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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5. 운동-이미지(Sur L’image-mouvement)에 관하여(1983)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in Pourparlers 1972-1990, 1990, 67-81.(P.250)
- 영화노트(Les Cahiers du Cinema), n° 352, octobre 1983
- 보니처(Pascal Bonitzer, 1946-)와 나르보니(Jean Narboni, 1937-) 1983년 9월 13일
* 이 대담은 영화1: 운동-이미지(1983)이 출판된 후에 한 것이다. 그리고 내용에 들어가 보면, 대담자들은 들뢰즈가 다음 저술로 영화 2: 시간-이미지(1985)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게다가 이 시기에는 이미 영화사적으로 이미 알려진 변화에 대한 여러 비평가들의 견해들이 이미 알려져 있던 시기이다. 그럼에도 대담자들은 철학적 관점에서, 이미지의 다양화에 대한 관점을 듣고 싶어 한다.
* 읽다가 보면, 운동-이미지란 용어를 공간상의 계속에 관한 용어로 쓰인다. 숫자가 1, 2, 3, 4, 5으로 계속되는 상황에서 운동은 1에서 숫자를 거쳐서 5로 가는 것이 운동이미지이다. 들뢰즈가 영화를 두 차원으로 구별할 때,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로 구별할 때, 운동-이미지는 사진을 필름으로 이어서 나열하는 것과 같지만, 시간-이미지는 나열이 아니라 움직이는 이미지 속에 어떤 흐름의 솟아남이 있다. 솟아남에는 세 가지를 설명하는데, 지각-이미지, 행동-이미지, 감화-이미지이다. 벩송은 공간상의 나열에는 운동(시간-지속)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시간-지속에는 심층의 감화작용, 신체를 통한 행동(감각운동), 그리고 대상에 덧붙이는 지각작용이 있다고 한다. 들뢰즈가 시간-이미지를 설명하는 데는 이 세 가지가 필수적이라 한다. 흥미로운 것은 벩송의 세 실사 – 명사, 형용사, 동사 - 에 닮았다는 것이고, 철학사에서 근세철학의 세 학자에도 이와 유사한 것이 있다는 점이다.
첫째로는 데카르트의 관념의 근거는 지각에 가깝고 이를 이어받은 이는 버클리이며, 흄과 칸트로 이어진다. 이는 주로 사변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수의 나열처럼 그림 속에 원자의 나열로 가는 계열들의 사고를 지배했다. 프레게, 러셀, 비트겐슈타인에 이른다. 이를 언어학적인 측면에서 의미론이라 한다.
둘째로는 개념을 다루는 라이프니츠인데 각각의 행동의 양태마다 충분이유율로서 개념작용이 있다. 이 개념작용은 사변적 대상에서만 뿐만이 아니라, 물리적 대상, 생명적 유기체, 무기물에서도 각각이 성립해야하기 때문에 이유(raison)이라 한다. 이 이유를 경험적으로 설명하면, 이유의 각각은 역동적 단위가 된다. 물체는 강도에서 생명체는 공연성에서 (들뢰즈는 비릴리오를 빌어서 속도를 덧붙일 것이다) 각각의 이유가 있으며, 각각은 역동적 단위로서 활동(행동)한다. 이런 이유 방식은 라이프니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쥘 라슐리에(Jules Lachelier 1832-1918)에게서 벩송은 착상했을 것이다.
셋째로 감화작용(affection)을 다루는 스피노자가 있다. 스피노자를 일반적으로 공통용어를 중심으로 취급하는 것은 사변적 철학이 자기의 유사성을 보이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에 비해, 스피노자의 사유를 감화, 공통용어, 직관의 내재적 흐름으로 다루면, 도덕적 행위들이 심층을 이유(raison, 기원)으로 하여 상식과 양식에서 공통용어의 다의성을 지닌 표현들이 드러난다. 그 다음에야 아제(미래)에 예상참여와 더불어 현실 행위들은 심층의 권능의 발현일 때야 자유의 실현이 된다. 심층으로부터 표면으로 감화작용의 표현에는 감동과 감응이 있으며, 실재적이고 현실적인 행위에는 공감과 공명이라는 직관이 있다. 이런 내재성으로부터 표면의 양의성 그리고 현실화의 과정에 이르는 길은 시간-이미지와 닮았으며, 그 과정에는 노력이 필수적이라는 것도 기억이론에서 필수적이다.
** 다른 하나로, 들뢰즈가 청각이미지와 시각이미지에 대한 구별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벩송은 시각과 청각의 차이를 구별했지만, 철학사의 맥락에서 이것들을 영원과 지속으로 형이상학적으로 구별하였다. 이 구별에서 시각의 동시성에 비해, 청각에는 시간의 필요를 알았고, 벩송은 메아리의 예와 더불어, 요즘 표현으로, 소리의 파동에서 도플러효과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눈으로 단번에 파악하는 것과 귀로 시간이 걸려서 파악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설명했다. 시각은 평면화를 위주로 하는데 비해, 소리는 거리와 방향 등을 내포한다. 이점에서 청각이미지가 ‘공연적’이라 한다. 벩송은 꼭 꼬집어서 말하지 않았지만, 플라톤주의 이래로 공간화 또는 시간을 배제한 평면화에서는 시각적 이미지를 ‘동연적’이라고 한다. 즉 관념은 선의 이데아에 동연적이다. 그런데 기억과 생명을 공연적이라고 한 것은 청각이미지를 빗대어 긴 과정의 경험적 총체로서 파악하는 기능을 설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며, 이 과정의 총체적 인식을 직관이라고 했다. 스피노자에서 세 과정의 총체로서 직관과 같은 의미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벩송은 자연, 추상, 단위, 단순성 등이 양면성이 있듯이, 철학사에서 직관에도 두 종류를 구별하였는데, 하나는 공간의 펼침을 한 번에 알 수 있는 직관이 있고, 다른 하나는 시간이 걸려서 방향과 거리를 파악하듯이 지각의 확장을 통한 직관이 있다. 전자의 경우에서는 플라톤주의, 데카르트, 칸트(순수이유의 비판이라는 점에서), 러셀로 향하는 사고의 경우들인데, 공간적 평면을 단번에 펼쳐짐에 대한 직관과 가깝다는 것이다. 이런 직관은 눈을 뜨면 바로 세상이 그림처럼 전면이 한꺼번에 들어오는 것에 대한 상식적 견해이다(스피노자의 공통용어에 가깝다). 이에 비해 흐름의 경과가 필요한 철학은 플로티노스와 스피노자에서 과정은 행동이 따라가야 한다. 물론 플로티노스는 행동을 따라가면 사유(누스)가 줄어든다. 스피노자에게서 행동을 하면할수록, 권능(누스)가 노력을 통해 관통하여 영향을 미쳐야 하는데, 그런 노력하기가 어렵기도 하지만 하는 이도 드물다고 한다. 벩송은 현실적 행위에 기억이 작동하고 미래에 예참하는 경우가 직관이 관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플라톤주의의 직관은 세계가 단번에 주어지는 것을 알아챈다고 여기는 직관임에 비하여, 자연(본성)내재주의의 직관은 심층의 흐름을 깊이(어제)로부터 표면위로 표출하는 과정을 직관하는 것이다. 두 직관은 영역도 방향도 다르다. 들뢰즈가 흥미롭게도 둘째의 직관에 대해, 내부에서 한 두 방향을 정할 것이 아니라, 어느 방향이라도 관계없으며, 어떤 강도라도 관계없이 퍼져 나가는(솟아나는) 결들이 있고 그 과정일체를 지각하는 직관이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한다. 생명체는 또는 무의식은 비결정적인 권능으로, 즉 정해진 방향도 정해진 강도성을 먼저 가지고 활동(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빗장이 열려진 공간(위상공간)으로 펼쳐지듯이 번져 나간다. 역사의 흐름에서 다양하게 펼쳐짐이 있을 것인데, 카이로스(시의 적절함)에 맞는 집중과 변곡점이 고원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펼침의 활동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인민의 자주와 자유에 의해, 앞으로릐 삶과 철학에서 과제일 것이다. (54RLH)
***II. Cinéma 53-112 -
# II.5. 운동-이미지에 관하여, Sur L’image-mouvement 67–81
영화노트(Les Cahiers du Cinema), n° 352, octobre 1983
- 보니쩌(Pascal Bonitzer)와 나르보니(Jean Narboni)와 함께, 1983년 9월 13일 대담.
