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즈음
한주영
백세 시대라 한다. 이제 그 절반을 살았다. 그동안 나의 삶은 어떠했을까? 나머지 삶은 어찌해야 할까?
내 인생에서 불교를 빼 놓고 이야기 하기는 힘들 것 같다. 흔히 말하는 모태신앙이었다. 어릴 적 새벽녘에 얼핏 잠이 깼을 때면 부모님의 불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곤 했다. 부처님이 얼마나 위대한지, 불법이 얼마나 수승한지 감탄사가 연거푸 흘러 나왔다.
엄마는 친구들이 놀러 오면 불교 설화를 들려주셔서 우리 친구들은 엄마의 이야기 듣기를 좋아했다. 중고등학교 교사이셨던 아버지는 우리 지역에 불교학생회를 만드시고 학생들을 모아 법회를 여셨다. 초파일에는 절에서 언니 오빠들과 함께 어르신들께 “봉축, 부처님오신날”이라고 쓰인 꽃을 달아드렸다. 불교가 뭔지는 몰라도 좋은 느낌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에 부모님은 우리 동네에 절을 지으셨다. 절에서 아버지 제자들과 함께 생활했다. 새벽 예불 때면 졸려서 머리를 이불속에 박고 한참을 씨름하기도 했지만 참 좋았다. 그때 예불문과 반야심경을 외웠다. 아마도 그때 외우지 않았으면 지금까지도 외우기 힘들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때 천수경을 외우지 못한 게 아쉽다. 나는 아직도 천수경을 외우기 못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우리 가족 그러니까 나와 여동생, 고모와 삼촌까지 4명의 아이들과 절에서 합숙하는 학생들의 도시락까지 10개가 넘는 도시락을 싸셨다. 그래도 전혀 힘든 기색이 없었다. 부처님 오신날 우리 읍에서는 처음으로 제등행렬을 했다. 나는 스님과 행렬의 맨 앞에 섰다. 그때의 자부심, 뿌듯함은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초파일 날 법당 앞마당에 등을 달고 초에 불을 켜던 일, 법당에서 언니 오빠들이랑 공연을 하며 즐거웠던 일, 너무나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더구나 우리 집에 뜻밖에 경사가 났다. 우리 부모님께는 남들이 다 아는 고민이 하나 있었는데 대대로 손이 귀한 집안에서 딸만 둘을 두고 슬하에 아들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우리 집에 남동생이 태어났다. 당시 엄마 연세가 이미 마흔이 넘었기 때문에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부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로부터 4년 뒤 다시 남동생 한명이 더 태어났다.
하지만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느 날 합숙하던 학생들이 모두 떠났다. 그리고 아버지는 학교를 그만 두셨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그때 아버지는 공립학교에서 사립학교로 자리를 옮기셨는데 이사장의 신임을 받고 있는 아버지를 교장이 견제하였다고 한다. 학생들과 합숙하는 것이 시비가 있었던 듯하다. 아버지는 당시에 40 중반, 자신감이 넘치셨던 때였기에 거침없이 사표를 쓰고 새로운 교육자의 길을 걷기로 작정하셨다. <한글소학>이라는 책을 내시고 그 책을 통해 새롭게 교육자의 길을 걷고자 하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하시는 일은 돈 벌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가정 경제는 급격히 나빠졌다.
그때 우리 절에는 비구니 스님이 오셨는데 너무나 빛나는 분이셨다. 우리 가족은 스님께 절을 맡기고 전부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혼자서 새벽예불을 나갔다. 스님의 시계는 정확했다. 새벽4시, 깜깜한 새벽길을 걸어 예불을 드리러 갈 때의 환희심은 정말로 최고였다. 엄마는 나에게 동방아를 하나 주셨는데 그 회색 옷이 나는 참 좋았다. 나는 스님이 되고 싶었다. 부모님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래서 내가 아무리 존경한다고 해도 스님에게서는 그와는 차원이 다른 고결한 향기가 났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느 날 그토록 좋아하던 스님이 보이지 않았다. 지리산으로 공부하러 떠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고3 수능을 마치고 어느 대학을 갈지 고민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갈만한, 또는 가고 싶은 대학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동국대학교에 불교학과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눈이 번쩍 뜨였다. 부모님께 불교학과에 가겠다고 하니 대찬성이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셨던 담임 선생님은 반대하셨다. 그래도 나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원서 접수 마감일이 임박해서야 동국대에 원서를 써주셨다. 그때까지도 담임 선생님은 과 쓰는 난을 비워놓고 다른 과를 가라고 권하셨다.
