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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의 영웅 최형(崔瑩)장군의 북진주의와
정치군인 이성계(李成桂)의 사대주의(事大主義)
남 홍 진
명문가(名文家)의 名將
최형(崔瑩)장군은 고려의 명문가의 출신이었다. 그는 고려의 재상을 지낸 최유청(崔惟淸)의 5대손 이었고 그의 아버지 최원직(崔元直)은 사헌부(司憲府)의 간관(諫官)이었다.(현대의 검찰에 해당)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난 최형은 어려서부터 영악하고 얼굴에 위엄이 있고 기골이 장대했다. 최형이 16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떴는데 그는 임종할 때 최형을 불러 놓고 "너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유명한 유언을 남겼다. 아버지의 유언을 간직한 최형은 청렴한 인물로 한평생을 모범적인 생활을 했다.
최형은 청년 장교로 임관한 후 양광도(揚廣道=현재 경기도)의 도순문사(都巡問使)를 따라 왜구(倭寇)를 물리치는데 큰공을 세운 것이 계기가 되어 국왕의 근위대원으로 임명되었다. 서기 1352년 공민왕(恭愍王)때에는 조일신(趙日新)의 역모를 진압하면서 무관의 명성을 떨치고 공민왕 3년에는 39세의 젊은 나이로 대장군(從三品)에 올랐다.
그러나 최형이 고려의 대장군이 되었을 때 한반도를 중심으로 국제정세는 매우 복잡했다. 유라시어(Eurosia)를 석권한 몽고(蒙古)의 징기스칸(成吉思 )이 건설한 대원제국(大元帝國)이 쇠퇴일로에 들어서면서 만주 일대를 중심으로 불거져 나온 홍건적(紅巾賊)이 요원에 불길처럼 번졌다. 몽고의 원(元)나라가 군사를 동원해 토벌 작전을 펴는 한편 고려에도 원군을 요청해 왔다. 고려는 최형을 비롯한 40여명의 장군을 선발해서 2천여 명의 병사를 파병하는 한편 元나라에 있는 고려인 2만 여명으로 하여금 최형장군과 더불어 홍건적과 싸우도록 했다. 고려 군을 이끌고 나간 최형은 만주 각지에서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최형장군은 이때 元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홍건적과 싸움을 통해 많은 경험을 쌓았다. 우선 세계를 제패한 원나라 군의 작전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본 元나라 군사의 작전능력 보다 오히려 고려의 군사가 더 우수하다는데 자신을 얻었다. 그리고 다시 元나라의 내정이 형편없이 무능하고 부패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최형장군은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훗날 명(明)나라의 군사력까지도 가름하게 되었다.
상승(常勝)의 명장(名將)
고려는 元나라가 기울기까지 무려 90년 동안 종주국으로 섬기면서 자주성을 잃을 상태였다. 그런데 마침 元이 쇠퇴하면서 고려는 독립의 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이었다. 최형장군은 군사를 이끌고 북방으로 나가 과거에 잃어버린 동북방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탈환하는 한편 압록강을 건너 요양(遼陽)에 이르는 지름길을 석권했다. 고려의 야전군 사령관인 최형장군은 서북면의 병마사 역할까지 도맡게 되면서 고려로 진입하는 홍건적을 상대로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만주에서 元군에 밀린 10만 명의 홍건적이 남쪽으로 처내려와 개경(開京)을 함락시키고 성안의 남녀를 도륙하는 등 큰 비극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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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362년 최형은 이성계(李成桂) 등과 연합하여 개성을 탈환한 다음 이듬해 국왕을 환도시켰다. 그러나 국왕이 환도했을 때 김용(金鏞)일당이 행궁(行宮)을 습격하는 등 역모 사건이 발생했다. 국왕이 위기에 처했을 때 최형장군이 김용 일당을 진압하는 등 큰공을 세웠다. 이때부터 최형장군은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현재 국방장관) 올랐다.
한편 元나라에서는 고려의 공민왕이 반원(反元)정책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고려 왕족 중에 덕흥군(德興君)을 국왕에 즉위시킨 다는 명분으로 최유(崔濡)를 앞세워 1만 명의 군사를 고려로 진군시켰다. 그러나 최형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나가 최유가 이끄는 군사를 일격에 무찔렀다. 이처럼 국내외적으로 다사다난한 고려 말기에 막중한 국방 임무를 맡은 최형은 동분서주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그러나 백전백승 나라의 위기를 구하는 최형 장군에 대한 인기는 날로 상승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최형장군에게도 실수는 있었다.
