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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천서각공방 원문보기 글쓴이: 우광성
본부 휘하 장시場市는 동쪽으로 용인龍仁・광주廣州・여주呂州・이천利川의 염로鹽路
와 통하였고, 북쪽으로 서울의 양도糧道와 인접했다. 그러므로 염상鹽商이 하루 동안 장
시에서 판매하는 양이 자그마치 수백 태駄이고, 미상米商이 하루 동안 판매하는 양도 또
한 백여 태보다 적지 않다. 그러나 각처의 상인들이 외지에서 먹고 잠을 자면서 왕래하는
것에 비해, 본부의 백성들은 외부에서 먹고 자는 비용이 낭비되지 않으니 소금을 무역貿
易하거나 쌀을 판매하여 얻는 이익이 촌민村民보다 많을 것이다.
관官에서 수채收債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처음 행상을 시작한 후 3개월이 지난 후【3달이
지나지 않으면 아마 이익을 얻기 힘들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3달을 기다린 이후에야
가능하다.】 매월 1냥 5전씩 나누어 납부케 하면, 19개월에 이르러 본전과 함께 탕감蕩減
되니, 19개월에 걸쳐 납부한 돈은 합이 28냥 5전이다. 백성의 경우 25냥의 관채官債를 모
두 갚게 되고, 관의 경우도 10분의 1의 이자를 본전과 함께 수봉收捧했으니, 이를 공사公
私가 모두 편리한 도로 삼는다면 백성의 생리가 저절로 그 가운데 있게 될 것이다.
삼남三南・기전畿甸・관동關東의 변장邊將167)은 그 수를 합하면 93진鎭이 되는데, 조정
에서는 매년 각 진에 군목軍木168) 36필疋을 예급例給하여 화약과 탄환으로 바꾸어 예상
치 못 한 일에 대비하게 하였다.169) 그러나 근래에 각 진에서는 이 군목을 모두 사용해 버
려 전혀 무취貿取하지 않아, 만약 영곤營閫170)이 적간摘奸171)할 때를 당해서는 남겨둔 약
간의 화약을 외진 곳에 다른 물건과 뒤섞어 내버려두고, 편비偏裨의 명목名目을 핑계 삼
아 뇌물을 보내 미봉彌縫하고, 군사 훈련을 할 때는 부근 가까운 읍邑의 고저庫儲에서 화
약을 이리저리 몰래 들여와 겨우 중단 없이 훈련할 뿐이다. 그러므로 평상시에 1근의 화
약도 저장한 것이 없다. 비단 해당 진鎭에 저장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훈련할 때가
다가오면 화약 가격이 얼마인지조차 따지지 않고 구무求貿하기 때문에, 각 읍의 군색軍
色이 고저에서 투매偸賣를 하여 읍과 진 모두 여유 분이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군대
에서 가장 긴요한 것은 화구火具만한 것이 없는데, 이미 화약이 없으니 장차 저 탄환은 어
디에 사용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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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변장邊將: 변경을 지키는 장수將帥로 첨사僉使 · 만호萬戶 · 권관權官 등의 제반을 통틀어 말한다.
168) 군목軍木: 군보로 받아들이던 포목布木을 말한다.
169) 【두주: 각 진에 매년 36필의 군목軍木을 예급例給하는 규례는 지금 여러 명목과 합쳐져 각 진에서 사라졌다. 지금 만약 공방
을 설치하여 화약과 탄환을 조성하는 방법으로 삼고자 한다면, 들어가는 물력物力 또한 반드시 별도로 조획措劃하는 계책을
만든 이후에 가능할 것이다.】
170) 영곤營閫: 감영監營 · 병영兵營 · 수영水營, 혹은 감사監司 · 병사兵使 · 수사水使 등을 통칭하여 부르는 말이다.
