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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순정리론 제67권
6. 변현성품 ⑪
6.4. 도과(道果): 사문성(沙門性)과 사문과(沙門果)
1) 사문성(무간ㆍ해탈도)과 사문과
[앞에서] 사문(沙門, śrāmaṇa)과 사문과(沙門果)에 대해 논설하였는데, 무엇이 사문의 본성 즉 사문성(沙門性, śrāmaṇya)이며, 이러한 사문과의 본질[體]은 무엇인가? 그리고 과위의 차별에는 모두 몇 가지 종류가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청정도가 사문의 본성이고
유위와 무위가 사문과이니
여기(果)에는 여든 아홉 가지의
해탈도와 택멸이 있다.
淨道沙門性 有爲無爲果
此有八十九 解脫道及滅
논하여 말하겠다.
‘사문’이라고 하는 말은, 능히 영원히 [3]계(界)ㆍ[5]취(趣)ㆍ[4]생(生)의 온갖 생사의 도깨비[魑魅]를 종식시키고 제거하였기 때문에, 혹은 능히 부지런히 힘써 온갖 과실(過失, 즉 번뇌)을 종식시켜 영원히 고요[寂靜]하게 하였기 때문에 ‘사문’이라 이름한 것으로, 예컨대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스스로 이같이 해석하였다. “능히 부지런히 노력하여 여러 가지 악과 불선법, 잡염(雜染)의 과실을 종식시키고 제거하였으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그래서 사문이라 이름한 것이다.”1)
그리고 사문이 갖는 것을 ‘사문의 본성’ 즉 사문성(沙門性)이라고 일컬은 것으로, 이는 바로 사문이 닦아야 하는 훈법(熏法)이다. 여기서 ‘훈’이란 나쁜 냄새를 풍기는 번뇌[生臭惑]를 물리치고 없앤다는 뜻이다. 이는 바로 무루의 성도(聖道)를 본질로 하는 것으로서 세속의 도가 아니니, 능히 온갖 과실을 남김없이 그리고 완전[究竟]히 고요하게 하고 종식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이생(異生)은 비록 무소유처의 염오를 이미 끊었을지라도 진실의 사문이 아니니, 온갖 과실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잠시 과실을 고요하게 종식시켰을지라도 완전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2)
이미 무루도가 바로 사문의 본성이라고 하였으므로 유위와 무위가 모두 사문과(沙門果)가 될 수 있으며,3) 따라서 사문과의 본질은 유위와 무위 모두에 통한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사문과에 모두 네 종류가 있다고 설하였으니, 첫 번째가 예류과이며, 마지막이 아라한과이다.4)
[그렇다고 할 때] 도류지(道類智)의 품류는 바로 유위로서의 예류과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으며, 견소단법의 끊어짐[斷]은 바로 무위로서 예류과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도류지의 품류나 혹은 욕계 제6품을 떠나는 무루의 해탈도는 바로 유위로서의 일래과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으며, 견소단법의 끊어짐과 아울러 욕계계인 수소단 가운데 앞의 6품의 끊어짐은 바로 무위로서의 일래과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도류지의 품류나 혹은 욕계 제9품을 떠나는 무루의 해탈도는 바로 유위로서의 불환과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으며, 견소단법의 끊어짐과 욕계 수소단법의 끊어짐은 바로 무위로서의 불환과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진지와 무생지, 무학의 정견은 바로 유위로서의 아라한과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으며, 3계의 견소단법과 수소단법의 끊어짐은 바로 무위로서의 아라한과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박가범(薄伽梵)께서는 계경 중에서 다만 무위를 사문과의 본질이라고 설하였을 뿐이니, 예컨대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무엇을 예류과라고 이름한 것인가? 이를테면 3결(유신견ㆍ계금취ㆍ疑)을 끊은 자이다. 나아가 무엇을 아라한과라고 이름한 것인가? 이를테면 이미 탐ㆍ진ㆍ치 등을 영원히 끊은 자이다.”
어찌 불환과도 진(瞋)을 영원히 끊은 자라고 이미 인정하였다고 하지 않겠는가?5)
이 역시 어떠한 어긋남도 없으니, 해석한 뜻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의 뜻은, 일체의 번뇌의 때[垢]를 깨끗이 제거[淨除]한 이의 ‘끊어짐’을 설하여 ‘영원히 끊었다’고 말한 것으로, [번뇌의 때가] 여전히 남아있는 자의 그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번뇌의 때가 조금도 남김없이 끊어진 경우에만 ‘영원히 끊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변지(遍知)에 대해 설하면서 “무엇을 일컬어 ‘탐을 영원히 끊은 것’이라고 한 것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하였는데, 여기서의 뜻은 “만약 일체종(一切種)과 일체(一切)가 끊어졌으면 그것을 바로 ‘영원히 끊은 것’이라고 이름한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일체종[이 끊어졌으면--]’이라고 함은, 이를테면 자성(自性)을 끊고, 아울러 능연(能緣)을 끊었으면 바로 ‘영원히 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으로, 오로지 견고소단의 제법만이 끊어진 단계에서는 견고소단 법의 경우 자성은 이미 끊어졌지만 능연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며, 견집소단법의 경우 능연은 이미 끊어졌지만 자성은 아직 끊어지지 않아 ‘영원히 끊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 변지라고 말할 수 없다.6)
그리고 ‘일체[가 끊어졌으면--]’이라고 말한 것은, 이를테면 견멸소단 등의 열한 가지 혹(惑) 중의 1부(部)가 영원히 끊어진 것에 따른 것이다.7) 바로 이 같은 사실에 따라 9변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두 나타내었으며, 아울러 이생의 ‘끊어짐’은 변지에 포섭되지 않는 것임을 나타내었다.
