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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 4장 1~42
성경엔 본문의 사마리아여인을 비롯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처럼,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에게 천대받는 이방인처럼 나온다. 하지만 실상 사마리아인은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유대인에게 완전한 이방인은 아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섞인 혼혈족으로 유대인의 피가 흐르지만, 혈통을 중요시 여기는 정통 유대인들은 그들을 다른 이방인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취급하였다.
유대인들은 순수 아브라함의 혈통만이 구원을 받는 다고 생각했기에 아무리 선량해도 혼혈이면 구원을 못받고 아무리 못된 성격이라도 순수 유대혈통이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사마리아가 이렇게 혼혈이 되어 유대인에게 소외 된 역사적 배경을 살펴 보면, BC721년전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가 앗수르에 함락되었을 때 앗수르는 사마리아에 사는 유대인이 앗수르에 항거하지 못하도록 다른 이방민족을 대거 이주시켜 유대인들과 결혼을 시켰다.
그래서 그 사이에 혼혈족들이 태어났고, 혼혈족들은 자연스레 부모의 신이었던, 여호와 하나님과 또 한쪽 부모의 신인 이방민족의 잡신들을 동시에 섬기게 되어 이도 저도 아닌 혼합주의 신앙을 그들이 갖게 되었다.
그런 사마리아의 역사에 대해 열왕기하 17장에 자세히 나와있다.
왕하 17:33 "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그래서 정통 유대인들은 이런 사마리아인을 경멸해 유대와 갈릴리 가운데 끼여 있는 사마리아 땅을 밟는 것 조차 꺼려 유대에서 갈릴리로 갈때 일부러 사마리아를 피해 동쪽 요단강을 낀 베레아쪽으로 한참을 우회해 갈릴리로 넘어갔다.
그런데 예수님은 본문에서 처럼 사마리아 땅을 그대로 통과해 가신 것이다.
예수님이야 그런 유대인들과 통념과 상관이 없으니 그대로 지름길로 가신 것도 있지만, 예수님은 700년간 영적으로 메말라 있던 사마리아의 땅에 생명수를 부어 주기 위해 그 땅을 밟으 신 것이라 볼수있다.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의 수가란 마을에서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간 사이, 갈증과 피곤함으로 우물가에 가서 앉으신다.
본문 6절에서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가 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라고 써져 있는데 여기서 우린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수 있다.
그리고 이곳 우물가에서 물을 길러온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다.
'수가'는 히브리어로 '술취한' '누운' 또는 '거짓'이란 뜻으로 야곱의 아들 디나가 욕을 본 세겜과 같은 마을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 야곱의 우물은 현재에도 보존되어 있으며 이 수가성(현재는 나블루스)과 야곱의 우물은 1km가량 떨어져 있다.
예수님이 이 우물가를 찾은 때는 제육시라 했는데 이는 현재 시간으로 열두시 정오에 해당하는 때로
사막지대에서 낮 정오는 가장 뜨거운 시간이다.
그래서 여인네들은 한낮을 피한 저녁 시간에 우물가에 모며 물을 길으며 마을의 소식을 전하기도 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교제를 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마을에서도 복잡한 사생활로 평판이 좋지 않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한 한낮에 물을 길러 나온 것이다.
여인은 물을 길으면서 우물가에 앉아 있는 예수님을 보고 이상히 여긴다.
행색이 딱 봐도 유대인인데, 오지 말아야 할 사람이 온 것도 그렇고, 거기다 자기에게 물좀 달라며 말을 거는 게 아닌가.
옛날 유대에서는 예전 우리나라 조선시대양반처럼 길가에서 자기 아내를 봐도 말을 걸지 않았다 하니, 남자가 외간 여자에게 말을 건다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도 보통 여자같으면 피하거나 아니면 얼른 물 한바가지 건네고 모른 척 했을 텐데, 이 여인은 여러 남자를 거친 산전수전 다 겪은 여인이어서 그런지, 개의치 않고 낯선 남자인 예수님께 묻는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하나이까?"
그러니 예수께서 너무도 뜬금없는 대답을 한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인은 일반 유대인들과는 다른 평범치 않은 예수님을 보고 호기심을 갖는다.
거기다 같은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멸시 받는 처지라 이렇게 말을 걸어 주는 예수님이 조금은 반갑게도 느껴졌을 지도 모른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어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여기서 이 여인의 말엔 여러가지 의미가 내포되있다.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당신 유대인'에서 좀더 친근하고 존중의 의미가 있는 '주'라고 바뀌며 서로간의 벽이 허물어 진 듯 하면서도 여인은 사마리아인들이 평소 유대인에게 갖고 있던 마음, 즉, 자기네 또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긍심과 우리민족을 무시하지 말라는 반발심을 드러낸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더욱 범상치 않은 말을 하여 여인의 관심을 증폭시킨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물은 그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인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에 바보가 아닌 이상 곧이 곧대로 듣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낱 허풍이 아닌 무언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예수께 이렇게 대꾸한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에 예수님은 난데없이 이 여인에게 남편얘기를 꺼낸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예수님의 이런 난데 없는 말은 여인의 깊은 컴플렉스를 건드린다.
