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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노기욱 문화유산 원문보기 글쓴이: 덕산방
참고자료
한국 기독교 역사 관련 사적
소래교회.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탑(인천). 배재학당.이화학당.
공주 영명학교. 서울 기독교청년회관. 김제금산교회(ㄱ자예배당).
강경 북옥교회(한옥예배당) 등
각 교파 및 지역 모교회
정동제일교회(감리회) 새문안교회(예장)중앙교회(성결) 공주교회(침례)
서대문 영문교회(구세군) 강화교회(성공회)
일제 강점기 순교 사적
제암리교회. 수촌교회. 매봉교회. 천곡교회. 남양교회. 노곡교회.
진해 웅천교회. 울릉도 저동교회. 삼척 천곡교회. 등
6.25전쟁 관련 순교 사적
애양원 및 기념관. 철원읍교회. 신안증도 증동리교회. 영광 영산교회.
상월그리스도교회. 해제 중앙교회. 등
선교및 복음전도 관련 순교 사적
양화진 외국인묘지. 인천 외국인묘지. 광주 선교사묘지. 전주 선교사 묘지.
노고단 기독교 선교 유적. 등
종합적 순교사적 및 기념관
한국기독교 100주년 순교자기념관.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광양기독교 100주년 기념관. 등
2008년 6월 14일 국민일보. 자료제공: 한신대 신광철 교수.
기독교 유적지
1 강화도
강화도는 영적인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48번 국도 끝에 위치한 창후리 선착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인
토머스 선교사의 숨결을 느낄수 있는 곳이다
1865년 9월, 1차 한국 방문길에 올랐을 때 풍랑을 만나 좌초됐던
그의 배는 물길을 따라 교동도 호두포에 다달았다..
교동도에는 1933년 세워진 파란색 지붕의 교동교회가 있다
또 강화에는 조선시대 어느 양반집의 유서 깊은 고택처럼 보이는
성공회 강화성당이 있다
1900년 건립됐고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한국식 교회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2 인천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은둔의 땅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생명을 건 항해 끝에 인천 제물포항 입항을 눈앞에
둔 벽안의 선교사들이 있었다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다
이들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곳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이
이곳에 서 있다.
1885년 7월 아펜젤러 선교사가 세운 이 교회에는 아펜젤러의 흉상과
1901년 만들어진 종, 내리역사 전시관 등이 있다
3 경기도
120년 한국 기독교 역사를 지켜온 순교자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용인시 양지면에 위치한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에는
순교자 300인의 초상화와 유물이 전시돼 있다
기념관 가는 길에 총신대 신대원에 들르면 1988년 복원된 소래교회를
볼 수 있다. 상인으로 만주에 갔다가 매킨타이어 선교사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서상륜이 동생 서경조와 함께 1883년 5월 황해도 장연군
송천리(소래마을)에 소래교회를 세웠다
또 평양 대부흥운동의 발상지로 유명한 장대현교회를 축소 복원한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도 있다
이천시 초지리에 위치한 기독교역사박물관에는 한국 기독교 역사와
관련된 각종 도서와 신문 잡지 등 10만여점이 소장돼 있다
4 강원도
원주에는 1905년 무스 선교사가 일산동에 원주제일교회를 설립하면서
선교의 기틀을 마련했다
교회 마당에 있는 모리스 선교사와 레어드 선교사 기념비가
초기 선교역사를 말해준다
원주 지역 의료선교는 1913년 서미감병원에서 시작됐다
이 병원은 원주기독병원 안쪽에 보존돼 있다
북쪽 화진포로 올라가면 외국인 선교사 별장을 볼 수 있다