Q1.(질문중 첫째): (67) 당신의 책은 시네마의 역사가 아니라 이미지들, 기호들(des signes), 분류학(une taxinomie)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 책은 앞서 쓴 당신의 저술들 중의 몇몇을 이어간다. 예를 들면 당신은 프루스트(Proust, 1871-1922)에 관하여 기호들의 분류작업(une classification)을 했다. 그러나 시네마1: 이미지-운동(1983)과 더불어, 당신이 철학적 문제 즉 특별한 작품(스피노자, 카프카, 베이컨, 프루스트의 작품)에로가 아니라, 여기서 시네마와 같이 작품 일체 속에서 영역에로 접근하기로 결심한 것은 처음이다. 그리고 동시에 당신이 이 작품으로 하나의 이야기(une histoire)를 만든다고 스스로 방어한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이 책을 역사적으로 다루고 있다. (67)
GD(질 들뢰즈) – 퍼스(Peirce, 1839-1914)와 같은 논리학자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언어 모델과 독립적으로, 극히 풍부한 기호들의 분류작업을 정교하게 한 것이다. 나는 한권의 논리학 저술, 즉 시네마의 논리학을 만들고자 시도했다. (69) [기호의 논리, 방향(의미)의 논리, 감각의 논리 등을 이미 썼고, 시네마의 논리 등으로 이어진다. 주름은 물체의 논리라고 할까?]
Q1-m(m은 마실가의 생각이다) - 들뢰즈는 시네마의 역사를 다루지는 않았지만, 시네마 발전의 역사에서 중요 변곡점들을 보건데, 이미지와 사유 사이의 연관 속에 있음을 보여주려 한다. 그 변곡점들의 나열이 역사적 시대적 서술처럼 보일 수 있으나, 아마도 들뢰즈는 시네마의 영역에서 변곡점들의 솟아남이 고원과 같은 것으로 여겼을 것 같다. 역사적으로 보면 시네마의 통시태를 나열 또는 배열한 것 같지만, 주제에 관해서 보면 공시태에서 지층적인 층위들(분류작업)과 위상들(une taxinomie)을 배치하여 용출선(탈주선)들의 동맹(연대)을 보여주고 한 것 같다.
Q2: (68) - 사람들은 또한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당신은 시네마에 대해 철학의 부당함과 같은 어떤 종류의 것을 수정하고자 원한다고. 당신은 특히 현상학을 비난하는데, 현상학이 시네마를 잘못 이해했고, 그것[시네마]을 자연적 지각에 비교하고 대립시키면서 시네마의 중요성을 축소하였다고 비난한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벩송이 시네마를 이해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가졌고, 심지어는 시네마에 관해 예견했었다고, 그러나 [벩송]자신의 고유한 개념작업들을 시네마에게 수렴을 인정할 수도 없었고 또는 원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마치 벩송과 이 예술 사이에 일종의 추적-경기(une course-poursuite)가 있었던 것과 같다. 왜냐하면 물질과 기억(1896) 속에서, 시네마를 인식하지 못했는데, 벩송은 운동-이미지에 대해, 세 가지 중요 형식들, 지각-이미지, 행동-이미지, 감화-이미지와 더불어, 근본적 개념을 분간해 냈고, 이 운동이미지는 영화(필름)의 새로움 자체를 예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에 창조적 진화(1907)에서, 그리고 이번에는 시네마에 실재적으로 대치되어서, 그는 현상학자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네마를 기피한다. 그는 시네마 속에서 자연적 지각과 동일한 자격으로 매우 오래된 착각의 영속(la perpétuation)을 본다. 이 착각(une illusion)은, 운동이 시간 속에서 고정된 절단으로부터 재구성될 수 있다고 믿는데 있다. (68)
GD –내가 믿기로, 따라서 벩송은 여기서 상대성 이론과 연관해서 철학적인 새로운 개념들을 정교하게 했다. 그는 상대성(la Relativité)이 시간의 개념작업을 함축한다고 생각했고, 상대성은 그 자체에 의해 시간의 개념작업을 분간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시간은 개념작업을 구축하려는 철학에 속한다고 한다. 단지 이처럼 일어난다: 사람들은, 벩송이 상대성을 비난했다고, 그가 물리학이론은 비판했다고 믿었다. 벩송은 너무 심한 오해(le malentendu)를 사리지게 하기에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보다 단순한 개념작업에로 되돌아 왔다. 남은 것은 물질과 기억(1896) 속에서, 그가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를 묘사했다는 것이다. 이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는 늦게서야 이것들의 장(場)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69-70)
Q2-m 질문자들은, 1983년인데, 들뢰즈가 시간-이미지에 관해 작업하고 있다고 눈치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운동-이미지에서 세 가지 중요 형식들로 지각-이미지, 행동-이미지, 감화-이미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세가지 이미지를 심층에서부터 상층으로 방향을 정하면 감화, 행동, 지각으로 배치할 수 있다. 이 방향은 삶에서 시간상 배치일 것인데, 사변의 논리에서는 지각이 항상 우선하는 것으로 이유(raison)를 찾으려 한다. 지성이 자기에 맞는 이유 또는 근거가 있다고 여기는 점에서 지각이 먼저이다. 말하자면 대상에 대한 지각이 있고 그리고 무의식의 감화가 발동하는 것처럼 여긴다. 삶은 감화작용이 항상 흐르고 있고 실재성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한번의 지각에서도 감화가 덧씌여지고, 그 다음 지각에서는 감화와 행동의 연관으로 더 많은 것들이 덧씌어 진다. 다시 말하면 첫째 감화에서 지각이 덧 씌여져 있다는 예로서 시각의 착시들에서 찾을 수 있었고, 둘째 감화와 행동에는 더 많은 주의와 강도성이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첫째 방향에서는, 지성의 작용을 이성[전능한 지성]의 판단으로 착각하여 일상성에서 이성(raison)이 아닌 이유를 찾는 얕은 인식에 기대고 있다. 이에 비해 둘째 방향은 심층의 흐름과 분출이 일상성이나 고정성에서 벗어나, 진솔하고 단순한 본성(la nature, 즉 자연)으로부터 인식과 더불어 재인식이 일어나는 경우이다. 