서기 1365년 최형장군이 동서강도 지휘사(東西江都 指揮使)로 부임해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사냥을 나갔을 때 마침 왜구(倭寇)가 창능(昌陵)에 몰래 들어와 세조(世祖)의 초상을 훔쳐 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자 평소 최형을 시기하던 신돈(辛旽)이 우왕(禑王)에게 모함하여 최형을 계림윤(鷄林尹)으로 좌천시켰다. 그러나 최형을 이를 마다하지 않고 순응했다. 그러자 신돈은 다시 이 기회에 최형을 아주 없애 버리기고 마음먹고 최형이 조정의 상하(上下)간의 이간질을 시켰다는 혐의로 이득림(李得林)이란 사람을 보내 최형을 죄인으로 몰아 고문하도록 지시했다. 최형의 운명은 풍전 등화처럼 위태롭게 꼬였다. 최형의 생명이 경각에 달렸음을 확인한 합포만호 정사도(合浦萬戶 鄭思道)가 앞장서서 결사적으로 최형을 변호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10년이 지난 서기 1374년에는 제주도에서 말을 목축하는 목호(牧胡)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제주도는 원래 일본을 동정(東征)하기 위해 元나라에서 군민총관부(軍民摠管府)를 설치하고 "다루하치"를 감독관으로 주재시키고 소와 말을 방목하고 있었다. 따라서 제주도는 元나라의 영향이 크게 미치는 곳이었다. 그런데 말을 관리하는 친원파 목호들이 중국 대륙에 새로 등장한 명나라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자 고려에서 최형장군을 총수로 군함314척, 병사 2만5천6백명의 대군을 출정시켜 반란자들을 토벌케 했다.
왜구(倭寇)를 소탕하다
제주도에 상륙한 최형장군은 반란에 가담자들을 모두 처단했다. 그리고 고려 병사들로 하여금 소와 말을 함부로 잡아먹지 못하도록 했다. 만일 군령을 어기는 자는 용서 없이 사형에 처하는 등 군기를 바로 잡았다. 반란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제주 도민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초형장군이 개선했을 때 이미 공민왕은 암살되었고 우왕(禑王)이 즉위해 있었다. 우왕이 즉위하자 이번에는 왜구(倭寇)가 날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왜구가 얼마나 심했던지 고려 왕조는 파멸의 위기로 몰렸다. 서기 1376년에는 왜구가 충청도 연산(連山)까지 진출해서 계태사(開泰寺)를 점거하고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를 패사시키는 등 피해가 막심했다. 최형장군은 노구를 무릅쓰고 출정하여 공주(公州) 근처에 이르렀을 때 왜구가 쏜 화살이 최형장군의 입술에 상처를 입히는 등 전세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담력이 강한 최형장군은 의연하게 진두 지휘를 계속해서 왜구를 격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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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은 왜구(倭寇)를 무찌른 최형장군의 논공시상(論功施賞)으로 최형장군을 侍中(현재 수상)에 임명하려 했지만 최형은 수상이 되면 왜구가 일어나도 쉽게 출전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했다. 그리하여 다음해에는 왜구가 예성강(禮成江) 어귀까지 쳐들어와 50여 척의 전함을 불지르고 강화(江華)로 진격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를 방어하기 위한 궁내의 의견이 분분할 때 최형장군이 직접 출전해서 모두 격멸시켰다.
서기 1378년에는 왜구들이 다시 승천부(昇天府)에 침입하여 서울을 향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에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도성의 장정들을 총동원하였다. 그러자 왜구는 오직 최형장군이 이끄는 군사를 격파하겠다는 목적으로 다른 부대와는 싸우지 않고 최형만을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왜구는 오직 최형장군이 이끄는 직속부대를 향해만 공격을 집중하면서 한때 전세가 불리하였다. 최형이 밀린다는 소문을 전해들은 서울의 민심은 극도로 흉흉하였다. 주민들이 피난 가려고 짐을 꾸릴 때 이성계가 이끄는 군사가 최형과 연합하여 공세를 취하면서 밀리던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 사건이 있은 후에도 경상도, 강원도, 전라도에는 해마다 왜구가 끝이지 않았다. 백성들은 왜구의 등살로 농사를 짖지 못해 백성들이 굶어 죽는 사태가 발생했다. 백성들이 기아(飢餓)로 죽어가자 최형장군은 전함 130척을 만들어 각도의 승군(僧軍)을 동원해 왜구를 완전히 뿌리 뽑았다.
