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極限生活을 일깨워 준 洞窟體驗
약간은 흐릿한 날씨였지만 우리 서남지부 모임 日氣는 정말 좋고 괜찮았다.
오전 9시 50분쯤 7호선 철산역 2번 출구를 빠져나오니 지수가 當到해 있었고 저만큼서 치영이가 어딘가 전화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지수가 준비한 생수와 선물 컵을 주고 받는 사이 멀리 수원에서 래현이가 도착하고 이어 종현이의 모습이 지하철 레일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지수가 몇 몇 친구들에게 참석확인을 하자 다들 일정이 새로이 생긴 모양이다. 언뜻 정섭이가 인근에 도착하고 있다는 연락이다. 곧 이어 정섭이가 도착했다. 오늘은 이렇게 여섯이서 트레킹 멤버가 되었다. 10시를 조금 넘긴 시각 근처의 버스정류장에서 광명시내버스를 타고 20여분 정도 지나 가학산 입구 정류장에 도착했다.
친구들과 오랜만의 鼎談을 나누며 걸음을 옮기려니 잘 다듬어진 小公園이 보인다. 梧里 李元翼의 기념관 입구 庭園이었다.
이원익은 1547(명종 2)년에 태어나 1634(인조 12)년 87세의 나이로 생을 마친 朝鮮 中期의 文臣이다. 자는 공려(公勵)이고 호는 오리(梧里)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으로써 성균관전적, 형조좌랑, 정언, 지평, 동부승지, 안주목사, 형조참판, 지의금부사, 이조판서, 우의정, 영의정을 두루 역임한 宰相이다. 개설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한성부 출신으로 태종의 아들 익녕군 치(益寧君 錙)의 4세손이며, 수천군(秀泉君) 정은(貞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청기수(靑杞守) 표(彪)이고, 아버지는 함천성(咸川正) 억재(億載)이며, 어머니는 감찰 정치(鄭錙)의 딸이다. 강서(姜緖)·조충남(趙忠男) 등과 交流하였다. 키가 작아 키작은 宰相으로 널리 불렸다.
15세에 동학(東學 : 4학 중의 하나)에 들어가 수학해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9년(선조 2)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이듬해 승문원권지부정자로 활동하였다.
사람과 번잡하게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외출도 잘 하지 않는 性品이었다 하며, 유성룡(柳成龍)이 일찍부터 그의 비범함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1573년 성균관전적이 되었으며, 그 해 2월 성절사 권덕여(權德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그 뒤 호조·예조·형조의 좌랑을 거쳐 이듬 해 가을 황해도도사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 병적(兵籍)을 정비하면서 실력을 발휘, 특히 이이(李珥)에게 인정되어 여러 차례 중앙관으로 천거되었다.
1575년 가을 정언이 되어 중앙관으로 올라온 뒤, 지평·헌납·장령·수찬·교리·경연강독관·응교·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587년 이조참판 권극례(權克禮)의 추천으로 안주목사에 기용되어, 양곡 1만여 석을 청해 기민을 구호하고 종곡(種穀)을 나누어주어 생업을 안정시켰다. 또, 병졸들의 훈련 근무도 연 4차 입번(入番)하던 제도를 6번제로 고쳐 시행하였다. 이는 군병을 넷으로 나누어 1년에 3개월씩 근무하게 하던 것을 1년에 2개월씩으로 고쳐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킨 것이다. 이 6번 입번제도는 그 뒤 순찰사 윤두수(尹斗壽)의 건의로 전국적인 병제로 정해졌다.
그 뒤 임진왜란 전까지 형조참판·대사헌·호조와 예조판서·이조판서 겸 도총관·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조판서로서 평안도도순찰사의 직무를 띠고 먼저 평안도로 향했고, 선조도 평양으로 파천했으나 평양마저 위태롭자 영변으로 옮겼다.
1600년 다시 좌의정을 거쳐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영남 지방과 서북 지방을 순무하고 돌아왔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광해군 즉위 후 다시 영의정이 되었을 때 전쟁 복구와 민생 안정책으로 국민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김육(金堉)이 건의한 대동법(大同法)을 경기도지방에 한해 실시해 토지 1결(結)당 16두(斗)의 쌀을 공세(貢稅)로 바치도록 하였다.