(1) 사문과의 본질이 오로지 무위라는 비유자 설 비판
[사문과의 본질에 대해] 비유자(譬喩者)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사문과의 본질은 오로지 무위이니, 성교(聖敎)와 정리(正理)에 따랐기 때문이다. 성교라고 함은 앞에서 설한 것이 바로 그것이니,8) 여기서는 마땅히 정리에 대해 분별해 보리라. 모든 유위는 허물어질 수 있기 때문으로, [그것을 본질이라고 할 경우] 사문과 자체를 신뢰[保信]할 수 없다. [사문과 자체는] 바로 신뢰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오로지 무위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먼저 [앞서 인용한] 성교는 그렇지 않으니(다시 말해 사문과의 본질이 무위임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앞에서 해석한 바에 준(准)하였기 때문이다. 즉 앞의 곳곳에서 이미 “그가 인용한 다른 뜻을 갖는 경으로는 능히 승의의 이취(理趣)을 입증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해석하였다.9) 계경에서 비록 “예류과의 본질은 이를테면 3결을 끊은 것이다”고 말하였을지라도, “오로지 네 가지 선정을 닦는 중의 현법락주(現法樂住)와 같다”는 [식으로는] 말하지 않았다. 즉 경에서는 “이러한 [현법락주의] 선정은 바로 초정려이다”고 설하였는데, 실로 이러한 선정은 이치상 그 밖의 [선정과도] 역시 통하기 때문에 ‘오로지--’라고 말하지 않고서 별도의 다른 뜻이 있음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이 경(앞서 인용한 경)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니, 마땅히 [이를 근거로 사문과의 본질은 오로지 무위라고] 주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10)
만약 “그 밖의 다른 경에서 ‘현법락주는 4정려와 통한다’고 설한 경우가 있을지라도 이 경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11)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그러한 경(현법락주에 대해 설한 경)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또 다른 경에서는 “여섯 가지 법을 영원히 끊은 이를 설하여 예류과라고 이름한다”고 설하였거늘,12) 어찌 오로지 3결을 끊은 자만을 [예류과라고 하겠는가]?
또한 예류과의 성자가 [오로지 3결(유신견ㆍ계금취ㆍ疑)을 끊은 이라고 한다면], 이치상 실로 변집견과 탐 등을 지녔다고 해야 하며, 이를 끊은 자는 예류과가 아니라고 해야 하지만, [그것을 입증할만한] 별도의 증인은 없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그가 말한 바는 결코 기쁨을 낳게 할 수 없다(다시 말해 선설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 인용된 계경에 의해 “오로지 무위만이 바로 사문과[의 본질]이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제출한] 정리(正理)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만약 전도됨이 없는 지(智)라면 무위법에 비추어볼 때 가장 신뢰[保信]할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관행자(觀行者)에게 참다운 지(智)가 생겨나면, 능히 ‘나의 생은 [이미] 다하였다’는 등의 사실을 스스로 안다. 비록 이러한 ‘지’가 허물어질 수 있는 법이라고 할지라도 가장 신뢰할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능히 전도됨이 없는 뜻을 분명히 안 것[顯了]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결정코 네 가지 사문과의 본질은 유위와 무위 모두를 포함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다시 사문과는 역시 유위와도 통하는 것임을 입증하는 지교(至敎)가 있으니, 계경에서 “근(根)의 도피안(到彼岸, 바라밀다)을 반연하여 [사문]과(果)의 도피안을 분명하게 알며[顯了], [사문]과의 도피안을 반연하여 보특가라 역시 도피안을 분명하게 안다”고 설한 바와 같다. 오로지 유위법에 근거하여 보특가라를 설정하는 것으로, 보특가라는 [사문]과에 의해 [도피안을] 분명하게 안다고 하였기 때문에 [사문]과의 본질은 역시 또한 유위와 통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비유종(譬喩宗)의 이치상 결코 근거로 삼을 수 없는 무위에 근거하여 보특가라(즉 예류과 등의 성자)를 설정하였으니, 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무위는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으로,13)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법[無體法]을 가설적 개념[假者, 즉 보특가라]의 근거[因]로 설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즉 그들은 “무위는 오로지 일어나지 않는 것[不轉]을 특상으로 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에,14) [그것에] 의탁(依託)하여 보특가라를 설정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다만 그것(무위)에 근거하여야 [예류과 등의 보특가라를] 설정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가] 획득한 것은 바로 도(道)이기 때문에 [사문과의 본질은] 필시 유위이며, 이에 따라 향도(向道)와 과도(果道)에 근거하여 여덟 종류의 보특가라를 설정하였던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특가라가 이미 도에 근거하여 설정되었을 뿐더러 도 자체는 향ㆍ과에 통하는 것이거늘, [사문]과[의 본질]을 어찌 오로지 무위라고 하겠는가?
또한 설령 애써 노력하고 추구하여 획득한 것(즉 번뇌 단)을 [사문]과라고 이름할지라도 과위(果位)에 포섭되는 도(道)도 이미 추구하였던 것이거늘, 어떻게 그러한 도를 [사문]과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도 역시 추구하였던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계경 중의 가타(伽他)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이는 고요한 방에 머물며
용맹하게 진리[諦]를 사유하였으니
8해탈(解脫)과 3명(明)을 추구하여
만(慢)과 도거의 멸진을 증득하였기 때문이네.
또한 계경에서 “무상심(無相心)의 선정은 해탈[解]을 결과로 삼는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해탈의 본질[解體]은 바로 진지와 무생지이며, 선정은 바로 사문[성]이다.15) 이는 곧 아비달마(阿毘達磨)에서 설한 “사문과의 본질은 유위와 무위 모두와 통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정리와 성교가 [이처럼] 분명하여 조금도 기울거나 움직일 수 없다. 그럼에도 [앞서 인용한] 경에서 다만 [사문]과를 무위(즉 結의 斷)라고 설하였던 것은, 이러한 무위는 오로지 바로 [무루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택멸은 오로지 사문과(沙門果)일 뿐이지만, 도(道)는 [이와 아울러] 사문[성](沙門性)과도 통하기 때문에 생략하여 설하지 않은 것이다.
혹은 무위법(택멸열반)은 바로 결과(이계과)로서 결과를 갖지 않지만,16) 도(해탈도)는 두 종류(결과와 원인) 모두와 통하기 때문에 생략하여 설하지 않은 것이다. 혹은 무위법은 유위의 허물을 떠난 것으로서 [유정들로 하여금] 기뻐하고 즐겁게 하기 위해 [무위에] 치우쳐 설하게 된 것이다.