宰相 中의 宰相
최형은 장군으로서의 명망만이 아니라 제상(宰相)이 된 후에는 불의와 타협을 모르는 청렴한 재상이 되었다. 그는 이인임(李仁任), 마형수(馬坰秀)등 탐관오리를 유배하는 등 개혁을 단행했다. 한 번은 국정에 관여해 폐단을 일으킨 우왕(禑王)의 유모 장씨(張氏)를 체포하였다. 그러자 우왕이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최형은 장씨를 참형에 처함으로서 국가를 위한 공사에 엄격했다. 최형은 마침내 고려에 태양처럼 위대한 인물이었다. 우왕(禑王)은 최형의 빛나는 공적을 기리기 위해 포상을 철권(鐵券)으로 내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장수들 중에 역전의 공로가 많기로는 오직 卿 한사람뿐이다. 그대는 재상으로 충의를 다하고, 위로는 왕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을 보살핌이 더할 나위 없으니 재상 중에도 재상이로다. 田土와 노비를 포상으로 주는 것이 마땅하지만 卿의 청렴으로 보아 반드시 사양하리라고 생각되어 다만 鐵券을 내려 玉으로 軸을 삼아 특례의 표창하는 바이다."
최형은 수상이 된 후 왕권을 바로 잡기 위해 우왕의 방탕을 간곡하게 말렸다. 정성을 다해 눈물로 만류했다. 하지만 우왕의 방탕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최형은 백성들의 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상인들에게 인세를 매기는 등 경제 정책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명(明)나라와 마찰
서기 1387년에는 고려의 장방평(張方平)이란 사신이 요동에 이르렀을 때 明나라로부터 요동 통과를 거부당해 그대로 돌아오는 사태가 벌어졌다. 국교 단절의 비상사태를 맞은 고려는 큰 충격을 받았다. 고려의 대명정책은 마침내 험악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사태가 꼬인 이유는 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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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은 明나라의 황제가 즉위한 후 곧 반원친명(反元親明) 정책으로 전환했다. 그것은 대세를 통찰한 선견지명임과 동시에 고려왕조로서는 元나라와 함부로 끊을 수 없는 유대관계상 모험정책이었다. 그러나 공민왕이 친명정책을 쓴 것은 사실상 태조 王建 이래 고려가 추진하는 북진주의를 위한 포석이었다. 왜냐하면, 高句麗의 옛 강토를 환수하여 자주독립국가를 이룩하는 것이 고려의 일관된 숙원이었음으로 사실상 친명정책 속에는 북진정책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마침 元이 쇠퇴하는 기미를 지켜본 고려의 공민왕으로서는 옛 고구려의 강토였던 요동반도를 되찾는 방법은 아직 요동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명나라와 손을 잡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명나라의 요동진출은 예외로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고려는 기선을 제압하려고 서기 1370년 이성계(李成桂)등 장군에게 1만5천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환인(桓仁)의 우라산성(于羅山城)을 공략하고 많은 주민을 압록강 이남으로 이주시키고, 요동의 요충지인 요양(遼陽)을 함락하도록 했다. 그러나 요양성(遼陽城)을 함락한 고려군의 실수로 창고를 불태우는 바람에 식량이 떨어져 엄동을 넘기지 못하고 곧 철수하고 말았다. 이때의 출격은 요동 정세의 변화에 따른 박차를 가하려는 고려의 기본정책 이었다.
그러나 이때 고려의 정세가 변했다. 국내에서 친원파의 세력이 부활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의 외교정책이 흔들리면서 명나라 또한 고려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를 버리고 군사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했다. 명나라 황제는 누차에 걸쳐 고려의 표리부동한 처사를 힐책하고 사절을 비롯하여 내왕하는 고려인을 정탐 자로 몰아 체포하는 사태가 계속 일어났다. 서기 1372년 공민왕 21년에는 장문의 선유(宣諭)를 내려 나하추군(納哈出軍)의 우가장(牛家莊) 습격 사건에 고려 군이 가담하였다는 억지를 들어 고려의 사절이 요동 경유를 거절하고 정벌 군으로 하여금 고려를 위협하는 외교적 사건으로 번졌다.
우가장 사건이란 명나라가 요동을 석권할 때 겪은 최대의 피해를 본 사건이었다. 원나라 군사의 기습을 받은 명나라 군은 10만여 섬의 군량과 5천여 명의 군사를 잃는 참패를 당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 고려가 元나라와 합세했다는 억지 때를 쓰는 것이었다. 고려와 명나라간에 긴장이 쌓이는 판에 서기 1377년에는 고려가 다시 元나라의 연호를 사용함과 동시에 元나라와 국교를 재개하자 원나라는 고려에 明나라를 치기 위한 요양의 협공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明나라의 황제 역시 고려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과중한 세공액(歲貢額)을 바치라고 통고하는 한편 만일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수십만 병사를 이끌고 쳐들어오겠다고 위협했다. 두 나라의 협공을 받은 고려는 서기 1384년까지 7년여에 걸쳐 경제적으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밀린 5년분의 세공조로 金 5백근, 銀 5만량, 베 5만필, 말 5천필을 明나라에 바치고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明나라 황제의 위협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압록강 이남 이북의 주민은 모두 고려인들이었다.
