 간절히 기다릴 때 바로 모세가 말했던 그 사람이 내 인생의 도상에 홀연히 나타난다는 것이죠. 저는 20대 때 순수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야심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 순수할 필요 없습니다. 아무것도 타락할 일이 없기 때문에, 가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기 때문에, 가진 것이 있고 잃을 것이 있는 사람은 순수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용규 목사님의 <내려놓음>은 읽지 말아야 합니다. 그건 하버드에서 박사한 사람들이나 읽고, 여러분은 들어 올리는 일부터 먼저 해야 해요. 많은 사람들은 들어 올리는 그 중량감 넘치는 과업이 없는 채로 자꾸 내려놓으려니까, 겸손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자꾸 자학적인 겸손에 도달하니까 드디어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숭실대생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착한 놈이다, 착한 놈이 한때 거룩하게 지나면 독한 놈이 된다, 독한 놈과 착한 놈이 발전적으로 되면 이기는 놈이 된다, 세상을 이기기 위해선 독한 놈이 되어야 한다, 너희는 충분히 독하지 못하다, 내가 숭실대생들에게 늘 하는 이야기입니다. 채플 시간에 간절히 말합니다. 이용규 박사쯤 되니까 하버드에서 박사학위 받고 그러니까 <내려놓음> 이런 책을 쓰지, 여러분은 <올려놓음> 이런 책을 써야 합니다. 여러분이 감동받아야 할 책은, 여러분은 야심을 꿈꾸는 책을 읽어야 하지, 그런 야심을 꿈꾸고 열망을 고조시키는 정당화하는 그런 책을 읽지 않고 계속 겸손하게 나가면 안 돼요. 그러면 안 됩니다. 열망, 참 중요합니다. 메시아를 정조준하면서 텍스트에 의존해 줄을 치면서 언젠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해요. 저는 우리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저는 그래서 인류문제 정치문제의 전문가가 됐어요. 저는 북한과 우리 민족의 화해 이런 문제에 너무나 많은 독서를 하다 보니까 이제 제가 제 전공이 그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분야에 대해 전문가 대우를 받고 강연을 하러 다닙니다. 통일원이 남산에 있을 때 북한 사람들의 삶을 알기 위해서 노동신문을 읽고 다녔습니다. 그때는 노동신문을 읽으려면 허락을 받아야 해요. 북한 방송을 들으면서 북한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간절하게 기도하다가 북한 꿈을 수없이 꾸었습니다. 북한의 전철을 타는 꿈, 평양 가는 꿈, 백두산 올라가는 꿈을 꾸다가 제가 사실상 북한에 간 건 2006년에 갔습니다. 그런데 통일문제 민족의 화해문제, 이런 문제에 대해서 글을 길게 쓰고 강의를 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나에게는 이 비전이 있기 때문에, 저는 그리운 금강산이라는 노래를 부를 때 임진강이라는 노래를 부를 때 눈물이 많이 납니다. 저는 웬만한 찬송가보다 그리운 금강산, 물론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면이 있지만 그러나 임진강이라는 노래랑 같이 부르면 됩니다. 제가 임진강에 자리 잡았잖아요. 파주 북문을 쳐다보면서, 북한군 초소에서 아이들이 막사에서 얼음지치기 하는 것을 제가 겨울 내내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아이들에게 이 비전을 심어주기 위해서 <풍산개>라는 영화를 보러가자고 설득했다가 완전히 된통 욕을 얻어먹고 왔습니다. 저는 재미나게 봤는데 아이들 두 명은 이 아버지의 간절한 분단극복의식이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거죠. 영화가 너무 허접하다며, 그럼에도 <풍산개>의 상상력을 저는 높이 쳐서 기어코 설득해서, 그런데 끝내 제 아내는 동참하지 않고 아이 두 명을 간신히 데려 갔는데, 다시는 아빠가 추천한 영화 안 보겠다, 그런데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그 영화의 완성도보다는 그 상상력을, 20대 때 젊은 텍스트 의존적인 열망, 하나님이 약속한 열망, 북한 동포, 이건 내가 내 당대에 이루어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저는 그래서 철조망이라도 넘고 싶고 그러거든요. 문익환 목사님이 쓴 책을 읽고 감동을 받으면, 누군가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20대 때 제 젊음이 저를 50대 때 단단히 여물게 만들고 계속 나에게는 불꽃이 되어 있습니다. 북한 동포에 관련된 이야기는, 이 문제에 제 전공이 어떻게 쓰임 받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계속 이 일에 관여하게 될 겁니다. 왜? 