어쩌면 대상에 대한 인식은 재인식일 것이다(왜냐하면 첫 인식은 신체자체일 것이기에). 이런 재인식이 일상과 관습에 속하는 것인지, 통상적인 상식과 더불어 이유 논리의 양식과 달리 실재성의 진솔하고 단순한 (재)인식인지를 구별해야 할 것이다. 첫째 방향은 관념 또는 원리가 먼저 있다는 생각에 익숙하기 때문인데 비해, 둘째 방향은 삶의 실재성에 대한 직관 또는 기억의 작동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전자에서 원리과 관념을 직관한다고 하는데 이는 칸트적 용어로 순수 이성(이유)일 것이고, 종교가 그 이유에다가 정신이라는 지위를 부여했다고 본다면, 후자의 직관은 근원 또는 시초에 대한 사유에서 단순한 자연의 권능일 것이며, 이 직관은 기억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경험의 총체에서 오는 것이다. 벩송이 2천5백년 서양철학사가 뒤바꾸어(inverser)서 전해져 왔다고 생각했고, 들뢰즈는 “방향의 논리”에서 이 전도된 사고를 전복(subversion)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들뢰즈가 논리에 관해서, 여러 방식으로 책들을 낸 것도, 논리가 하나의 방향도 아니고, 또한 논리가 추상적인 절대로 이르는 하나의 논리로서 변증법을 싫어하기 때문인데, 그로서는 여러 가지들의 논리들이 있다는 것을 제시하면서 사유 또는 기억 또는 삶이 다양체라는 것을 입증하려는 노력이었다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Q3: (70) - 사람들은, 당신의 책의 매우 훌륭한 페이지들에게 영감을 준 드레이어(Dreyer, 1889-1968)같은 영화인에게 정당하게 발견하는 것이, 있지 않는가? 나는 최근에 20년이 지나 재상연한 게르트루드(Gertrud, 1964)를 다시 보았다. 그것은 찬란한 영화이며, 그 영화에서 시간의 수준들에 대한 조절(la modulation)이 세련미에 도달했는데,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 구구건이, 1898-1956)의 수준들만이 그 순간들에서 세련미에 동일하게 한다(예를 들어 雨月物語, 우월물어 Ugetsu monogatari 1953 (Les Contes de la lune vague après la pluie)의 마지막에, 도기장이의 부인이 출현과 사라짐, 죽음과 삶). 드레이어는 자신의 논문인 「쓴 글들(Écrits)」(1961)에서 줄곧 말하기를, 제3차원 즉 심층을 제거해야만 하고, 평평한 이미지들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며, 이는 이미지들을 4차원과 5차원, 즉 시간(le Temps)과 정신(l’Esprit)과 직접적으로 연관 짓기 위해서라 한다. 예를 들어 오르데트(Ordet, 1955: La Parole)에 관하여, 그것은 매우 호기심이 많은 것인데, 그것은 거기서 귀신(revenant) 또는 망상(démence)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확한 과학과 직관적 종교의 깊은 연관”이 중요하다고, 그가 정확하게 말한다. 그리고 그는 아인슈타인(Einstein, 1879-1955)을 상기한다. 내가 인용해 보면, “새로운 과학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을 이어서, 현존의 증거들을 - 우리들의 감관의 차원인 3차원의 세계 바깥에 – 시간의 차원인 4차원을, 영혼주의(psychisme)의 차원인 5차원을 가져왔다. 사람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사건들을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사람들은 정확한 과학과 직관적 종교 사이에 깊은 연관을 우리에게 재인식하게 하는 새로운 전망들을 열었다.”‥… 그러나 “시네마의 역사”라는 질문으로 되돌아가자. 당신은 계속들(des successions)을 개입하게(intervenir, 중재하다) 했다. 당신은 예를 들어 전쟁 후에 이미지의 그런 유형이 그런 순간에 나타난다고 말한다. 따라서 당신은 추상적 분류작업만을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적 역사도 만들었다. 당신은 또한 역사적 운동도 고려하고자 원한다. (70)
GD – 내가 믿기로 모든 이미지들은 동일한 요소들을, 동일한 기호들을 달리 조합한다. 그러나 어느 조합도 어느 순간에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한 요소가 전개되기 위하여, 몇 가지 조건들이 필요하며, 그렇지 않으면 위축되거나(atrophié) 또는 부차적으로 남아있다. 따라서 하강(下降)들이나 또는 계통들이라기보다 전개의 수준들이 있고, 각 전개의 수준은 그렇게 될 수 있는 만큼 완전하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적 이야기(hustoire historique)라기보다 오히려 자연적 역사(histoire naturelle)에 대해 말해야 한다. (71)
[하강과 계통은 상층에서 표면으로 방향인데 비해, 전개 또는 생성의 수준들은 심층에서 표면의 창조 또는 시뮬라크르로 향한다. 전자가 명령의 언어학이라면, 후자는 자연의 자기 생성이다. 벩송은 당연히 후자의 사유에서 인간도 자연(본성)의 자기 생성으로 본다. (54RLG)]
Q3-m 질문자가 상대성을 벩송의 시간적 차원에 두지 않고,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적 상대성의 증거로서 이야기 하는데, 이는 벩송의 표현으로, 그 상대성은 그 수식을 줄일 수도 있고 늘일 수도 있다. 벩송의 지속의 상대성은 각각이 고유한 삶이 있고, 그 삶과 동시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고유성이 있다. 각각의 자기 이미지와 다른 이미지들과 연관을 상대적이라 한다. 서로는 가역적이지도 늘이지도 줄이지도 못한다. 자연사에서는 인간이 줄이고 늘일 수 있는 사건들 또는 상태들이 없다. 지구와 태양 사이를 상대적 시간으로 계산하고 도식으로 줄여서 늘여서 설명할 수 있다. 그 시간에도 다른 모든 사건들이 줄이고 늘여지는 것은 아니다. 지속하는 시간은 불가역적이라는 점이다. 영화는 상연이라는 시간을 과학적으로 줄이고 늘일 수 있다. 개인 또는 내가 보고 느끼고 그리고 감상을 적는 시간(지속)은 두 번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행동-이미지는 고유한 것인 만큼 삶의 일생도 고유한 것이다.