혹은 여기서는 오로지 무위의 결과(즉 이계과)만을 설하였을 뿐이지만, 다르게 말하고 있는 경도 있으므로 이에 너무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여기서는 오로지 세 가지 결(유신견ㆍ계금취ㆍ疑)이 끊어진 것 등에 대해서만 설하였을 뿐, 다른 번뇌가 끊어진 것에 대해서는 두루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계경에서는 “마음을 신속하게 회전(廻轉)시켜 정진하면, 능히 무상(無上)의 보리(菩提)를 증득하여 단식(段食)의 상(想)을 초월하고, 온갖 색의 상을 초월하며, 유대(有對)의 상을 몰(沒)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밖의 다른 ‘상’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17) [앞서 인용한] 이 경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별도의 다른 뜻에 의해 오로지 “무위가 사문과[의 본질]이다”고 설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2) 사문성과 사문과(續)
또한 역시 별도의 다른 뜻에 의해 사문과(沙門果)에 오로지 네 종류만이 있다고 설하였지만,18) 만약 별도의 다른 뜻을 폐(廢)하고 법상(法相)에 [근거하여] 논설할 경우 사문과에는 여든 아홉 가지가 있는데, 그것들은 다 해탈도와 택멸을 자성[性]으로 한다. 이를테면 3계의 번뇌를 영원히 끊기 위해 여든아홉 가지의 무간도를 일으켜야 하는데, [이 가운데] 견도에 포섭되는 무간도의 수는 여덟 가지이니, 법지인(法智忍)과 유지인(類智忍)에 각기 네 가지가 있기 때문이며, 수도에 포섭되는 것은 여든한 가지이니, 9지(地)에 각기 9품의 무간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든아홉 가지의 무간도는 오로지 사문의 본성 즉 사문성(沙門性)일 뿐으로, 이러한 사문의 본성은 무간도에 의해 생겨난다. 그러나 여든 아홉 가지의 해탈도는 역시 또한 유위의 사문과이기도 하니,19) 이는 바로 그것(사문성인 무간도)의 등류과(等流果)이고 사용과(士用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갖 무간도(견도에 포섭되는 여덟 가지와 수도에 포섭되는 여든한 가지)에 의해 끊어진 번뇌의 ‘단(斷)’인 여든아홉 가지의 택멸은 오로지 무위의 사문과일 뿐이니, 이는 바로 그것(사문성인 무간도)의 이계과(離繫果)이고 사용과(士用果)이기 때문이며, 그것(무간도)은 능히 이러한 장애(즉 번뇌)를 획득하는 득(得)을 끊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 해탈도도 역시 사문의 본성에 포섭된다고 하지 않겠는가? 온갖 무간도 역시 그것(해탈도)의 등류과이고 사용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간도 역시 유위의 사문과에 포섭되어야 하는 것으로,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바야흐로 온갖 무간도는 모두 다 해탈도의 결과가 아니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그러한 경우가 있다고 할지라도 다만 “무간도의 힘이 해탈도를 일으킨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니, 그것(무간도)의 힘은 능히 이것(해탈도)이 일어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을 끊을 수 있기 때문이며, 이것은 그러한 도와 필시 무간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탈도의 힘은 무간도를 인기할 수 없으니, 이것(해탈도)의 힘은 그것(무간도)이 일어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을 능히 끊을 수 없기 때문이며, 그것은 이러한 도와 필시 무간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20) 즉 비록 [해탈도와] 무간에 [무간도가] 생겨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다 그러한 것은 아닐 뿐더러 [오로지] 이것(해탈도)의 힘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니, 말하자면 [그것(상지 상품의 무간도)은] 어떤 때에는 그 밖의 다른 가행의 힘에 의해 인기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혹은 [그것은] 필경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무간도와 해탈도가] 서로 유사하다는 과실[類失]은 없는 것이다.
3) 사문과로서 네 가지만을 설한 이유
[그렇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계경에서는 사문과(沙門果)로서 여든아홉 가지를 설하지 않고, 오로지 네 가지(예류ㆍ일래ㆍ불환ㆍ아라한과)로만 설한 것인가?
어찌 경에는 별도의 다른 뜻이 있다고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어떤 별도의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인가?
바야흐로 어떤 이는 해석하여 말하기를, “모든 관행자(觀行者)는 오로지 네 가지 과위 중에서만 분명하게 기뻐하고 즐거워[歡悅]하며, 각혜(覺慧)를 낳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오로지 네 가지 과위만이 지극히 신뢰할만한 것이며, 그 밖의 다른 [사문]과는 그렇지 않으니, [네 가지 사문과는] 설혹 퇴실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죽지 않는 한 다시 획득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다른 어떤 이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로지 이러한 네 가지 과위에서만 순서대로 악취(惡趣)와, 그것의 원인과, 인취와 천취의 생에 의해 드러나는 [세계를] 능히 초월할 수 있기 때문으로, 오로지 상ㆍ중품의 탐 등의 세력에 의해서만 악취로 가 태어나고, 하품에 의해서는 [악취로 가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존재의 근본[有本]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욕계와 유정지(有頂地)가 바로 그것으로, 두 가지 과위는 유정지를 초월하고, 두 가지 과위는 욕계를 초월하기 때문에21) 오로지 네 가지만을 사문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혹은 온갖 번뇌에는 총체적으로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무기이고, 둘째는 불선이다. 즉 처음의 과위는 두 종류를 모두 초월하고, 뒤의 과위는 무기의 번뇌를 초월하며, 일래과와 불환과는 오로지 불선의 번뇌만을 초월하는데, 악은 초월하기 어렵기 때문에 오로지 네 가지로만 설정하였다.”
유여사(有餘師)는 [이같이] 말하였다. “박가범(薄伽梵)께서 여든아홉 가지의 사문과를 현[법]에 증지(證知)하지 못하였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오로지 네 가지 사문과만을 설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다섯 가지 이유에서 4과(果)를 설정하였으니
일찍이 획득된 도를 버리고, 수승한 도를 획득하며
끊어짐[斷]을 하나로 모으고, 여덟 지(智)를 획득하며
단박에 16행상을 닦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五因立四果 捨曾得勝道
集斷得八智 頓修十六行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끊어짐[斷]과 도(즉 해탈도)의 상태에서 다섯 가지의 이유를 충족하였을 경우, 부처님께서는 경에서 그 같은 끊어짐과, 아울러 끊어짐의 ‘득’과 구시(俱時)에 생겨나는 청정한 해탈도를 ‘사문과’로 설정하였다.22)
여기서 다섯 가지 이유란, 첫째 일찍이 획득된 도를 버리는 것이니, 이를테면 [4사문과의 단계에서는] 일찍이 획득된 과도(果道)와 향도(向道)를 버리기 때문이다.
둘째는 수승한 도를 획득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4사문과의 단계에서는] 과위에 포섭되는 수승한 도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끊어짐(즉 택멸)을 전체적으로 일으키는 것[總集]이니, 이를테면 [4사문과의 단계에서는] 하나의 과위를 획득함으로써 이전부터 획득해온 끊어짐을 전체적으로 획득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8지(智)를 획득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4사문과의 단계에서는] 일시에 네 가지 법지와 네 가지 유지를 전체적으로 획득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16행상을 능히 단박에 닦는 것이니, 이를테면 [4사문과의 단계에서는] 비상(非常) 등의 [행상을] 능히 단박에 닦기 때문이다.
즉 네 가지 과위에 머물 때에는 [이 같은] 다섯 가지의 이유를 모두 갖추게 되지만, 그 밖의 과위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여든아홉 가지 사문과를] 오로지 네 가지 사문과로만 설한 것이다.