북한 동포들에 대한 이 민족에 대한 화해와 열망, 우리가 만일 복음으로 우리 민족이 화해하지 못하면 세계 만민에게 동족이 화해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피그미족과 저 폴리네시아로 갈 것이며 아마존 밀림으로 갈 것입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젊은 사람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이 말했던 그 분, 모세와 예언자들이 말했던 그 나라에 대한 열망이 간절하게 꽂힌 젊은이가 일을 성취한다고 저는 믿어요. 그런 사람만이 역사에 쓰임 받는다고 저는 믿는 바입니다. 나다나엘과 빌립은 한 동아리 맞죠? 이 두 명은 사도행전 1장 13절을 빼고는 항상 빌립 다음에 나다나엘이 나와요. 그런데 빌립 다음에 나다나엘이 빠져있고 바로돌로매가 나와요. 이 바로돌로매가 나다나엘과 같은 사람일거라 봐요. 그런데 지금 빌립이라는 사람이 나사렛 예수 라고 소개했더니 이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이 하는 말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그랬더니 빌립이 하는 말이, 나다나엘이 한 말은 과거형으로 표시돼있고 빌립이 한 말은 현재형으로 표시돼 있습니다.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말씀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이것은 영원한 말씀이 아니죠. 진리가 아닙니다. 항상 진리인 것만 현재형으로 표시되죠. 그랬더니 빌립이 말하기를 ‘빌립은 그에게 말한다’ 에레쿠 카이 에 니레, 와서 보라, 이 말 중요합니다. 1장 38절에 이미 한 번 썼습니다. 예수님이 안드레와 요한이 선생님 어디 사십니까, 물으니 와 보라, 즉 예수의 인격과 대면하라, 예수의 인격의 진수와 정면으로 만나보아야 한다, 이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예수와 직접 대면하지 못하게 만드는 종교권력의 두터운 장벽에 싸여 있습니다. 참 무서운 일입니다. 오늘 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교회를 가야 하는데, 교회 강단에서 선포하는 목사님은 교회를 경영해야 하는 경영자의 관점에서 하기 때문에 주일 설교에 헌금 이야기를 많이 섞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다음 교회가 정치적 보수 세력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교설을 퍼트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알짬을 보여주기 보다는 예수님의 진실과 대면시켜주기 보다는 교회 자체의 모임, 아젠다, 교회자체의 아젠다를 설파하기 때문에 교회 강단에 와서 예수님을 만나기 쉽지 않습니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처럼 2,3일 동안 같이 살면서 그의 동료들을 다 변화시킬 만큼 간절한 예수님의 불덩어리 자체, 예수님의 말꼬리 자체, 예수님의 형상자체 만큼, 그렇게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이면, 와 보라가 맞습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우리 형제자매들 보고 와 보라, 같이 살아보자, 이건 실제로 너무 힘든 일입니다. 예수님은 와 보라, 예수님 안에 있는 그 열망의 진수, 그걸 만져보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의 진수 그 공기를 마셔보라고 했습니다. 네가 나를 원하느냐? 와서 맛을 보아라, 내가 무얼 꿈꾸는지, 내가 무얼 숨 쉬는지, 내가 무엇 때문에 생기로운지, 내가 무엇 때문에 열정으로 가득 찼는지 한 번 체험을 해보라고, Experience me, 나를 경험해보라고, 이거 얼마나 대단한 말이에요. 내가 가르침 어느 하나를 따르라가 아닙니다. 내 가르침을 따라서 시험해보라가 아니라 나 자체를 보라, 나 자체를 해독하라, 나 자체가 하나님 걸어 다니는 말씀이다, 나 자체를 경험하고 이해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함부로 하면 이단이 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하는데 우리는 잘 안 돼요. 우리가 가향에 와 보라, 가향은 노숙자들의 본부아래 있는 한 건물로써 40평 남짓한 건물로, 벌써 여러 교인이 왔다가 안 오잖아요. 온다고 분명히 그랬는데, 한 어른교인이 왔다가 차마 이곳에 앉아 있기 힘드니까 안 옵니다. 아마 그 분은 건물이 좋았으면 계속 왔을 텐데, 문제는 우리끼리는 괜찮은데, 양목사님과 저는 하도 소박하게 많이 살아서 여기도 편안하게 느껴집니다만, 대부분이 좋은 교회를 다닌 사람들은 여기 앉아 있으면 신분강등 비슷한 걸 경험합니다. 내가 꼭 이런 데 앉아 있어야 하나, 또 노숙자 서넛을 만나다보면, 여기 실제로 노숙자가 출몰하는 지역이잖아요. 여러분 전부 다 훈련받은 사람들이 되어가지고 노숙자가 침을 흘리고 앉아 있고 대변을 여기저기 봐 놓아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좋은 사원에서 템플에서 신전에서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던 사람들은 여기가 너무 허접스럽게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와서 보라, 예수님의 진수를 보여줄 수 있다면, 한 인격의 중심을 뒤흔들어서 따라오게 만들만큼 추종을 이끌어 낼 만큼, 설복을 시킬 수 있을 만큼 그 인격의 알짬을 보여줄 수 있는 교회가 된다면, 우리는 스타킹 하이타이 비누 가지고 전도하지 않고 예수 인격의 순수함으로 예수의 열망으로 예수의 꿈꾸는 비전으로 우리가 사람들을 흡수할 수 있거든요. 