明나라 황제는 노골적으로 공갈 협박 외교로 고려의 사기를 꺾음으로서 고려의 북진 정책을 완전히 견제하려 했다. 당시 요동반도의 넓은 땅에는 비록 주민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본래 고구려의 땅이었을 뿐만 아니라 압록강은 결코 明나라와 고려간에 국경이라고 정한 바도 없었지만 그렇게 생각 해본 적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압록강 이남의 주민과 강 이북 만주 주민의 성분도 비슷했기 때문에 전혀 국경의 개념이 서있지 않았다. 서로 자유스럽게 물건을 교역하고 통혼하고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사실상 고려의 백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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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고려와 명나라는 경쟁적으로 주민을 자기편에 확보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힘썼던 것이며 도강을 원하는 주민에게는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했던 것이다. 당시 고려의 북방정책 중에 주민을 확보하는 공작의 기지가 바로 강계(江界 현재 滿浦鎭)였고 明나라와 접촉을 시도하는 관문이기도 했다.
압록강 건너 환인(桓仁)일대의 평야와 요양(遼陽)일대의 땅은 고려인들이 살고 있었고 고려 사람들은 그 땅을 당연히 고려의 땅으로 간주했다. 특히 그 땅은 고구려의 발상지로 지난날 蒙古를 상대로 운명을 걸고 싸운 땅이었고, 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고려의 피난민들이 몰려가 정착한곳이기 때문에 일찍이 元나라도 그곳을 고려의 땅으로 간주하고 고려군민총판부(高麗軍民摠判府)를 두었다가 나중에는 그 기구를 심왕부(瀋王府)로 승격하여 고려의 왕족으로 하여금 심왕(瀋王)에 임명하는 등 고려의 자치적인 민정(民政)을 하도록 실권을 부여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요심(遼瀋) 일대에는 고려인들이 살고 있었음으로 고려는 당연히 이 지역을 영토확장, 즉 고토회복(故土回復)의 대상 지였던 것이며, 그 정책을 쌍성총판부(雙成摠判府)가 맡도록 하고 영흥(永興 현재 함경도)이북이 아직 明나라의 지배력이 완전히 미치지 못했음으로 고려가 먼저 점령하여 기정사실화한 다음 만일 명나라가 문제를 제기해오면 정치적으로 해결책을 적절히 모색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초기의 明나라는 당면 과제가 元나라와의 싸움에서이기는 것이 목적이었음으로 아직 요동(遼東) 반도에 대한 점령이나 지배는 미처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다만 元나라의 북만주정책을 주도하는 나하춘 장군으로 하여금 고려와의 유대를 맺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건데 元의 나하춘이 서기 1387년 6월 明나라 군사에 항복함으로서 명나라는 元나라의 20만 명의 포로와 많은 노획물을 차지하는 전과를 올림과 동시에 동북방면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로대장군 남옥(征虜大將軍 藍玉)이 이끄는 15만 대군이 서쪽으로 진출하여 蒙古 경락에 열중하면서 요동(遼東)일대는 明나라 군사는 하나도 없이 텅빈 상태가 되었다. 明나라가 元나라를 치기에 요동반도에 정신 쏟을 여력이 없음을 확인한 고려는 마침내 요동진출의 야심을 품게 되었고, 明나라는 고려의 낌새를 눈치채고 장방평(張方平) 등에 대한 요동 출입을 폐쇄하기에 이른 것이다.
明나라와 전운(戰雲)이 감돌다
우왕과 최형의 북진정책
요동(遼東)정책을 둘러싸고 고려 정부 내에 적극적인 북진 파와 소극적인 파로 갈렸다. 그러나 禑王의 뜻이 북진 정책을 찬동했고, 북진정책에 정통한 최형(崔瑩) 역시 강경한 북진 파였다. 禑王과 최형은 국가의 정책을 일관성 있게 통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우선 국제정세와 관계없이 축제(蓄財)에만 눈이 어두운 권신들 중에 이인임(李仁任), 임견미(林堅味), 염흥방(廉興邦) 등을 처단 또는 유배하고 흔들리는 민심을 바로잡는 한편 북진정책에 정치생명을 걸고 추진했다.