홍천군에서는 찬송가 371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을 쓴
독립운동가 한서 남궁 억 선생과 한서 교회를 만날 수 있다
1918년 모곡리로 낙향한 한서 선생은 1919년 한서교회(당시 모곡교회)
를 세우고 무궁화 30만 그루를 심으며 조국 독립을 기도했다
5 영남
부산시 초량동에는 1892년 베어드 선교사가 세운 초량교회가 있다
1926-1932년 교회를 담임했던 주기철 목사가 사용한 강대상 등이
잘 보존돼 있다. 또 진해에는 주기철 목사의 신앙을 싹틔운
웅천교회가 있다.1919년 웅천교회에서 집사 직분을 받은 그는
이 기간에 마산시 문창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
은혜를 받고 목회의 길을 결심했다
문창교회는 영남 지역의 모교회로 독립운동가이며 부통령을 지낸
함태영목사가 시무했다
주기철목사도 1931-1936년에 이곳에서 사역했다
대구 지역에는 1933년 고딕식 별돌 예배당으로 지어진 대구제일교회
옛 성전이 있다
또 동산의료원에는 1910년 지어진 방갈로풍의 선교사 주택들이 있다
6 충청
충남 논산시 강경읍에는 1923년 목조건물로 지어진 북옥감리교회가 있다
당시 남녀유별의 유교적 풍습에 따라 교회 전면에 문을 2개 만들어
남자와 여자의 출입구를 따로 했고 대들보 좌우로 남녀 신도가
따로 앉도록 했다
또 한옥 예배당으로 지어진 전통의 성공회 교회도 볼 수 있다
1922년 세워진 청주시 성공회 수동교회
1907년 세워진 성공회 진천교회
1923년 한옥을 개조한 예배당과 기역자 형 사제관이 남아 있는
성공회 음성교회도 있다
충남 천안시 병천면에는 유 관순 열사 생가와 매봉교회가 담을
하나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있다
7 전남
전남 영광군에 들어서면 엄숙한 분위기에 머리가 숙여진다
이곳은 신앙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성도들의 순교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야월교회는 가족을 포함 65명의 성도가 순교했다
이 교회는 1908년 유진 벨 선교사에 의해 세워졌다
6.25 직전 후방 교란을 목적으로 남파된 공산 게릴라들이
이곳에 침투했다. 인민재판 등으로 마을을 유린하려 했지만 기독교인들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다
공산 게릴라들은 성도들을 염전에 판 웅덩이에 묻어 죽였다
인근 염산교회 성도들도 신앙을 지키려다 죽임을 당했다
모두 77명의 성도가 스러져갔다
이들은 <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를 부르며
하나님 품에 안겼다
청정 남해 바다가 보이는 전남 여수시 율촌면에는 손양원 목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애양원과 순교기념관이 있다
민주화 운동의 산실인 표시석이 있는 목포 중앙교회도 추천한다
8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읍에 위치한 이기풍 선교기념관에는 제주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 역사의 귀중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420석 규모의 대예배실과 소예배실 등을 갖춘 예배동에는 이목사 관련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특히 <세상과 짝하지 마라> <5분 이상 예수님을
잊지 마라> <주의 종은 하나님 다음 가는 분이시다> 등 이목사의
아내인 윤함애 사모가 막내딸에게 전한 유언이 잔잔한 감동을 전해준다
남제주군 대정읍 안성리 대정교회에 가면 제주 첫 순교자인
이도정 목사를 만날 수 있다
그는 17세때 이기풍목사의 열정적인 목회 활동에 감동받아 복음을
받아들였고 목회자가 됐다
이도정목사는 서귀포교회 중문교회 등 10여개 교회를 개척했고
활발한 전도활동을 이어가다 1948년 6월 예배를 드리러 가던 중
공산 폭도들에게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그외 순교지
고양·파주 지역
- 태극단원
고양군과 파주군 일대에서는 교통부에 근무하던 이장복(당시 26세)이 수백 명의 태극단을 조직하여 적의 전화선 절단, 경의선 파괴 등 지하유격활동을 펼쳤다.