그렇게 돼야 하거든요. 우리가 그렇게 못 됩니다. 우리 양목사님과 제가 분투해왔지만 우리는 그냥 목사에 불과합니다. 얼마나 좋아요. 탁 성도들을 향해서 나를 따르라 그러면 몇 사람 따라오고 그러면 좋지만, 일단은 우리가 이런 말을 하면서 강력한 정신력으로 사람을 설복시킬만한 영권이 우리한테 없는 거예요. 이건 쉽게 안 돼요. 오랫동안 기도해야 하고 삶을 충실하게 살아내야 영권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위탁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을 많이 할수록 우리가 하나님께 더욱 더 절대 복종할수록 하나님은 우리의 입술에도 권세를 주십니다. 그때 입술에 권세를 주실 때도 우리의 사적인 용도로 쓰는 권력이 아니라 진리 아래 복종시키는 수 있는 힘을 더하여 주시는 거죠. 그러면 제일 좋은 전도 방법은 와 보라, 가향의 건물을 보지 말고 가향의 옛적 모습을 보지 말고 가향의 강단에서 선포되는 사람의 마음을 설복시키는 진리의 힘을 한 번 경험해보라, 이렇게 말하는 거죠. 빌립이 예수님에 대해서 와 보라고 말하는 사이에 이제 예수님이 드디어 개인기를 발휘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신 것을 보셨다.’ 이건 과거시제입니다. 그런데 ‘그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이건 현재시제입니다. 말씀하신다는 거의 대부분이 현재시제입니다. ‘그의 대하여’ 페리라는 전치사가 쓰였습니다. concerning him입니다. 그냥 그에게 말씀하신다는 레게이 아우토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삼겹, 역겹, 레게이 페리 아우투, He says regarding him, 그에게 관하여 말씀하신다, 이렇게 됩니다.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이레, 보라, 알렉소스 이스라 알레티스 덴 도 도흐 돌로스 에크 에신), ‘예수님이 말했다. 진실로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로다’ 인칭대명사가 쓰였습니다. What a really too Israelite, 놀랍게 돼 있습니다. 이레 라는 말은 놀랄 때 쓰는 말입니다. ‘놀랍다, 간사함이 전혀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진실로 참 이스라엘 사람을 만났다. 간사함이 전혀 없다.’ 간사함이 없다는 말은 나사렛 출신인 자기 앞에 이 나사렛을 사정없이 내리치는 이런 말입니다. 나사렛이 왜? 무슨 도시이기에? 나사렛은 첫째, 예수님 당시에 분봉왕이었던 헤롯 언티파스의 도시를, 왕궁수도를 건설할 때 동원된 석수장이들의 마을입니다. 그다음 그 너머에 있는, 나사렛 너머에는 이스라엘 평야지대의 소작인들이 많이 살았어요. 다시 말해서 누구도 살지 않은, 쉽게 말해서 가리봉동 중랑동 면목동 다 합한 겁니다. 미안합니다. 지금 그 동네, 우리 인구 구성비에서 그렇습니다. 또 파주도 포함시킬게요. 파주 그다음 중계동, 다 옛날 내시들이 살던 곳입니다. 그다음 당고개는 전부 다 망나니들 사는 동네입니다. 당고개에서 가톨릭 사람들이 다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제일 양반 가톨릭은 새남터에서 잠두봉에서 다 목이 베였습니다. 천민 가톨릭은 전부 다 당고개에서 목을 다 베었습니다. 그런 동네 사람이라는 거죠. 거기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 이렇게 물었어요. 이 단호하고도 도발적인 말을 듣고 예수님 하는 말이 와 진짜 사특함이 전혀 없는 이스라엘 사람이네, 예수님이 놀랐습니다. 그 말을 그에게 직접 한 게 아니라 그에 관하여 예수님이 방백, 즉 혼자서 말하실 때, 와 진짜 이스라엘 사람이네, 그 안에 간사함이 전혀 없네, 즉 사람에게 아부하는 말 아첨하는 말이 전혀 없네, 라는 말을 했어요. 그랬더니 ‘나다나엘이 그에게 말씀한다. 언제부터 나를 알고 계셨습니까?’ 이때부터 말이 좀 바뀝니다. 자기를 칭찬해서 그랬든지 어쨌든 간에 ‘언제부터 나를 알았습니까?’ 하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이때는 과거시제입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부터 나는 너를 보아왔다.’ 여기 해석이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여긴 깨달음이 아직까지 없는 충분히 제가 속 시원히 해명이 되지 않고 계시의 빛이 아직까지 저한테 비취지 않았어요. 혹시 여러분께서 깨달으면 알려주십시오. 도대체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 말은 예수님이 천리안을 가졌다는 말인지 무슨 말인지, 이 말 끝에 그 다음 말이 더 중요합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부터 나는 너를 보았다.’ 