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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人間革命 28卷
第4章 勝利島 (34~39)
<승리섬 34>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어느 섬이나 사람들에게 배척당하는 등 혹독한 박해의 역사가 있었다. 그런 현실에서 학회원은 어본존을 근본으로 어서와 세이쿄신문, 대백련화와 함께 동지의 격려를 버팀목으로 삼아 시련을 꿋꿋이 이겨내고 행복의 꽃을 피웠다.
야마모토 신이치는 섬의 광포개척에 부지런히 힘쓰는 사람들을 격려하는 데 특별히 더 힘을 쏟았다.
1958년 4월, 제2대 회장 도다 조세이(戶田城聖)가 세상을 떠나고 6월 말에 총무로서 실질적으로 학회를 이끌게 된 신이치는 7월에 사도섬을 방문한다.
은사가 서거한 뒤, 슬픔에 잠긴 섬의 동지들을 격려하고 싶었다. 발적현본(發迹顯本)하신 니치렌대성인(日蓮大聖人)이 어본불로서 새로운 투쟁을 일으킨 사도에서 싸우는 용자와 함께 희망찬 새로운 전진을 시작하자고 결심했다.
1960년 5월 3일, 신이치는 제3대 회장에 취임하자 7월에는 오키나와지부를 결성하고 류큐 제도의 동지들을 격려하고자 오키나와를 방문했다. 또 세계 평화여행의 첫발을 내딛고 해외 첫 지구를 결성한 곳은 하와이 오아후섬의 호눌룰루였다. 동양 광포를 향한 기점으로 삼은 곳도 홍콩이다.
일본에서는 도쿠노섬, 아마미오섬도 방문했다. 이때 아마미총지부를 결성했다.
각 방면을 방문할 때마다 낙도에서 온 벗이 있다고 들으면 직접 만나 간담하고, 서적에 시 등을 휘호해 선사하는 등 혼신의 노력을 다해 격려하려고 애썼다. 왜냐하면 낙도에서 광선유포의 길을 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늘 가장 고투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고, 마음을 쓰고 빛을 비춰 최대로 격려한다. 이것이 창가(創價) 리더가 갖춰야 할 자세고 여기에 바로 불법의 인간주의 실천이 있다.
1964년 9월 하순, 20호 태풍이 일본 열도를 덮쳐 각지에서 맹위를 떨쳤다. 특히 가고시마현의 다네가섬과 야쿠섬에 큰 피해를 입혔다.
다네가섬에서는 도처에 집이 무너졌다. 또 야쿠섬에서는 최대 순간풍속이 68.5미터를 기록했다.
<승리섬 35>
신이치는 홍콩에서 다네가섬과 야쿠섬 등을 휩쓴 20호 태풍 피해 상황과 학회원들이 섬에서 분투하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다. 가고시마현 간부와 연락해 바로 재해지역으로 격려하러 가도록 부탁하고 전언도 부탁했다.
집이 붕괴되어 망연자실한 동지는 바로 달려와 준 간부를 보고 감동했다. 그리고 “반드시 ‘변독위약(變毒爲藥)’할 수 있는 불법(佛法)입니다”라는 신이치의 전언을 듣자 용기가 솟구쳤다.
멤버들은 힘차게 일어서 지역 부흥에 앞장섰다. 또 자신과 지역의 숙명전환을 바라며 과감하게 불법대화를 시작했다. 홍교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10월 하순, 도쿄에 온 가고시마현 간부에게서 그 보고를 받은 신이치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로 고생이 많았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를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제 다 끝장’이라며 절망할 것이냐. ‘이런 일로 질소냐! 반드시 이겨낼 테다!’ 하고 결의하고 일어설 것이냐.
실은 신심을 하는 진정한 의미는 어떠한 괴로움이나 역경에도 지지 않는 강한 자신을 만드는 데 있습니다. 재해를 입은 여러분은 시련에 지지 말고 엄연히 일어서 주위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을 보내기 바랍니다.”
그리고 신이치는 염주보를 맡기며 다네가섬과 야쿠섬 동지에게 격려품으로 전해달라 부탁했다.
가고시마현 간부는 염주보를 들고 섬을 방문했다. 한 사람 한사람에게 야마모토 회장의 마음을 전하고 염주보를 전달했다. 섬 간부에게 맡길 수 있었지만, 그러면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리는 것만 같았다.
섬 멤버들을 한층 더 감격했다.
섬의 동지가 받은 것은 자신들을 생각하는 ‘신이치의 진심’이었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면 용기가 생기고 결의가 생기고 사자(師子)가 태어난다.