그래서 여인은 지금까지 예수님 앞에서 장황하게 말을 늘어 놓았던 태도완 사뭇 다르게 모습으로 짧게 대답을 한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아마도 여인은 지금껏 고개를 쳐들고 예수님을 똑바로 보다가 이말을 할 때는 시선을 피했을 듯 싶다.
그러자, 예수께서 여인의 감추고 싶은 치부를 확 들춰내는 말을 한다.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자는 네남편이 아니니 네말이 참되도다"
이 요한복음 4:16~18절에서 기독교 상담심리학의 치유기법이 출발 한 것이라 한다.
우린 구더기 드글드글한 것을 이불로 덥은 채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문제 없는 척하지만, 결국 구더기는 치워버려야 할 것들이며 이 이불을 걷어 내지 않고선 구더기들을 청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돌연한 예수님의 이러한 말은 그야말로 그런 구더기들과 오물위에 얌전하게 덮은 이불을 확 걷어 버린 행위였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에 여인은 지금 껏, 괜찮은 척, 잘난 척하려는 마음이 온데간데 없어진다.
"주여,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로소이다"
이 여인이 구원 받을 영혼이라는 것은 여기서 드러난다.
여인은 예수님 앞에서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하고 어깃장을 놓거나, 아니면 창피해 도망가지 않았다.
여인은 의사앞에 부끄러운 부분의 환부를 드러내놓는 환자처럼 예수님 앞에서 자기 죄와 상처를 순순히 벌려 놓았다.
그간 이 여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굴었지만 남편을 다섯번이나 갈아치우면서 겪은 고통과 수치는 컸을 것이다.
한남자에게 받은 결핍을 똑같이 결핍된 남자에게 채우려 하다 실패하고, 그렇게 이남자 저남자 바꾸어 가면서 채우려 했지만 그 결핍된 남자들에게서 받은 상처로 여자는 더욱 곤고해지고 회의감만 깊어져 가고 그 결핍 또한 점점 커져만 갔을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은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라 했으니 그 여자는 현재 유부남의 첩이거나 정부였을 터이니 여인의 삶은 그야말로 치욕적인 삶이었을 것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이 사마리아 여인과 같다.
고개를 빳빳히 들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잘난척하다가 예수님 앞에 감추고 싶은 죄악과 수치를 모두 까발겨져 결국 무릎을 꿇고 그의 긍휼만을 구하게 되는 우리의 모습이다.
영적으로 본다면 이 다섯 남편과 현재의 정부를 포함한 여자의 여섯 남자는 인간의 여섯 우상을 의미한다. 6은 인간의 숫자이며 사단의 숫자이기도 하다.
이 사마리아 여인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기전에 사단에게 소속되어 여섯우상을 섬기며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고 고단한 삶을 살았다.
돈으로 채워보려도 하고, 술과 도박 마약 성적 방종등, 쾌락에 빠져보기도 하고, 명예나 성공을 향해 치달아 보기도 하고, 또 고아하게 예술이나 학문등에 전념해보기도 하지만, 목마름의 근원은 해갈되지 않는다.
사마리아 이 여인이 매일같이 이 물을 긷기 위해 뙤약볕에 물동이를 이고 1km을 걸어 오간 것 것처럼 우리도 이러한 것들을 얻기 위해 땀을 흘리며 끊임 없이 얼마나 수고를 하는가.
그것을 얻기 위해 BTS의 노래처럼 내 피땀 눈물 영혼까지 다 바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산다. 궁극의 해갈이 될 수 없는 것들을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한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여인에게 처럼 우리에게 이러한 물과는 달리 다시 목마르지 않은 물을 수고하여 물 길러 오지않아도 되는 생수를 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그러기 전엔 우린 예수앞에 소환해야 할것들이 있다. 바로 우리가 남편으로 의지했던 것들, 만족스럽지 않아 끊임없이 갈아치워야 했던 남편들, 마음속의 여섯우상을 끌어내어 예수님 앞어 벌려놔야 한다.
이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앞에 다 드러나 버린 것이고 예수를 선지자로 인정함으로 자기죄를 인정한다.