Q4: - 당신의 분류작업은 그런대로 평가 작업이다. 그 분류작업은 당신이 받아들인 작가들에 관한, 따라서 당신이 가까스로 인용한 또는 당신이 언급하지 않은 작가들에 관한, 가치 판단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시간-이미지의 문턱에 남겨 두면서, 하나의 연속을 확실히 예고한다. 이 시간-이미지는 운동-이미지 자체의 저 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첫 권에서 당신은 세계2차 대전의 끝날 무렵과 그 다음날에 행동-이미지의 위기를 묘사한다(이탈리아의 신실재론, 그리고 프랑스의 누벨바그…). 당신이 이런 위기의 시네마를 특성화하는 몇몇 특징들(des traits)이 [있는가?] (모든 것이 진부하게 되어가는 감정, 원칙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 사이에 항상적인 치환들(permutations), 연속화면들(séquences)의 새로운 분절들(articulations), 주어진 상황과 주인공의 행동 사이에 단순 연결의 파괴(rupture) 등, 실재성을 마치 결함 있고 부식하는 것처럼 취급되었는데), 이 모든 것이 전쟁 이전의 두 영화 – 근대 영화의 토대자로서 생각되었던 그리고 당신이 언급하지 않았던 놀이 규칙(La Règle du jeu, 1939)과 시민 케인(Citizen Kane, ou Citoyen Kane, 1941) - 속에서 이미 소개되지 않았던가? (71-72)
GD –그러나 나는 이 첫째 권에서 그러한 예들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반면에 나는 자연주의적인 일체에 대해 말할 수 있었다. 심지어 신실재주의와 누벨바그에 대해 나는 가장 피상적인 측면에서 전적으로 마지막에서 접근할 뿐이다. (73)
Q4-m – 어느 시대든지 전조(탈주선의 이유)는 있다. 누벨바그를 1950년대로 설정하기 이전에 질문자들은 1940년에 단초가 있음 말한다. 위의 두 편을 영화를 본적이 없어서 뭐라고 말할 수 없다. / 소크라테스의 참주제(황제)에 반대의 단초는 어쩌면 이방인 고르기아스의 카이로스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열린 한계에서 결정할 수 없는 것에 머물지 말고 인간의 본성과 삶의 방식에서 작은 좋은 일이라도 하자는 것이다. 영혼은 한계 없지만 현실의 한계인 경험의 영역에서 이런 저런 방식에 대한 분류와 배치는 중요하다. / 수많은 영화에서도 분류가 필요하고 어떤 배치에 속하지 않을 수 있는 영화에 대해서도 다루어야 할 것이다. 운동 이미지의 분류에서 벗어나는 행동-이미지란 이미 사물의 공간화가 아니라 인격의 또는 인간적인 것의 이미지에 대한 심성적[감화] 이미지와 결합된 것이리라. 사물을 오래 여러 방식으로 다루면, 인간적인 측면을 분류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수석 수집가의 사물의 분류는 인격의 반영물이듯이, 영화가 새로운 실재성을 드러낸다고 할 때, 인습적이고 일상적 인간이라 하더라도 인간 본성(내면)을 드러낼 때 작품이 되는 것이 아닐까?
Q5: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인상을 받는다: 당신이 무엇보다 흥미 있어 하는 것, 그것은 자연주의와 정신주의(spiritualisme) 이며 (한편으로 부뉴엘(Buñuel, 1900-1983) 스트로하임(Stroheim, 1885-1957), 로지(Losey, 1909-1984), 다른 한편으로 브레송(Bresson, 1901-1999) 드레이어(Dreyer, 1889-1968)를 말하자), 다시 말하면 자연주의의 몰락과 퇴행, 또는 4차원인 정신(l’esprit)의 도약과 상승 이다. 이것들은 수직적 운동들이다. 당신은 수평적 운동에, 행동의 연쇄에, 예를 들어 미국 시네마에 관심이 덜한 것 같다. 그리고 당신이 신실재주의와 뉴벨바그에 접근할 때, 때로는 당신이 행동-이미지의 위기를 말하고, 때로는 그 일체 안에서 운동-이미지의 위기에 대해 말한다. 당신에게 있어서 그 순간에, 운동을 넘어서 다른 이미지 유형의 출현 조건들을 준비하면서 위기에 처한 것이 모든 운동-이미지인가? 또는 운동-이미지의 다른 두 측면인 지각작용들과 순수 감화작용들을 그 당시에 존속하게 하고 즉 강화하게 하면서 [위기에 처한 것이] 행동-이미지만 인가? (73)
GD – 스트롬볼리(Stromboli, terra di Dio, 1950: fr. Stromboli 속에 이방인 여인이 있다고 하자. 그녀는 참치 낚시로, 참치의 고민, 화산의 분출을 통해서 지낸다. 그녀는 그러한 것을 때문에 반작용하지 않고, 응답도 하지 않는데, 그것은 너무 강도가 크다. “나는 끝났다, 내가 두렵다, 어떤 불가사의, 어떤 아름다움, 제기랄(mon Dieu)‥…” 또는 유럽 51(Europe 51, 1952)의 부르주아제도는 공장이 되어서: “나는 단죄받은 자들을 본다고 믿었다‥…” 그러한 것이, 내가 믿기로, 신실재주의의 큰 발명이다. (74) [왜 들뢰즈는 로셀리니의 스트롬볼리(1950)와 유럽 51(1952)를 언급했을까? 신실재론의 작품이기 때문만이 아니리라. 두 작품에는 감화작용에 대한 내용을 끌어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지는 혼자가 결코 아니다. 고려해야 할 것은 이미지들 사이의 연관이다. 그런데 지각작용이 순수 시각적이고 음성적[청각적]이 될 때, 지각작용은, 그것이 행동과 연관이 더 이상 없는데도, 무엇과 연관 속에 들어가는가? 그것의 동력적 이어짐[연결]으로부터 절단된 현실적 이미지는 잠재적 이미지와, 즉 심성적 이미지 또는 거울 속 이미지와, 연관 속에 들어간다. (75)
우선사람들은 보는 것, 그것은 온시간(le Temps), 즉 시간의 탁자보들, 직접적 시간-이미지이다. 그것은 운동이 그쳤다는 것이 아니라, 운동과 시간의 연관이 뒤집어졌다는 것이다. .. 전도된 것은 시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운동이다. 몽타쥬(le montage)[나열]는 필연적으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방향(sens)을 바꾼다. 몽타쥬는, 라푸자드(Lapoujade, 1921-1993)가 말한 것처럼, 몽트라쥬(le montrage)[전시]가 된다. 둘째로 이미지는 시각적이고 음성적인 고유한 요소들과 새로운 연관을 유지한다. 사람들은 바라봄(voyance, 구경)은 그 요소들로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읽을 수 있는” 어떤 것을 만든다. 고다르의 방식으로 이미지의 교육학적 전체가 가능하게 된다. 결국이미지는 사유(la pensée)[누스]가 된다. 즉 사유의 메카니즘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동시에 카메라는 명제적 기능들을 위해 진실로 가치를 부여하는 다양한 기능들을 할당한다.(75) - [첫째 (공간 속에) 시간 계열로 배치가 시간적 간격을 제시할 것이고, 간격에는 이미지를 책의 쪽처럼 읽을 수 있는 방식이 있을 것이고, 그래서 이미지의 흐름이 사유[누스, nous]일 것인데, 카메라는 간격들 찍으면서 명제화할 것이다.]
