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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38권
9. 변정품(辯定品)①
9.1. 여러 형태의 선정(禪定)[1]
1) 4정려(靜慮)
이와 같이 온갖 지(智)의 차별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다음으로 ‘지’의 근거가 되는 선정[定]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인데,1) 오로지 온갖 정려(靜慮)만이 능히 다 같이 [‘지’의]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먼저 정려에 대해 분별하기로 한다.
혹은 앞에서 [성자나 이생과도] 공통되는 [부처의] 공덕 가운데 ‘지’에 의해 성취되는 무쟁(無諍) 등의 공덕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으니,
이제 다음으로 그 밖의 법(즉 선정)에 의해 성취되는 공덕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먼저 [그러한 공덕의] 근거가 되는 선정[定]에 대해 분별하기로 한다.2)
바야흐로 온갖 선정 중에서 정려(靜慮, dhyāna)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정려의 네 가지에는 각기 두 가지가 있으니
그 중의 생(生)정려에 대해서는 이미 설하였고
정(定)정려는 선(善)으로, 심일경성(心一境性)이지만
수반하는 법과 함께 할 경우 5온을 자성으로 한다.
초정려는 사(伺)ㆍ희(喜)ㆍ낙(樂)을 갖춘 것이며
뒤의 정려일수록 점차 앞의 지(支)를 떠나게 된다.
논하여 말하겠다.
일체의 공덕은 대개 정려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먼저 정려의 차별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한다.
여기에는 모두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초정려와 제2ㆍ제3ㆍ제4정려가 바로 그것이다.
어찌 온갖 정려에는 ‘자(慈)’ 등과 같은 [서로에] 공통되지 않는 명칭[名想]이 없는 것인가?3)
어찌하여 여기서는 다만 ‘초(初, 즉 제1)’ 등의 네 가지 수(數)에 근거하여 개별적인 명칭을 설정하는 것인가?
여기에 공통되지 않은 명칭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오로지 하나의 지(地)만을 두루 포섭하는 [공통되지 않은] 명칭은 없으니, 모든 정려에는 각기 두 종류, 이를테면 정(定)과 생(生)의 차별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온갖 생정려(生靜慮)는 앞에서 이미 논설한 바와 같으니, 이를테면 제4정려에 여덟 가지가 있으며, 초정려에는 두 가지가, 그 밖의 정려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4) 그렇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의 지(地)를 전체적으로 드러내는 개별적인 명칭은 존재하지 않는다.
온갖 정정려(定靜慮)의 경우, 전체적으로 상(相)에 차별이 없다. 즉 이러한 네 정려 자체에 대해 전체적으로 말하면, 그것들은 다 선성(善性)에 포섭되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니, 선의 등지(等持)를 자성으로 삼기 때문이다.5) 그러나 만약 이에 보조적으로 수반하는 법[助伴, 즉 상응ㆍ구유법]과 함께 하는 경우라면, 5온을 자성으로 한다.
이러한 [‘생’과 ‘정’의] 두 가지 정려는 이미 동일한 것이어서 그 차별을 알기 어렵다.
그리고 [정정려의 경우, 전체적인] 상에는 차별이 없다고 하였을지라도 지(地, 단계)에는 차이가 있다.
즉 ‘지’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 수(數)에 근거하여 그 명칭을 나타낸 것으로, 그래서 ‘초[정려]’ 내지 ‘제4[정려]’로 설하게 되었다.
여기서 경주(經主)는 스스로 묻고 답하고 있다.
“무엇을 일컬어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고 한 것인가? 말하자면 하나의 소연에 전념하는 것이다.”6)
그러나 그의 답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안식과 의식의 두 식(識)이 만약 다 같이 하나의 소연에 [전념하였다면] [이것도] 마땅히 ‘심일경성’이라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다른 이치를 추구해 보아야 한다.