171) 적간摘奸: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 조사하는 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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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유로 약환계藥丸契를 서울에 설치하고, 저 93진에 매년 예급하는 군목軍木을 거
두어들여, 공인貢人으로 하여금 값을 받고 각각 해당 진에 화약과 탄환을 만들어 보내자
는 의론이 나온 지 이미 오래이다. 지금 만약 각 진의 군목을 편의에 따라 본부에 수납輸
納하고, 본부에서 휘하 백성들에게 계契를 만들어 화약과 탄환을 조성하게 하여, 각 해당
진에 나누어 보내 그 나머지 이익을 얻고, 또 해마다 본부에서 수 근斤의 화약과 수 개箇
의 탄환을 만들어 납부한다면 소민小民의 생리生利와 영문營門의 군기軍器에 모두 보탬
이 될 것이다. 근래에 들어 경외京外에 화기火器가 갖추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논의가 없
는데, 실로 막대한 우환이므로, 약환계를 창치創置하자는 논의를 그만둘 수 없다.
백성의 생업生業은 본래 차이가 있고, 풍속에 따라 산물産物을 제정함에는 각각 알맞은
방법이 있다. 불도佛島에 뽕나무를 심어 서관西關이 누에치기에 알맞은 고장이 되었고,
고림高林172)에 왕골을 심어 교동喬桐이 대자리를 생산하는 읍이 되었다. 대저 목화는 토
질에 따라 마땅하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으나, 뽕나무・산뽕나무・닥나무・옻나무
는 어느 곳이던 모두 적합하다. 또한 대부분 나무의 그늘은 모두 곡식에 해가 되지만 뽕나
무・산뽕나무・닥나무・옻나무는 척박한 토질을 비옥하게 변화시켜 식물을 잘 자라게
하며, 또한 사람의 생리生理에도 연관이 된다. 만약 본부에서 산을 끼고 있는 곳에 닥나무
를 심고, 습지와 가까운 곳에는 옻나무를 심으며, 높고 낮은 원야原野에는 뽕나무를 심어,
백성들이 이것을 생업으로 삼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면, 앞날에 그 효험은 서관의 명주
나 교동의 대자리보다 적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본부의 산천은 물이 맑고 모래가 깨끗하여, 좋은 품질의 종이를 만들기에 딱 알맞
다. 만약 백성들에게 종이뜨기[浮造]173) 방법을 가르쳐, 백성들이 닥나무를 심어 수익이
생길 수 있음을 알게 한다면, 포상을 통해 사기를 북돋아 주지 않아도 반드시 부지런해질
것이다. 다만 기전畿甸은 본래 이를 생업으로 삼지 않아서 비록 힘써 심고자 하더라도 그
묘목苗木을 얻기 힘드니, 이는 마땅히 본부에서 여러 방면으로 계획해야 한다. 그 수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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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고림高林: 고구려 때의 지명으로, 현재 인천시 강화군江華郡에 속한다.
173) 부조浮造: 종이뜨기로 풀이하였는데, 닥나무 섬유와 닥풀을 수조에 넣고 막대기로 저어 섬유의 엉킴을 풀어주고 염簾으로 섬
유를 건져내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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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으로는 삼남三南 및 기전 내에 지평砥平・양평楊平 등 닥나무가 있는 읍에서 값을
주고 널리 사들여, 본부 성 동서東西로 있는 밭두둑 사이에 넓게 심고, 그 밭의 농부에게
맡기고 기르게 해서 이익을 얻는다. 매년 해빙解氷하는 시기에 알맞은 방식대로 뿌리쪼
갬[裂根]을 하여 모종을 나누면, 5~6년이 지나지 않아 닥나무가 무성한 마을이 될 것이
다. 그러나 이러한 교도敎導 방법은 벼슬하는 자가 가혹하거나 게으르지 않고 편리를 따
라 이끌어 가야만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관장官長은 벼슬의 임기 만료가 있어 항상 지켜
볼 수 없으니, 마땅히 기개가 있고 사무事務를 아는 사람을 선택하여, 닥나무가 심어져 있
는 밭두둑 근처에서 전적으로 관리하게 하여 그 효과를 기다리고, 특별히 포상하는 법을
시행한 연후에야 공功을 거두어 들일 수 있다.