이 세 측면에서, 내가 생각하기로, 운동-이미지를 넘어섬이 있다. 분류작업에서 보면, 사람들은 “시간적 기호들(chronosignes)”, “읽기 기호들(lectosignes)” “사유 기호들(noosignes)”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76)
Q5-m 질문자들은 추론의 상승을 정신 또는 시간의 경과로 상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 운동은 추론에서 부정성을 제외하고 하나의 관념으로, 또는 관념들이 병치된 공간으로, 향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는 심층에서 솟아남 또는 탈주선의 흐름과 다르다. 질문자는 전자의 추론적 운동을 수직적으로, 후자의 흐름을 수평적 운동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추론의 방향(상향)을 계급 또는 위계질서로 보면 카톨릭과 국가 체제를 옹호하고 견고히 하는 방식이 보인다. 사실은 심층에서 표면으로 올라오는 것이 수평적이고, 추론의 상향은 수직적인데, 그 상향이 동심원의 외연확장인 동연성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이다. 동연성의 범위에 들어오면 중앙이 지배원리가 먼 원의 원주에도 동일한 방식으로 힘과 권력을 미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중심과 변방 사이에 위계적 관계가 수직적이다. 종교는 그 힘의 행사를 심판과 천국이라는 겁주기와 달래기를 사용한다. 그러면 국가는 위기를 부추기고 노예적 예속[포로]을 심거나 자발적 종속[항복]을 강요한다. 식민지 정책은 이러한 방식을 작용(조작)하기 위해 법률적 구조를 심는다. 일제 사법의 지배가 존속하고, 미국의 점령으로 구 법률체계에다가 조약과 협정 속에 영어를 기준으로 한 것 자체가 그러하다. 아직도 일제와 자본제국의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입말과 노마드라는 전쟁기계가 필요한 이유(이때 이성이 쓸 수도 있다)이다 .(54RLH)]
Q6: - 당신은 언어학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고, 이런 학문에 영감을 받은 시네마의 이론들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읽을 수 있는” 것이 되었던 이미지들에 대해 말한다. 그런데 시네마에 적용된 “읽을 수 있는”이란 용어는 언어학적 지배력[영향력](“영화를 읽다”, 영화의 “강독들”)의 순간에 당당하게 인기를 얻었다. 당신에 의한 이 단어의 사용은 혼동을 초래할 위험에 처하지 않는가? 읽을 수 있는 이미지라는 당신의 용어는 언어학적 관념이 뒤덮는 것과는 다른 것을 뒤덮는가(은폐하는가)? 또는 읽을 수 있는 이미지는 당신을 언어학적 관념으로 이끄는가? (76)
GD –바쟁(André Bazin, 1918-1958)의 매우 아름다운 원문들 가운에, 그 하나에서 그는 사진은 거푸집이고, 주조물(un moulage)이라고 설명한다(그리고 사람들은 언어 또한 거푸집이라고 다른 방식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카메라는 전적으로 변조(modulation)이다. 영속적인 변조로 되어 있는 것은, 목소리들뿐만이 아니라, 소리들, 빛들, 운동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미지의 매개변수들(paramètres)들은 변이(변수)로, 반복으로, 깜박거림으로, 죔쇠로 등등으로 작동한다. (76)
따라서 이미지의 가시성은 가독성이 된다. 읽을 수 있음은 여기서 매개변수들로부터 독립성임을 지칭하며 그리고 계열의 수렴을 지칭한다. 또한 다른 측면이 있는데, 이는 우리가 앞서 주목했던 것들 중의 하나와 결합한다. 그것은 수직성의 질문이다. 우리의 시각적 세계는 부분적으로 수직적인 키(신장 身長)에 의해 조건 지워져 있다. 미국 비평가인 슈타인버그(Leo Steinberg, 1920–2011)는 설명하기를, 근대 회화는 순수하게 시각적 평면 공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직적 특권의 포기에 의해 정의된다고 한다. (77)
Q6-m – 영화가 회화나 조각보다, 공간의 계속적인 나열이 있고 시간의 간격이 있어서 “비지블(visible, 가시성)” 보다 “리지블(lisible, 가독성)”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서양화와 동양화의 비교에서 서양화는 그림 속에 사이(빈 것)가 없는데 비해 동양화에서 사이가 있어서 작품 속에 ‘깊이’라는 상상의 공간이 있다고들 한다. 그럼에도 서양화든 동양화든 시각적 환시를 일으키지 않고서는 깊이를 설명하기 쉽지 않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평면의 단일성을 벗어나 깊이와 중첩, [규비즘의]단면 사이의 간격을 표현하여 시간적 간격을 지니고 있다고 불 수 있으며, 이로서 화폭은 시간-이미지의 감화를 불러일으킨다. 그 회화가 ‘비지블’에서 ‘리지블’이라는 것은 단순한 평면 공간으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회화는 닫힌 공간 속에서 운동-이미지를 두께를 갖는 듯한 조합을 행한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계속되는 나열이 동일한 평면(화면)위에서 이루어지지만, 음악적 효과처럼 앞의 화면의 잔영과 결합 또는 혼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역할을 지니고 있다. 영화는 보는데서 완전한 이해와 인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의 이해 속에 개념작업이 있으며, 관객의 내재성과 연관에 따라 감화작용으로 감동과 감응을 보태어 인식과 재인식이 있다. 이 과정의 드라마는 시간지속의 흐름을 모방 또는 유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점에서 영화는 청각적 리지블과 같은 효과를 내포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 그러므로 책을 한번 읽고, 다시 읽으면서 감화의 양태들이 다르다고 하듯이, 보면서 앞의 경우들을 기억하면서 보거나, 영화를 한번 보고 다시 보면서, 관객 나름의 개념작업을 하면서도 감화작용에 빠져들 수 있다. 영화는 책(이론서)읽기 같은 언어로 되어 있기보다, 그림을 책처럼 넘기면서 보는 것(읽는 것)이다. 이 시각적 읽기(lisible)가 언어학의 이론과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두 번 세 번 다시 읽기에서는 읽는 이의 기억속의 지각들이 훨씬 더 많이 참여하고 부가하여, 화면의 지각을 풍부하게 한다. 이 풍부함은 화면이 갖는 것이라기보다, 관객(인격)이 투여한 경험적 지각들의 참여이라는 것이다. 들뢰즈는 언어로부터 사물에 대입하기 보다가, 심층의 감화작용이 보낸 기호들(signes)에 관심이 더 클 것이다. 원자론적 언어학이든 요소론적 언어학이든 내재성이 내보내는 기호들은 각 예술의 영역에서 다른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54RLH)
Q7: - 왜냐하면 아마도 수직성에 대한 원인 분석하기(mise en cause)는 현대 시네마의 중요한 질문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질문은 [브라질 감독인] 로차(Glauber Rocha, 1939-1981)의 마지막 영화의 핵심이다. 그 영화 지구의 시대(L'Âge de la Terre (A Idade da Terra 1980)는 찬란한 영화이며, 그럴듯하지 않은 평면들[프레임]을 허용하고 있으며, 수직성에게 진실한 도전을 포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적인 “실측의(實測의, géométral)” 각도 아래서만 시네마를 고려하기에, 당신은 본래 드라마적인 차원을 - 그리고 예를 들어 마치 히치콕(Alfred Hitchcock, 1899-1980) 또는 랑(Fritz Lang, 1890-1976) 같은 작가들이 이 시선을 다루었던 것처럼, 시선(le regard)의 문제에서 노출되는[나타나는] 차원을 - 회피하지 않는가? 첫째[실측 각도]에 관하여 당신은 기능을 마치 은연중에 시선에 참조하는 것 같은 “표절(la démarque, 평가절하)처럼 곧잘 언급한다. 그러나 시선의 용어는 단어 그 자체까지도 당신의 책에서 완전히 없다. 곰곰이 생각해서(délibérément) 인가? (77-78)
GD – 나는 이런 용어가 필수적인지를 알지 못한다. 눈은 이미 사물 속에 있고, 눈은 이미지의 일부이며, 눈은 이미지의 볼 수 있는 가능성(la visibilité)이다. 그것은 벩송이 제시한 것이다: 즉 이미지는 그자체로 빛나는 것이고 볼 수 있는 것이며, “검은 화면”을 필요로 할 뿐이다 검은 화면은, 눈이 다른 이미지들과 함께 모든 방향에서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방해하고, [또한] 빛이 분산하고 모든 방향으로 퍼지는 것을 방해하고, [또한] 빛을 반사하고 굴절한다. “항상 스스로 퍼져나가는 빛은 결코 폭로되지 않았다‥….” 눈, 그것은 카메라가 아니고 화면이다. 카메라에 관한한, 그것의 모든 명제적 기능들과 더불어, 그것은 제3의 눈이며 정신의 눈이다. 당신은 히치콕의 경우를 상기시킨다. 사실상 그는, 마치 트뤼포(Truffaut, 1932-1984)와 두셰(Douchet, 1929-2019)가 그렇게 제시했던 것처럼, 영화 속에 구경꾼을 도입했다. (78) [당신은 독일식 사변에 빠져 주체는 밖에 있다고 여긴다.]