4) 초월증의 일래ㆍ불환이 사문과인 이유
만약 오로지 청정도(淸淨道)만을 사문의 본성이라고 한다면,23) 유루도의 세력에 의해 획득된 두 가지 과위(초월증자로서 일래과와 불환과)가 어떻게 사문과에 포섭된다고 하겠는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세속도에 의해 획득된 ‘끊어짐’이라도
성도에 의해 획득된 것과 뒤섞였기 때문에
무루의 ‘득’이 이를 임지하기 때문에
역시 사문과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世道所得斷 聖所得雜故
無漏得持故 亦名沙門果
논하여 말하겠다.
바야흐로 무루도에 의해 획득된 택멸이 사문과에 포섭된다는 것은 이치상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極成]이다. 그런데 [일래과와 불환과의] 두 과위를 획득할 때, 온갖 세속도에 의해 획득된 택멸은 그 수가 매우 적을 뿐더러 다수의 성도에 의해 획득된 택멸과 더불어 전체적으로 하나의 득(得)에 의해 획득되어 함께 동일한 [사문]과를 성취하였다.24) 그렇기 때문에 이 경우 [택멸의 수가] 적은 것(세속도에 의한 것)을 많은 것(무루도에 의한 것)에 포함[從]시켜 그것들을 다 같이 사문과라고 일컫게 된 것이다. 즉 세속도로써 두 [사문]과를 획득할 때, 이러한 과위는 오로지 세속도에 의해 획득된 택멸만을 단과(斷果, 즉 이계과)의 본질로 삼는 것이 아니며, 이와 아울러 견도에 의해 획득된 택멸이 거기에 서로 뒤섞이어[相雜] 전체적으로 동일한 과위를 성취한 것이니, 동일한 결과를 낳은 도의 ‘득’에 의해 획득되었기 때문이다.25)
이 같은 사실에 따라 계경에서는 “무엇을 일컬어 일래과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3결을 끊고 탐ㆍ진ㆍ치가 엷어진 자이다. 무엇을 일컬어 불환과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5하분결을 끊은 자이다”고 말하였던 것이다.26) 따라서 세속도에 의해 획득된 택멸과 무루도에 의해 획득된 택멸은 섞여있기 때문에, [택멸의 수가] 적은 것을 많은 것에 포함시켜 ‘사문과’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또한 세속도에 의해 획득된 택멸이라 할지라도 무루 단(斷)의 득(得)에 의해 임지(任持)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득’의] 힘에 의해 임지됨에 따라 물러나더라도 목숨을 마치지 않기 때문에,27) 무루 단의 ‘득’이라는 도장이 찍힌 것이기 때문에 역시 사문과의 본질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죽은 이의 물건에 왕의 도장[王印]이 찍혀있으면 더 이상 그것을 수집(收集)한 사람의 물건이라고는 말하지 않듯이, 이 역시 마땅히 그러하기 때문에 역시 ‘사문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28)
(1) ‘성자는 세속도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상좌 등의 설 비판
[이에 대해] 유여사(有餘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이러한 멸(세속도에 의해 획득된 택멸)은 당래 금강유정과 참된 사문과를 [낳게] 될 것이기 때문에 역시 ‘사문과’라는 명칭으로 설정할 수 있다. 이러한 멸이 비록 그것(사문성)의 이계과(離繫果)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바로 그것의 사용과(士用果)이기 때문에, 그것의 결과(즉 사문과)라고 이름하여도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유여사는 다시 설하기를, “이러한 무위(세속도에 의해 획득된 택멸)는 사문성(즉 무루도)의 증상력에 의해 획득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역시 마땅히 ‘사문과’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니, 세속도로써 번뇌를 끊을 때에도 역시 그 같은 사문성을 닦아 [번뇌를] 대치하였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상좌(上座)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치상 필시 마땅히 이미 성제를 관찰한 자[見諦者]가 세속도로써 번뇌를 끊을 리가 없으니, 그는 능히 일체의 ‘유’의 경계대상[有境, 즉 욕ㆍ색ㆍ무색유]을 모두 다 맹렬히 타오르며 이글거리는 뜨거운 쇠 구슬과 같은 것으로 관찰하였기 때문이며, 세속도는 상지의 법을 관찰하여 적정[靜] 미묘[妙]한 것이라는 등의 기쁨의 앎[欣行覺]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인정하였기 때문이다.29) 이에 따라 모든 성자(즉 이미 성제를 관찰한 자)는 이치상 필시 마땅히 ‘유’에 포섭되는 법(즉 세속도)으로써 온갖 ‘유’에서 출리(出離)한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여사는 다시 [이같이] 설하였다.
“예컨대 스스로 몸을 장엄하기를 좋아하며 청정한 것을 탐(耽)하고 욕락(欲樂)하는 어떤 젊은이의 목에 썩어 문드러지고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개나 뱀이나 사람의 시신을 걸어주면 악취와 더러움에 참기 어려워하며 수치심과 혐오감이 그의 마음을 옥죈다고 하더라도 여러 성자가 온갖 유(有)를 싫어하는 것만 못하다. 그럼에도 [성자는] ‘유’를 반연하여 ‘적정한 것’이라는 등의 생각을 낳는다고 설하였으니, [상좌는] 이와 같은 말에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성자는 ‘유’를 무상정(無想定)과 같은 것으로 [여긴다고] 하였다.”30)
이같이 [말하더라도] 진실로 과실이 되지 않는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바야흐로 그(유여사)는 어떻게 “모든 성자는 온갖 ‘유’의 경계대상을 뜨거운 쇠 구슬과 같다고 관찰하여 ‘유’의 경계대상에 대해 이미 ‘즐거운 것이라는 뒤바뀐 견해[樂倒]’를 끊었다”고 하면서도 “유루행(즉 상지의 제법)에 대해 ‘이는 바로 즐거운 것이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인가? 하면, [성자는] 즐거움이 생겨나기를 원하여 즐거움의 인연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어떻게 “모든 성자는 [젊은이가] 세 가지 시신을 지극히 싫어하는 것 [이상으로] 온갖 ‘유’의 경계대상을 싫어하여 ‘유’의 경계대상에 대해 이미 ‘청정한 것이라는 뒤바뀐 견해[淨倒]’를 끊었다”고 하였으면서도 “유루행에 대해 ‘이는 바로 청정한 것이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인가? 하면, [성자는] 썩은 똥 구덩이나 여인의 죽은 시신처럼 지극히 악취가 나는 곳을 즐거이 익히고 가까이[習近]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그(상좌)의 힐난은 진실로 과실이 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성자라도 온갖 즐거움의 인연을 추구하여 여인을 익히고 가까이할 때 정념(正念)을 상실하며, [그러한] 번뇌를 끊는 상태[斷惑位]에서만 정념이 현전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들을 인용하여 예(例)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자신이] 설한 것에도 어긋나기 때문이다. 즉 그의 말도 “성자는 [모두가] 관찰한 바대로 별도의 다른 [유루]행을 갖지 않는다”는 이와 같은 설에 어긋나는 것이다.31)
또한 모든 성자는 정념에 안주하여 비록 제행 자체가 모두 괴로운 것이라고 관찰하였을지라도 그것에 대해서도 역시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하니, 계경에서 “낙수를 향수할 때 낙수를 향수하였음을 참답게 안다”고 설한 바와 같다.