본부에는 삼남三南이 만나는 사통팔달의 도로가 위치해 있고, 또 그 땅의 형세가 금金과
수水가 상생相生하며, 줄지어 늘어선 별이 서로 이어져 완연히 천시성원天市星垣174)의 모
습을 하고 있으니, 실로 백공百工이 모여드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마땅히 본부 휘하에 각각
의 공인工人을 모집하여, 혹은 관전官錢으로 다스리고, 또는 요과料窠를 설치하여, 생계를
유지하며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공인을 모집할 때는 반드시 한곳에 정착할 만
한 사람들을 선택해야만 관청 곡식을 축내거나 흩어져 도망가는 폐단을 없앨 수 있다. 대
저 공장工匠이 흩어져 도망가는 것은, 밤낮으로 힘써 일한 대가로 받은 조그만 수익으로
겨우 생계를 꾸려가는데, 매번 관역官役은 혹독하고, 관장官長된 자들은 억지로 싼 값을
매기며, 물건의 완성을 심하게 독촉하고, 조금이라도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곤장을 치고
칼을 씌워 못하는 짓이 없으니, 어떻게 공장이 편안히 안착하겠는가? 하물며 본부는 아문
衙門이 많고 사역使役이 매우 빈번하니, 미리 후한 값을 결정하고 정례定例를 명백히 갖
추어 혹 털끝만큼도 정례 외에는 자기 멋대로 협박하거나 책망하지 못하게 한 이후라야 공
장이 모여들 것이고,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방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본부에서 동쪽으로 5리쯤 떨어진 곳이 바로 용인龍仁의 수진면水眞面이다. 본부 백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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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천시성원天市星垣: 천시원天市垣을 말하는 것으로 3원 중의 하나이다. 현재의 헤르쿨레스·뱀주인·뱀·여우·독수리· 북왕관·목자 등의 여러 별자리에 걸친 넓은 범위의 별자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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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모두 땔나무를 이 지역에서 채취하는데, 관문官門에서 5리쯤에 있는 이 지역이 다른
지역에 포함된 것은 땅의 넓이가 편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혹 변란이 일어나더라
도 성 가까운 곳에 있는 백성을 방어와 수비를 위해 불러 모을 수 없으니, 관방關防을 중
시하는 방도가 아니다. 마땅히 이 면面을 나누어 본부에 부속시켜 거리를 균등히 하고, 요
역徭役을 고르게 하는 방도로 삼아야 할 것이다.
본부가 유수부留守府로 승격된 후, 모든 공적인 사무에는 마땅히 역말을 사용해야 하고,
또 불시에 사역使役이 있기 때문에 역말을 관문에 오래도록 대기시키지 않을 수 없다. 만
약 외촌外村에 생활하는 역호驛戶175)를 평상시 성내에 입번하게 할 경우, 그 상황을 지탱
하기 어려울 것이다. 마땅히 본부 경계에 소재한 3개의 역촌驛村을 모두 본부 휘하로 옮
기고, 부성 근처에 있는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과 전토田土를 편의에 따라 환급換給하여,
그 생리生理를 갖추어 준 이후에야 공사公私 모두 편리한 도가 될 것이다.