<어구해설>
변독위약: ‘독을 바꾸어 약으로 한다’는 뜻이다. 괴로운 생명(독)이 그대로 행복한 생명(약)이 되는 묘법의 큰 공력(功力)을 나타내는 말
<승리섬 36>
1965년 1월 11일에는 이즈오섬이 큰불에 휩싸였다.
밤늦게 모토마치의 번화가에서 발생한 불이 강풍을 타고 금세 번졌다.
이즈오섬지청, 읍사무소, 도서관, 우체국, 전화국을 비롯해 상점과 주택 등 580여채가 모두 불타 소실 면적이 약 3만 7500제곱미터에 달하는 큰 화재였다.
사상자가 없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재해를 입은 사람 중 30세대 가까이가 학회원이었다.
신이치는 이때도 바로 간부를 파견했다. 간부들은 이즈오섬에 도착하자 그날 저녁 좌담회를 열었다. 장소는 번지는 불길을 모면한 학회원 집이었다.
섬은 정전으로 전등도 꺼지고 전화도 되지 않았다. 촛불을 켜고 흐릿한 불빛 아래 회합을 해야 했다. 촛불이 참석자의 걱정 어린 얼굴을 비췄다. 천정에는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을 비추듯 검은 그림자가 흔들렸다.
간부는 낙담하고 의기소침한 동지의 모습에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생명력을 쥐어짜듯 말하기 시작했다.
“야마모토 선생님은 ‘목숨을 건져 다행’이라며 여러분에게 전언을 주셨습니다.”
간부는 수첩을 꺼내 읽었다.
“여러분의 괴로운 심정은 가슴이 저릴 만큼 잘 압니다. 필사적으로 제목을 보내고 있습니다.
대성인은 ‘나는 일본국의 기둥이 되겠노라. 나는 일본국의 안목(眼目)이 되겠노라. 아는 일본의 대선(大船)이 되겠노라. 이렇게 맹서한 원(願)은 깨뜨리지 않겠노라’(어서 232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이즈오섬의 기둥이 되고 안목이 되어 대선이 될 소중한 분들입니다.
그런 여러분이 절대 좌절하지 않고 굳세게 밝게 발랄하게 도전한다면 이즈오섬은 활기를 되찾을 것입니다. 부디 섬사람들을 돕고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지역 부흥을 이끌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묘법(妙法)을 수지한 사자(師子)가 아닙니까!“
전언은 신이치의 혼이 담긴 외침이었다. 필사의 일념에서 나오는 말에 혼은 공명한다.
<승리섬 37>
파견 간부가 신이치의 전언을 말하자 이즈오섬 동지들은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하더니 얼굴이 점점 홍조를 띠었다.
“선생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즈오섬에 회관을 건설하고 싶습니다. 섬 동지 여러분이 희망에 불타 힘차게 노력한다면 섬은 반드시 부흥해 더욱 번영할 것입니다. 그 원동력이 되길 바라며 회관 건설을 추진하고자 합니다.’”
이야기가 다 끝나기도 전에 큰 박수가 일었다. 참석자는 서로 어깨를 감싸 안으며 기뻐했다.
좌담회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모두 입을 모아 결의를 말했다.
“이번 재난을 이즈오섬의 큰 발전을 위한 발판으로 삼읍시다! 지금이 바로 불법을 수지한 사람이 얼마나 강하지 보여줄 때입니다!”
“그래요. 섬사람들은 모두 희망을 잃었어요. 격려해 힘을 줍시다! 그리고 신심을 하면 어떠한 어려움도 반드시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끝까지 외칩시다.”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번 대형화재를 변독위약하는 길은 절복밖에 없어요. 온 섬에 홍교의 일대 선풍을 일으킵시다!”
참석자들의 가슴속에 투혼이 불타올랐다!
밖은 쏟아지는 달빛 아래 불탄 잿더미가 사방을 새까맣게 뒤덮고 불어오는 바람도 매캐한 남새가 났다.
그러나 동지는 청신한 건설의 기운을 가슴에 안고 이날 밤부터 불법대화를 하러 신나게 뛰어다녔다.
집을 잃은 학회원은 ‘앞으로 어떠해 해야 할지’ 매우 불안했다.
그러나 ‘벗의 재기를 위해 불법을 말하자’며 홍교에 힘쓰자 어느새 고뇌의 미궁에서 벗어났다. ‘반드시 이겨내겠다!’는 굳은 다짐과 ‘반드시 이겨낼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이 가슴 속에서 솟아올랐다.
경애혁명의 직도(直道)는 바로 홍교에 있다.