인민군이 퇴각하기 직전인 9월 20일 인민위원회와 내무서의 노동당원들이 지방 좌익 세력 30여 명을 앞세워 태극단원들을 색출하기 시작하여 이태영(당시 29세)과 이두영(24)을 먼저 잡아갔다. 이후 태극단원 38명을 붙잡아 송포면(현 일산서구 송포동) 덕이리(현 일산서구 덕이동)으로 끌고 갔다. 좌익세력들은 조직부장 홍원식(당시 20세)과 간부 윤석만(당시 21세)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나서 창으로 찔렀으며 입을 찢어서 처참하게 살해했다. 또한 도주하던 이응만(당시 33세)을 붙잡아서 얼굴과 엉덩이의 살점을 도려내고 다리를 잘라 살해했다. 그리고 15∼16세 학생 등 38명을 모두 살해했다.
기독교인 학살
- 병촌교회 신도 학살
병촌성결교회는 논산시 성동면 개척리에 있는 작은 교회다. 그 당시 신도는 모두 74명이었다. 마을을 점거하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9월 27일에 반동분자라며 신도들을 구덩이 앞으로 끌고갔다. 정수일 집사는 당황하지 않고 공산당원들에게 '공산군은 패전하니 회개하고 구원 받으라'며 설득을 했다. 하지만 공산당원들은 쇠스랑, 삽, 몽둥이 등을 휘둘러 그녀의 시부모와 3명의 자녀, 시동생 가족 들을 때려 죽였다. 신도 66명(남 27명, 여39명)은 그렇게 참혹하게 맞아 죽었다.
- 임자진리교회 신도 학살
신안군 임자도에 초가로 지어진 임자진리교회가 있었다. 전쟁중에 이곳에도 남로당원들이 들어와 섬을 관리했다. 그런데 국군의 반격이 시작되어 북으로가야 할 상황인데도 그들은 섬을 떠나지 않았다. 이판일 장로와 이판성 집사는 노동당원들의 감시 속에서도 피난을 가지 않고 교회에 남아 있었다. 10월 5일 남로당원들은 두 가족을 포함해서 교인 48명을 백사장에서 칼과 죽창으로 살해했다.
- 두암교회 신도 학살
정읍시 소성면 애당리에 두암교회가 있었다. 두암교회에서는 평양 출신 임동선 전도사를 초청하여 부흥집회를 가졌는데 그때 공산주의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강연을 했다. 전쟁이 나자 공산주의자들이 두암마을로 들어와 교인들을 반동으로 몰았고 임동선 전도사가 공산주의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했다. 1950년 9월 하순경 퇴각하기 전에 김용은 전도사 동생인 김용채 집사와 우익인사들을 사살했다. 10월 19일에는 윤임례 집사와 그 자녀들을 붙잡아다가 몽둥이로 두들겨 패서 죽였고, 교회와 신도들의 집 4채를 불태웠다. 또한 김용채, 조선환, 김용술과 그의 가족, 김용은, 박호준 등 23명을 칼로 찌르고 둔기로 때려죽였다. 그 뒤 교회와 집 4채를 불 지르고나서 사라졌다.
- 소록도교회 목사 등 학살
전남 고흥군의 소록도교회에서 나환자를 대상으로 목회활동을 하던 김정복(당시 61세) 목사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붙잡혀 고흥내무서에 감금되었다가 9월 28일 우익 청년 30여 명과 함께 고흥읍 뒷산에서 피살되었다.
- 법성포교회 목사 등 학살
전남 법성포교회 김종인(당시51세) 목사는 9월 29일 인민군에게 끌려가서 살해당했고 그의 가족 4명과 교인 24명도 죽임을 당했다.
- 만경교회 목사 등 학살
전북 만경교회 김종한(당시 45세) 목사는 교인 15명과 함께 김제내무서 우물에 생매장되었다.
