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에서의 위치>
불교에서는 초기부터사람들의 심성을 객진번뇌. 본성청정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까 수행을 하면 누구나를 가릴 것 없이 해탈하여 사바세계에서 벗어나 니르와아나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부파불교에서는 각 부파에 따라서 여러가지 학설이 제기되기는 하였지만 해탈사상은 모두 수용하였다. 다만 깨달음을 얻어도 아라한을 목표로 하는 성문사상에 머물렀다.
그들은 출가전문적이고 니르와아나에 안주하여 민중교화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에 반하여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기치를 들고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서기전 1세기 경으로 추산되는 이들의 불교운동을 대승불교라고 부른다.
이때 최초의 대승경전인 반야경전군이 성립되었다. 여기서는 모든 존재에 실체가 없음을 지혜로써 직관하라는 공을 제창하면서, 부처가 재세하던 시대의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새로운 물결이었다.
이어서<법화경>이 성립되어 일불승사상을 제창한다. 이경은 모든 중생이 구제의 대상임을 선언한다. 대승만이 구제의 대상이 되고 소승들은 그럴 수 없다면, 이것은 부처의 자비와 평등의 가르침에서 벗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비유와 방편을 제시하여 남녀. 노소. 인종. 계급. 소승. 대승의 구별이 없이 중생은 한결 같이 부처의 품에 들어 행복하고 평화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또 같은 무렵의 <화엄경>에서는 "마음. 부처. 중생, 이 셋은 아무런 차별이 없다"라고 하는 삼계유심사상을 선양한다.
이는 우리들의 삶에 적극적이며 희망적인 비젼을 제시하여 주려는 것이라고 본다. 이와 같은 반야.법화.화엄의 사상을 계승하면서 해탈에 관한 우리들의 자질. 성품의 문제를 논의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사람이 깨달음의 길을 걸으려면, 그들의깨달을 자격. 자질을 여러 각도에서 연구하여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불교사적으로는 부처가 깨달음을 시현한 것을 근거로 하여, 우리 모든 중생에게 그와 동등한 자질. 가능근거가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이와 같은 것을 바탕으로 하여 새롭게 등장한 경전군들을 여래장 계통의 경전군이라고 말하고 싶다. 대승중기에 이루어진 이들 경전으로는 <대방등여래장경> . <부증불감경> . <스리이마알라아왕비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 등이 있다. 구나바드라 (394~468)가 436 년에 번역한 <스리이마알라아왕비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은 산스크리트원본은 단편만 존재하며, 티벳 역본이 현존한다.
<무대설정의 배경>
이 경에서는 아요디야아국의 스리이마알라아왕비가 주인공으로 활약한다. 그녀는 그 당시 인디아에서 최대 강국 중의 하나인 코살라국의 쁘라세나짓트왕과 말리카왕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성품이 곱고 행복한 공주이다. 이 나라의 수도인 스라아와스티는 그 당시 인디아에서 가장 번성하던 도시의 하나이며, 불교 최대의 사원인 기원정사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부처는 이곳에서 여러차례에 걸쳐서 안거를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공주는 스라아와스티에서 남쪽으로 1백50km쯤 떨어져 자리잡고 있는아요 디야아국의 야쇼미트라왕에게로 시집을 가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다. 이후 이 공주의 활동의 무대는 아요디야아로 된다. 거대한 가가라강을 등지고 있는 풍요로운 이 아요디야아는 힌두교들의 7대 영장중의 하나로 인디아에서는 유명한종교도시이다.불교에서는 샤아키야족이, 힌두교에서는 라마신이 태어난 곳이라고 하여 예로부터 순례자들이 끊이질 않는다.
1528년에는 무갈제국이 라마를모신 힌두사원을 헐어버리고 무슬림사원을 세우면서 종교분쟁의 터로 바뀐다. 이렇게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아요디야아를 무대로 설정한 배경을 현대에 사는 우리는 한번 음미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어느날 종교적 정서가 짙은 코살라의 왕비와 왕은 부처의 가르침을 온 누리에 널리 홍보하고 싶은 서원을 실현하려고, 여대신으로 하여금 그들의 공주인 스리이마알라아왕비에게 편지를 전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공주로 하여금 부처의 가르침을 신수봉행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과 평화를 실현하라는 것이다.
<Vimalakirti소설경>이 재가 청신사(upasaka)인 위말라아키이르티의 소설이라면, 이 경은 재가의청신녀(upasika)인 스리이마알라의 소설이다. 이는 재가신도들의 새 불교운동을 발단으로 해서 일어난 대승불교의 연장선상에서 일불승사상에근거한 청신사와청신녀의 평등성을 가르치려고 하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여남평등사상을 실현하려는 그 배경을 또 음미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일불승의 표방>
번뇌의 근원은 무명이다. 무명으로부터 두가지의 번뇌가 일어난다. 하나는 주지번뇌이며, 또 하나는 전번뇌이다. 전자는 잠재적인 상태의 번뇌라면, 후자는 이미 발현해버린 상태의 번뇌이다.