이즈오섬 동지는 협의 끝에 회관을 완성할 때까지 회원 1000세대를 목표로 도전하자고 굳게 다짐했다. 누구나 의기 왕성했다.
모토마치에 지은 이재민을 위한 조립식 주택에서는 동지의 창제에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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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오섬 동지는 눈부신 기세로 홍교를 추진했다.
큰불이 난 지 여덟 달 뒤인 1965년 9월에는 고대하던 이즈오섬회관 기공식을 열었다.
큰불이 나기 전, 섬의 학회 세대는 500세대 정도였다. 그런데 이해 12월에는 800 수십세대가 되고 이듬해인 1966년 1월에는 드디어 염원하던 1000세대를 달성했다.
다 같이 힘차게 일어설 때 새로운 전진이 시작된다.
다 같이 마음을 하나로 할 때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1월 21일, 회관 준공식을 정식으로 거행했다. 회관을 이즈오섬공항에서 가까운 조금 높은 언덕 위에 세워졌는데 이날 대강당은 환한 웃음꽃으로 가득했다.
회관 건설에 맞춰 자기 집을 신축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마을 재건을 위해 바쁘게 뛰어다니며 지역에 크게 공헌한 사람도 있었다.
가장 큰 기쁨은 회관 준공과 함께 새로운 회원이 많이 탄생해 섬 곳곳에 희망을 밝히는 묘법의 등불이 켜졌다는 사실이었다.
이 법성(法城)은 대형 화재라는 슬픔 속에서 눈물을 훔치고 일어선 동지에게 인생과 광포의 승리를 상징하는 기념탑이었다.
신이치는 동지의 분투를 진심으로 상찬하고 만감을 담아 축전을 보냈다.
“이즈오섬회관 준공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곳에 사이좋게 즐겁게 모여 행복을 구축해주십시오.”
이 말에 사람들은 지나온 1년을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한 사람 한사람이 행복하기를, 신이치의 바람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러기 위한 신심이고 학회이고 광선유포다. 박해도, 시련도, 수행도 영원한 행복을 구축하기 위한 단련이다.
그리고 26일에는 이즈오섬지부가 신설되어 약 2000명이 모여 지부결성대회를 열었다.
성훈에는 “화(禍)도 전환되어 행(幸)으로 되리라”(어서 1124쪽)고 씌어 있다. 이즈오섬의 보배로운 벗들은 대형 화재라는 재난을 이겨내고 각자 행복의 기반을 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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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학회 조직은 무엇을 위해 있는가. 진실한 불법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가르치고, 사람들을 격려하고, 무너지지 않는 행복경애에 이르도록 손을 내밀고, 서로 절차탁마하기 위해 있다.
따라서 가장 괴롭고 힘든 상황에서 신심에 힘쓰는 사람일수록 가장 힘을 쏟아 격려하고 북돋아주어야 한다. 각 섬에 사는 학회원이 많지는 않지만, 대도시에만 관심을 쏟고 각 섬에 빛을 비추는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모든 사람의 행복을 구축한다’는 학회의 사명을 이룰 수 없다.
신이치는 전부터 섬의 동지가 희망에 불타 용기를 내어 발랄하게 전진하도록 격려하는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회가 ‘사회의 해’라고 정한 1974년을 앞두고 신이치는 수뇌간부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그리고 검토 끝에 1974년 1월 14일에 낙도본부 결성을 발표했다. 학회본부에서 근무하는 구마모토 출신의 미쓰시마 세이지라는 청년이 낙도본부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11일 뒤인 1월 25일에는 가고시마현 규슈종합연수원(훗날 규슈연수원)에 아마미오섬과 오키노에라부섬, 도쿠노섬, 다네가섬, 요론섬 등 규슈 지방의 섬에서 대표 50명이 모여 낙도본부 제1회 대표자회의를 열었다.
연수원에 머물던 신이치는 그 전날 학회본부 수뇌와 규슈 간부 그리고 낙도본부 관계자들과 함께 낙도에서 전개할 활동을 협의했다.
신이치는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모레 홍콩으로 출발해야 해서 그 준비 때문에 내일 여는 낙도 대표자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중하고 배웅할 때는 나갈 생각입니다. 다들 마을에서 배척당하는 등의 박해 속에서도 고생하면서 각 섬의 광선유포를 추진한 존귀한 불자들이니까요.
전원이 틀림없이 니치렌대성인의 본권속(本眷屬)인 지용보살입니다. 기이한 인연으로 각자 섬에 출현해 대성인의 명을 받고 광선유포의 투쟁을 일으킨 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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