이를테면 [마음이] 만약 하나의 소의근(所依根)에 의지하고, 하나의 소연에 전념하는 것을 ‘심일경성’이라고 이름한다면, 한 찰나의 마음[一念]은 소연을 바꾸는 일이 없으므로 마땅히 일체의 마음 중에는 다 심일경성이 존재한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치상으로도 실로 다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이니, 각각의 찰나에 심ㆍ심소법은 하나의 경계대상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일체의 마음을 다 ‘선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여기서 ‘심일경성’이라고 설한 것은 다만 수승한 등지(等持)로 말미암아 선한 심ㆍ심소법이 상속하며 일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다시 말해 마음으로 하여금 하나의 소연 상에서 상속하며 일어나게 하는 것을 심일경성이라고 한다면),
마음은 하나의 [소의]근에 근거하여 일어날 뿐더러 자신의 경계대상(즉 전 찰나와 동류인 경계대상)을 반연하는 그 밖의 다른 마음(후 찰나의 마음)을 인기하여 속생(續生)시키니, 이것도 바로 ‘심일경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마음을 떠나 그밖에 별도의 등지(즉 심일경성)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경주의 힐난)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일찍이 심소법에 대해 널리 분별하면서
‘등지는 마음을 떠나 별도로 존재한다’고 이미 분별하였다.7)
이를테면 만약 마음 자체가 바로 삼마지라고 한다면, 마음으로 하여금 작용하게 하는 것(예컨대 ‘탐’ 등의 심소) 따위도 역시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니, [양자가] 차별되는 인연을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등의 논란을 모두 드러내자면 앞에서 [논설한] 바와 같다.8)
따라서 마음을 바로 삼마지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떠한 뜻에 근거하여 ‘정려(靜慮)’라고 하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된 것인가?
이러한 [선정은] 적정(寂靜)할 뿐더러 바야흐로 능히 잘 심려(審慮)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정려’라고 하였다].9)
여기서 ‘심려’란 바로 ‘진실로 요지(了知)한다’는 뜻으로,
이를테면 [계경에서]
“마음이 선정에 들어있을 때 능히 참답게 요지할 수 있다”고 설한 바와 같으니,
‘심려’라는 뜻 중에 ‘지(地, dhī)’라는 계(界, 즉 어근)가 들어있기 때문이다.10)
그리고 이 논(『현종론』)의 종(宗, 즉 유부종)에서 볼 때 ‘심려’는 결정코 ‘혜’를 본질로 한다.11)
[그러나] 훈석(訓釋)의 이치에 근거할 경우, 이는 바로 경계대상에 집중하여 고요하게 사유 계탁하는 것[凝寂思度]이기 때문에 ‘정려’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으니, 결정코 ‘혜’를 낳아 흐릿하거나 산란됨[濁亂]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러한 선정은 수승하고 두루 [존재]하는 연(緣)을 임지(任持)하여 참답게 사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려’라고 이름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수승한 [연]’이라는 말은 욕계에 대해 분별한 것이고,
‘두루 [존재]하는 연[遍緣]’이라는 말은 무색계에 대해 분별한 것이며,12)
‘참답게 사유한다’는 말은 전도된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분별한 것으로서, 능히 이러한 [수승하고 두루 존재하는 연을] 임지하는 선정이 바로 미묘한 등지이며, 이러한 미묘한 등지를 일컬어 ‘정려’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곧 지(止)와 관(觀)이 균등하게 작용[均行]하며 전도됨이 없는 등지를 바야흐로 ‘정려’라고 이름한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염오[의 등지]는 어찌 이러한 명칭(‘정려’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인가?
그것 역시 능히 ‘그릇되게 심려하는 것[邪審慮]’이기 때문으로, 서로 유사한 것에 대해서도 역시 이러한 명칭을 설정할 수 있으니,
세간에서 ‘부패한 종자’ 등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13)
따라서 [지관이 균등한] 일체의 선정을 정려라고 말하여도 아무런 과실이 없는 것이다.
만약 선성에 포섭되는 심일경성과 아울러 이에 수반하는 법을 네 가지 정려로 설정하였다면,
어떠한 특징[相]에 근거하여 초ㆍ제2ㆍ제3ㆍ제4정려로 설정하게 된 것인가?
사(伺)와 희(喜)와 낙(樂)을 갖춘 것을 초정려로 설정하였다.
즉 [어떤 정려의] 상태 중에서 선한 심일경성이 심(尋)ㆍ사(伺)ㆍ희(喜)ㆍ낙(樂)과 함께 상응하는 것이라면, 이와 같은 등지를 ‘초정려’라고 이름하였다.