라고 하니까 하는 말이 ‘나다나엘이 그에게 대답했습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스라엘 임금입니다.’ 48-49절은 굉장히 어려운 본문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던 게 무엇이며 그 말을 했다고 갑자기 이스라엘 임금이니 왕이니 등등 이 말은 무엇인가? 여기에는 구약역사에 얽혀 있는 암호가 들어 있습니다. 이 암호를 풀지 않으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첫째 암호를 풀어야 합니다.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말뜻, 누구누구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 무화과나무가 아열대 과일이죠? 혹시 여러분 이거 기억납니까? 예레미야 25장에서 두 광주리의 무화과나무 비유, 한 광주리에는 좋은 무화과가 실려 있고 한 광주리에는 나쁜 무화과가 실려 있는데 이 무화과가 누구를 상징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의 한 그룹 한 그룹, 즉 포로로 잡혀 간 사람들은 좋은 무화과에요. 포로로 잡혀가지 않고 그 땅에 남아 있는 것은 나쁜 무화과죠. 무화과는 이스라엘의 상징나무입니다. National tree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말은 스가랴 3장 10절, 열왕기상 4장 25절, 미가 4장 4절, 약 서너 군데의 성경구절을 볼 때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말을 풀 수 있는 일종의 관용어법을 볼 수 있어요. 이 말은 메시아의 통치 아래 사는 편안한 모습, 즉 자기 곡식을 자기가 팔아먹고 사는 이스라엘 자유농민의 편안한 모습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겁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말은 이 나다나엘이 자기 땅을 가지고 농사짓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뜻일 수 도 있어요. 이 뜻이요. 즉 메시아 시대에 있을 법한 이스라엘 자유농민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열망하는 사람들을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죠. 이렇게 근거할 수 있는 해석이 한 군데 밖에 없어요. 전도서 랍비주석에, 에클리 에세스 랍바 라는 책에, 여러분 기억하지 마세요. 전도서 랍비주석에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은 메시아를 대망하면서 바이블 스터디, 즉 성경을 공부하면서 묵상하는 사람,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구절이 한 군데 나와요. 다시 말해서 요약하면 누구누구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말은 자기 농사를 짓고 땅을 지키는 이스라엘 자유농민으로써 메시아가 오셔서 모든 사람을 땅을 고루 나눠줄 때 그 시대를 앞당기기 위하여 말씀을 간절히 보고 있는 사람, 이런 뜻으로 본다면, 간사함이 없다는 말은 상업에 종사하지 않고 협착하지 않고 자기 땅을 일구어먹고 사는 참 애국심의 기초과제로써 이스라엘 땅을 지키기 위해서 메시아가 이 땅에 올 것을 간절하게 기다리면서 그 땅을 지키고 사는 이스라엘 자유농민, 이런 뜻으로 볼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 좀 어렵죠? 이런 암호가 있기 때문에 그 다음 말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해석하지 않으면 그다음 말이 해석이 안 됩니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오 하나님 아들이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방금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말뜻을 이런 식으로 풀어야 합니다. 이 암호를 풀 수 있어야만 그다음이 다시 말해서, 당신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메시아 시대를 대망하는 우리 같은 이스라엘 자유농민들을 실현시켜 줄 참 왕입니다, 당신은 내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무얼 열망하는 지를 간파하셨습니다, 내 마음속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을 간절하게 품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나를 알아차리셨으니까 당신은 내 마음을 이미 다스리기 시작하셨습니다, 당신이야말로 나의 왕이십니다, 나 같은 이스라엘 자유농민의 왕이십니다, 그런 뜻으로 고백한 거예요. 이건 예수님에 대한 객관적 고백이라기보다는 나에게 의미 있게 다가온 당신의 모습, 즉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이 어떤 존재로 보였어요? 