본부에 이미 장용외영壯勇外營이 있고 또 양향糧餉과 성지城池가 있으니 본부 휘하에
서 사는 백성들은 비록 군적軍籍에 이름이 오르지 않았더라도, 모두 수하手下 친병이 된
다. 새로 사방에서 모집하는 초기에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도록 힘써, 그
들이 안심하고 일하며 정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나 여러 제반의 요과料窠에 자원
하여 입속入屬하는 자들 외에는, 일에 종사한 연수年數로 제한하여 신역身役에 관련된
수효를 침범하지 말고, 또 역役을 수행하는 도중 옮겨와 지내는 자가 있는 경우 관문關
文을 이급移給하여 탈급頉給해 준다면 사방에서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반드시 줄지어
모여들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성大城・명도名都 가운데 사람이나 재물이 번화하고 즐비한 곳으로 평양
平壤・안주安州・의주義州・함흥咸興・전주全州・대구大丘가 가장 먼저 일컬어지는
데, 모두 재화가 모여들고 흥판興販에 힘입어 저절로 풍족하게 된 곳이다. 본부의 경우,
재화나 흥판이 모두 앞의 여러 성城에 미치지 못하니, 번화하고 즐비하게 할 수 있는 유
일한 길은 조획措劃하여 그 방법을 힘써 다 하는 데 달려 있다. 이러한 내 견해에 대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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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역호驛戶: 역에서 필요로 하는 일이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배정되어 있던 민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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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들은 “이는 쓸데없이 자질구레한 말이다. 백성들을 모집해 크게 번성케 하는 계책으로
는 부족하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점이 있으니, 어찌 한 가지 일에서 나
온 하나의 이익이 일반 백성에게 두루 이를 수 있겠는가? 비교하자면 원기元氣가 만물을
길러 날짐승・들짐승・물고기들이 각각 제자리를 얻고, 봄바람이 변화를 북돋아 온갖 식
물이 모두 무성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비록 우매한 소견에서 나온 것이지만, 지금 이
여러 조목들은 진실로 마음을 다하여 조획하여, 각각 업業으로 삼은 일을 따라 생계를 유
지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니, 물이 가까운 곳에 있는 땅이나 숲이 무성한 곳에 있는 풀처럼,
어찌 저절로 윤택하고 잘 성장하는 이치가 없겠는가? 오직 편의便宜의 계책을 힘써 다하
는 데 달려 있으니, 앞으로 일어날 효험이 어떠한지는 지켜볼 뿐이다.
손자가 말하길 “무릇 많은 병력을 다스리는 것을 적은 병력 다스리듯 할 수 있는 것은 수
數를 나누는 데에 있다”고 했는데, 이는 수를 나누는 방법이 군제軍制에 있음을 인지한 것
이다. 군사軍師・여졸旅卒・양오兩伍는 한漢나라 제도에서 수를 나누는 방법이고, 군부
軍部・사초司哨・기대旗隊는 명明나라 제도에서 수를 나누는 방법이다. 병농兵農을 분
리하거나 일치시키는 것은 시대마다 그 제도가 다르지만, 분리와 일치 중 그 어느 것도 끝
까지 좋기만 한 계책은 없다.
대개 병사는 평소에 양성하지 않으면 연습할 수 없고, 실로 평소에 연습하지 않으면 병사
로 삼을 수 없다. 그러나 만일 평소에 양성하고자 한다면, 천하의 재력을 다 써도 양성할
방도가 없다. 이것이 끝까지 좋기만 한 계책이 없는 이유이다.
만약 지금 본부에 앞서 논의했던 양직陽稷 6면面・남양南陽 1면・용인龍仁 1면을 이속
移屬시킨다면, 호총은 2만에 가까울 것이다. 이 민총民摠에서 비록 장정의 병사를 엄별하
더라도 36초의 인원수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176) 이 36초를 4개의 번番으로 나누면 1개
의 번은 9초가 된다. 또 이 9초의 병사를 3개의 등等으로 나누면 각 등마다 3초가 된다. 매
년 10월 21일부터 12월 21일에 이르기까지 돌아가며 입번을 실시하는데, 10월 2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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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두주: 반드시 36초哨로 하는데, 25초는 오위五衛에 분속시키고, 6초 및 별군관別軍官·친군親軍으로 여러 열교列校를 신
칙하게 하며 대장 수하에 전속시킨다. 수성守城할 때 사위四衛는 사방을 나누어 지키고, 중위는 가운데에 위치해 접응接應
하고, 대장은 오로지 절제節制를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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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0일까지는 1번째 등 3개의 초가 입번하고, 11일부터 30일까지는 2번째 등 3개의
초가 입번하며, 12월 1일부터 20일까지는 3번째 등 3개의 초가 입번하여, 각각 만20일로
제한하여 이후 방번放番을 허가한다.