- 연동교회 목사 등 학살
목포 연동교회 최명길(당시 44세) 목사는 목포 건너편 작은 섬으로 가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인 20명과 배를 기다리다가 내무서원에게 체포되어 영암군 삼호분주소로 연행되어 심한 매를 맞고 숨졌다.
진실화해위에서 밝혀 낸 학살
2008년도에 진실화해위(진실·화해를 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학살사건 규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김제지역 학살
전 현직 군인, 대동청년단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원 등 우익인사와 부유층 지주, 그 가족들이 피해를 입었다. 1950년 7월 28일 김갑동을 비롯하여 12명, 8월 2일 최준식을 포함한 4명, 8월 26일 봉남면 신응리 종정장터에서 8명, 9월 27일 김제내무서 앞 야산 공터에서 김기철 등 62명, 만경면분주소 우물과 방공호에서 만경교회 교인 15명을 비롯해서 53명, 소토리 공동묘지와 화포리 창자마을에서 65명 등등 지방 좌익과 내무서원들에 의해서 모두 200여 명이 학살되었다.
서천지역 학살
1950년 9월 중순경 분주소와 내무서에서 조사를 받은 우익인사들이 풀려났다. 그러나 9월 25일경 다시 잡혀가서 12평짜리 서천등기소 창고에 240∼250명이 감금되었다. 9월 27일 01시경 좌익 세력들이 창고에 불을 질렀고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불에 타 죽었다. 이 학살은 북한 노동당 지시를 받아 자행되었다. 우익인사들은 군경의 가족, 대한청년단 등이었다. 학살은 노동당위원회에서 결정했고 정치보위부에서 집행했는데 서천군의 노동당위원장, 인민위원장, 정치보위부장, 정치보위부원 7명, 내무서장, 내무서부서장, 노동당 세포위원 등등이 관여했다. 나중에 이들 대부분은 경찰에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예산지역 학살
1950년 9월 9일 우체국 집배원 이종성, 상궁리 이장 이춘성, 고흥억 등이 지방좌익에게 끌려가서 고덕면 대천링서 희생당했고, 예산내무서에 수감되어 있던 고영준을 비롯해서 12명은 1950년 9월 25일과 9월 27일 사이에 향천리 공동묘지로 끌려가서 살해됐으며, 삽교면 삽교분주소 앞 양조장 창고에 수감되어 있던 12명이 삽교면 두리 공동묘지와 신가리 야산(일명 꽃산)에서 피살됐다.
이후 36명이 신가리 야산에서 죽었다. 신암면 예림리 사람들이 수복된 줄 알고 좌익 세력들을 폭행하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신암분주소와 지방 좌익들이 서용길, 유분석, 강한구, 황도연외 2명을 체포하여 종경리 야산으로 끌고가 살해했고 대술면 산정리 신작로 소나무 아래에서 15명을 학살했다.
금산지역 학살
1950년 7월부터 11월까지 지역 자위대와 인민군 등이 이장과 면장, 공무원과 그 가족 등 118명을 살해했다. 진실화해위는 이들의 가족관계등록부의 사망 일시를 정정하고 각종 기관 자료에 당시의 지역사를 바르게 기술할 것을 권고했다.
청원지역 학살
1949년 10월∼1950년 10월 동안 빨치산과 지방 좌익, 내무서원, 인민군 등에 의해 문헌자료와 참고인 진술을 통해 33명의 희생된 사실을 확인했다. 사람들이 인민위원회에 협조하지 않고 군경에 협조하였거나, 공무원을 지내고 대한청년단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강제 연행하여 학살했다.
부여지역 학살
1950년 9월 12일 윤대선을 비롯하여 3명이 인민재판을 받고 홍산면분주소에서 희생되었고, 구룡면 용당링서 4명 등 총 11명이 피살되었다. 피해자(면장, 기자, 의사, 교장)들은 지식인이자 국민회, 대한청년단 등 우익 활동을 한 사람들이었다. 학살 기록은 북한의 노획문서인 '부여군 검찰소 문서'에 나타나 있었는데 정치보위부와 내무서, 그리고 인민군이 협조하여 공조한 흔적이 엿보였다.