왕적인 면모로 다가왔다는 뜻이에요. 즉 당신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말씀 묵상하면서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간절하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을 고조시켰던 내 모습을 알아보시고 내가 무얼 열망하는가를 알아보셨기 때문에 당신은 하나님 아들, 내 마음을 이미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이미 내 마음을 다스리기 시작한 왕입니다, 나는 당신께 설복됐습니다, 나는 당신께 매료됐습니다, 나는 당신을 따를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 말입니다. 당신을 따를 마음이 있다는 말은 당신은 이스라엘 임금이라는 말이에요. 이 말은 객관적인 예수님에 관한 진술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이 주신 충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이렇게 극적으로 감동적으로 예수의 초창기 멤버들이 확보되었다, 결성되었다, 그 본문을 보여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모을 때 강력한 계시의 힘으로 모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을 고조시켜 모았습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있는 농민들의 희망으로 떠오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에 파고드는 왕이십니다. 그렇게 했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가 그에게 말씀하신다.’ 아멘 아멘 레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이제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볼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볼 것이다.’ 이 구절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늘이 일단 열린다는 말뜻은 에스겔서와 희년서와 같은 신구약 중간 시기에 나온 표현입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말은 이런 겁니다. 말라기부터 세례요한까지 400년 동안 닫혀 있었던 하늘계시가 무차별적으로 열려서 이스라엘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감이 막 고조된다, 즉 하늘이 열린다는 말은 뭐죠? 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환하게 밝혀주는 계시가 비처럼 쏟아진다, 하나님이 나를 돌보시고 사랑하셨다는 증거가 비처럼 쏟아진다, 예수 안에서는 이제 이스라엘 민족, 버림 받은 것처럼 보이고 그리스로마제국과 페르시아제국과 앗수르 제국과 바벨론 제국 이집트 등에게 갈가리 찢겼던 이스라엘 민족을 이렇게 완벽하게 돌보시고 집중적으로 사랑하시고 은총을 폭포수처럼 붓는 그 장면을 볼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지 않았음을 확신시켜 줄 것이다, 즉 하늘이 열린다는 말은 하나님의 무차별적인 은총과 능력이 쏟아질 것이다. 누구를 통하여? 예수를 통하여. 그래서 하늘이 열리면 앉은뱅이가 일어설 것이고 눈 먼 자가 다시 볼 것이며 죽은 자가 살아날 것이며, 그런 엄청난 구원의 파도가 밀려올 것이다, 그런데 그 엄청난 구원의 파도를 내재하는 자가 인자입니다. 인자라는 말 1장 51절 마지막 단어 인자는 고난을 통하여, 고난어린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펼치는 자입니다. 그게 인자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 통치를 이 땅에 펼치는 분이 인자인데, 인자라는 말은 요한복음 13번 쓰였습니다. 신학적이기 때문에 이걸 설명하자면 복잡하고 간단하게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요한복음 3장에 또 인자가 나오기 때문에 지금은 다 하지 않겠습니다. 인자라는 말뜻, 이것만 아십시오. 고난을 통하여 고난어린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 통치 하나님 뜻을 이 땅에 펼치는 메시아의 별칭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중요한 말, 하늘이 열려서 무슨 일이 벌어져요?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천사가 왜 오르락내리락 합니까? 이때 천사는 예수님의 복종을 도와주고 절대 순종을 도와주는 천사이지, 예수님의 개인기를 도와주는 천사가 아닙니다. 갑자기 신기한 능력을 발휘해서 예수님이 얼마나 대단하가를 보여주는 천사가 아니에요. 여러분 가끔 그런 생각이 들죠? 천사가 있으면 전투경찰도 막아주시고 그러면 좋을 텐데, 예수님의 천사는 예수님의 특별한 개인기 카리스마를 증량시키는 천사가 아니라 순종을 도와주는 격려의 천사입니다. 누구 이야기가 떠올라요? 