그 입번할 시기에 이르러, 첫날부터 4일까지는 입직장령入直將領이 영솔하여 사습私習
하고, 5일째 되는 날에는 중군中軍이 여러 장영將領을 영솔해 군사훈련을 하고, 또 6일째
되는 날부터 9일까지는 입직장력이 앞서와 마찬가지로 사습하고, 10일째에 이르러 유수
留守가 중군 이하를 영솔하여 훈련한다. 그 후 10일간은 모두 앞서와 마찬가지로 의식을
시행한다. 번차番次를 교체하는 날에 이르러 유수는 다시 신구번新舊番을 영솔하여 훈련
하고, 뒤이어 방번한다.
또 입번하는 시기에 매일 각 사람마다 각각 2되의 쌀을 지급하면, 각 사람마다 20일간 입
번하는데 들어가는 식량은 4말이 된다. 이를 미루어 계산해보면, 앞서 살핀 36초 중 당년
에 입번한 9초를 제외한 나머지 27초에서 각 사람마다 4말의 쌀을 거두면, 그 중 9초가 납
부하는 쌀만으로도 입번하는 9초에 들어가는 식량을 충족시킬 수 있다. 또 그 나머지 18
초가 납부하는 수를 가지고 9초의 번졸番卒에게 반찬거리를 정급定給하려 해도 여유가
있을 것이다. 또한 입번하는 시기에 이르러 시사試射177)와 포상하는 제도가 없을 수 없는
데, 이 남아 있는 쌀로 또한 조처하여 마무리할 수 있으니, 오직 잘 헤아리고 조치하는 것
이 어떠한지에 달려 있을 뿐이다.【36초를 모두 양정良丁으로 하면 보전하기 어려우니, 경
우에 따라 사노私奴를 그 사이사이에 포함시키면, 비록 2말을 줄이더라도 그 가운데서 조
획措劃할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의 양역良役은 1필로 치를 수 있게 정해져 있으나, 전錢으로 지급할 경우 2
냥이고, 쌀로 지급할 경우 6말인데, 이 수數가 1필의 값어치가 되기 때문이다. 지금 36초
의 병사들에게 매년 4말로 양역을 치를 수 있게 감정減定하여, 4개의 번으로 나누고 돌아
가며 입번한다. 가령 갑甲 해에 1번째 번番 9초가 입번하면 2・3・4번째 번 27초의 병사
가 각각 4말의 쌀을 납입하여 입번하는 9초의 식량으로 삼는다. 또 을乙 해에 이르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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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시사試射: 조선 시대에 대신·고관·군사 등에게 활이나 총 쏘는 것을 시험하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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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째 번과 갑甲 해에 퇴번退番한 1번째 번이 함께 4말의 쌀을 납입해 2번째 번 9초의 식
량으로 삼는다. 계속해서 이 규범을 사용하여 병丙・정丁 해에 이르러서도 서로 바꾸어
가며 순서가 한 번 돌았으면 다시 시작한다.
번을 설 때에는 쌀을 줄이고, 번에서 물러날 때에는 쌀을 납부하여, 한 쪽으로 치우쳐
고생시킨다는 탄식이 없게 한다. 3년 동안 쌀을 납입하고 4년차에 이르러 한 번 번을
바꾼다.178)
이와 같은 것을 제도로 삼으면, 1년에 4말의 쌀로 양역을 치르는 것이니 지극히 적은 것이
고, 4년차에 한 번 입번하니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다. 또한 20일간 입번하는 사이에 평
상시 계속 정련하다면 무기를 다루는 방법이나 군대의 신호에 따라 진퇴進退하는 절차가
저절로 이목耳目에 익숙해지고, 또 4년차에 이르러 다시 입번한다면 군대의 절차가 점차
로 정련될 것이다. 이미 이 36초의 정련된 건아健兒들이 있으니, 그 완급함에 이르러 마땅
히 믿음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나라의 병제兵制는 읍마다 허술하여, 각 도道의 병수兵帥가 이른바 돌아가며 훈련을
행하고 있지만, 3년에 한 번 하는 데 불과하다. 비록 의식儀式에 의거해 시행하더라도, 그
연습하는 것이 하루에 불과하니, 좌작坐作과 진퇴의 절차는 이미 그 향방을 알기 어렵다.