광해군이 난폭해지자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비에 대한 효도, 형제간의 우애, 여색에 대한 근신, 국가 재정의 절검 등을 극언으로 간쟁했고, 임해군(臨海君)의 처형에 극력 반대하다 실현되지 못하자 병을 이유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1623년(인조 1)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제일 먼저 영의정으로 부름을 받았다.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자, 인조에게 자신이 광해군 밑에서 영의정을 지냈으니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면 자신도 떠나야 한다는 말로 설복해 광해군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였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80세에 가까운 노구로 공주까지 왕을 호종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도체찰사로 세자를 호위해 전주로 갔다가 강화도로 와서 왕을 호위했으며, 서울로 환도하자 훈련도감제조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고령으로 체력이 약해져 사직을 청하고 낙향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 왕의 부름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性品이 素朴하고 單調로워 誇張이나 誇示할 줄을 모르고, 所任에 充實하고 正義感이 透徹하였다.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나 집은 두어 칸 짜리 오막살이 草家였으며, 退官 후에는 朝夕거리조차 없을 정도로 淸貧했다고 한다.
소공원 입구에서 가학산 광명동굴길로 트레킹을 시작하는 주위 情景은 온통 밤꽃내음으로 우리들의 情緖를 흠뻑 적시고 있었다. 우리들은 잠시 머물고 있다. 친구 용필이가 도착할 예정이라고 지수가 알려준다. 먼 산의 밤나무와 꽃말을 주고 받고 있으려니 용필이가 도착하였다. 서로 악수를 나누고 지수가 출발을 신호한다. 오전 10시 30분이다.
길따라 오르는 길은 자동차길인 듯 한데 자전거길이라고 프랑카드엔 적혀있다. 아직도 공사중인 길이다. 지수가 주위에 布陣하고 있는 山形을 소개한다. 오르는 길을 기준으로 왼쪽은 書讀山이고 가운데가 駕鶴山이며 길 오른쪽으로 구름산(雲山), 道德山이라고 말한다. 포장된 길을 벗어나 산길로 접어드는 길목엔 온갖 잡새와 나뭇잎을 스쳐가는 바람소리로 우리를 반긴다. 밤나무와 소나무가 鬱蒼한 숲길을 걸어 올라가고 있다. 햇볕은 구름에 가려 따갑지 않지만 節侯上으로 芒種이다.
망종은 24절기 중 아홉 번째에 해당하는 절기로써 소만(小滿)과 하지(夏至) 사이에 들며 음력 5월, 양력으로는 6월 7일 무렵이 된다. 태양의 황경(경도)이 75도에 달한 때이다. 망종이란 벼, 보리 같이 수염이 있는 까끄라기 곡식의 종자를 뿌려야 할 적당한 시기라는 뜻이다. 이 시기는 모내기와 보리베기에 알맞은 때이다. 그러므로 망종 무렵은 보리를 베고 논에 모를 심는 절후이다. 그만큼 대지가 肥沃하다는 의미도 절후에 담겨 있는 듯 하다.
발아래로 밟는 발길이 부드럽기 그지없다. 길섶에 휴게의자가 보인다. 잠시 休息을 취할 모양이다. 나무의자에 앉으려니 앞쪽에 노오란 꽃으로 다발을 한 나무들이 우리들과 인사를 나눈다. 시원한 숲바람과 함께 잘 어우러진 山中眞景이다. 다시 발길은 동굴이 있는 곳으로 오르고 있다. 길 가까이에 잣이 주렁 주렁 달린 잣나무가 群落을 이루고 있다. 나무계단과 흙길을 교대로 지나면서 어느덧 駕鶴山 광산동굴에 도착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光明駕鶴鑛山洞窟(Gwangmyeong Gahak Mine Cave)”이다.