야곱의 이야기. 야곱이 돌베개를 벨 때 하늘의 사닥다리가 열리고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할 때 임하는 게 무엇이죠? 믿음의 조상답게 살아라, 믿음의 길을 끝까지 즉 가나안 땅으로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 네가 이번에 가나안 땅을 떠나지만 너는 반드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야 한다, 너는 돌아와야 한다, 너는 이 가나안 땅을 상속해야 한다, 그 메시지를 준 분이 누구에요? 하늘사닥다리에 있는 천사들이었죠. 예수님에게도 똑같은 메시지, 너는 이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일어난다, 너는 대제사장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너를 박해할지라도 너는 네 길을 끝까지 가야 한다, 그래서 천군천사의 오르락내리락하는 메시지가 있었어요. 그런데 오늘 날 우리는 왜 천군천사가 안 나타납니까? 완성된 성경이 있기 때문에 천군천사가 안 나타납니다. 거의 안 나타나십니다. 이게 머리에 가만히 있으면 천군천사가 왔다 갔다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즉 하나님 말씀을 암송하고 있으면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 같아요. 오르락내리락은 무엇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고 명령을 받아오시고 우리의 기도를 올라가서 결제를 받아오시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갖다 주시는 분이 천사니까, 여러분이 만일에 오늘 순종하기를 원하면 천사의 오르락내리락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순종한 사람에게만 이 기적이 일어납니다. 순종 열망을 정조준하는 사람에게 실제로 천사의 왕래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천사처럼 왕래하려면 순종의 정조준이 지향점을 딱 갖춘 사람만이 하나님 말씀이 열립니다. 하늘이 누구에게 열립니까? 순종이 확고부동하게 정해진 사람에게, 즉 주님을 따름이 확고부동한 사람에게 하늘 문은 열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특권을 내지 않고 절대순종을 돕는 신적격려자를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일주일동안 하늘 문이 열려서 천군천사가 주는 신적 격려의 메시지가 성경말씀 안에서 66권 안에서 여러분에게 오르락내리락 하기 바랍니다. 여러분 기도가 오르락 여러분 하루 동안 살 말씀의 역사가 내리락 하여 천군천사의 힘을 덧입어 전진하는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누가 천사의 도움 받고 40주 40야를 달려갔나요? 근대 철인3종 경기의 창시자, 엘리야, 40일 40주야를 어떻게 했죠? 천사가 주는 메시지를 받고, 그다음에 처녀가 아이를 배었지만 그 엄청난 Depress를 어떻게 했죠? 가브리엘 천사, 처녀 아이 배었을 때도 오시고 할머니 아이 배었을 때도 오신 분이 가브리엘 천사입니다. 그다음에 간절한 영적전쟁을 할 때는 가브리엘 천사가 22일간 늦게 도착합니다. 페르시아 천사와 싸우다가, 그런데 내가 작정하고 기도하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또한 천사를 보내주셔서, 다니엘서 10장입니다. 내가 작정하고 기도하는 그 순간에 벌써 천사가 답지하여 기도응답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여러분 인생의 도상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절대적 순종의 도상에서 하나님 천사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전진하는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천군천사의 왕래를 유발시킬 만큼 절대순종을 바치는 젊은 종들이 일어나면 한국교회의 희망이 있습니다. 한국교회, 한국역사의 가장 위대한 자랑은 예수님 닮은 인재의 양산입니다. 예수님 닮은 성자급 인류가 한국교회의 희망이고 한국교회의 전 세계의 기여입니다. 한국의 희망은 뭡니까? 돈이 아니라 예수 닮은 인간입니다. 예수 닮은 제자공동체의 결성, 이것이 한국의 희망이고 이 민족 통일의 앞잡이고 세계 선교의 앞잡이가 될 줄로 믿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예수님 제자 삼아주셔서 우리를 우리 인생 도상에서 세워주시고 우리 열망이 고조되도록 잡아주셔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삼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우리 인생의 도상에서 신적격려를 만나게 해주시고 천군천사의 호위를 받으며 십자가를 묵묵히 지는 저희되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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