만약 “[그때] 성자는 잠시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뿐이다”고 한다면, 그 밖의 다른 경우(靜ㆍ妙ㆍ離)도 역시 마땅히 그렇다고 해야 하니, 상지의 경계에 대해서도 역시 잠시 ‘적정한 것’이라는 등으로 관찰하였기 때문이다.32) 성자는 ‘유’를 관찰하여 열반의 경우처럼 궁극적[畢竟]으로 적정[靜] 미묘[妙]하고 [염오를] 떠난 것[離]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상지의 경계대상은 [하지에 비해] 약간 ‘적정한 것’이라는 등의 상(相)을 조작[思]하여 하지의 거칠고 동요하는 등의 법을 염리(厭離)할 뿐이다.
세존께서도 역시 “‘유’[에 포섭되는 법으]로써 ‘유’에서 출리(出離)한다”고 설하였으니,33) 예컨대 “성자는 색[계의 법]으로써 욕계에서 출리하며, 무색[계의 법]으로써 색계에서 출리한다”고 설한 바와 같다. 그리고 “[그럴 경우] 능히 무색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고 말할까 염려하여 부처님께서는 다시 “온갖 ‘유’에 의해 조작된 것[諸有所作]과 온갖 ‘유’에 의해 사유된 것[諸有所思]이 멸(滅)한 이는 모두 다 능히 [무색계에서] 출리할 수 있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또한 우리의 종의에서는 “모든 성자는 세속도로써 하지의 염오를 떠날 때, 상지의 세속의 선정[世定, 즉 유루정]을 꼭대기[首]로 삼아 관찰하여 ‘적정한 것’이라는 등의 생각을 일으킨다”고 설할 뿐 상지에 태어나 [그것을 ‘적정한 것’이라는 등으로 생각한다고] 설한 것이 아니거늘, 어찌 “어떻게 성자가 온갖 ‘유’의 경계대상에 대해 ‘적정한 것’이라는 등의 생각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라고 책망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성자는 ‘유’에 태어나는 것을 싫어하지 ‘유’의 공덕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34)
또한 성자도 세속의 선정에 대해 ‘적정한 것’이라는 등의 생각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입증할만한 지교(至敎)가 있으니, 예컨대 계경에서 “구수(具壽)여, 사리자(舍利子)는 신속하게 맹림(盲林)에 가 멸수상정(滅受想定)에 들었으며,35) 선정으로부터 일어난 다음 ‘이러한 멸(滅)과 열반은 매우 즐거운 것이며, 매우 적정한 것이다’고 소리 높여 외쳤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저 존자는 이러한 멸수상정에 대해 즐겁고 적정한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바로 열반에 대해서도 매우 유쾌하고 즐거운 것이고 매우 적정한 것이라는 생각을 일으켰기 때문에 선정으로부터 일어나 ‘이러한 멸(滅)과 열반은 매우 즐거운 것이며, 매우 적정한 것이다’고 소리 높여 외쳤던 것이다. 즉 멸수상정 중에는 일부[少]의 유전(流轉)만이 멸하였음에도 이와 같은 즐거움과 적정의 두 상(相)이 존재하거늘, 하물며 유전이 전부 멸한 열반은 어떠할 것인가? 혹은 바로 멸진정을 일시 열반이라고 말하기도 하였으니, 즐거움과 적정이 부분적으로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또한 부처님께서도 이러한 선정에 대해 매우 ‘미묘한 것’이라고 말하였으니, 이를테면 박가범(薄伽梵)께서는 멸수상정을 설하고 나서 다시 이같이 말하였다. “이것의 미묘함은 여섯 가지 경안(輕安)보다 뛰어나니, 멸수상정 자체는 미묘성[妙性]을 갖기 때문으로, 다른 것과 비교하여 수승함과 저열함을 헤아릴 수 있다.”
또한 『점손감계경(漸損減契經)』 중에서 말하였다. “이와 같은 네 종류의 적정해탈(寂靜解脫)은 일체의 색ㆍ무색계에 포섭되는 법[所收]을 초월하니, 나는 필추로서 그러한 선정을 닦는 자는 그러한 선정으로부터 일어날 때 반드시 ‘이와 같은 선정 중에서 지극히 적정하게 되었다’고 소리 높여 외칠 것이라고 설하리라.”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유정지(有頂地)의 선한 유루정만이 적정한 것이며, 그 밖의 다른 유루정은 그렇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잠시 적정한 것 등을 반연하여 ‘적정한 것’이라는 등의 생각을 일으켰으니, [그것으로] 능히 번뇌를 끊을 수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이 역시 그렇지 않으니, 하지의 법에 대해 상지의 법은 절대적[畢竟]으로 ‘적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절대적인 관점(즉 열반)에서 본다면] 초정려가 욕계에 비해 적정하다거나 적정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어찌 욕계의 법을 싫어하여 초정려를 ‘적정한 것’이라는 등으로 관찰할 때, “그것은 절대적인 것[畢竟]이 아니기 때문에 욕계의 염오를 떠나는 것에도 장애가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자지의 선한 마음으로 잠시 자지가 부정(不淨)한 것임을 사유(思惟)하였을 경우, [그러한 사유가] 비록 자지의 번뇌에 계박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역시 능히 번뇌로 하여금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관찰하였거늘, 어떻게 하지가 재횡(災橫, 재앙과 횡액)에 의해 핍박됨을 관찰하고, 상지는 하지의 재횡에서 영원히 벗어나 [더 이상] 하지의 재횡에 핍박되지 않는다고 관찰하는 수승한 선정이 현전하였음에도 하지의 번뇌의 득(得)을 능히 끊을 수 없다는 것인가?