주지번뇌에는 또 네가지가 있으니,
(1)일방적인 편견 속에 존재하고 있는 잠재적인 번뇌인 견일처주지번뇌,
(2)범부의 세계인 욕망계에 특유하는 집착속에 존재하고 있는 잠재적인 번뇌인 욕애주지번뇌,
(3)육체를 소유하는 이의 세계에 특유하는 집착 속에 존재하고 있는 잠재적인 번뇌인 색애 주지번뇌,
(4)윤회의 생존에 공통으로 있는 집착 속에 존재하고 있는 잠재적인 번뇌인 유애주지번뇌이다.
그런데 이 네가지의 주지번뇌가 가지고 있는 힘은 모든 전번뇌의 기초가 되는 것이긴 하지만, 이것을 또 무명주지의 큰 힘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만큼 무명주지는 질기고 센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문의 지혜로는 끊을수 없다. 다만 여래의 깨달음의 지혜를 빌려서만이 소멸시킬 수 있다. 이것은 대승이야말로 진실한 가르침이어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예를 들면 어떤 종류의 씨앗이나 초목.약초.삼림도 모두대지에 의존하며,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 발육하듯이, 성문이나 독각, 세간적인 것이나 출세간적인 선법의 모든 것은 대승에서 연원한다. 우리가 삼승을 말하기는 해도 그것은 방편이며 최종적으로는 불승이라고하는 유일한길에 귀착한다. 이 불승이라고하는 유일한 길, 즉 일승을 체득함에 의하여 비로소 무상의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다.
<여래장설>
여래장이라는 용어는 <대방등여래장경>에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경에서는 [아홉가지의 비유]를 들어 여래장이 부처의 가르침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상징적으로 제시하여 주고 있다.
tathagatagarbha를 분해하여보면,tatha는 [so taht, same, 그냥 그대로, 사실 그대로, 如]라는 뜻이며, 다음에는 gata로 볼 것이냐, agata로 볼 것이냐에 따라 뜻이 다르다. gata는 [gone, 가버렸다, 去], agata는 [come, 와 버렸다. 來]라는 뜻이다. 앞의 것을 따르면 如去, 뒤의 것을 따르면 如來이다. garbha는 [grasp, 꼭 움켜쥠]이 원래의 뜻이다. 여기서 의미를 확대시켜, [womb, 태, 자궁, 태아]라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tathagatagarbha는 [여래의 자궁]으로도 풀이되고, [자궁 속에 들어 있는 여래]로도 풀이되지만, 중국의 스님들은 [여래장]이라고 번역했다.
우리말로 [부처님의 마음자리]라고 옮기면 어떨까. 자궁의 기능은 무엇인가. 태아와 함께 생각되는 것이지 만일 태아를 빼놓고 생각하면 별로 의미가 없다. 그래서 자궁은 언제나 태아와 함께 취급할 때 그 기능이 가장 온전하게 드러난다.
그렇다면 [여래의 자궁]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여래의 씨알이 들어 있다.여래의 씨알은 무엇인가. 중생이다."인간은 모두가 철학자이다. 전문적인 철학자와 그렇지 않은 철학자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차이는 양적인 것이지 질적 차이는 아니다Antonio Gramsci"라고 말하는 것처럼 중생은 작은 부처일 뿐이다. [자궁 속에 들어있는 여래]로 봐도 뜻은 같다.
이 <스리이마알라아왕비사자후대방편방광경>에서는 여래장설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여래장은 성스러운 진리의 의의를 해석할 경우의 기초이다. 그런데 여래장이라고 하는 기초가 아주 심원하므로 성스러운 진리의 의의도 또한 심원하며, 난지.난해하다. 이론의 영역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세간적 상식으로는 미칠 수 없고, 다만 총명한 지자만이 아는 바이다.
여래장은 생사윤회하는 경우의 의지처이다. 여기서 윤회란 우리들의 조금 전의 순간에 몸에 있는 모든 감관이 작용을 잃든 잃지 않든, 아직 감수하지 않는 모든 감관을 새로 몸에 받는 것을 말한다. 죽음과 삶을 나타내는 윤회라고 하는 이름은 여래장의 별명이다.
세간의 상식적인 말투인, 죽음이란 모든 감관의 기능이 정지함을, 삶이란 새로운 감관의 발생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래장은 죽음과 삶을 초월한다. 왜냐하면 여래장은 연기의 법칙에 근거한 생멸. 변화를 특질로하는 유위의 존재의 영역을 초월하여 상주. 견고. 적정. 영속적이다.