본송(本頌) 중에서는 다만 ‘사(伺)와 상응한다’고 설하였지만, 이미 ‘심(尋)과도 역시 상응한다’는 뜻을 나타낸 셈이니, 만약 ‘사’가 희ㆍ낙과 함께 하는 경우라면 필시 ‘심’과 상응하지 않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사’가 배제된 상태를 제2정려로 설정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본송에서는 다만 ‘사(伺)를 갖춘 것’이라고 설하고 ‘심(尋)을 갖춘 것’이라고 설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마땅히
“[초정려는] 심ㆍ희ㆍ낙을 갖춘 것으로, ‘심’을 언급하면 ‘사가 존재한다’고 설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성취된다”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지분[支]을 점차 떠나게 된 상태를 제2ㆍ제3ㆍ제4정려로 설정한 것으로,
[사(伺)ㆍ희(喜)ㆍ낙(樂) 중] ‘사’를 떠나 두 가지 지분이 존재하는 상태와,
두 가지를 떠나 ‘낙’만이 존재하는 상태와,
세 가지 종류를 모두 떠나게 된 상태가 바로 그와 같은 순서의 정려이다.14)
그래서 심일경성을 네 가지 종류로 나누게 된 것이다.
2) 4무색정(無色定)
정려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무색정(無色定)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색정도 역시 이와 같으며
네 온으로, 하지를 떠난 것이다.
이와 아울러 위의 세 근분정도
모두 색상(色想)을 제거한 선정이라고 하니
무색정이란 말하자면 색이 존재하지 않는 선정으로
[출관] 후의 색은 마음으로부터 일어난다.
공무변처 등의 세 명칭은
가행에 따라 설정된 것이며
비상비비상처의 경우 [상(想)이]
어둡고 저열하기 때문에 그같이 이름하였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러한 무색정과 정려는 수(數)와 자성이 동일하다.
이를테면 [무색정도] 네 가지로, 여기에 각기 두 가지가 있다.
생(生)의 무생정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설한 바와 같으니, 「세간품(즉 연기품)」에서 생(生)에 따라 네 가지가 있다고 논설하였다.15)
정(定)의 무색정 자체에 대해 전체적으로 말하면 역시 선성(善性)에 포섭되는 심일경성이니,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본송에서] ‘역시 이와 같다’는 말을 설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보조적으로 수반하는 법[助伴]과 [함께 하는] 경우라면, [5온 중] 색온이 제외되니, 무색정에는 수전색(隨轉色)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16)
이렇듯 [무색정은] 비록 심일경성과 이에 수반하는 법(즉 4온)을 본질로 한다는 점에서 어떠한 차별도 없을지라도 하지를 떠날 때 생겨나기 때문에 네 종류로 나눈 것으로,
이를테면 제4정려를 떠났을 때 생겨나는 것을 공무변처(空無邊處)로 설정하였으며, 내지는 무소유처(無所有處)를 떠났을 때 생겨나는 것을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로 설정하였다.
여기서 ‘떠난다’고 함은 무슨 뜻인가?
이를테면 이러한 도에 의해 하지의 혹(惑)에서 해탈하는 것을 말하니, 바로 하지의 염오를 떠난다는 뜻이다.
바로 이러한 네 가지 근본정(根本定)과 아울러 위의 세 근분정(近分定)을 전체적으로
‘색상(色想, 색에 대한 관념)을 제거한 선정’이라고 말하는데,17)
공무변처의 근분정에 대해 이같이 말할 수 없는 것은,
하지(즉 제4정려)의 색을 반연하여 색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즉 [공무변처의 근분정에서는] 하지의 색상을 반연하기 때문에 ‘색상을 제거한 선정’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대종온(大種蘊)」에서
“색상을 제거하는 것은 바로 제4정려에서이다”라고 설한 것인가?18)
그는 욕계를 반연하여 자신의 몸 중에 존재하는 온갖 색[에 대한 상]을 점차로 제거하기 때문이다.19)
그러나 무색계에는 이러한 [색]상이 있을 수 없으니, 이전의 가행위에서 색상을 제거하였기 때문으로, [색상이 제거된 선정을] ‘근본[정]’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더라도 역시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
어떠한 뜻에 근거하여 ‘무색(無色)’이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인가?
그곳에는 어떠한 색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에 근거하여 [‘무색’이라 이름하였다].