따라서 그대(상좌)는 마땅히 [유여사의 말은] 환희를 낳지 못하는 것이라고(다시 말해 善說이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리석은 부류들은 무상천(無想天)에 대해 진실로 완전[究竟]한 출리(出離)라고 주장하여 바야흐로 무상정(無想定)을 일으키게 되지만,36) 성자는 그것을 출리라고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성자는 무상정을 일으키지 않으니,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다른 어떠한 생각[想]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그(상좌)의 비유(譬喩)는 [자신의 주장(성자는 유루도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주장)을] 입증할만한 어떠한 공능도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유학의 성자도 세속도로써 역시 능히 번뇌를 끊을 수 있다”는 사실은 지극히 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2) ‘이생은 번뇌를 끊을 수 없다’는 유설(有說) 비판
어떤 이는 이같이 설하였다. “계경 중에서 네 가지 사문과는 점차적으로 증득된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모든 이생은 진실로 번뇌를 끊는 일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는 이치에 맞지 않으니, 그 경에서는 차제증(次第證)의 성자에 근거하여 밀의(密意)로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그 계경 중에서는 “바야흐로 어떤 부류들은 제행에 대해 참답게[如理] 사유(思惟)하여……(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설하였던 것으로, 이치상으로도 필시 마땅히 그렇다고 해야 하니, 그 밖의 다른 경에서는 “네 선정을 획득하는 자는 견제위(見諦位)에 들어간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뜻에 결여[缺減]됨이 있는 경을 겨우 접하고서 바로 완고하게 주장하여 그 밖의 다른 성교를 부정해서는 안 되니, 온갖 성교 중에는 다수의 차별이 있어 어떤 하나의 경 중에 그러한 여러 뜻을 모두 갖춘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온갖 성교 중에는 간략히 두 종류가 있으니, 뜻이 분명한 것[了]도 있고, 분명하지 않은 것[不了]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근거하는 바를 갖지 않는 것[無所待]도 있고, 근거하는 바를 갖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세속제를 설한 것도 있고, 승의제를 설한 것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총상(總相)을 설한 것도 있고, 별상(別相)을 설한 것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스스로의 뜻에 따른 것[隨自意]도 있고, 다른 [경의] 뜻에 따른 것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법상(法相)에 속한 것도 있고, 법교(法敎)에 속한 것도 있기 때문이다.
[온갖 성교 중에는] 이와 같은 등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갈래가 있어 계경 중에서 설한 내용이라 할지라도 다른 계경의 설을 배제하고서는 그 뜻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야흐로 경에서는 “제행에 대해 참답게 사유(思惟)하여--”라고 설하였지만, 그 뜻이 분명하지 않다. [여기서] 무엇을 ‘행’이라 하였던가? ‘행’에는 다수의 종류가 있다.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다”고 설하였다. 또한 계경에서는 “입식(入息)ㆍ출식(出息)ㆍ심(尋)ㆍ사(伺)ㆍ상(想)ㆍ사(思)ㆍ명신(名身) 등은 ‘행’이다”고 설하였다. 또한 계경에서는 “욕(欲) 등을 ‘행’이라 이름한다”고 설하였는데, 이는 바로 8단(斷)의 ‘행’이다. 또한 계경에서는 “제행은 비상(非常)이다”고 설하였는데, 이는 바로 유루법을 말한다. 또한 계경에서는 “일체의 ‘행’은 무상이다”고 설하였는데, 이 경에서의 뜻은 일체의 유위법을 말한 것이다. 또한 설하기를, “수행(壽行)은 바로 명근(命根)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등의 ‘행’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종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제행의 경계에 대해 참답게 사유한다”고 할 때, [제행의 경계는] 욕계계(繫)라고 해야 할 것인가, 색ㆍ무색계계라고 해야 할 것인가, 3계계라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무루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어떠한 지(地)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며, 그것의 분위(分位)는 어떠한가?37)
[또한] 여기서 ‘참답게 [사유한다]’고 하는 말은 어떠한 뜻을 나타내기 위한 말이며,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가? 어떠한 까닭에서 ‘세(世)’라고 말하였으며, 다시 어떤 연유에서 ‘제일(第一)’이라고 이름한 것인가? 어떠한 까닭에서 [세제일법의] 소연을 ‘행’이라는 말로써 설하였고, [그것을] 능연 상에서는 ‘작의’라는 말로 설한 것인가? ‘사유’라는 말은 작의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등의 종류에 대해 모두 다 따져 보아야 하는 것으로, 성교 중에서는 필시 마땅히 제법의 자성이나 명칭 등에 대해 모두 갖추어 해석하고 있는 곳이 있다고 해야 하니, 박가범(薄伽梵)께서는 교화할 유정들을 섭수하여 이익 되게 하기 위해 [설법하는] 처소를 관찰하고 시기를 관찰하며 근기[根性] 등을 관찰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차별하여 상응하는 바에 따라 그러한 법문들을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어떤 하나의 경 중에서 [그러한 뜻을] 모두 갖추어 설한 것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이욕(離欲)에 대해 설한 [경의] 뜻은 분명하게 알기 어렵기 때문에, “계경 중에서 ‘네 가지 사문과는 점차적으로 증득된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모든 이생은 진실로 번뇌를 끊는 일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5) 사문성의 이명(異名)
이와 같이 세속도에 의해 수소단을 끊고 두 가지 [사문]과를 획득할 때 획득되는 택멸도 사문과라고 이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그런데 사문과(沙門果)는 사문의 본성 즉 사문성(沙門性)에 따른 것으로, 이러한 사문의 본성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논설한 바와 같다.
그렇다면 이것에 또 다른 차별적인 명칭이 있는 것인가?
역시 있다.
어떤 [차별적인 명칭이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앞에서 설한 사문의 본성을
역시 바라문이라고도 이름하며
역시 범륜(梵輪)이라고도 이름하니
진실의 범(梵)이 굴린 것이기 때문이다.
所說沙門性 亦名婆羅門
亦名爲梵輪 眞梵所轉故
이 중에서도 오로지 견도만을
설하여 법륜(法輪)이라고 이름하니
신속함 등이 바퀴와 유사하기 때문에
혹은 바퀴 살 등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於中唯見道 說名爲法輪
由速等似輪 或具輻等故
논하여 말하겠다.
세속의 이치[世俗理]에 근거할 경우, 온갖 사문은 바라문과 다르니, 예컨대 계경에서 “마땅히 사문과 바라문 등에 보시해야 한다”고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그러나 승의의 이치[勝義理]에 근거할 경우, 온갖 사문이 바로 바라문으로, 예컨대 계경에서 “이러한 첫 번째 사문(즉 예류과) 내지 네 번째 사문(아라한과)은 정법에 머무는 자로서, 그 밖의 다른 진실의 사문과 바라문은 존재하지 않는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즉 [사문은] 능히 악법과 불선법을 물리치고 제거[遣除]한 이로서, 부지런히 지식(止息)하는 상이 [바라문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사문의 본질은 바로 바라문이니, [경에서] “악법과 불선법을 능히 물리치고 제거하였기 때문에……(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바라문이라고 이름한다”고 설한 바와 같다.38) 그래서 [사문성을] 바라문이라고도 이름하게 된 것이다.
