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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유의 본 성명은 박유(朴儒)이며 자는 문행(文行)이니 광해주 사람이다. 성격이 곧으며 경서와 사기에 통달하였다. 처음에는 궁예에게서 벼슬하여 원외(員外)로 되었고 동궁(東宮) 기실(記室)까지 올라 갔다. 궁예의 정치가 혼란하여진 것을 보고 이어 가정을 떠나 산골짜기에 은거하였다가 태조가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와서 현신하니 태조가 그를 예로써 대접하면서 말하기를 “좋은 정치를 하는 길은 어진 사람을 구하는데 있는바 이제 그대가 온 것은 마치 부암과 위수(傅岩渭濱)가 명사를 얻은 것과 같다.”하고 이어 갓(冠)과 띠(帶)를 주고 기요(機要)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공로가 있으므로 드디어 왕(王)씨라는 성(姓)을 주었다.
왕유의 현손 왕자지(王字之)의 자는 원장(元長)이며 처음 이름은 왕소중(王紹中)이니 아전(胥吏)으로부터 높은 벼슬에 올랐다. 그의 매부 왕국모가 이자의(李資義)를 죽일 때 왕자지는 궁문을 호위한 공으로써 도교령(都校令)으로 임명되었다. 숙종이 대궐에 불러 들여 내시(內侍)로 삼았으며 또 다시 전중 시어사(殿中侍御史)로 전임하였다. 예종 때에는 병마 판관으로 임명되어 윤관을 따라 여진을 정벌하였는데 누차의 전투에서 공로를 세웠는바 그 전말은 윤관의 전기에 기록되었다. 전중 소감으로 임명되고 좌산기상시를 거쳐 이부, 병부의 상서, 추밀원사를 역임하였다. 17년에 참지정사로 있다가 죽었는데 향년 57세었다. 시호는 장순(章順)이라 하였으며 예종 묘정에 배향하였다. 후일에 간관이 아뢰기를 “옛날에는 대신이 국가에 큰 공로가 있어야만 비로소 배향에 오를 수 있는데 왕자지는 비록 전공이 있다 하여도 그가 예종의 신임을 받은 것도 다만 왕의 은총을 받았을 뿐이고 위로는 임금의 잘못을 바로 잡은 일도 없었고 아래로는 백성에게 혜택과 이익을 준 것도 없으니 그를 배향한 것은 제전(祀典)을 존중하며 장래의 모범을 보이는 도리가 아니니 청컨데 주관 부서에 명령하시어 배향할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와 교체하여 배향하여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더니 왕이 “가”하다는 명령을 내렸다.
왕자지의 아들은 왕의(王毅)니 그의 딸이 이자겸(李資謙)의 아들 이공의(李公儀)에게 시집갔는데 이자겸이 패망되자 그는 인척으로서 연루되어 귀양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