그리고 여인은 이제, 예수 앞에서 자기의 오랜 영적인 고민을 내어 보인다. 바로 사마리아인으로서 유대인과의 오랜 갈등이 된 예배문제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산에서 예배를 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신학자들은 이 여인이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피하기 위해 대화의 주제를 예배로 바꾼것이라 말하는 의견이 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여인은 이제 예수님을 깊이 신뢰하게 되어 자기 내면 깊숙히 있던 예배의 갈급함과 영적 공허함을 드러낸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잠시 이 여인이 이러한 예배에 대한 고민을 갖게 된 것에 대한 유대의 역사를 살펴 보면, 사마리아가 앗수르에 의해 혼혈족이 되면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성전건축 참여 및 예루살렘 성전의 출입을 막게 되었다.
그러자, 사마리아인들은 자기네 땅에 있는 그리심산에서 성전을 건축하고, 축복이 선포된 그리심산이야 말로 참 예배의 장소라며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난 곳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친 모리아 산도 그리심산이라 주장하였다.
그래서 이 성전 문제로 유대와 사마리아는 200년간 갈등을 빚어 오다, 그리심산 성전이 하스모니안 왕조에 의해 파괴 되자, 사마리아 인들은 그 무너진 성전의 터에서 기도를 하며 그 공허감을 달래 왔던 것이다.
그래서 이 여인 또한 비록, 생활은 문란했지만 마음속으로 하나님에 대한 예배의 갈급함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단 몇마디로 이 여인뿐만 아니라 현재의 우리들에게 까지 그리스도인이 평생에 걸쳐 알아야 할 예배에 대한 진리를 모두 가르쳐준다.
"여자여. 내말을 믿으라. 이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나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 남이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지금은 예수님의 말처럼 세계의 어느 곳이라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가 되고 우리 마음 또한 성전이 되어, 행위로서가 아닌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사마리아여인에게 너희가 알지 못하는것을 예배한다고 한것은 사실 이 때의 사마리아인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했지만 그들은 구전으로 들은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방인들이 가져온 잡신과 혼합된 신을 믿고 있었다.
마치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이 한국의 무속신앙과 기독교를 혼합해 새로운 샤머니즘적 기독교를 창출해 믿는 것과 같이 이들의 믿음 또한 참 하나님을 모르는 신앙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고 한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처럼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다.
간혹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 유대인이 예수를 배척하기 때문에 유대인을 멸시하는 사람이 있는 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 생각한다.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전까지 그들의 눈이 수건으로 가려 진것 또한 하나님의 섭리라 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유대인의 눈을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게 일부러 가린것이냐, 그렇다면 유대인이 예수를 배척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일 아니냐. 라고 반문 할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아둔한 머리로 다 이해할수 없다는 말 밖에 나는 할말이 없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사마리아 여인은 지금껏 한번도 들어본적이 없는 예수님의 이러한 영적인 말씀에 그간 마음에 소중히 간직했던 신앙심을 드러낸다.
"메시야 곧 그리스로라 하는 이가 오실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것을 알려주시리라."
이에 예수는 "네가 말하는 그가 내가 그라"라고 대답한다.
이 말에 여자는 놀라 예수를 바라보기만 한다. 비록 유대 혼혈족로서 험하고 죄많은 삶을 살았지만, 마음속으로 그리던 구원자 그리스도를 만난 순간이다.
우리도 이러한 순간이 모두다 있지 않은가. 세상사람은 알수도 없고 세상말로도 표현할수 없는 주를 만나는 구원의 순간이다.
그때 제자들이 예수께 온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낯선 사마리아여자와 마주 대하여 얘기를 나눈 것을 이상히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간의 이상한 침묵, 그리고 여자의 심상치 않은 표정에 예수님께 "이 여인과 무엇을 얘기하시나이까?" 하고 물을 수가 없었다.
여인은 이제 중요한 물동이 마져 팽개쳐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가 사람들에게 가 외친다.
"내가 행한 모든일을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그리스도가 아니냐!"
이런 사마리아의 여인의 태도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을 때의 감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창피함이나 체면도 잊고,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 어서 그리스도를 와서 보라고 사람들에게 강권해 예수 앞으로 끌고 오는 것이다.
평소 마을 사람들을 꺼려 일부러 피해 다녔던 이 여인은 이제 사람들 앞에 나서서 소리치며 예수를 증거한다.
또한 이 여인을 멸시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 여인의 증거로 예수를 믿게 된다.
이는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기적은 지금 현대에까지 숱한 회심자들로 인해 이어져 왔다.
그런데 사실 이 여인이 마을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 특별히 한 행동은 없다.
그가 내게 한 놀라운 일 들을 말하고, 와서 보라고 사람들을 예수앞에 끌어다 놓은 일 밖에 없다.
사람들은 비록 여자의 말에 끌려왔지만, 그 다음은 예수님이 알아서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녀가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의 변화를 보자.
처음엔 '당신 유대인'에서 '주여'로 그리고 '선지자'에서 '메시야, 그리스도'로 바뀐다.