처음 가보는 대학 캠퍼스라 크고 좋아보였다. 원서접수를 하고 합격을 기다릴 때 혹시나 장학생이 되지 않을까 기대를 했는데 합격은 했지만 장학생이 되지는 못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입학금이 있을 턱이 없었다. 부모님은 어렵게 입학금을 겨우 마련하였다. 대학 다닐 내내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지만 그것이 대학생활에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시골에서 올라와 모든 것이 낯설고 기가 죽을 만도 한데, 나는 너무나 당당하게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이 신이 났다.
입학해서 처음 만난 선배는 <보살사상연구회>라는 불교대학 내 동아리로 나를 이끌었다. 그 선배들이랑 여주 신륵사에 가서 수련회도 하고 불교 공부도 했다. 그런데 그때 배운 공부는 기존에 내가 부모님께 들은 불교와는 사뭇 달랐다. 부모님은 주로 화엄이나 법화 등 대승경전을 이야기 하며 불교가 얼마나 형이상학적인지 감탄을 하셨는데, 당시 읽었던 <원시불교>라는 책에서는 불교는 형이상학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실천적 불교사상>이라는 책에서는 불교가 현실의 고(苦)를 해결하는 실천적인 종교임을 강조했다. 나는 어느덧 새로운 불교에 빠져들었다.
아버지는 국민윤리, 반공 교육에 앞장 서 오셨기 때문에 학생운동이 좌익에 물들고 있음을 개탄하시며 나에게 그것을 경계하도록 당부하셨다. 나는 학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한 선배가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었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군부독재여 안녕~” 그 선배는 수업을 듣는지, 마는지 늘 학생회 실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한편 보살사상연구회 선배들은 불교가 새로워져야 하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언제나 열띤 토론을 벌였다. 새로운 불교를 만들기 위해 하나 밖에 없는 종립 불교대학 학생의 위상과 역할이 무엇인지 각인시켰다. 나는 그 선배들의 가르침을 받아 남다른 사명감, 자부심과 긍지 그리고 불교의 미래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다.
부처님 오신날, 여의도에서 조계사까지 서울의 불자들이 모두 모여서 제등행렬을 하는 불교의 가장 큰 행사가 있었다. 선배들과 함께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면서 행진을 하고 있는데, 마포대교를 지날 즈음 선배들은 갑자기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고, 어느 틈에 경찰들은 최루탄을 쏘면서 대열 안으로 들어와 학생들을 연행하고 도망가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 나는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믿고 신뢰하던 선배들이 아버지가 그토록 경계하는 운동권들이 하는 행동을 하다니 가히 충격적이었다. 다음날 선배들은 “호헌철폐, 독재타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학생회에서 5·18 광주항쟁의 끔찍했던 영상을 보았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윽고 5·18 집회에 참석했다. 난생 처음 스크럼을 짜고 중문으로 향하는데 가슴은 콩닥콩닥 마구 뛰었다.
1학년 2학기 과대표에 선출되었다. 여학생이 과대표가 되는 일은 우리 과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른 과도 마찬가지여서 전체 과대표 중에 여학생은 한두 명에 불과했다. 당시 과대표는 남학생이 하고 여학생은 부과대표를 하며 보조를 하는 것이 성별분업처럼 익숙한 관행이었다. 특별히 의식적으로 과대표에 출마를 한 것은 아니었는데 투표 결과 과대표가 되었다.
2학년 때는 후배들에게 내가 선배들에게 받았던 것을 전해 주었다. 1년 차이 나는 후배들을 지도하기에는 내가 많이 부족했다. 더구나 이 친구들은 나보다 불교활동도 많이 하고 불교공부도 많이 하고 온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선배들은 부족한 나를 칭찬과 격려로 아껴 주셨다. 사회과학 공부도 병행했다. 소위 운동권 학생이 되어 가고 있었다.
3학년인가 4학년인가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보살사상연구회> 회장과 불교대학 학생회 교화부장을 맡았다. 동국대불교학생회, 석림회와 함께 ‘불교도 주간’을 선포하고 부처님 오신날을 기해 대대적인 홍보전을 펼쳤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 즉, 인간존엄의 선언이자, 중생의 괴로움을 편안케 하겠다는 부처님이 오신 뜻을 학내에 알리는 일을 했다. 직접 문안을 쓰고 그림을 그려 홍보물을 만들었다.
4학년 말, 진로를 고민하던 차에 선배의 권유로 대학원에 입학했다. 본과에서 유일한 합격생이었던 나를 사람들은 데모만 하고 다니는 운동권인 줄 알았는데 언제 공부를 했나 하는 시선으로 보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불교가 쉬웠다. 남들이 불교를 어렵다고 하는데 나는 한번 보면 부처님의 뜻이 환히 가슴에 들어왔다.