바라문의 본성을 역시 범륜(梵輪)이라고도 이름하니, 이는 바로 진실된 범왕(梵王)의 힘에 의해 굴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즉 부처님께서는 무상(無上)의 범덕(梵德)과 상응하는 분(즉 무상의 보리도를 소유하신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존만을 홀로 ‘범’이라고 이름해야 하는 것으로, 계경에서도 “부처를 설하여 역시 또한 ‘범’이라고도 이름하며, 역시 또한 ‘적정(寂靜)’이라고도 이름하며, 역시 또한 ‘청량(淸凉)’이라고도 이름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말없이 고요[寂黙]하고 텅 비어[沖虛] 소연(蕭然)한 이를 ‘범’이라고 이름하는데,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덕을 갖추었기 때문에 ‘범’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게 되었으며, 이미 스스로 깨닫고서 다른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해 이것(사문성)을 굴려 그들에게 베풀어주었기 때문에 ‘범륜’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5-1) 전법륜(轉法輪)에 대하여
그리고 이러한 범륜 중에서 오로지 견도에 근거하여, 세존께서는 어떤 곳에서 그것을 설하여 법륜(法輪)이라고 이름하였는데,39) 아야다교진나(阿若多憍陳那, Ājñāta kauṇḍinya) 등의 다섯 필추에게 견도가 생겨났을 때, 땅과 허공의 천신(즉 地居天과 空居天)들이 이를 전하여 “세존께서는 이미 정법륜(正法輪)을 굴리셨도다”고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견도를 설하여 ‘바퀴[輪]’라고 이름하게 된 것인가?
신속하게 작용[速行]하는 것 등이 세간의 바퀴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전륜성왕의 바퀴가 구를 때 멈추지 않고 신속하게 굴러가며, 버리고 취하며, 아직 항복하지 않은 것을 능히 항복시키며, 이미 항복한 것을 진압(鎭壓)하며, 위 아래로 회전하듯이, 견도 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법륜’이라고 이름하였다.40)
이를테면 전륜성왕의 바퀴는 [일단] 구르면 멈추지 않듯이 견도 역시 그러하니, 중간에 쉬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전륜성왕의 바퀴는 굴러가는 작용[行用]이 빠르듯이 견도 역시 그러하니, 각기 일 찰나[一念]이기 때문이다. 전륜성왕의 바퀴는 앞의 것을 취하고 뒤의 것을 버리듯이 견도 역시 그러하니, 고제 등의 경계를 버리고 집제 등을 취하기 때문으로, 이는 바로 4성제의 관찰이 반드시 구시(俱時)가 아님을 나타낸다.41) 또한 전륜성왕의 바퀴는 아직 항복하지 않은 것을 항복시키고, 이미 항복한 것을 진압하듯이 견도 역시 그러하니, 아직 관찰하지 않은 것을 능히 관찰하며, 아직 끊지 않은 것을 능히 끊기 때문이며, 이미 관찰하여 끊은 것은 더 이상 미혹하여 물러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륜성왕의 바퀴가 위 아래로 회전하듯이 견도 역시 그러하니, 상계의 고제 등을 관찰하고 나서 하계의 고제 등을 관찰하기 때문이다.42)
바로 이 같은 사실로 말미암아 견도만을 유독 ‘법륜’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존자 묘음(妙音)은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세간의 [수레]바퀴에 바퀴 살과 바퀴 통과 바퀴 테 등이 존재하는 것처럼 8지(支)의 성도도 그것과 유사하기 때문에 ‘바퀴[輪]’라고 이름한 것으로, 이를테면 정견(正見)ㆍ정사유(正思惟)ㆍ정근(正勤)ㆍ정념(正念)은 세간의 [수레]바퀴의 바퀴 살과 유사하고, 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은 바퀴 통과 유사하며, 정정(正定)은 바퀴 테와 유사하다. 그래서 법륜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비바사사(毘婆沙師)의 본래의 뜻은 “일체의 성도를 다 법륜이라 이름한다”고 총체적으로 설하는 것으로, 세 번 굴린 것[三轉]이 세 가지 도(견ㆍ수ㆍ무학도)에 포섭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43) 그런데 다른 이(즉 교진나 등)의 상속에 견도가 생겨났을 때, 이미 전생(轉生)의 첫 단계[轉初]에 이르렀기 때문에 [천신들은] “[세존께서는] 이미 [법륜을] 굴리셨다”고 말하였다. 즉 오로지 견도는 바로 법륜의 시초이기 때문에 “법륜은 바로 오로지 견도이다”고 설하게 되었던 것으로, 여러 천신들은 최초의 도에 대해서만 ‘전법륜’이라 말하고, 두 가지 도(수도와 무학도)에 근거하여서는 [‘전법륜’이라고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44)
여러 논사들도 대개 “견도를 법륜이라 이름한다”고 설하였으니, [그것은] 땅과 허공의 천신들이 오로지 이것(견도)에 근거하여 설하였기 때문으로, 일찍이 세 가지 도를 모두 법륜이라 이름한다고 설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로지 견도만이 앞에서 설한 바퀴의 의미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모든 견도를 다 법륜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45) 교진나의 소의신 중에 먼저 일어났기[轉] 때문에 경에서 “그러한 견도가 생겨날 때를 전법륜이라 이름한다”고 설하였던 것으로, 그 밖의 다른 도를 굴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교진나 등에게 견도가 생겨났을 때 “세존께서는 법륜을 굴리셨다”고 설한 것은, 의미상 그들이 전법륜을 획득하였음을 나타낸다. 즉 [법륜은] 본래 세존에게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에게로 미루어 두어야하지만(부처님에게 존재하는 것이지만), 교화될 자로 하여금 존중의 마음을 낳게 하려고 이와 같이 바로 설하게 된 것으로, 여래의 법륜이 굴러 다른 이의 상속신에 이르렀기 때문에 ‘전(轉)’이라고 이름하였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천신들은 마땅히 “보리수 밑에서 부처님께서 법륜을 굴리셨다”고 설했어야 하는 것으로, “세존께서 지금 바라날사국(婆羅날斯國, Vārāṇasī)에 있으면서 무상(無上)의 법륜을 굴리셨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법륜을] 굴려 다른 이에게 베풀어주는 것을 여기서 ‘전’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러한 교법[敎]을 일컬어 법륜이라고 하였으니, 다른 이의 상속신으로 전지(轉至)하여 그 뜻을 이해하도록 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46) 그러나 이것(교법)은 다만 방편일 뿐 진실의 법륜이 아니니, 그 밖의 다른 잡염법(雜染法)과 마찬가지로 수승한 공능이 없기 때문이다.
6) 사문과의 소의신
여기서 네 가지 사문과에 대해 사택해 보아야 할 것이니, 어떠한 사문과가 어떠한 계(界)에 의지하여 획득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세 가지는 욕계에, 뒤의 것은 3계에 의지한다.
