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상감매죽유문장진주명매병의 목독(木牘)
사윤수
그날 밤 소쩍새 소리에 처음 눈을 떴습니다 검은 허공이 실핏줄로 금이 가 있었습니다 사깃가마 속 사흘밤낮 회돌이치는 불바람이 나를 만들었지요 흙이던 때를 잊고 또 잊어라 했습니다 별을 토하듯 우는 소쩍새도 그렇게 득음 하였을까요 나는 홀로 남겨지고, 돌아보니 저만치 자기(瓷器) 파편 산산이 푸른 안개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모서리에 기러기 매듭 끈이 달린 국화칠색단 남분홍 보자기가 나를 데려갔습니다 다포 겹처마 팔작지붕 아래 슬기둥 덩뜰당뜰 당다짓도로 당다둥 뜰당* 거문고 소리 깊은 집이었습니다 달빛 애애한 밤 오동 잎사귀 워석버석 뒤척이면 나는 남몰래 사수 겹머리사위체 춤을 추곤 했지요 대숲에 댑바람 눈설레 치고 지고 내 몸에 아로새겨진 버드나무에도 당초호접무늬 봄이 수백 번 오갔습니다
여기는 커다란 하나의 무덤 그 속에 작은 유리무덤들, 이제 나는 침침한 불빛에 갇혀 있습니다 내가 죽은 것인지 산 것인지 나도 모르는데 날마다 많은 사람들 들어와 나를 쳐다봅니다 밖에는 복사꽃 붉은 비처럼 어지러이 떨어지는지** 전해주는 이 아무도 없고 그 사이로 천년의 강물 흘러갑니다 때로는 내가 흙이던 날의 기억 아슴아슴 젖어옵니다 누가 이곳에 대신 있어 준다면 나는 잠시 꿈엔 듯 다녀오고 싶건만 아, 그 소쩍새는 아직 울고 있을까요
출전 : 시집『파온』(2012, 시산맥사)
《작품 해설》사윤수(1964~, 경북 청도 출생)의「청자상감매죽유문장진주명매병의 목독(木牘)」은, 우선 특이한 제목이 독자들의 눈길을 끈다. 리움박물관에 소장된 이 희귀한 매병(梅甁)은 “대나무 ․ 매화 ․ 버드나무를 새기고 그 어름어름에 이하(李賀, 당, 791~817) 의 「장진주將進酒」를 흑상감(黑象嵌)한 청자에서 상상력의 날과 씨를 짜올린”(오태환) 시다. 특이하게도 좌측에 있는 위패를 시작으로 왼쪽으로 돌아가며 시가 적혔는데, 자기(瓷器)에 시문(詩文)된 내용은 인생의 절망을 파격적으로 그린 비가(悲歌)이다. 목독(木牘)(木 나무 목,牘 편지 독)에서 어림할 수 있듯, 시의 화자는 고려 시대 상감청자로, 자신이 “사흘밤낮 회돌이치는 불바람”을 이기고 태어난 사기 가마에서부터, 거문고 소리 좋은 집으로 팔려 가 행복했던 내력이며, 지금은 유리 무덤으로 은유된 어느 박물관 전시실 귀퉁이에서 외로이 생을 보내며 탄식 한다. 이 시는, 규방 여인의 내간체 독백 형식을 빌려, 나무 목판에 새긴 애절한 편지글이다. 행과 행 사이, 연과 연 사이 시공간을 천년으로 잡은 것부터 예사스럽지 않다. 이제 막 불가마에서 나온 매병의 첫 느낌을, “소쩍새 소리에 처음 눈을” 뜬으로 묘사한, 첫 행은 압권이다. 매병의 절실한 감정이입 역시, 깊은 감동과 울림을 준다. 그리고 “조각보를 침선하듯 한 땀 한 땀 쓰인 언문체가 돋보이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딱 그 공간에서 요긴하게 구실하는 토박이말의 맵시”와 “모국어를 요량 있게 부린”(오태환) 점 또한 격조가 있다. 사윤수의 시의 묘한 매력은 고려청자가 갖은 오묘한 비취의 신비가 스몄다는 점이다. 도공의 그 솜씨, 그 불꽃, 그 비밀들이 모두 매병에 흡수되어, 쓸쓸한 독백으로 울려오는 그 적요는, 얼마나 아름다운 한국의 미(美)인가.(김동원 시인·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