그러므로 여래장은 법신과는 본질적으로 결합한 불가분리의, 또 깨달음의 지혜와는 땔래야 땔 수 없는 바의 무위법에 있어서의 의지처이며 기반인 것이다. 동시에 법신과는 본질적으로 모순되고 그로부터 분리되며, 깨달음의 지혜와는 무관계한 유위법에 있어서도 또한 의지처이며 기반인 것이 여래장이다.
여래장이 만일중생의 내부에 없다면 사람이고 뇌를 싫어하고 니르와아나를 소망하여 동경하고 구하는 서원을 세우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6식과 심법지라고 하는, 이들 일곱가지는 순간적인 존재로써, 일순도 지속하지 못하고, 따라서 고뇌를 감수하는 일도 없으니까, 그것들이 고뇌를 싫어하고 니르와아나를 소망하여 동경하고 구하는 서원을 세우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여래장은 비롯함도 모르고 끝장도 없는 불생불멸의 것이니까 고뇌를 감수한다. 그러니까 여래장은 더더욱 고뇌를 싫어하고 니르와아나를 소망하여 동경하고 구하는 서원을 세우는 주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경에서는 여래장이 공성을 나타내는 데 있어서 두가지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첫째는 공여래장이다. 여래장에는 본디부터 법신과는 무관계이며, 깨달음의 지혜로부터 단절된 모든 번뇌의 장애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번뇌가 전혀 없다는 뜻에서 空이다. 둘째는 불공여래장이다. 번뇌는 허망하여 존재하지 않는데, 여래장은 법신과는 땔래야 땔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간지스강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불가사의한 부처의 모든 덕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덕성을 고루 갖추고 있다는 뜻에서 不空이다.
<여인성불의 길>
부처의 자비와 평등의 정신에 바탕을 둔 구제의 문제를 생각한다면, 여.남의 구별은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정신이 잘 살려진 것이 <승만경>이다. 웨샤알리이를 무대로 해서 위말라이키이르티거사는 不二의 법문을 설파했다면, 아요디야아를 무대로 해서 스리이마알라아왕비는 중생을 평화의 세계로 인도해야 함을 역설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자궁 속에 들어있는 여래]인 이 왕비는 부처로부터 수기를 받고 큰 서원을 세운다. 그녀는 깨달음에 이를 때가지 서원을 굳게 지킬 것을 맹세한다. 그럼 열가지 서원이 오늘날 불교운동을 함에 있어서도 많은 것을 시사함으로 그 내용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1)금후 나는 계율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은 마음을 결코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2)금후 나는 스승들에 대하여 불경스런 마음을 결코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3)금후 나는 어떤 경우에도 중생에 대하여 분노하거나 해를 끼치는 마음을 결코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4)금후 나는 타인의 행복이나 성공을 부러워하는 마음을 결코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5)금후 나는 아주 조금이라도 인색한 마음을 결코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6)금후 나는 자기자신의 향락을 위해 축재하지 않겠습니다.
7)금후 나는 보시. 애어. 이행. 동사의 사섭법에 의하여 중생들을 위하여 도움이 되기를 원합니다. 결코 자신을 위한 이익을 얻을 목적으로 중생들을 매혹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무잡념, 무권태, 불퇴전의 마음으로 중생들을 따뜻하게 포용하겠습니다.
8)금후 나는 의지할 곳 없는 사람, 포박당한 사람,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 고뇌하는 사람, 가난한 사람, 큰 재앙을 만난 사람들을 보면, 그들을 돕지 않고는 한발자욱이라도 버리고 지나쳐버리지 않겠습니다.
9)금후 나는 돼지고기나 새고기 등을 매매하는 죄를 지으면서 생활하며, 여래가 말씀하신 가르침이나 계율을 소홀히 하는 성질을 가진 사람을 보게되면, 결코 무관심하게 지나치지 않겠습니다.
어느 부락이나 마을, 도회지나 시골, 왕성의 안이나 밖에서 누구를 막론하고 나의 명령이 미치는 한 응징해야만 할 부류들을 절복하며, 구제해야만 할 부류들에 대하여는 이를 섭수합니다. 이것은 왜 그런가 하면 이 절복과 섭수에 의하여 이 세상에 정법을 영원히 존재케 하기 위함입니다. 정법이 영원히 존재한다면 신들이랑 인간들의 몸으로 태어나는 이는 중대하고 사후에 악도에 떨어지는 이는 감소할 것입니다.
10)금후 나는 정법을 몸에 익히는 것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마음을 결코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왜냐 하면 만일 정법을 몸에 익히는 것을 잃어버리면 대승의 가르침을 잃어버립니다.