히치콕이 시네마에 도입한 것은 따라서 심성적 이미지이다. 그것은 시선의 일[사건]이 아니며, 그리고 그것이 카메라의 눈이라면, 그것은 정신의 눈이다. .. 사람들은 선택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히치콕]은 고전인들의 마지막 인물이거나 또는 현대인들의 첫째 인물이다. (79)
Q7-m 이 대담에서 로차의 1980년 작품을 평가하는 것으로 보아, 1983년 영화1: 이미지-운동(Cinéma 1: L'image-mouvement, 1983)이 나올 때는 영화의 비평이나 이론이 완전히 개화한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영화의 이론에 벩송의 물질과 기억(1896)을 데려와 영화의 이미지를 무의식 흐름으로 설명할 뿐만이 아니라, 이미지의 총체도 수용한다. / 나로서는 벩송이, 흐름이 단절되고 경계 지워져 대상으로 틀을 갖추기 전에는, 우주도 몸도 사유 대상(이데아든 개념)도 추억도 그리고 소리와 그림도 이미지라고 한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이런 이미지이론을 영화의 변천사에서 대입시켜 설명한 것을 통해 벩송의 확장을 보게 되었고, 이런 관점은 들뢰즈의 큰 성과이다. 또한 들뢰즈가 벩송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물질과 기억(1896)이라 했을 때,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관념, 개념, 감화의 세 가지 철학적 방식에 대해 거의 말년에 쓴 라이프니츠의 주름을 읽고 나서야 이해되었다. 철학사는 관념, 개념, 감화로 전개되었을지라도 삶은 여전히 감화, 개념, 관념으로 확장된다. 이 방향은 소크라테스의 방향(sens)일 것이고, 들뢰즈는 그리스인이 되기를 권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92년에 논문 「플라톤과 그리스인들(Platon, Les Grecs)」을 썼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소크라테스가 경계했던 동방의 참주제(황제제)를 본 딴 로마의 황제와 바울의 크리스트는 인간 본성을 실현하는 철학이 아니며, 체제에 종속과 굴종을 심는 것으로 보았다. 스키조와 노마드를 괜히 꺼낸 것이 아니다. (54RLH)
Q8: - 당신에게 있어서 히치콕은 탁월하게 영화제작들을 한 영화인이며, 당신이 제3자적 성격(tiercéité)으로서 지적한 영화인이다. 관계들, 즉 그러한 것이 당신이 전체(le tout)라고 불렀던 것인가? 그것이 당신의 책의 어려운 점이다. 당신은 벩송을 원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전체는 닫혀있지 않고 반대로 열려 있고(l’Ouvert), 그것은 항상 열려있는 어떤 것이다. 닫혀있는 것은 집합들이며,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79)
GD – 열림은 릴케(Rilke, 1875-1926))에게 소중한 시적 용어로서 잘 알려져 있다.(79)
전체는 집합이 아니다 .. 전체는 다른 본성(자연)으로부터이며 시간의 질서로부터이다. 전체는 모든 집합들을 관통한다[가로지른다]. ... 벩송은 끊임없이 말한다: 온시간, 그것은 온개방이다. 그것은 변하고 있는 것이고, 매순간에 자연(본성)을 끊임없이 변하게 한다. 이 전체는 집합이 아니고, 한 집합[다양체]에서 다른 집합[다양체]으로 영속적 이행이며, 변형이다. (80)
그리고 이것이 무엇인지를 매번 탐구해 보라, 이것은 시간이며, 이것은, 이것들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 속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대로, 전체(le tout)이다. (81) [열려진 전체가 자연이며 생명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의 자기에 의한 자기 창조가 시간이며, 실재(진실)이다. - 이런 점을 시간-이미지는 잘 보여줄 것이다. (54MKG)] .
Q8-m, - 들뢰즈는 원자론적이든 요소론적이든 조합에 의한 단위인 집합은 벩송이 말하는 단위[다양체]도 아니고 흐름도 없다는 것이다. 집합론의 기댄 원자론적 의미론과 구조주의의 요소론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기원(아르케, 이유)을 깨닫게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미래에 예참하는 노력과 창조를 이해하지 못한다. 들뢰즈가 단순히 파라노이아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파라노이아의 순수이유를 간트 방식으로 비판해 보면 파라노이아에는 생명도 기억도 없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에서 라깡의 길은 추억의 조합인 집함론의 파라독스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벩송은 직관주의 수학이 등장하기 이전에 흐름과 기억이라는 사유에서 열려진 세계를 위상적으로 상정하였다. 물론 엔트피법칙과 전자기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수학의 단위 또는 통일성이 수학적으로 한계[경계]를 긋는, 관념(idée)이든 이유(raison)이든, 공간적이고 정태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이 고착적이고 폐쇄적 삶을 살아가게 하는 방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삶은 자연(본성)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자기를 창조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들뢰즈가 세상을 뜨기 전에 철학지에 기고한 글도 「내재성: 생명…(L’Immanence: une vie…)」이다. 들뢰즈는 스피노자 표현으로 내재적 권능의 발현을 기대하고 살았을 것이다. 내재성에서 우러나오는 그 감화작용을 지닌 것은, 자연 즉 생명은 영혼일 것이며, 어떤 관념과 이유에도 의존하지 않은 자주적이고 자발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깊이를 사유할 줄 아는 인간이, 이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발성의 발현 즉 자유! - 8천만과 8백만의 사유, 평화통일영세~중립코리아~(54RLH)
(11:01, 54RLH) (11:26, 54RLI)
*인물들**
1632 스피노자(Baruch Spinoza, lat. Benedictus de Spinoza, 1632-1677)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난 포르투갈계 유대인 혈통의 철학자이다.
1839 퍼어스(Charles Sanders Peirce, 1839-1914). 미국 수학자, 철학자. 실험실의 작업에 기초하여 칸트의 인식 비판에서 출발하여 “명제의 의미는 그것의 논리적(물리적) 귀결이다.”라는 준칙을 세워 실용주의로 길을 열었다.
1859 벩송(1859-1941), 프랑스 철학자. 물질과 기억(1897), 창조적 진화(1907)
1871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1913-1928)를 쓴 프랑스의 소설가. 이 소설은 1,000매를 넘는 대작으로 3인칭 수법으로 저술되어 있다. 장 상퇴유(Jean Santeuil, 1952), 생트 뵈브에 반대하여(Contre Sainte-Beuve, 1954)
1875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 보에미아 지방 프라흐 출신 오스트리아 작가. 시인, Mir zur Feier(1899), Le Livre d'images(1899) 1902년 이후 파리로 건너가 조각가 로댕의 비서가 되었다.
