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란하늘 아래에 나무의 녹색 잎들은 빨간색, 노란색으로 갈아입어 눈이 즐거운 계절이다. 충남 보령의 한 마을도 빨간 단풍잎과 노란 은행나무잎이 서로 고운 자태를 뽐내며 외지인을 반겨줬다.
이런 형형색색 마을 모습과 달리 그곳에서 살고 있는 한 장인의 옷과 손 그리고 얼굴에는 검은 가루가 뭍혀져 있다. 장인의 더럽고 거친 손과 대조적으로 그 손에서 단풍잎만큼 아름다운 남포 벼루가 탄생하게 된다. 손의 주인공은 60년 가까이 남포벼루를 만들고 있는 김진한 장인(72). 그는 ‘제 53회 충청남도 문화상’ 예술부문에 수상자로 결정됐다. 지난 1일 충남 보령의 평정마을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어릴 때부터 가업에 관심을 남포벼루는 김 명장의 할아버지 때부터 3대째 이어져오고 있다. 그러다보니 그는 아버지의 일을 쉽게 접하면서 자연스레 벼루 만드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7살 때부터 아버지의 작업장에 몰래 들어가 벼루를 갖고 놀다가 망가뜨려 매우 혼나기도 했다”며 “어려서부터 좋아하는 일이었는데 당시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고 말했다.
그때 당시만 해도 전기도 없는 방에 촛불하나만 키고 벼루를 만들었다고 김 명장은 회상했다. 벼루를 만들다보면 손이나 얼굴, 옷이 더러워지기 십상이고 부실한 장비로 문양을 조각하는 일은 매우 힘들었기에 그의 어머니는 벼루 만드는 일을 아버지 대에서 끝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우연히 부모님이 나눈 대화를 듣고 용기를 얻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뒤, 우연히 부모님이 대화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부모님의 대화가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벼루를 만드는 저를 안 좋게 보시고 나누신 줄 알았어요. 하지만 뜻 밖에도 ‘좌우지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진한이가 이 일을 좋아하는가보네’라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힘이 났습니다. 그 뒤 어머니는 반대하셨지만 저는 좋아하는 일이라 가업을 잇기 위해 열심히 배웠습니다”
어렵게 찾은 돌 박정희 정부 때 김 명장은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있는 을지문덕 상의 제작에 참여했다. 벼루의 세세한 모양을 조각하고 돌에 대해 잘 아는 그가 적임자였기 때문이다. 을지문덕 상을 제작할 당시 그는 재미난 얘기를 해줬다.
김 명장은 “청와대에서 1000만 원의 거금을 주고 을지문덕 상을 기한내로 만들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동상을 만들려면 1m 이상의 청동색 돌을 찾아야하는데 시간이 지나도 안 나왔다”며 “인건비로 매달 돈이 나가고 시간도 부족한 상황에서 충북 단양군의 한 계곡으로 갔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어 “계곡 상류에서 적당한 돌을 찾다가 없어서 내려오던 도중 돌로 이어진 징검다리를 보았다”며 “그 중 3번째 돌이 청동 색깔에다가 만들려는 동상과 크기가 딱 맞았다”말했다
김 명장은 그 이야기를 하면서 안도 한숨을 쉬는 듯 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과 달리 그 당시 정부의 권위의식으로 무서운 시절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시간 내로 일을 완성하지 못했더라면 상당한 곤욕을 치렀을 겁니다. 반면에 돌을 찾아 좀 뿌듯하기도 했어요. 그 돌이 상류에서 내려와 옛날부터 징검다리로 된 것인데, ‘저 돌을 만나려고 그간 고생을 했구나’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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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한 명장이 충남 보령 평정마을 입구돌 앞에서 벼루 기술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입구돌 뒷편에는 김명장의 아버지 때부터 벼루 기술자들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마음…벼루 박물관 건립 추진 김 명장은 아버지 때 벼루제작의 어려움을 회상했다. 약한 담금질로 조각칼을 만들면 칼이 무뎌 돌을 조각할 때 칼끝이 휘어져나가고, 강한 담금질로 조각칼을 만들면 제작과정에서 쇠가 휘어져나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지금은 현대 장비로 벼루를 조각하기 때문에 이런 걱정이 없다고 한다. 이렇듯 그는 전통산업도 현대의 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 옛날 전통에만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 전통적인 기법과 현대적인 기법을 함께 조합해서 21세기에 맞춘 공예품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전통만 지켜서 발전을 못하게 되면 아무런 의미도 없고 명맥만 유지하는 것만 된다”고 말했다.
현대 장비가 좋은 벼루를 만드는 것처럼 젊은 학생들이 벼루에 관심이 많아야 전통산업이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김 명장은 강조했다. 이를 위해 그는 한국 벼루의 역사를 담은 박물관을 만들어 젊은 사람들도 쉽게 벼루를 접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는 마을 입구에 ‘한국 벼루 본고장’이라는 입구돌과 자택 옆에 서예를 가르치는 공간, 벼루가 있는 전시관 등 별관 2채를 사비를 들여 만들어 놨다.
그는 “경복궁, 국립중앙박물관처럼 젊은 사람들이 박물관에 방문해 서예문화를 배우게 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며 “그러나 이런 박물관의 건설을 보령시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잘 안 돼 혼자의 힘으로 박물관을 짓고 있다”고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한국 벼루의 본고장’이라는 문구가 있는 입구돌 뒤편에는 김 명장의 아버지 때부터 벼루를 만드는 기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새겨져있다. 그는 자신의 활동을 사람들이 기억하기를 원한다.
“인생은 짧습니다. 짧은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남기고 가는 것이 중요해요. 벼루 등 서예문화를 배우려고 하는 젊은이들은 적고, 배운 사람들마저 돈벌이가 안 돼 포기합니다. 전문으로 하는 사람 한 둘에 불과하죠. 제가 지은 박물관에서 이런 활동을 한 사람들을 기억해줬으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