즉 상계에는 견도가 없으니, [거기는] 청문(聽聞)이 없고
하지를 반연하는 일이 없으며, 싫어함[厭]이 없기 때문이며
아울러 경증(經證)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다.
三依欲後三 由上無見道
無聞無緣下 無厭及經故
논하여 말하겠다.
앞의 세 가지 [사문]과는 다만 욕계의 소의신에 의지하여 획득되며, 뒤의 아라한과는 3계의 소의신에 의지하여 획득된다.
앞의 두 [사문]과는 아직 욕계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상계에 의지하여 획득되지 않는다고 함은 이치상으로도 역시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 번째 [사문]과(불환과)는 어째서 상계에 의지하여 획득되지 않는 것인가? 이미 욕계를 떠난 자라면, [상지에 의지하여서도] 역시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47)
정리(正理)와 성교(聖敎)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다.
먼저 정리란 어떠한 것인가?
상계의 소의신에 의지할 경우, 거기에는 견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미 욕계를 떠난 자라 하더라도 견도를 떠나서는 초월하여 불환과를 증득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떠한 연유에서 상계의 소의신으로는 필시 견도를 일으키지 못하는 것인가?
바야흐로 무색계에 의지하여서는 무아의 교법을 청문(聽聞)할 수 없기 때문으로,48) 이러한 교법을 듣지 않고서는 필시 결정코 견도에 들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무색]계에 태어나는 경우, 하지를 반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견도는 먼저 욕계의 고제를 반연해야 하기 때문이다.49)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무색계의 [몸은] 견도의 소의가 되지 않는 것이다.
색계의 몸에 의지하는 경우, 뛰어난 싫어함[厭]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으로, 뛰어난 싫어함을 떠나서는 능히 견도에 들 수 없다. 이를테면 욕계 중에서는 온갖 고수(苦受)가 존재하여 조그마한 즐거움이라도 낳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쌓아야 한다. 즉 [욕계] 인취나 천취에서의 생은 목숨이 짧고, 재물이 궁핍하며, 병이 많고, 친지나 친구가 배반하고 떠나며, 어긋나는 경계[違境]가 많아 그것을 싫어하는 마음[厭心]이 더욱 수승하다.
그러나 만약 색계에 태어나면 이와 서로 반대된다. 이를테면 그곳의 이생은 수승한 선정의 즐거움에 탐닉하며, 오래 살고, 병이 없으며, 탐욕이 없고, 배반하여 떠나는 일도 없으며, 어긋나는 경계도 이미 존재하지 않아 그것을 싫어하는 마음이 미미하고 저열하니, 싫어하는 마음이 미미하고 저열하면 능히 견도에 들 수 없다. 즉 능히 견도를 인기할만한 뛰어난 싫어함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색계의 몸에 의지하여서는 견도를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다.
마땅히 거기(색계)에 싫어하는 마음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그곳에 태어난 자에게도 싫어함이 존재하기 때문으로, 예컨대 계경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대선(大仙)이여, 저 화염은 필시 이곳(극광정천)에까지 올라올 리가 없으니, 범궁(梵宮)을 태워버리고 나서 거기서 마땅히 꺼질 것이다”고 설한 바와 같다.50) 즉 여기서 ‘두려움’이라고 하는 말은 오로지 싫어함에 근거한 것이다.
또 다른 곳의 어떤 가타(伽他)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듣기에, 장수천(長壽天)에는51)
미묘한 색과 영예를 갖추고 있음에도
마음에는 두려워 싫어함을 품고 있으니
마치 사슴이 사자를 대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두려워 싫어함[怖厭]’이라고 하는 말은,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싫어하는 것’임을 나타내니, 그곳(색계)에서는 이러한 뜻의 말로 [싫어함을] 나타내는 것이다.(이상 색계에도 厭心이 존재한다는 이설)
싫어함에 전박(纏縛)되면 마음은 싫어함에 처하게 되니, 계경에서 “집착에 전박되면 마음은 집착에 처하게 된다”고 설한 것과 같다. 여기(앞서 인용한 가타)서도 역시 이와 같아서 먼저 [두려워함의] 특성[相]을 알지 못하여 싫어함에 전박되면 그의 마음은 싫어함에 따라 속박[隨縛]된다. 따라서 그 후 [두려워함의] 특성을 이미 알았다면 비록 싫어함에 처할지라도 싫어함에 따라 속박되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여기서 [말한] ‘두려워 싫어함’의 다른 뜻이다.52)
실로 ‘두려워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상의 차별은 [이러하다]. 이를테면 그것의 상을 보고서 두려워 [심신이] 쇠퇴하고 손상[衰損]되면 마음이 놀라 무서워하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만약 그것의 상을 보고서 마음으로 흔쾌하게 바라는 것[欣欲]이 아니라면 심정적으로 버리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싫어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욕계에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지만, 상계에는 오로지 한 가지(두려워하는 것)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또한 이 두 가지의 본질적인 차별은 어떠한가?
먼저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서 마음이 놀라 허둥대는 것[心驚掉]을 일컬어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하며, 먼저 자세히 살펴보고서 마음이 즐거워하지 않는 것[心不樂]을 일컬어 ‘싫어하는 것’이라고 한다. 혹은 어리석은 마음[愚癡心]으로 인해 겁내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버리려고 하는 마음[棄捨心]으로 인해 등지게 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어떤 경계대상이] 두려워 [심신이] 쇠퇴하고 손상될 때 그것을 버리려고 하는 마음을 일컬어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하며, 버리려고 하기 때문에 그러한 경계대상에 대해 마음으로 기뻐하지[欣] 않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지금 이 경에서 설한 ‘두려워한다’는 말을 관찰해 보건대, 이는 바로 자신의 천궁(天宮, 즉 극광정천)이 손상되고 파괴될까 두려워한다는 뜻으로,53) 세간에서도 역시 이와 같이 말하는 경우를 찾아볼 수 있으니, “다만 그릇을 던질 때에는 그것이 깨어지는 것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바로 이 같은 이치(상계에는 싫어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치)에 따라 상계에 견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입증되는 것이다.
[상계에 견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할만한] 성교에는 다시 어떠한 것이 있는가?
계경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경에서 말하기를, “이곳(욕계)에서 통달(通達)하고 저곳(색계)에서 구경(究竟, 반열반)에 이르는 다섯 종류의 보특가라가 있으니, 이른바 중반(中般) 내지 상류반(上流般)이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 여기서 ‘통달’이란 말은 오로지 견도를 말하니, 바로 원적(圓寂)을 증득하는 최초의 방편이기 때문이다.54) 즉 경에서는 그곳(즉 색계)에서 통달한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견도는 상계에 결정코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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