하물며 혹 흉년이 들거나, 공사公私적인 일이 있어서 훈련을 정지하게 될 경우 5~8년 사
이에 한 번도 행진行陣하는 것을 보지 못한 자도 많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위험을 대비하
는 방법이겠는가? 만약 온 나라를 이 방법으로 다스린다면 나라의 군병들은 모두 정련될
것이나 조정의 경용經用에 많은 지장이 될 것이다. 진실로 대경장大更張・대변통大變通
이 아니라면 상황은 어찌할 수 없을 것이나, 오직 이 본부의 병제는 실로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매년 9초가 입번할 때 밥과 반찬거리는 영부營府에서 미리 대비하여 지급한다. 그리고 입
번을 시행할 때는 사람마다 각자 1짐[負]씩 땔나무를 마련하여 번소番所에 수납한다.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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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두주: 4년차에 이르러 한 번 경번更番하는데, 혹 그 사이 훈련하여 익힌 것이 정련精練되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면, 12초로
입번의 병사를 삼아 24초가 서로 바꾸어가며 쌀을 납입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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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番將은 375짐의 땔나무를 수봉收捧하여 번소에 저장하고 온돌을 때며, 밥을 지을 때 사
용토록 하니 또한 절목節目 사이의 일일 뿐이다.
맹자는 “3리 되는 성城과 7리 되는 곽郭”이라 했는데, 곽은 바로 외성外城이다. 성인데도
곽이 없으면 그 성은 성 역할을 할 수 없다. 본부의 성역城役을 근래 완료했는데, 지금까
지 외성을 축조하자는 논의를 듣지 못했으니, 경비가 다 떨어져서 다시 시행하기 어렵기
때문인가? 우리나라는 본래 외성이 없었기 때문에, 견문見聞에 사로잡혀 도리어 축조하
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인가?
우리나라는 삼한三韓 시대부터 성지城池가 모두 산 위에 자리해, 산성에 비록 외곽外郭
이 없더라도 오히려 지키고 방어하는 방도로 삼을 수 있었다. 평야에 위치한 성에 이르러
서는 진실로 성곽이 없으면 백 번 중 한 번도 지켜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함흥咸興・북청
北靑의 경우 모두 외성의 옛 터가 있는데, 이는 북로北路에서 전쟁할 당시 일찍이 축조했
지만, 평화로운 날이 지속되어 다시 수선하지 않으면서 평지가 되고 온통 밭두둑으로 변
해버린 것이다. 임진・계유의 난에 왜노들이 남원南原・진주晉州를 함락시킨 것은, 성
밖의 초목과 볏짚을 베어다가 큰 다발을 만들어 성 밑에 던져 쌓아 잠깐 사이에 성의 높이
와 같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 일찍이 외성을 축조했다면, 어찌 이러한 계책이 실
현될 수 있었겠는가? 본부는 평야에 자리하고 있어 사방이 적의 침입을 받을 수 있는 지
형인데, 어찌 외성의 축조를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겠는가?
그 축조의 제도를 살펴보면 성 외부로부터 40~50보를 한계로 삼아 모두 토축土築한다.
높이는 3장丈으로 제한하고 넓이도 이와 같이 한다. 우리나라의 성을 쌓는 제도를 보면
성 바깥쪽은 가파르고 안쪽은 평탄하게 한다. 이는 마땅히 안팎을 모두 가파르게 만들어
사초莎草를 입히고, 위로는 성가퀴[女堞]를 축조하며, 또 100보 정도 거리마다 각각 치성
雉城179)을 설치하면, 토축이기 때문에 석축처럼 깎은 듯이 가파르지는 않으나, 먼 길을 달
려와 공격하는 적들을 막기에 충분하고, 또 치성 위에서 움직이는 형세를 살필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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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치성雉城: 전방과 좌우 방향에서 접근하는 적과 성벽에 붙은 적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시설로, 성곽의 요소에 성벽으로부터
돌출시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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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들이 때를 틈타 마음껏 활개 치지 못할 것이다.