1990년, 페레스트로이카를 주창하던 러시아의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이 되었다.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는 자본주의 문제가 제도로 극복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결국 인간 개인 개인이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를 함께 나누어 평등한 사회를 만들려면 인간의 마음속에서 소유욕과 이기심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불교의 소욕지족,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다는 연기의 세계관에 대한 체화로써 수행이 필수적으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불교의 수행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석사학위 논문은 <안반수의 행법연구>이었다. 안세고가 번역한 <안반수의경>을 중심으로 아나빠나삿티로 알려진 호흡관에 관한 연구였는데 중국에 불교가 도입한 지 얼마 안 되는 초기에 번역된 지라 도가적인 해석이 많고 경과 주석이 섞여 있는 경전이었다. 당시에는 아나빠나삿띠라는 말도 생소했고 혼자서 경전과 일본학자들이 써 놓은 논문을 보며 알음알이로 논문을 썼을 뿐 실제로 그것을 직접 닦고 익혀서 체험하지는 못했다.
1998~9년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과 중앙종회 포교분과위원회에서 ‘재가불자를 위한 수행 체계화’ 사업을 하였다. 나는 그 일의 간사를 맡아 새롭게 부각되던 다양한 수행법을 체험할 기회를 가졌다. 위빠사나, 동사섭, 염불선, 깨달음의 장, 아봐타까지…. 새롭고도 놀라운 경험이었다. 무아, 연기, 공이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체험되었다. 자유, 자유였다. 행복이고 기쁨이었다.
마침 불교학과 선배인 오원칠 혜봉 원장님이 방배동에 <명상 아카데미>를 열었다. 와서 참여하라는 연락을 받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왜 하는지 묻지도 않고 무조건 달려갔다. 의심 없이 하라는 대로 따라 했다. 가만히 꽃을 바라보니 내가 꽃이 되었다. 나의 의식이 어디에 있는지, 내가 무의식적으로 어떤 습관적인 행위를 하는지 보게 되었다. 내 안의 고정관념들이 녹기 시작했다. 대학 때 외형의 출가는 또 하나의 얽매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재가법사의 길을 가고자 했지만 중학교 때부터 스님이 되어 온전히 수행에 전념하고 싶다는 어쩌지 못하였던 가슴에 자리하고 있었던 열망이 드디어 해소되었다. 3년간 열심히 참여했다. 공성을 머리가 아닌 현실로 체험하고 쨍하게 맑은 정신으로 잠을 자도 눈을 잠시 감았다 뜨는 것 같았다.
1999년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에서는 “여성불자 조직화”라는 사업계획을 발표했다. 간담회에 오라고 해서 간 것을 시작으로 나는 그 일을 맡는 주체가 되었다. 2000년 11월 27일 약 2년간의 준비 끝에 “불교여성개발원”을 창립하였다. 둘째 아이 출산으로 잠시 일을 접었다가 2002년 다시 불교여성개발원 실무자로 출근하여 얼마 전까지 일하다가 지금은 불교환경연대로 옮겨서 불교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니까 내 인생에서 불교를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가 없다. 특히 대학에 와서 불교를 전공하게 되고 보살로서 살겠다고 발원한 이후 그 맹세를 잊어본 적은 없다. 남편도 불교인연이 깊어 함께 불교 일을 한다. 큰아이가 고3 때 스스로 불자임을 선언할 때가 가장 보람이었다. 그 일을 편지로 적어 지난해 현대불교신문사 감사편지 공모에 내서 상을 받은 적도 있다.
이제 앞으로 불교 수행을 통해 좀 더 깊어지고 커지기를 바란다. 세상을 위해 온전히 쓰이기 위해서는 더 내 스스로 인식이 깊어져야 하고 마음이 더 커져야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여성재가불자로서 부처님의 수기를 받고 경전으로 전승되어오는 <승만경>에 나오는 승만부인의 10대원 중에서 마지막 열 번째 발원으로 마치고자 한다.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부터 깨달을 때까지
정법을 항상 몸에 지녀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가르침을 잊으면 대승을 잊는 것이며
대승을 잊으면 바라밀을 잊는 것이며
바라밀을 잊으면 대승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대승에 굳건한 마음이 없는 보살은 정법을 받아들일 욕구도 없고
취향 따라 들어갈 능력도 없어서
범부의 경지를 뛰어넘는 일을 영원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와 같이 한없는 잘못을 보며
또한 미래에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일 보살마하살의 큰 복덕을 보기 때문에 이 10대원을 세웁니다.
한주영 1991년 졸업. 불교여성개발원 사무처장 역임하고 현재는 불교환경연대 사무처장으로 근무 중이다. 석사학위 논문으로 <안반수의 행법연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