청주지역 학살
인민군이 청주로 들어온 이후 노동당원들은 청주형무소, 청주내무서, 정치보위부 등 3곳에 우익인사를 붙잡아다 감금했다. 이후 인민군이 퇴각할 즈음인 1950년 9월 24일∼25일 이틀 동안 일시에 3곳에서 집단적으로 학살했다. 청주형무소에 감금되었던 사람들은 형무소와 당산(동공원)에서 234명 이상이 사살되거나 둔기로 타살되었고, 청주내무서에서는 120명을 무심천으로 끌고가 총살했다. 정치보위부에 감금되었던 우익인사 95명은 좌익 세력들이 산성리 토굴로 끌고 가서 총살했다. 청주지역에서의 집단학살은 정치보위부 명령에 의해 인민군, 내무서원, 빨치산이 학살을 집행했다.
가평지역 학살
1950년 9월 말경 가평면 마장리 노루목고개에서 농민 200여 명이 인민군과 내무서원에게 학살당했다.
강화지역 학살
1950년 9월 29일 밤에 양사면 인화리 중외산 중턱에서 고상곽 외 48명이 인민군과 내무서원에 의해 학살되었다. 그 외 김주현 등 18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해자 주체는 인민군, 내무서원, 지방 좌익 등으로 확인되었다. 희생자들은 인민군에 의해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있었거나 벽보와 삐라를 만들어 배포하고 태극기를 게양했다는 이유로 피살당했다.
주문진지역 학살
1950년 7월 10일 교항리에서 대한청년단 100여 명이 인민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평남 양덕군 반공인사 학살
필자는 고향인 평안남도 양덕군 대륜면에서 좌익의 무자비하고 포악한 만행을 체험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무상몰수 무상분배 정책을 펼쳐 부친이 평생 동안 고생해서 모은 전답을 몰수했다. 친일을 한 것도 아니고, 백서의 한 사람으로서 열심히 산 것밖에 없는데 반동이라는 굴레를 씌워 탄압했던 것이다.
필자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고향에서 유격대생활을 했다. 그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은 행동이었지만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 도저히 그들 이념에 맞춰서 살수가 없어서 어쩔 수없이 선택했던 일이다. 김일성이 땅을 빼앗아 무상으로 나누어주자 농민들은 모두 좋아했다. 하지만 많은 농지세가 부과되었고 몇 년 뒤에는 모두 협동농장으로 바뀌어 모든 땅이 국유화되면서 사유재산은 인정되지 않았다.
소련군정을 등에 업고 이북에서 권력을 움켜쥔 김일성은 대한민국을 적화시키려고 혈안이 되었다. 그는 소련과 중국에 매달리며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더니 결국 동족에게 총을 겨누었다. 참으로 천인공로할 일이다.
전황이 악화되자 양덕군에서는 정치보위부 이재춘의 지휘 하에 보안서 직원들이 반공인사 49명을 붙잡아갔다. 그때 끌려간 사람들 중에 필자의 형인 박양신과 박양필, 그리고 외삼촌인 안창봉도 있었다.
1950년 10월 1일 보안서원들이 반공인사들에게 쇠고랑을 채워 성천군 쪽으로 끌고 가던 중 고물상을 운영하던 박홍범과 양덕병원장 이양곤이 탈출했다. 보안서원들은 성천면 군자리에 있는 탄광까지 끌고 가서 탄광구에 밀어 넣고 따발총을 난사한 후 돌을 던져 시체를 덮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뒤늦게 박홍범에 의해서 알려지게 되었다.