가령 남원・진주처럼 풀을 베어다 다발을 만들어 이를 밟고 성으로 넘어올 경우, 외성
의 성가퀴를 지키던 병사를 철수시켜 힘을 합쳐 굳게 지키고, 내성에서는 성 위에서 총포
와 화살로 집중 공격하면 적들은 좁은 틈 사이에서 이리저리 날뛰며 달려들 수 없을 것이
다. 비록 퇴각하려 해도 외성의 안쪽 면이 또한 가파르니, 이른바 진퇴유곡進退維谷라 할
수 있다. 또 가령 적이 성 밖에서 홍이포紅夷砲・호준포虎蹲砲 등으로 외곽의 한쪽 면을
부수더라도, 내성은 결코 손상을 입지 않을 것이다. 또 가령 적들이 외곽을 부수거나 또
는 풀을 쌓아 성의 높이와 같게 만들어 성곽 안으로 넘어오더라도, 내성과 외성의 사이는
4~50보가 될 뿐이고, 위에서 비처럼 화살을 쏘거나 돌을 날린다면 무용을 발휘할 형편이
안 될 것이니, 비록 100만의 적들이 있더라도 어찌 감히 우리를 침범할 수 있겠는가!
또 성의 제도를 보면, 반드시 내성과 외성의 사이를 각각 3, 4백 보로 제한하여 세로로 간
성間城을 축조하는데, 내성의 성가퀴 위에서 외성의 성가퀴와 바로 맞닿게 한다. 또한 좌
우 모두 가파르게 하는 제도를 사용하여, 아래 있는 자들이 붙잡고 올라오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두 성가퀴 사이에 용도甬道180)를 만들어 왕래에 편리하도록 한다. 혹 외성이 함락
되는 문제가 생기면, 그 성가퀴 위의 병사로 이를 통해 철수해 내성으로 들어오게 하고,
내성의 용도와 바로 맞닿은 곳은 문을 설치해 여닫는다. 또 세로로 축성한 간성에 각각 암
문暗門을 설치하여 평상시 통행하는 길로 삼는다. 혹시라도 난리가 일어나면 외성에 넘
어오는 적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며, 내성과 외성 사이에서 잠시라도 화살이나 돌을 피하
지 못하게 하다면, 이는 완전하고 뛰어난 계책이라 할 수 있다.
축조하는 방법도 만전을 다하였고 외성도 이미 토축했다면, 비록 지대址臺181)일지라도 반
드시 돌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작은 돌과 흙을 섞어 튼튼하게 공이로 다져 올리면 된다.
또 흙을 구할 때는 성 밖 10보쯤 되는 곳으로 한계를 삼아 땅을 파내어 축조한다. 축조가
끝난 후, 곧이어 흙을 파낸 구덩이를 좀 더 깊게 파서 참호塹壕로 삼는다. 참호의 좌우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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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용도甬道: 담을 양쪽에 쌓아 만든 통로이다.
181) 지대址臺: 담이나 집채 따위의 건물이나 구조물 아래 지면에 터를 잡고 돌로 쌓은 부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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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저城底에서 10보쯤 되는 곳에, 작은 돌로 튼튼하게 공이로 다져 올리고 사초를 입혀, 장
맛비에 무너져 구덩이를 메워버리는 우환을 제거하도록 한다.
투입되는 재물과 노동력을 논의해 본다면, 외곽과 내성의 차이는 있으나 주변 둘레가 5
천 보 이내이므로 10만 냥을 넘지 않는다. 또 그 망루・치성・성가퀴는 크고 아름다울 필
요가 없고, 오직 수선이 완전하면 될 뿐이다. 그러니 돌아보건대 지금 경비經費가 비록 궤
핍되었다고는 하나, 그 10만 냥을 조획하는 계책까지 견제하는 바가 있으니, 어찌 국가를
만세토록 유지할 수 있는 장책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는 것인가? 오직 결연히 실천하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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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영의 천일록 -- 관수만록 중에서....
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