禑王은 최형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회형의 딸을 영비(寧妃)로 삼았다. 최형은 고려 왕실과 혈연을 맺음으로서 고려의 북진정책을 공고히 다졌다. 그런데 이때 마침 서북면 도안무사(西北面 都安撫使) 최원지(崔元祉)로부터 조야를 깜짝 놀라게 하는 정보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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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내용인즉 明나라의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압록강에 이르는 전역에 明나라 황제의 이름으로 방문(榜文)을 내붙였는데 그 내용인 즉 철령(鐵領=현재 강원도 함경도 경계상에 있는 安邊의 鐵關을 의미함)이북과 이동(以東) 이서(以西)는 본래 元나라의 개원(開原)에 속하는 땅이었음으로 그 땅에 사는 고려인 한인(漢人) 여진인 몽고 인은 모두 요동에 속한 다는 것이었다. 결국 明나라 황제의 주장은 철령의 서쪽 평안도까지 모두 明나라의 땅이라는 주장이었다.
이상 안하무인의 정보에 접한 고려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최형이 조정 중신회의를 주제한 자리에서 '정요위(定遼衛)를 공격하여 明에 일격을 가할 것인가? 아니면 明나라 황제의 요구에 굴욕적으로 응할 것인가? 를 놓고 진지하게 의논했다. 회의 결과 일단 明나라를 상대로 외교적 교섭을 해본 연후에 최종 결론을 내리자는 데 합의했다. 결국 고려는 억울함을 참고 일단 조임(趙淋)을 대표 사절로 명나라에 보냈다. 그러나 고려의 사절로 파견된 조임은 요동에 들어가지 조차 못하고 문전 박대를 당하고 되돌아오자 고려의 대명(對明)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고려의 요동(遼東) 원정군(遠征軍)이 출정(出征)하다
우왕과 최형은 요동정벌을 은밀히 추진하는 한편 明으로 하여금 철령 이북에 대한 요구를 철회하라는 교섭을 펼치기 위해 주청사(奏請使)로 밀직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을 明나라의 서울로 보냈다. 그런데 박의중이 明나라로 떠난 후 최원지로부터 또 다시 두 번째 보고가 들어왔는데 그 내용은 더욱 가관이었다. 이를 태면 요동사(遼東司)에서 1천명의 병력과 지휘관 두 사람을 강계(江界)로 파견하여 철령위(鐵領衛)를 세우고 明나라의 관원을 임명하였는데 그들이 모두 요동에 이미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저들의 계획인즉 요동에서 철령에 이르기까지 모두 70개의 역참(驛站)을 설치할 계획이고 각 역참마다 일백호(一百戶)의 주민을 이주시킨 다는 것이다.
두 번째 보고는 고려의 조정을 결정적으로 격화시켰다. 보고에 접한 禑王은 분을 참지 못해 울면서 "군신이 나의 공요(攻遼) 계책을 듣지 않아 오늘날 이런 사태에 이르렀다." 하고 탄식한 후 전국의 병사를 소집하도록 특명을 내렸다.
禑王과 최형은 황해도에 전진기지를 만들어 그곳에 직접 나가 이성계(李成桂)를 불러 요동정벌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요동정벌군의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런데 사태를 격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최원지의 보고 내용이 사실은 과장되거나 날조되었던 것이다. 왜냐 하면, 당시 明나라 기록에 의하면 이때 明군은 강계(江界)저편에 있는 황성(黃城)에서 주민들을 잠시 보살폈을 뿐 병사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거나 침략할 의사는 없었던 것이다.