해주지역 학살
해주 학살 참상기가 1950년 10월 25일 조선일보에 실렸다.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950년 10월 17일 아침까지 해주시 해주인민교화소(형무소) 감방마다 우익인사가 감금되어 있었다. 전날 함포사격으로 전황이 불리한 것을 알아차린 적들은 감방 문을 밖에서 잠그고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그로 인해 4,500여 명이 불에 타죽었다. 그 와중에 간신히 탈옥해서 도주한 사람이 100여 명이었다. 하지만 얼마 못가서 적에게 발각되어 사살되었는데 시신은 모두 토막내어 길가에 던져졌다. 적의 만행은 10월 10일 경부터 시작되었다. 10월 17일 오후 미 제24사단 제21연대가 해주시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인민군의 학살행위는 멈추지를 않았다. 집단 학살당한 사람이 10,000여 명은 될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해주 교외에 있는 산의 동굴마다 시체가 방치되어 시신을 찾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원산교화소 학살
북한에서는 전쟁 직후부터 정치보위부에서 요주의 인물들을 예비검속차원에서 잡아다가 협박과 고문으로 국가 변란, 반동죄 등을 씌워 감옥살이를 시켰다.
원산교화소에는 수천 명이 반동죄수로 잡혀와 있었다. 그중에는 38도선 접경지대에서 잡혀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다수의 공무원, 경찰관, 목사, 신부, 지주, 국군 포로 등이 있었다. 10월 8일 밤이 되자 죄수들을 불러내기 시작했다. 정치보위부원과 간수들이 4명을 1개조로 묶어서 밖으로 내보냈다. 밖에서는 인민군들이 트럭에 시동을 건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인민군들은 230여 명을 원산 앞바다로 끌고 가서 등에 돌을 매달고 둔기로 때려 바다에 던져 살해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 방법은 별로 효과적인 것이 아니었다. 시시각각으로 국군이 진격해 오고 있어서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원산교화소 맞은편 500m 떨어진 신풍리에 야산이 있었고 그곳에 커다란 방공호가 있었다. 인민군들은 길가에 길게 늘어서서 사람들을 그곳으로 끌고 갔다. 굴 안에서는 기관총을 든 간수 2명, 인민군 군관 1명, 촛불을 든 사병 1명이 서 있었다. 그들이 바로 학살조였다. 학살조는 사람들이 굴속으로 들어가면 시체 위에 앉게 한 후 총을 쏘아 사살했다. 나중에 방공호에서 발굴된 시신은 298구였다.
그 아비규환 지옥에서도 총알이 스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박명연, 황씨, 박 군, 평강중학교 2학년 권혁기, 원산방속국 아나운서 석상봉, 한준명 목사 등 6명이었다. 원산교화소의 일반 죄수들은 원산으로 들어온 국군이 감방 문을 열어주어 풀려났다.
원산에서는 시내와 신풍리 방공호, 원산 앞바다, 원산교화소, 우물 등지에서 학살이 진행되어 총 1,700여 명이 희생당했다.
함흥교화소 학살
함흥교화소는 중앙사를 비롯하여 1·2·3·4·5사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수감자 90%가 반동죄로 구속된 사람들이었다. 1950년 10월 10일경 수도사단 제18연대가 함남 정평군에 도달했고 함흥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10월 12일 함흥교화소에서는 징역 2년 이하 일반죄수 500여 명을 선별하여 석방했다. 그때 풀려나지 못한 소위 반동죄수가 12,000여 명이었다.
반동죄수들은 3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굶다가 10월 15일에 차례대로 끌려나가 함흥교화소 내에서 700여명, 충령탑 지하실에서 200여명, 정치보위부 지하실에서 300여명, 덕산의 니켈광산과 반룡산 방공호 등지에서 수천명이 집단으로 학살당했다.
고성군 저수지 학살
인민군이 유엔군의 북진에 쫓겨 국경지대로 올라가면서 곳곳에서 노동당에 비협조적이었던 양민과 반공죄수 그리고 우익인사를 처형했다.