1879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 유태계 독일출생 미국 물리학자.
1883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유대계 소설가. 현재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에서 유대인 부모의 장남으로 태어나 독일어를 쓰는 프라하 유대인 사회 속에서 성장했다.
1883 바레즈(Edgard Varèse, 1883-1965), 프랑스 태생 미국 활동 음악가, 작곡가, 전자음악 선구자.
1885 스트로하임 (Erich von Stroheim, 1885-1957), 독일계 미국인. 배우, 감독, 시니리오 작가. 역작 탐욕(Greed, 1925)[7시간 짜리]을 완성
1885 들로네(Robert Delaunay 1885-1941) 프랑스 화가. 처음에 신인상중의 그리고 입체파. [들로네라는 이름으로 화가 다섯이다]
1885 소냐 들로네(Sonia Delaunay, née Sophie Stern, 1885-1979) 우크라이나 출신 프랑스 화가(로베르 들로네 부인),
1889 드레이어(Carl Theodor Dreyer, 1889-1968) 덴마크 영화감독. La Passion de Jeanne d'Arc (1928), La Parole (Ordet, 1955) 게르트루드(Gertrud, 1964),
1890 랑(Friedrich Christian Anton Lang, Fritz Lang, 1890-1976) 오스트리아 태생에서 독일인(1919-1935), 그리고 미국귀화(1935-1976)인 영화감독 Metropolis, 1927(공상과학영화).
1894 장 르누아르(Jean Renoir, 1894-1979) 인상주의 화가인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아들, 프로방스대학에서 수학과 철학을 전공, 1920년대에 감독. 위대한 환상(1937년), 게임의 규칙(1939년). 그는 오슨 웰스의 유명한 딥포커스 방식 이전에 ‘깊이있는 무대’(Staging in depth)를 통해 진실과 정직의 영화미학에 접근해갔다. 르누아르의 ‘깊이있는 무대’란 인물들이 전경쪽으로 이동하거나, 배경이나 중경의 인물들을 강조하는 미장센을 통해 깊이감을 착각하도록 만드는 방식이다. “그는 가장 위대한 감독이다. 그는 영화의 존재를 정당화한다.” 장 르누아르에 대한 데이비드 톰슨의 말이다.
1896 베르토프(Dziga Vertov, 본명 David Abelevich Kaufman, 1896–1954) 소비에트 전위 영화가, 편집 기획자, 영화감독, 이론가. L'Homme à la caméra, 1929)
1898 아이젠슈타인(Sergueï Mikhaïlovitch Eisenstein, 1898-1948) 소련 영화감독, La Grève 1924, Le Cuirassé « Potemkine » 1925, Octobre : Dix jours qui secouèrent le monde 1927
1898 미조구치(Kenji Mizoguchi, 溝口 健二, 구구 건이, 1898-1956) 일본영화감독. 구로사와(Akira Kurosawa)와 오주(Yasujirō Ozu)와 더불어 일본 영화의 거장이다. 雨月物語, 우월물어 Ugetsu monogatari 1953 (Les Contes de la lune vague après la pluie)
1899 히치콕(Alfred Hitchcock, 1899-1980) 영국 출생의 미국 영화감독. 스릴러 영화라는 장르를 확립하였으며 그 분야의 1인자이다. 현기증(Vertigo 1958년), 암살자의 집(The Man Who Knew Too Much (1934), 39계단(The 39 Steps, 1935)등에서 심리적 불안감을 연출하는 ‘히치콕 터치’를 창출하였다.
1900 루이스 부뉴엘(Luis Buñuel, 1900-1983)은 스페인과 멕시코의 영화 감독, 각본가. 1929년 달리와 함께 “안달루시아의 개(Un Chien Andalou, 1929)[16분]”. 스페인 태생 멕시코인 영화감독. 멕시코에서 죽었다.
1901 브레송(Robert Bresson, 1901-1999) 프랑스 영화인, 13편의 장편 영화 출품. Procès de Jeanne d'Arc, 1962 Au hasard Balthazar, 1966
1902 막스 오퓔스 (Max Ophuls, Ophüls, Maximillian Oppenheimer, 1902-1957) 유대계 독일 출신 프랑스-미국 영화인. Lettre d'une inconnue: Letter from an Unknown Woman, 1948) Lola Montès, 1955)
1906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소설가, 극작가. 3부작 소설 몰로이, 말론은 죽다, 명명하기 힘든 것
1906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1906-1977) 이탈리아 영화감독. 스트롬볼리(Stromboli, terra di Dio, 1950: fr. Stromboli .
1909 베이컨(Francis Bacon, 1909-1992) 아일랜드 태생 영국 화가. 대담성과 소박함, 강렬함과 원초적인 감정을 담은 화풍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09 로지(Joseph Losey, 1909-1984) 미국 영화감독, 제작자, 시나리오 작가. 에이젠슈테인 밑에서 공부한 경력 때문에, 멕카시즘으로 미국을 떠나 유럽으로.
1915 오슨 웰스(Orson Welles, 1915-1985), 미국 연극배우로 출발하여 영화감독으로. 시민 케인 Citizen Kane, 1941), 상하이에서 온 여인(The Lady from Shanghai, 1948).
1918 바쟁(André Bazin, 1918-1958) 영화와 텔레비전 비평가. 1938년 생클루 사범출신인데 교수자격시험 구술에서 낙방경험이 있다. Cahiers du cinéma의 창간자들 중의 하나.
1920 펠리니(Federico Fellini 1920-1993)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카비리아의 밤(Le Notti di Cabiria)(1956, 아카데미상 수상)에서 열심히 사는 현대 하층계급의 영혼구제의 길을 모색하였고, 달콤한 생활(La Dolce vita)(1960, 칸영화제 1등상 수상)에서는 부패한 로마의 풍속을 현대의 장대한 벽화(壁畵)로 묘사하였다. <8과 1/2>(1963)
1920 슈타인버그(Leo Steinberg, 1920–2011) 모스크바 태생, 유대계 러시아 출신 미국 비평가, 예술사가.
1921 라푸자드(Robert Lapoujade, 1921-1993), 프랑스 화가, 판화가, 영화감독(짧은 영화).
1922 알랭 레네(Alain Resnais, 1922-2014), 프랑스 영화감독. ‘시간’을 탐구하는 그의 실험은 현대 아방가르드 영화들의 종합판을 연상시켰다. 지난해 마리앙드 바에서(L’Ann dernie Marienbad, 1961), 1997년 작인 누구나 [과거에는] 그 노래를 알았다.(On Conna la Chanson, 1997)의 제목 뜻은 ‘누구나 아는 진부한 얘기’라는 관용어이다.
1922 파졸리니(Pier Paolo Pasolini, 1922-1975) 이탈리아 작가, 시인, 기자, 시나리오작가, 영화감독.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파시즘에 비판적이었는데 권력과 종교의 결탁과 끔찍한 살육을 사디즘으로 그린 영화 살로 소돔의 120일이라는 작품을 완성한 후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1922 로브-그리예(Alain Robbe-Grillet, 1922-2008) 프랑스 소설가, 영화인. 시공간 해체와 사도마조히즘이 돋보이는 아방가르드 영화감독. 샤로뜨(Nathalie Sarraute)와 함께 누보로망작가.