경기도 광명시 가학동 산 17번지 일대(네비게이션은 가학광산동굴, 광명시 가학동 27번지, 가학동 산 17-1, 광명시 자원회수시설로 설정)에 위치해 있고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개방(마지막 입장시간 오후 4시 20분)하며, 연중무휴(단, 명절연휴 제외)로 운영되고 관람시에는 문화해설사가 동행 입장하여 상세하게 안내해 준다. 가학산은 경기도 광명시 가학동(駕鶴洞), 일직동(日直洞), 노온사동(老溫寺洞), 소하동(所下洞)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 220m이다. 구름산(雲山)과는 능고개를 서독산(書讀山)과는 도고내고개를 사이에 두고 솟아있다.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한 지형도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은 독립된 산으로 동쪽으로는 오리동 계곡이 발달되어 있으며 서쪽으로는 크게 두 개의 산줄기가 뻗어 있다. 가학산은 과거 鶴(지금의 白鷺로 추정)의 棲息處로 학들이 멍에처럼 마을을 둘러쌌다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마을 뒷산이 풍수지리로 볼 때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고 하고 있다.
광명가학광산동굴은 이 지역의 文化空間으로써 또한 藝術的인 만남의 空間으로써 또다른 한편으로는 敎育科學體驗空間으로 크게 각광받고 있는 곳이다. 문화공간으로는 洞窟展示會를 통하여 가학광산동굴의 역사와 이야기를 반영한 근대문화 전시관을 설치하고 유물전시회 및 신인 예술가들의 작품, 전시회 등을 통해 문화예술의 공간, 시간이 공존하는 공간을 느낄 수 있는 곳이며, 와이너리를 통하여 동굴 내부 기온이 연평균 12℃를 유지하고 있어 포도주 등 발효식품을 보관하는 저장고 및 체험공간을 planning하고 있다고 한다. 예술적인 만남의 공간으로는 洞窟 映畵館 운영을 통하여 동굴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의 색다른 체험을 감성적 접근으로 2배의 보는 즐거움과 감동을 선물하고 있으며, 洞窟 文化藝術公演을 통하여 동굴이라는 차별화된 장소에서 울림을 통한 음악회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교육과학체험간을 통하여는 靑少年 洞窟 探査 프로그램 운영을 통하여 학교폭력, 인터넷, 스마트폰 중독 예방 교육, 과학캠프 등과 함께 청소년의 스트레스를 날려줄 활동프로그램인 통굴 탐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靑少年 洞窟 科學캠프 운영을 통하여 동굴 탄생과 비밀, 동굴 생태, 동굴 과학 등 창의과학자 육성 및 지구과학 꿈나무 육성을 위한 캠프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원래 가학광산동굴의 정식명칭은 시흥동광산으로 1912년 4월에 경기도 시흥군 서면 가학리에 제968호로 광산등록을 하고 1972년까지 60년간 금, 은, 동, 아연 등을 채굴하던 곳이었다. 회사의 부도로 방치되다가 소래포구 젓갈을 보관해 오던 중 2011년 1월 26일 광명시가 매입해 수도권 최고의 관광명소로 탈바꿈시키고 있는 곳이다. 한때는 종업원이 500여명, 하루 채굴량이 250톤이 넘었던 수도권 최대의 금속광산이었다고 한다. 가학광산동굴의 조암광물로는 석영, 운모, 방해석, 녹니석, 스카른 광물, 장석이 있고, 광석광물로는 방연석, 섬아연석, 황동석, 수정, 황철석이 있다.
오전 11시 10분을 가리키고 있다. 지수가 11시 30분 입장권을 단체로 구입하여 나누어 준다. 동굴에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서려는데 추운 바람이 우리를 향해 掩襲한다. 광산내부의 12℃ 기온이 외부의 30℃와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플라스틱 안전모 착용과 함께 보온을 위한 점퍼를 입었다.
