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조선의 참 선비 최부의 <표해록>
역사학자들이 꼽는 세계3대 중국여행기는 일본 스님 엔닌이 쓴 <입당구법 순례기>,이탈리아인 마르코폴로가 쓴 <동방견문록>,조선의 선비 최부가 쓴 <표해록>이다.
최부는 성종 때 추쇄 경차관으로 임명되어 제주도에 파견되었다.
경차관이 하는 일은 군대를 살피고,관청의 곡식 손실을 조사하고,흉년이 든 해에는 백성이 굶주리지 않게 돌보고,
관청에서 사람을 가둘 때 제도와 절차를 잘 따르고 있는 지 확인하고,도망친 노비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제주도에 도착한 지 얼마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는 유교를 받드는 시대라 중국 송나라 주자가 만든 <가례>를 엄격히 따르는 것이 도리였다.
상례를 지키지 못하는 것은 죄라고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빠르게 돌아가신 아버지가 있는 전라도 나주로 가야했기에 최부의 마음은 조급했다.
한라산에 구름이 끼고 비가 오거나 날씨가 고르지 못할 때는 배를 타서는 안 된다고 말리는 사람도 있었고,
동풍이 알맞으니 떠날만 하다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배는 출항했다.
제주 목사가 장례를 도우라고 보낸 음식과 일행까지 43명이 동승했다.
하지만 출발한 지 4일째,우박이 내리고 큰 바람이 불면서 배는 아찔한 파도에 솟구쳤다 내리치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돛이 모두 부서졌다.
배는 표류하기 시작했다.
배에 탄 사람들은 최부를 원망하며 불평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자 그들을 설득했다.
"배가 뒤집힌 것도 아니고,부서진 것도 아니다. 표류하다 다른 나라에 이르게 되면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부모와 자식을 생각하며 몸을 아끼자"
영파부 경계에서 해적을 만난 후 일부 군인들이 바다에 제사를 지내지 않아 표류하게 되었다고 원망하자
논리적으로 그들을 깨우쳤다.
"신이 만약 영험이 있다면 어찌 나 한 사람이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고 너희의 정성을 저버릴 수 있겠느냐?
이 배가 표류한 것은 서두르다 순풍을 기다리지 못해서일 뿐이다."
배가 표류하다 중국 해변 마을에 도착했을 때 왜구로 오인받아 죽을 수도 있었지만 최부의 기지로 무사할 수 있었다.
당시 중국 해안 역시 일본 왜구들의 횡포로 피해가 컸기에 왜구라고 의심 받으면 먼저 죽인 후에 보고 해도 된다는 규정이 있던 때였다.
최부는 중국 명나라 관리에게 여러 차례 심문을 받았다.
필담을 통해 해박한 지식으로 선비로서 조선의 관리로서 품격를 보여 주었다.
일행에게도 조선인으로 예의와 품위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부탁했다.
결국 왜구의 혐의를 벗고 북경으로 호송될 수 있었다.
북경으로 가는 동안 항주의 넓은 제방, 양자강의 운하,주택,풍속 등 진귀한 중국의 문명을 보게 된다.
특히 국제무역에 대해 관찰하고 가뭄에 농사짓느라 고생하는 조선의 농민을 위해 수차를 만드는 법을 배웠다.
최부는 명나라 황제를 만날 때는 붉은 색 '길복'을 입어야 하는 규정에 따를 수 없다며 입고 있던 상복을 벗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상을 당한 사람은 진심을 다해야 하는데 화려한 옷을 입으면 예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결국 최부는 황제를 알현할 때만 잠시 상복을 벗는 것으로 타협했다.
최부 일행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기까지는 8000여리 길,135일이 걸렸다.
그가 쓴 표해록은 성종 임금에게 바친 보고서였다.
조선의 임금들은 표류민에 관심이 많았다.
표류민이 보고 들은 것은 나라에 중요한 정보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신들이 가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풍경일 것이고, 낯선 곳에서 살아 남기 위한 절박감으로 살폈던 기록이기
때문이다.
임금은 표류 과정에서 보고 들은 것에 묻고 쌀이나 옷감을 하사하고 생활이 안정될 때까지 세금을 면제해 주기까지 했다.
최부의 <표해록>을 읽으며 지도자가 가져야할 바람직한 리더십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리더십은 뭘까? 그것은 '사명감'이다.
리더는 사리사욕에서 벗어나 사명감을 가지고 몸을 던질 수 있어야한다.
해명과 변명,책임을 떠넘기는 행위로 일관하는 사람은 러더가 될 자격이 없다.
최부는 내게 조선시대 선비에 대한 갖고 있던 부정적인 편견을 씻어 주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절망 속에서 일행을 격려했다.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비굴해지거나 위선을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판단력을 잃고 허둥댈 때 삶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치 않았다.
배움에서 쌓은 지식을 어려움에 처한 백성을 구하는데 썼다.
그의 나이 34살,1488년에 있었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