한편 明나라 황제는 서기 1387년 12월에 설장수( 長壽)를 통해 고려에 보낸 자문(咨問)에도 철령 이북의 회수건과 明나라에 대한 모욕과 정탐을 힐책하는 내용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금후 明나라에 使臣을 보내지 말라는 등 강경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고려의 북진정책을 제압하기 위해 선수를 쓴 것이었다. 저들은 고려가 호시탐탐 노리는 요심(遼瀋)은 물론 고려 자체를 자신들의 영토라는 등 협박 외교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좌절된 북진정책
한편 禑王으로부터 요동을 공격하라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이성계(李成桂)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이유를 들어 북진 불가를 이렇게 역설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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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小逆大一不可 夏月發兵二不可 擧國遠征 倭乘其虛三不可 時方署雨 弓弩膠解 大軍疾疫四不可(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거역이 불가하고, 둘째 여름철에 출병이 불가하고, 셋째 거국적인 원정을 하면 왜구가 허점을 노리기 때문에 불가하고, 넷째 장마철이라 아교가 녹아 활을 제대로 쓸 수 없고 또 질병이 번질 우려 때문에 불가하다는 것이었다.(譯者 意譯)
이성계가 이상의 이유를 들어 출정의 불가를 제청했지만 사실 이 '네 가지 불가론'은 훗날 쿠데타로 잡은 왕권을 합리화 하기 위한 조작이었다. 당시 이성계가 주장한 네 가지 이유 중에 "여름철 출병은 질병이 우려된다." 는 조항뿐이었다. 이성계의 말인즉 농번기를 피해 추수를 끝낸 후에 출동해야 군량에 걱정을 덜 수 있지 만일 여름철에 출동하면 비록 요양성을 점령한다 해도 곧 장마철에 접어들기 때문에 진퇴양난에 빠지게 될 뿐만 아니라 군량미 부족으로 곤경에 처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성계의 주장은 상당히 이유 있는 이론이었다. 지난날 공민왕 때 요양성을 처서 함락시켰지만 군량이 떨어져 많은 회생을 치르고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던 뼈저린 체험을 이성계로서는 당연히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형은 이성계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했다. 최형 역시 여름철 출병을 걱정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계의 저의를 의심하면서도 출정을 서두른 것은 다음과 같은 피치 못할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우선 요동에 나가 있던 明나라의 병력이 모두 蒙古 방면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에 요동 방위가 소홀할 때 진격해야 요동을 쉽게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던 것이다. 가능한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고, 요양 지방에는 고려인과 여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여진 땅에서 자란 이성계의 성망(聲望)이 크게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최형의 결단으로 요동 원정을 위한 출병은 사실로 이루어 졌다.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로 하여금 약 5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요동을 향해 출병토록 명했다. 서기 1388년 5월 이성계는 압록강 중간의 위화도(威化島)에 5만 대군을 주둔시키고 도강을 대기 중이었다. 그러나 좌우군도통사(左右軍都統使) 이성계는 재차 회군을 상신 했다. 지금은 장마철이라 강물이 불어 도강할 수 없기 때문에 위화도에 머무르고 있는데 앞으로 우기가 오면 큰 내가 더 불어나기 때문에 진군이 곤란하고, 또 서우(署雨)에는 병사들의 활(弓)이 녹아 기능이 떨어져 싸움에 지장이 많고, 군량보급에 지장이 많다는 것이 회군의 이유였다.(당시 조선의 무기는 오직 활이었다. 칼과 창은 실전에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그 기술도 뒤졌지만 활만은 중국 보다 능숙했다. 그러나 조선의 활은 우중에는 성능이 뒤졌다. 우중에는 불에 쬐어야만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조선군의 입장에서 유일한 무기는 활이었는데 그 활의 성능이 떨어졌다는 야전군의 건의는 무시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비가 많이 내려 도로가 막히고 군량이 제때에 보급되지 않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외에도 군의 사기가 떨어져 도망병이 속출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남은(南誾), 조인옥(趙仁沃) 등 이성계 휘하의 장군들 역시 회군할 것을 주장하는 한편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할 것을 은밀히 모의했다. 결국 남은 조인옥의 건의를 받은 이성계 역시 회군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요동정벌군(遼東征伐軍)이 정치군(政治軍)이 되다
당시 회군의 이유는 이상 4가지(四不可) 였다. 출동시기로 보아 승산이 확실치 않은 점도 있었지만 회군의 진짜 동기는 군량부족이 더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중국의 明實錄에 의하면 서기 1388년 8월초에 고려의 천호 진경래(千戶 陳景來)라는 자가 명군에 투항하여 제공한 정보에 의하면 이성계가 회군한 이유는 오직 "양식이 모자라서 돌아간다"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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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회군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남쪽을 향한 반란군은 개성 부근에 이르러 禑王에게 수상(首相) 최형의 파직을 상소했다. 그러나 禑王은 이를 거부하고 전 밀직부사 진평중(密直副使 陳平仲)을 통해 제장(諸將)들에게 이렇게 유시(諭示)했다. (우왕의 유시는 구테타로 궁지에 몰린 국왕이 병력을 거느린 쿠데타 장군들에게 보낸 마지막 통고로 그 내용이 진실했다.) 禑王은 유시를 통해 일단 왕명을 거역하고 회군한 장군들의 행위를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견책했다.