11시 30분이 되자 동굴 입장이 시작되었다. 坑道는 바닥에 조명시설을 잘 갖추어 보행에 큰 불편은 없었다. 보행로 한쪽으로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얼마를 걸어 들어 갔을까? 해설사가 일행들을 모아놓고 여러 가지 동굴관련 해설을 해 주었다. 이제부터는 정해진 갱로를 따라 해설사의 설명을 곁들인 동굴체험을 시작하고 있었다. 문득 오른쪽을 올려다보니 높게 높게 채굴했던 동굴이 위치하고 있다. 채굴기술의 眞髓를 보는 듯 했다. 앞을 향하니 광부들이 마음속에 품었던 ‘고향생각’, ‘부자가 되고픈 마음’을 낙서로 표현했던 액자가 걸려있었다. 광부들의 애틋한 사연이 표현된 정갈한 마음이 이 곳의 저변을 흐르고 있었다.
몇 걸음을 더 걸어 나가니 잘 정돈된 의자들이 있는 공연장에 도착했다. 동굴내에 공연장이 있다는 것은 선뜻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도 완전히 극장식 공연장이었다. 놀라운 시설임에 틀림없었다. 잠시 공연장 의자에 앉아 분위기를 만끽한 우리들은 공연장을 나와 갱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얼마 가지 않아 깍아지른 듯한 절벽아래로 계단이 시설되어 있어 내려가 보았다. 처음 보았던 높은 채굴 동굴과 거의 흡사할 정도로 깊은 곳까지 동굴을 내려팠던 것 같다. 이곳은 젓갈 숙성장소로 활용했던 곳이다. 내려갔던 계단을 다시 올라와 시원한 동굴기온과 갱도를 흐르는 물소리를 동무삼아 입구로 천천히 이동하였다.
앞이 훤히 입구가 보인다. 동굴밖을 나오니 찌는 듯한 기온이다. 시간이 정확히 12시를 가리키고 있다. 동행했던 용필이가 사정이 있어 이곳에서 발길을 돌린다. 모두 고마움과 함께 다음 만남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친구들은 동굴 뒤쪽을 오르는 나무계단식 길을 올라 산길의 여유공간에서 휴게를 가졌다. 지수가 준비해 온 족발을 안주로 소주와 맥주를 한잔씩 기울이며 숨가쁘게 트레킹한 疲勞를 달랬다. 그런데 참석회비를 내는 과정에 용필이가 금일봉을 찬조해 주어 무척 고마웠다. 그리고 지수의 서남지부 향후계획도 상세히 설명되었다. 또한 동창회 총무인 래현이가 이달 모임의 내용설명과 함께 많은 참여를 참석한 친우들에게 부탁하였다.
휴식을 마친 우리들은 이제 산 아래로 발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린벨트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풀숲이 茂盛한 호젓한 산길을 니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치영이가 많이 힘들어 보인다. 너무 무리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꿋꿋하게 트레킹을 계속하는 모습에서 성남인의 意志를 엿보는 것 같아 마음 흐뭇하였다.
갔던 길을 되돌아 철산역 2번출구앞에 도착했다. 이곳 인근에서 점심을 가질 계획이다. 광명시내로 들어가 ‘매운 낙지 찜’을 메뉴로 한 음식점에서 점심을 가졌다. 반주와 함께 낙지볶음, 찐만두, 낙지소스볶음밥으로 점심을 가지며, 서남지부의 발전을 위한 提言들이 論議하였고 오후 4시가 가까워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體驗에서 일행 모두가 깨달았겠지만 광부들의 채굴과정에서 보여준 極限生活은 우리들에게 示唆하는 바가 매우 크며, 그 어떤 狀況에서도 누구나가 가져야 할 生活의 意志와 剛健함을 가르쳐 준 所重한 체험이었다는 깨달음을 가져보고자 한다.
2014년 6월 7일 서남지부 리포터 석대식이가
첫댓글 잘읽어보 았습니다 - 역사 공부도하구요
대식이의 빠르고 상세한정보,
대국후 복기하듯 잘 읽었네.
이번모임에서 동문들의 세월의흔적을 보면서
내모습을 비춰본다.
몇일전 통화시 김용규가 간다더니 안나왔구먼
머리에 쥐는 나는듯 했지만 잘 일었음
언제 개인적으로라도 시간되면 가보고 싶을때 많은 도움이 될듯.
석대식 친구ㅡ대단한 글 쓰셨네. 고딩때 수업시간 생각 나는글. 지겨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