그러나 후에 [그곳에서] 몰(沒)하여 하계에 태어나면 색은 마음으로부터 생겨난다. 현견하건대, 세간의 색법과 비색법도 역시 서로 의존하면서 일어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마음이 [변]이(變異)하기 때문에 색의 차별이 생겨나며, 색근에 차별이 있으면 식이 생겨나 바로 [변]이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색계로부터 장차 하계에 태어나려고 할 때에는 [과거]색에 수순하여 생겨난 마음이 상속하며 머무는데, 그것의 세력에 의해 하계의 색을 인기하여 낳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로지 그것(과거색에 수순하여 생겨난 마음)으로부터 생겨난다고는 말할 수 없다. 금[세](今世)의 색은 역시 또한 선세(先世, 과거세)에 색과 구행(俱行)하였던 마음의 상속을 연(緣)으로 삼고, 오래 전에 이미 멸한 색을 자신의 종자로 삼아 비로소 일어나니, 동류인은 과거ㆍ현재와 통하는 것이라고 인정하였기 때문이다.20)
그리고 모든 아라한은 반열반하고 나면 제온의 상속이 남김없이 끊어졌기 때문에 현재에는 제온을 낳을 만한 어떠한 연도 갖지 않는 것으로, 무색계로부터 몰한 경우와는 동일한 예(例)가 될 수 없다.21)
이와 같이 ‘무색’이라는 총체적인 명칭[總名]에 대해 이미 해석하였다.
어떠한 까닭에서 [무색정을] 공무변처(空無邊處) 등의 개별적인 명칭으로 말하게 된 것인가?
먼저 앞의 세 종류의 명칭은 가행에 따른 것으로, 가행을 닦는 단계에서 가없는 무변(無邊)의 허공(虛空)과 무변의 식(識)과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無所有]를 사유(思惟)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승해에 근거하여 가없는 무변의 허공을 사유하는 가행에 의해 성취된 무색정이면, 이를 ‘공무변처(空無邊處)’라고 이름하였다.
이를테면 만약 비록 색과 구유(俱有)할지라도 그 자체 색에 의지하거나 소속되지 않는 법이 존재한다면, 온갖 유정으로서 색으로부터 출리하기를 희구하는 자는 반드시 가장 먼저 그러한 법을 사유해야 한다.
즉 허공 자체는 비록 색과 구유할지라도 색에 근거[待]하여 비로소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허공은] 외법(外法)에 포섭되는 것일지라도 그것의 상(相)은 가없는 것[無邊]이어서 그것을 사유할 때 쉽게 색을 떠날 수 있다.
그래서 [색으로부터 출리하기를 희구하는 자는] 가행위에서 허공을 사유하는 것으로, 그것이 성취되었을 때에는 상응하는 바에 따라 역시 [허공 이외] 다른 법도 반연하기에 다만 가행에 따라 이러한 [공무변처라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
만약 승해에 근거하여 가없는 무변의 식을 사유하는 가행에 의해 성취된 무색정이면, 이를 ‘식무변처(識無邊處)’라고 이름하였다.
[여기서 가행은] 이를테면 순수 청정[純淨]한 여섯 종류의 식신(識身)에 대해 능히 요별하는 중에 그것의 상을 잘 취하고 나서, 승해에 안주하여 가상(假想)의 힘으로써 무변인 식(識)의 상을 사유 관찰하는 것으로, 이러한 가행이 선행하여 성취되는 [무색정은] 그것이 상응하는 바에 따라 역시 [식 이외] 다른 법도 반연하기에 다만 가행에 따라 이러한 [식무변처라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
만약 승해에 근거하여 일체의 모든 존재[一切所有]를 버리는 가행에 의해 성취된 무색정이면, 이를 ‘무소유처’라고 이름하였다.
즉 이러한 가행은 거칠고 동요[麤動]하는 무변의 행상을 관찰하여 그것을 싫어하여 버리기[厭捨] 위해 일으키는 것이니―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무소유]처를 ‘최승사(最勝捨)’라고 이름한다―,
여기서는 더 이상 [거칠고 동요하는] 무변의 행상을 짓는 것을 즐기지 않으며, 마음은 소연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적연(寂然)하게 머물기 때문이다.
상(想)이 어둡고 저열함[昧劣]으로 말미암아 네 번째 무색정(비상비비상처)의 명칭을 설정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이러한 경지의 선정 중에서는 ‘상’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처럼 밝거나 수승[明勝]하지 않기 때문에 ‘비상(非想)’이라고 이름하였으며,
그렇다고 ‘상’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비비상(非非想)’이라고 이름하였으니, 이러한 경지에는 여전히 어둡고 저열한 ‘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비상비비상’이라는] 말은 유정지(有頂地)의 ‘상’을 나타낸 것으로, 아래 7지(地)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상’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으며,
세 가지 무심(無心)의 상태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비상’이라고 이름하게 되었다.22)
어찌 유정지의 가행위 중에 [머무는] 모든 유가사(瑜伽師)들 역시 이같이 생각한다고 하지 않겠는가?