여자는 단 한번으로 만남으로 우리가 일생을 거쳐 이뤄야 할 신앙의 과정과 완성을 한 순간에 이룬다.
호기심에서 관심, 그리고 회개에 이르러 구원을 받고, 또한 세상에 나가 전도를 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과업을 단숨에 이루어 놓는다.
사마리아의 여인은 우리와 같은 죄 많던 인간이었지만 그녀가 예수님을 믿은 후, 취한 태도는 가히 예수님께 칭찬을 들을 만 하며 이 기특한 여인은 유대인이 꺼리는 사마리아에 오신 예수님의 발걸음을 결코 헛되게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마을로 가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사이 제자들에게 말한다.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이말의 뜻은 세상의 물질적 추수는 씨뿌리고 거두는 일이 넉달이 지나야 되지만 영적인 추수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씨뿌림과 동시에 추수 할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 낯을 피해 한 낮을 피해 물을 긷던 그녀에게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나서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할수 있었을 까.
우린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을 때 그 감격과 열정을 첫사랑의 때라 이야기한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누구나 그런 순간이 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여인이 일반적인 그리스도인과 다른 점은 그 그 환희와 감격이 식기전에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여인은 비록 사람들에게 멸시받는 천한 여인이었지만 그녀의 구세주를 만난 기쁨과 그 진정성과 열정은 마을 사람들의 선입견을 벗겨 버리고 마음을 움직이기 충분했을 것이다.
이 여인이 특별한 것은 예수님을 만난 후, 구원의 감격을 가슴에 안은 채, 물동이를 이고 집으로 가지 않았다.
여자는 충분히 "일단 물동이부터 집에 놓고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야지" 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 여인은 자신의 죄악된 삶에서 그리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린 이 사마리아의 여인과 같은 처지로 출발하긴 하지만, 복음전파에 있어선 이 여인과 달리 너무나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때가 많다.
사실 예수님께 구원을 받은 제자된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은 백번 말해도 전도 아닌가.
하지만 평생 남은 커녕 자기식구 한명 전도하지 않는 기독교인이 너무도 많다.
왜냐, 사실 전도는 첫사랑의 열정이 식은 후에 하기엔 상당한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나도 처음 예수님을 만난후, 눈에 뵈는 게 없을 때는 듣기 싫다고 해도 예수를 전했고, 예수님을 말하지 않으면 견딜수 없는 저절로 터져 나오는 그런게 있었다.
그러나 그 뜨거운 감정이 식으니, 세상 사람과의 부딪힘이 꺼려지고, 그들이 듣기 싫어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게 민폐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불신자를 꺼리고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믿는 자끼리만 어울리려 한다.
하지만 그런 자들은 영적 교만으로 사마리아땅을 밟지 않는 유대인과 다를 바가 없다.
다른 불신자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은 채, 혼자서 또는 믿는 사람끼리 성경을 얘기하고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는 것은 세상의 빛도 소금도 못되는 혼자만의 만족을 위한 신앙이다.
그런 신앙은 후에 예수님께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책망을 받게 되있는 것이다.
또한 우린 사마리아의 여인도 본받아야 하지만, 무엇보다 예수님을 본받아야 한다.
사마리아 여인의 진실 어린 전도가 마을 사람에게 통했 듯, 예수님의 진실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통한 것이다.
예수님은 영혼을 구하기 위해 남들이 밟지 않는 땅을 밟았고, 남들이 말 걸지 않는 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남들이 말하지 않는 진리의 말을 한 것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원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은 사람들 대부분이 거짓을 원한다.
가슴을 찌르는 솔직한 말 보다는, 귀를 즐겁게 하는 위선의 말을 좋아하며 진실을 알기를 싫어하고 두려워 한다.
이 수가성은 앞서도 썼지만 술취한 성, 거짓 성을 의미한다. 그러니 이 수가란 마을이 이 세상을 상징한다는 걸 생각하면 그 지어진 이름의 의미가 절묘하게 매치된다.
하지만 이러한 술취한 거짓 성에 산다해도 성에 사는 모든 이가 거짓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 속에서 진실을 알고자 하는 자, 들을 귀있는 자를 찾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들을 귀였던, 진리를 알고자 했던 이 여인을 위해, 또한 이 여인을 통해 구원받을 영혼들을 위해 모든 유대인이 꺼리는 사마리아 땅을 밟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처럼 누가 '들을 귀'인지 '못 듣는 귀'인지 알수 없다. 분명 우리가 외형으로 판단 했다면 여섯남자를 거친 사마리아 여인은 건너 뛰고 전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린 더 듣든지 아니 듣든지 사람들에게 전도를 해야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전지하신 예수님 또한 핍박을 받으시면서 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제자라면 더 더욱 복음을 전파하는 데 게으르지 말아야 할것이다.
ㅡ주님의 산 나현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