1928 리베트(Jacques Rivette, 1928-2016) 프랑스 영화 감독, 시나리오 작가, 영화 평론가, 잡지 편집자. 카예 뒤 시네마 전 편집장, 누벨 바그의 중심인물이다.
1929 스노우(Michael Snow, 1929-) 다양한 영역의 카나다 예술가. 화가, 조작가, 영화인, 사진가, 음악가.
1929 두셰(Jean Douchet, 1929-2019) 프랑스 영화 비평 및 영화사가. 작가이며 감독이었다
1931 메츠(Christian Metz, 1931-1993), 고등사범출신, 영화기호학의 프랑스 이론가. 영상언어를 음성언어로 변환하는 화면해설이 지니는 고유의 특성을 분석하였다.
1932 트뤼포 (François Truffaut, 1932-1984) 프랑스 영화인, 노벨바그의 중심인물.
1937 나르보니(Jean Narboni, 1937-) 알제리 태생, 프랑스 영화비평가, 역사가, 대학 강의자
1939 로차(Glauber Rocha, 1939-1981) 브라질 감독, 시나리오작가, 배우, 작곡가, 영화제작자. 브라질의 누보 시네마 선구자. L'Âge de la Terre (A Idade da Terra 1980)
1946 보니처(Pascal Bonitzer, 1946-) 프랑스 시나리오작가, 작가,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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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 놀이 규칙(La Règle du jeu, 1939) 프랑스 영화감독인 르느와르(Jean Renoir, 1894-1979)의 작품. 감독은 1930년대 말에 귀족제와 상류층 그리고 이들에게 봉사하는 하인들의 풍습화를 그리고자 하였다. 영화사에서 트뤼포에 따르면 “영화애호가의 경전이며 영화중의 영화”로 꼽는다.
1941 시민 케인(Citizen Kane, ou Citoyen Kane, 1941) 미국 감독인 오슨 웰스(Orson Welles, 1915-1985)의 드라마 작품이다. 가상인물 케인은 부호이며 37개 언론사와 방송국을 소유한 시대의 거물이다.
1950 스트롬볼리(Stromboli, terra di Dio, 1950: fr. Stromboli 이탈리아 감독인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1906-1977)의 작품이다. 로셀리니는 "믿음의 재발견"에 대한 영화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이 영화는 신과 피조물 사이의 대화를 문제삼고 있다. 다소 냉소적이고 이기적인 주인공과 그녀를 둘러싼 호의적이지 않는 환경 사이의 대면을 덧칠해 나가면서 풍부함을 더하는 영화다.
1952 유럽 51(Europe 51, 1952)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1906-1977)의 신실재주의의 작품이다.
1953 雨月物語, 우월물어 Ugetsu monogatari 1953 (Les Contes de la lune vague après la pluie) 미조구치(Kenji Mizoguchi, 溝口健二, 구구건이, 1898-1956)의 영화. 옹기장이 겐주로(Genjuro)와 주변이야기.
1955 오데트(Ordet, 1955): La Parole 덴마크 영화감독 드레이어(Carl Theodor Dreyer, 1889-1968)의 영화. 1930년경 덴마크 농가를 배경으로 루터파 가정의 아버지와 세 아들(Mikkel, Johannes, Ander)이 등장한다. 둘째가 신비적 발작을 한다.
1964 게르트루드(Gertrud, 1964), 덴마크 영화감독 드레이어(Carl Theodor Dreyer, 1889-1968)의 마지막 영화. 전직 유명배우인 부인 게르트루드는 변호사인 남편 구스타프를 떠난다. 그녀는 젊고 재능있는 장송(Erland Jansson)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1980 지구의 시대(L'Âge de la Terre (A Idade da Terra 1980)는 브라질 감독인 로차(Glauber Rocha, 1939-1981)의 영화이다. 여기서 주인공 안티크리스트 역할을 하면서 “나의 임무는 작고 보잘것없는 지구를 파괴하는 것이라”라 한다에 이에 대항하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인물들 넷이 등장한다.
프레임(frame) 영상의 물리적 둘레이자 틀을 말한다. 원자 또는 단어인 셈이다. 클로즈업(gros plan)은 프레임을 확대한 것이다. -/- 영화의 이어짐의 단위들로서, 쇼트, 씬, 시퀀스가 있다. / 쇼트(shot): 영화의 장면에서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기까지의 길이로서 한 문장인 셈이다. 씬(scene): 쇼트가 여러개 모인 단위이다. 쇼트가 명제(문장)라면 씬은 단락(단락 속에는 문장이 여럿 있음)에 해당한다. 시퀀스(sequence): 씬을 여럿 나열하여 사건 또는 경우의 과정을 보여주는데 이는 소절(小節)에 해당한다. 이 절들을 합하여 한 장을 이루고(단편영화), 장편 영화는 장들이 여럿인 하나의 논문(꼭지)이나 장편 소설과 같다. (lu 54MKG)
(14:22, 54RLH) (15:06, 54RLI)
* 덧글:
들뢰즈가 벩송의 물질과 기억을 깊이 이해하면서, 고다르의 영상작업(1976)에서 시각이미지와 청각이미지를 구별하려고 했을 때, 이미 이 구별의 착상을 뚜렷하게 한 것 같다. 물론 서양 미술사에서는 시각에 청각을 보태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왔다고들 한다. 그 과정에서 회화에 음악성을 도입하려한 클레(Paul Klee, 1879-1940)가 있듯이, 반면에 쓴글이 음악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시(詩)에서였다. 시각이미지와 청각이미지 사이의 조합 또는 혼성의 노력은 죽 있어왔다.
그런데 시청각이라 할 수 있는 영화와 TV에서 두 이미지들의 구별이 확연함에도 시청자에게 하나의 통일성처럼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변증법이라 말하는 하는 것은 오류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통일성을 갖지 않았으나, 신실재주의와 누벨바그에 의해 통일성에 대한 논의보다, 더 깊이로 들어간 것 같다. 즉 1830년대 이후로 사물의 내부로 들어가듯이, 1950년대 영상매체의 내부로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맥루한이 제기한 메시지와 매체(미디어) 사이의 관계에서 매체가 메시지보다 앞선다고 하듯이, 두 이지미들 사이의 연대를 실현하게 하는 점에는 다른 측면이 있다[감화작용일 것이다].
2000년 대 이후로, 여기서 소녀시대이래로 BTS의 대중가요의 길에도 시각이미지와 청각이미지 사이의 연관을 생각할 수 있다. 가요는 우선 청각이미지인데 여기에 TV와 영상매체가 시각이미지를 촉발시켰다고 해야 하나. 특이 이들이 외국으로 퍼져나가는데, 청각이미지에 앞서서 시각이미지의 역할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BTS는 청각이미지를 위해 영어를 입말로 쓰기도 한다. (혀로) 입말, (손으로) 쓴글, (눈으로) 화면, (귀로) 소리, 등의 역할(혼성이든 재현이든, 상연이든 공연이든, 총괄적 의미를 생산하는 것은 제도와 체계가 아니라 감화작용이라고 벩송을 이어받은 들뢰즈가 말한다. 자연을 토대로한 토지와 생태, 전설과 유물과 유적 등에서 오는 감화작용이 이유(raison)이다. (54RL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