“온갖 [선정의] 상(想)은 병(病)과 같으며, 화살과 같으며, 부스럼과 같으며, 무상천(無想天) 중에서는 어리석음[癡]과 같으며, 어두움[闇]과 같지만,23) 오로지 비상비비상천에서만은 앞의 것(하7지와 무심정)과 상위하는 적정(寂靜)의 미묘함이 있다”
그러니 어찌 이것도 가행에 근거하여 설정된 명칭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이치상으로는 실로 마땅히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니, 관행자(觀行者)는 반드시 먼저 염상(厭想)과 무상(無想)을 닦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혹 어떤 이가
“관행자는 어떠한 연유에서 [비상비비상처의] 가행을 닦을 때 이같이 생각[念]하는 것인가?”라고 물으면,
필시 마땅히 이 같은 사실
(“유정처는 ‘상’이 어둡고 저열하기 때문이다”라는 사실)을 언급하여 물음에 대답해야 한다. 그래서
“‘상’이 어둡고 저열함으로 말미암아 [네 번째 무색정의] 명칭을 설정하게 되었다”고 설한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4무색정을 모두 ‘처(處)’라고 말한 것은, 이는 바로 온갖 유정[諸有]이 생장하는 처소[生長處]이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네 처소는 [거기에] 존재하는 유정이든 존재하지 않는 유정이든 여러 가지 업과 번뇌를 생장시키기 때문으로, 그러한 처소가 바로 열반이라고 그릇된 생각[妄計]을 타파하기 위해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유’를 생장시키는 처소라고 설하였던 것이다.
3) 8등지(等至)와 미(味)ㆍ정(淨)ㆍ무루(無漏)등지
무색정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등지(等至, samāpatti)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러한 근본 등지는 여덟 가지로서
앞의 일곱 가지에는 각기 세 종류가 있으니
미(味)와 정(淨)과 무루(無漏)가 바로 그것이며
뒤의 것에는 ‘미’와 ‘정’ 두 종류만이 있다.
‘미’란 애(愛)와 상응하는 선정이고
‘정’이란 세간의 선한 등지로서
바로 미착(味著)되는 선정을 말하며
무루는 말하자면 출세간의 선정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분별한 정려와 무색정의 근본등지(根本等至)에는 [이처럼] 모두 여덟 종류가 있는데,
이 가운데 앞의 일곱 가지 등지는 각기 세 종류(味ㆍ淨ㆍ無漏等至)를 갖추고 있지만,
유정(有頂)의 등지(즉 비상비비상처)에는 오로지 두 종류(미ㆍ정등지)만이 있을 뿐이니, 이러한 경지는 어둡고 저열하여 무루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의 미등지(味等至)란 이를테면 애(愛)와 상응하는 등지를 말한다.24)
‘애’는 능히 미착(味著)하는 것(즉 선정의 맛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라고 말한 것으로, 그 같은 ‘애’와 상응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이를 ‘미등지’라고 이름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애와 상응하는 등지’라고 말한 것은 자성에 근거하여 설한 것으로서, 이것도 등지(等持, 즉 심일경성의 삼마지)를 자성으로 삼기 때문이다.
만약 이에 보조적으로 수반하는 법[助伴]과 함께 하는 경우라면, 마땅히
“‘애’와 구유하는 품류의 법을 미등지라고 이름한다”고 말했어야 하지만,
여기서는 다만 ‘애’라는 한 품류의 과법(果法)만을 취하여 [말하였을] 따름이다.
정등지(淨等至)라고 하는 명칭은 세간의 선(善)한 선정을 가리키니, 번뇌의 더러움[惑垢]에서 떠난 것이기 때문이며, 무탐 등의 온갖 백정(白淨)의 법과 함께 상응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25)
이는 바로 선이기 때문에 미등지와는 다르며, 바로 유루이기 때문에 무루등지와도 다르다.