況復疆域 受於祖宗 豈可易以與人 不如興兵拒之 故我謀之於衆 衆皆曰可 今胡敢違
"우리의 옛 강토를 회복하는 것은 조종(祖宗)의 유지(遺志)이다. 어찌 내 나라의 땅을 남에게 쉽사리 내어 줄 수 있단 말인가. 군사를 일으켜 우리의 옛 땅을 지키려고 제장들과 더불어 중지를 모았을 때 제장들은 모두 출정이 옳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 와서 그대들은 전의 약속을 어기는가?."(譯者 意譯)
이상 우왕이 장군들에게 보낸 유시(諭示)의 내용 중에 회군의 이유에 대한 언급이 한마디도 없는 점으로 보아 이성계의 4가지(四不可) 이유가 훗날 조작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이성계의 회군으로 정부군과 혁명군(반란군)간에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최형은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작은 수의 군사를 이끌고 이성계의 막강한 군사를 상대로 분전했다. 정부군은 시정인(市井人)들을 끌어 모아 갑자기 편성되었지만 최형의 분투 아래 유만수(柳曼殊)군을 격퇴시켰다. 그러나 이성계가 이끄는 막강한 부대가 정부군의 저항을 무찌르고 선죽교를 건너 자남산(子男山)위에 진을 친 최형의 마지막 방어선까지 무너트렸다. 혁명군은 패주하는 정부군을 물밀 듯이 내몰고 만월대(滿月臺)위의 궁궐 안으로 진격했다. 최형은 마침내 禑王과 눈물로 최후의 작별을 고하고 혁명군에 체포되었고 최형의 심복 장군들은 속속 처형당했다. 최형은 혁명군에 의해 일단 고봉현(高峰縣)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합포(合浦)로 옮겨졌다. 그러다가 서기 1389년에 "그 동안 나라에 이바지한 공로가 비록 크나 사대(事大)의 예에 어두워 단독으로 공요(功遼)의 군사를 일으켜 천자(天子)에 득죄(得罪)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마터면 나라를 망칠 번하였으니 전공(前功)이 대명(大明)에 대한 반역죄를 덮을 수는 없다." 하는 이유를 들어 참형에 처했는데 그때 최형의 나이 73세였다. 최형은 참형 대에 올라서도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승자(勝者)는 궤변(詭辯)으로 패자(敗者)는 침묵으로
최형이 처형되던 날 개성은 물론 전국의 저자시가 모두 문을 닫아걸고 항의와 조의(弔意)의 뜻을 표했고, 거리의 어린이를 비롯한 촌부들까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권력의 기복에 따라 승자는 패자에게 갖은 누명을 씌우듯이 최형의 경우도 그러했다. 당시 최형의 공요(攻遼)정책이 나라와 백성들에게 큰 재난을 불러올 위험한 작전이었다면 당시 백성들은 최형의 처형을 당연하게 아니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백성들은 가동항부(街童巷婦)에 이르기까지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은 최형의 북진정책을 지지했다는 증거이다. 결국 최형의 요동공략이 불가능하다는 이론은 이성계가 훗날 회군을 합리화하기 위한 혁명군의 공작물이었다. 다시 말하면 철령위(鐵領衛)의 문제를 계기로 明나라 황제의 협박이 고려의 북진 파에게 역이용 당했다면 이성계는 다시 그 이유를 혁명의 계기로 이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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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의 고독한 생애(生涯)
당시 고려가 추진한 요동정벌의 목적은 明나라와 전쟁을 전제로 하는 모험이 아니었다. 다만 요양(遼陽)을 일단 점령한 다음 환인(桓仁)일대를(남만주 일대) 완전히 장악하여 엣 신라와 당나라와의 고사(故事)에 따라 明나라를 상대로 적당히 정치적으로 흥정할 것을 기도했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북방 정세에 정통한 최형이 무모한 전쟁 유발을 시도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 증거가 바로 고려말에 기록된 사실(史實)을 조선왕조의 사관들이 아전인수격으로 편집한 대서 잘 드러났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한 반역을 어떻게 던지 정당성과 합리성을 강조해야만 자신의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조선왕조가 시작된 후 고려사를 무려 40여 년간에 걸쳐 수없이 뜯어 고쳤다는 사실이 바로 떳떳하지 못한 회군을 뒷날 변명했다는 의미로 간주된다. 특히 처음에는 요동정벌에 반대하고 회군을 제일먼저 주장한 남은(南誾)이 훗날 조선조의 실력자가 되었을 때 明나라의 기반이 다져 졌음에도 이성계 밑에서 실력자 정도전(鄭道傳)과 태조 6년 서기 1397년에 최형보다도 더 강력하게 요동정벌을 결심하고 정력을 쏟은 사실은 이성계의 회군 변이 조작이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태조 6년 6월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로 조선의 병권을 장악한 정도전은 소위 '오진도'(五陳圖)라는 병서(兵書)를 작성했는데 태조(이성계)는 이를 쾌히 받아들인 후 훈도관(訓導官)을 두고 전국의 절제사(節制使)와 서반(西班)과 각 품관(品官)에게 교습시켰다. 정도전 등은 흥병출경(興兵出境)을 건의하고 태조를 움직여 거국적으로 출사(出師)준비에 착수했다. 그해 8월에는 진도훈도관(陳圖訓導官)이 각 道와 각 鎭에 파견되었으며 전국각지에서 대규모의 군사훈련을 실시하기까지 했다.