대승의 가르침을 잃어버리면 빠아라미타아(paramita)를 잃어버립니다. 빠라아미타아를 잃어버리면 대승을 구하지 못합니다. 만일 보디트와대사이면서 대승에 안주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정법을 몸에 지니려 하지 않고, 스스로 그릇된 길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들은 어리석은 범부들의 지위로 떨어지는 운명이 되고 말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죄악이라고 인정하고 대죄인으로 간주합니다.
정법을 몸에 익힘으로써 나도 또 미래의 보디트와들도 헤아릴 수 없는 복덕을 얻는다고 하는 목적을 성취할 것입니다. 이 열가지 내용을 통해서 대승불교의 참정신을 구현하기 위하여 우리자신이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탐욕이 치성하고, 우리들의 삶의 질서가 흐트러짐으로 먼저 지계를 해야 한다.
그래서 첫째 원으로 계율을 세운 것으로 본다. 우리는 선지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다. 선지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무명의 세계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래서 둘째 원으로 스승에게 불경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사람이 분노심을 일으키면 극단적으로는 타인을 크게 해친다.
5계중에서도 불살생을 말하는 것은 남의 목숨을 나의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겨 더불어 함께 살라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셋째 원으로 불해를 세운 것이다. 사람의 행복이나 성공은 노력 끝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럴 때 축하하여 주거나 기뻐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이 애써 노력하지는 않고 부러워하기만 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을 경계하기 위하여 넷째 원을 세운 것이다.
사람이 인색하면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봐도 동정심이 없다. 나누어 가짐으로써 남을 불행으로부터 건져주려는 정신을 살리려고 다섯째 원을 세운 것이다. 사치와 향락은 사람을 타락으로 이끌기 쉽다. 그런데 재산을 모아 사치와 향락에 쓴다면 무슨 보람이 있겠는가. 우리는 주변에서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지 않는가.
그래서 여섯째 원을 세운 것이다. 재가자들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의 실천덕목이 사섭법이다. 이와같은 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혹세무민하거나 쓸데없는 생각을 버려야 함으로 일곱번째원을 세운 것이다. 이 세상에는 여러가지 일로 불안해하거나 고뇌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고서는 자리를 뜨지 않겠다는 것이 여덟번째 원이라고 본다. 인디아에서는 채식과 육식을 엄격하게 구별하여 淨.不淨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힌두들은 채식을 많이 하고 있다. 그들은 채식을 하는 것으로써 스스로를 청정하다고 규정하고, 육식을 하는 타종교인을 비난하였다.
이에 불교에서도 은연중 육식을 삼가하고 채식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새로운 불교운동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왕권을 빌려 응징이라도 하겠다는 절복과 또 적극적으로 구제의 대상을 찾아나서는 섭수를 표방한다.
이 아홉번째 원속에는 그 당시 타종교와의 관계에서의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정법을 따르는 것이 대승을 수호하는 것이다. 대승이야말로 지혜를 완성할 수 있다. 지혜를 완성하는 길만이 대승을 영원히 보전하는 길이며, 대승의 흔들림이 없을 때 중생을 모두 구제할 수 있다는 인류 구원관을 제시하는 것이 열번째 원이라고 본다.
왕비는 이 열가지 원을 요약. 정리하여 3대원으로 함축하고 있다.
1)이 진리에 걸은 서원으로써 중생에게 이익을 가져올 복덕을 쌓고, 이런 선근의 공덕으로 정법을 이해할 수 있기를 원하오며,
2)정법을 이해한 뒤에도 게으름을 피우거나 두려워하는 일 없이 중생에게 가르침을 펼 수 있기를 원하오며,
3)정법을 펼침에 있어서는 신명을 돌보지 않을 것이며, 재산을 바쳐서라도 호지하고, 몸에 익히기를 원하오이다.
<새로운 가치관의 설정>
우리 중생은 모두 애기부처임을 확인한 셈이다. 재가의 애기부처인 스리이마알라아 왕비가 무애자재한 모습으로 부처의 인가를 받아 정법을 수호하여 대승을 길이 보전할 대원을 세우고 있음을 본다.
이런 정신은 우리 역사 속에서도 면면히 숨을 쉰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신라시대에세명의 여왕이 있음을 안다. 이는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가 힘들다. 그들은 모두 정법에 따라서 왕위에 오른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인 정법이 아니고는 어떻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크레오파트라의 음모와는 그 성질이 다르다. 재가의 청신녀가 부처의 수기를 받는다면, 재가의 청신사나 출가한 비구니.비구도 마찬가지이다. 부처의 자비와평등의 정신속에서는 4부대중은 동등한 형제자매일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비구니 종정이나 비구니 총무원장의 출현을 기대해 봄직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