이는 바로 앞의 등지(즉 味等至)에 의해 미착(味著)되는 경계로서, 이것이 무간에 멸할 때 그러한 미정(味定, 즉 미등지)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즉 과거의 정등지를 반연하여 깊이 미착하면, 그때는 비록 미착되는 선정[所味定, 즉 정등지]에서 ‘나왔다[出]’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 능히 미착하는 선정[能味定]에 대해서는 ‘들었다[入]’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온갖 선정에서 나오는 것에는 모두 다섯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지(地)에서 나오는 것이며,
둘째는 찰나(刹那)에서 나오는 것이며,
셋째는 행상(行相)에서 나오는 것이며,
넷째는 소연(所緣)에서 나오는 것이며,
다섯째는 종류(種類)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초정려로부터 제2정려 등에 들면, 이를 일컬어 ‘[초정려]지에서 나왔다’고 하며,
동일한 경지에서 [동일한] 행상과 [동일한] 소연을 [반연하는 선정이] 상속 전전하는 상태에서 전 찰나와 무간에 후 찰나에 들어가면, 이를 일컬어 ‘[전] 찰나에서 나왔다’고 하며,
무상(無常)의 행상으로부터 고(苦)의 행상 등으로 들어가면, 이를 일컬어 ‘[고의] 행상에서 나왔다’고 하며,
색온을 반연하는 선정으로부터 수온 등을 반연하는 선정에 들면, 이를 일컬어 ‘[색온의] 소연에서 나왔다’고 하며,
유루의 선정으로부터 무루의 선정에 들거나 불염오의 선정으로부터 염오의 선정에 들면, 이를 일컬어 ‘종류에서 나왔다’고 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종류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미착되는 선정(즉 정등지)에서 나와 능히 미착하는 선정(미등지)에 들었다”고 말한 것이다.
어찌 두 말(미착과 등지)이 서로 모순된다고 하지 않겠는가?
‘능히 미착하는 것’은 바로 애[탐]으로서, 들어가게 된 선정[所入定]이 아니며, 들어가게 된 것은 바로 선정으로, ‘능히 미착하는 것’이라 말할 수 없는데, 어떻게 ‘능히 미착하는 선정에 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인가?
서로 모순되는 과실이 없으니,
현견(現見)하건대 상응하는 법의 경우 둘 중 어느 한 가지의 명칭을 언급함으로써 양쪽 모두[俱品]를 설할 수 있기 때문으로,
“장자(長者)에게 작의(作意)를 권유하여 기별(記別)하였다”고 하는 것과 같다.26)
즉 [미착과 등지는] 서로 상잡(相雜)되어 있기 때문에 두 말을 모두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
애(愛)와 상응하는 등지(等持)이기에 ‘미(味)’라고 이름한 것이며, 이
때 ‘애’는 등지의 힘이기 때문에 ‘선정[定, 즉 等至]’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두 말에는 더 이상 서로 모순되는 과실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선정의 애[탐]은 상속 현전한다.
즉 후 찰나의 모든 [선정은] 전 찰나[의 선정]을 반연하여 경계대상으로 삼으니,
‘미착되는 선정’은 바로 전 찰나에 소멸한 선정이며,
후 찰나에 생겨난 선정을 ‘능히 미착하는 선정’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이같이 능히 미착하는 애[탐]이 현재전할 때에는, 과거의 경계(이미 멸한 정등지)를 반연할 뿐 현재의 자성(즉 等持)과 상응법과 그리고 구유법은 반연하지 않으니, 필시 자성 등을 관찰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미래의 그것도 반연하지 않으니, 일찍이 영납(領納,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소연의 경계에 전념[專注]하여 [이리저리] 옮겨 다니지 않는 것을 바야흐로 ‘선정[定]’이라 이름하였으니, ‘애’와 상응하는 선정 역시 오로지 하나의 경계대상에 전념하기 때문에 선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밖의 혹(惑)과 상응하는 경우는 이와 같지 않으니, 이를테면 그 밖의 번뇌는 자신의 소연에 대해 ‘애’처럼 능히 마음으로 하여금 전념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마지(三摩地)로서 만약 ‘애’와 구유(俱有)하는 것이라면, 동일한 소연에 전념하는 것이기에 선(善, 즉 정등지)과 서로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무루정(無漏定, 즉 無漏等至)이란 이를테면 출세간의 선정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은 ‘애’의 소연이 되지 않기 때문에 미착되는 선정(즉 정등지)이 아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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