태조 7년 8월에는 제진(諸鎭)의 절제사로 진도(陳圖)를 연습하지 못한 자를 장벌(杖罰)하는 한편 정도전과 남은은 매일 같이 태조를 만나 요동공략을 권했다.
서기 1393년(태조11년) 5월 明나라 사신이 가지고온 명나라 황제의 수조(手詔) 역시 고려말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협박조의 내용이었다. 이를테면 조선의 사절은 두 절강민(浙江民)으로부터 소식을 정탐하며, 요동에는 사명을 빙자하여 사람을 보내 변장(邊將)을 유인하고 여진사람 5백명을 설유하여 도강시켰음을 질책하는 한편 장명동토(將命東討)로하여금 조선에 대해 보복할 것이라는 노골적인 협박을 해왔다. 사태가 이러할 때 서기 1398년 5월에는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변중량(卞仲良)이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우리는 사대(事大)의 예를 다하는데 明나라에서는 간첩 운운으로 협박하고 있으니 우리는 부당한 明나라 요구에 순종할 것이 아니라 보다 강경한 태도로 맞서야 한다"
이상 일련의 역사적인 사실을 감안할 때 당시 긴장된 대명(對明)관계라던가 요동공략론은 오히려 최형의 북진론을 방불케 했던 것이다. 만약 이성계의 회군론이 요동정벌 반대의 명분이었다면 이러한 사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정도전 등이 계획한 요동정벌에 의하면 최형의 요동정벌이 성공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최형의 인물됨
최형은 강직하고 청렴하기 비길 때 없는 인물로 평생 누추한 집에서 생활하였으며 살림살이가 더없이 검소했다고 한다. 그는 국가의 록으로 사는 관리가 잘사는 것을 보면 마치 짐승과 같이 취급했으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다고 한다. 싸움터에서는 무적의 용장으로 명성을 떨친 장군으로 시석(矢石)이 좌우에 날라들어도 조금도 두려움 없이 태연자약할 만큼 대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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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부하에게는 준엄한 무장이었지만 진중에서도 시(詩)를 짓는 등 풍류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한다. 도당(都堂=최고의 관청이었던 議政府의 별칭)에 나가서는 바른말을 서슴지 않았으며 찬성하는 사람이 없으면 홀로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그는 철석같은 심신으로 나라를 걱정했지만 때로는 외로움에 젖어 고뇌에 빠지는 인간적인 단면도 있었다. "나는 나라 일을 밤새 생각하고 아침에 동료들에게 이야기하면 한 사람도 나와 뜻을 같이 해 주는 사람이 없다." 하고 한탄했다고 할만큼 고독했다.
이처럼 우국충정의 인물이 전 생애를 걸고 추진한 요동공략의 북진정책은 그 웅지를 펴지 못한 체 야심에 사로잡힌 정치군인 들의 반란으로 끝내 좌절되고 만 것이 민족적으로 천추의한 이다. 최형이야말로 나라를 위해 일생을 바친 '겨레의 스승'이었다. 그의 참형을 슬퍼한 백성들의 노여움이 결국 무속(巫俗)속에 묻혀 길이 전해오고 있다.
지금도 경기도 파주 일대와 황해도 일대에서 무당들이 섬기는 무신(巫神) 중에는 최형이 가장 인기있는 영웅신(英雄神)이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2년에 한 번씩 3월이 되면 많은 무당(巫堂)들이 임진강가에 있는 덕물산(德物山)에 모여 도당(都堂)굿을 하고 돼지고기로 국을 끓여 먹었다. 그 돼지 고깃국을 성계국 즉 이성계국이라고 했다. 최형의 죽음이 고려의 민심을 얼마나 슬프게 했느냐는 것은 무속을 통해 존숭(尊崇)되는 민속에서 가름할 수 있다.
한 시대의 명장은 이렇게 갔지만 그의 "황금보기를 돌같이 한" 기상은 우리 겨레에 길이 남아 있는 한 우리의 미래는 세계를 향해 영원히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