평양시내의 용악산(292m)에서 7번째 골짜기를 일컫는 칠골동과 승호리·사도리·기림기 공동묘지 등지에서 6,500여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그 외 강원도 고성군의 저수지에서 800여명, 함경남도 영흥군 영흥초등학교와 방공호에서 1,520여명, 순천군 순천북서쪽 터널에서 200여명, 안변군에 소재한 신고산에서 천주교도 190여명, 고원군의 운곡면, 관평역, 흑토령 저지대, 성내리 공동묘지 등지에서 800여명, 함경북도 갑산군의 양유리, 부흥리 굴, 지경리, 우물 등지에서 420여명이 학살당했다.
신천지역 학살에 관한 진실
외국인이 북한에 입국하면 필수 방문 코스가 있다. 바로 황해도 신천군에 있는 신천박물관이다.
북한은 38도선을 넘어온 미군이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동안 신천군 전체 주민 25%에 해당하는 35,383명을 잔인하고 야수적인 방법으로 학살했다며 그 현장에 박물관을 지었는데 그곳이 바로 신천박물관이다. 신천박물관은 북한 주민과 해외 인사들에게 반미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신천박물관에 들어서면 안내원이 '미군이 900여명의 무고한 인민들을 강제로 방공호에 몰아넣은 뒤 공기구멍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르고, 수많은 여성들을 온천 휴양소로 끌고 가서 농락한 뒤 연못에 빠뜨리고 수류탄을 던졌다'고 설명한다.
과연 북한의 선전대로 그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러나 진실은 그렇지가 않다.
황해도 신천군과 재령군 일대에서 반공의거를 목적으로 비밀결사 단체 구국동지회, 광복동지회가 결성되었다. 광복동지회의 정자환은 무기 수송차량을 탈취하여 소총 200정으로 청년단원을 무장시키고 무장봉기의 때를 기다렸다. 유엔군이 북진할 무렵 인민군은 수백 명의 종교인, 조선민주당원, 청우당원, 지식인, 지주, 반공학생 등을 예비검속으로 붙잡아 살해하기 시작했다. 1950년 10월 13일 광복동지회는 청년과 애국시민의 호응 속에 만세를 외치며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반공의거군은 5일간 인민군과 사투를 벌여 신천지역을 장악했다. 북쪽으로 퇴각하던 인민군 패잔병들은 안악군으로 들어가 안악중학교 강당 지하실에서 600여명의 주민을 학살하고, 서하면 청년 72명을 붙잡아 난도질을 가해 처참하게 학살했다. 한편 신천군에서는 인민군에 의해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자치회를 구성하여 노동당, 민청, 여성동맹, 농민동맹, 직장동맹 간부들과 그 가족들을 처단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역사책『조선전사』26권에는 '…신천 땅을 강점한 미제침략군 우두머리인 해리슨 놈의 직접적인 지휘 밑에 계획적으로 감행되었다. 이 살인마는 1950년 10월 17일 미제침략군이 신천을 강점한 첫날에 '나서 지주, 악질종교인, 고리대금업자, 건달꾼 등 인간쓰레기들을 제 놈의 졸개로 긁어모아 인민학살에 내몰았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은 사실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내용이다.
1950년 10월 17일 오후에 미 제24사단 제19연대가 재령에 들어왔다. 이 부대는 재령의 도로교차점에서 북진하는 부대를 도왔다. 제19연대 본대는 진남포를 향해 곧 북상했고, 제3대대 L중대가 재령과 신천일대의 경비를 맡았다. L중대는 이틀이 지난 10월 20일에 북진을 위해 재령을 떠났다.
따라서 북한이 주장한 '미군이 52일 동안 신천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은 억지다. 그리고 '해리슨'이 학살을 지휘했다고 하는데 그것 역시 거짓이다. 미 제19연대에 '해리슨'이라는 장교는 없었다.(한국논단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