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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IV. 증명과 확인의 기도>의 줄거리 :
이제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위하여 사는 것이 내 사명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먹고 몸이 살도록 허락하시는 한, 나는 아버지에게만 마음을 다 드리기 위해 삽니다. 그리고 내 몸이 이 땅을 향한 아버지 주권의 착륙지점이 되기 위해서 삽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내 인생을 완결지으신 그 뜻을 이 땅에서 받아 이루기 위해 삽니다. 이렇게 세 가지를 위해서 사명자로 살아갈 때, 이 세 가지가 실제 삶에서 얼마나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끊임없이 확인하는 길을 알아봅니다.
IV. 증명과 확인의 기도
(마태복음 6:12~13)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본문 중심으로 <IV. 증명과 확인의 기도>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이제 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사는 것이 내 사명임을 깨닫고 인정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먹고 몸이 살도록 허락하시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명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실제 삶에서 얼마나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내가 사명자로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일과,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는 일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이 일이 얼마나 잘 수행하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단순히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임하시옵소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이기에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고, 점검할 수 있고, 잘못되면 본 궤도로 돌아올 수 있는지에 대해 본문이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기도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기도에 대한 사명이 잘 지켜지고 있는가를 알게 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는 기도는 아버지의 주권이 나를 착륙지점으로 내려와서 내 몸으로 맺는 관계의 통로들로 아버지의 다스리심이 쭉쭉 뻗어나가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기도입니다. 내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내게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시험에 들었다면 내가 아버지 주권의 착륙지점과 센터가 되어 드리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마지막으로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기도는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을 따라서 살지 못한다면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악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말하고 행동하면 악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악을 행하고 있다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사명자의 삶은 중단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악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주의 기도는 하나의 유기적인 연관성으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용서에 관한 기도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기도와 연결되고,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의 기도는 아버지 나라의 주권이 땅에 임하심과 다스리심의 기도와 연결되고, 악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는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다 깊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2절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삶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내가 사명자로 사는가 아닌가를 확인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 삶은 사람과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부딪히다 보면 내게 죄지은 자, 잘못을 저지른 자, 피해나 손해를 입힌 자, 빚진 자도 있게 됩니다. 이 말씀에서 죄로 번역된 헬라어 옵헤일레마(ὀφείλημα)는 빚, 손해, 피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포함하여 12절의 기도를 풀어보자면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하거나 손해를 입힌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가 아버지께 잘못한 것을 사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같은 말씀에 대해 옵헤일레마 대신 빗나감의 죄를 뜻하는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가 쓰였습니다. 다만 어느 쪽으로 이해하든 예수님께서 주의 기도를 통하여 전달하시려는 핵심 의미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를 굉장히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주의 기도가 끝난 이후에 이어지는 14~15절을 보면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피 흘리심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서 주어지는 은혜로 용서를 받는 것 같이 여겨지지 않습니다. 조건부 용서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게 잘못한 사람을 먼저 용서하면 아버지께서도 내가 아버지를 향해 저지른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는 말씀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조건부 용서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피를 흘리시고 살이 찢기시며 이루신 용서의 역사는 십자가를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되게 하는 권세를 주십니다. 모든 죄가 사해지면서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권세가 주어지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인정하여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이 믿음으로 죄 사함의 용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란 단순히 용서받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14~15절에서 말씀하신 잘못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여 용서받아서 아들이 된 자로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잘못한 것을 가리킵니다. 지렁이 같은 죄인인 나는 예수님의 은혜로 용서받아서 거룩하신 창조주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아들이 된 뒤로 아버지께 잘못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구절 속에는 상관관계가 들어있습니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이 있고 내가 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계십니다. 간단히 말해 사람, 나, 아버지가 나를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와 내게 잘못한 사람의 관계가 따로 있고,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따로 있어서 별도로 두 개의 관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잘못한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내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어떤 마음 상태를 갖느냐가 곧바로 사람을 대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내가 하나님께 잘못했을 경우에 나타나는 일이란 내게 피해를 주고 손해를 끼친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갑이라는 사람이 내게 피해를 주고 손해를 끼쳤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해의식과 손해의식이 생겨서 억울해한다든지, 괘씸하게 여긴다든지, 분통이 터져 어쩔 줄 모른다든지, 증오심과 보복심으로 앙갚음의 기회를 엿본다든지 하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나와 아버지의 관계와 나와 잘못한 사람의 관계는 나를 중심으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내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수 없어서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면, 그것은 나에게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름만으로 의식할 수 있는 아버지께 내 마음이 다 드려지지 않은 증거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핵심적인 의미를 12절의 기도를 통해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예를 스데반 집사님을 통해 생각해 봅니다.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봅니다. 그리고 돌에 맞아 죽어가는 상황에서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자신을 치는 자들의 용서를 구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용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이 돌에 맞아 죽는 상황은 무척 억울하고 화가 날 만합니다. ‘내 영혼이 귀신이 되어서 너희들을 밤마다 괴롭힐 것이다.’라고 했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에게는 억울함, 분통, 괘씸함, 증오, 앙갚음에 대한 정서가 없습니다. 하나뿐인 몸이 돌에 맞아 죽는 상황에서 자신을 치는 자들의 용서를 구하는 모습은 어떻게 보자면 맹탕 같습니다.
이로부터 용서란 내가 입은 피해와 손해 때문에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고, 괘씸함에도 이를 악물고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피해와 손해는 발생합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을 보면 그러한 피해의식이 없었습니다. ‘내가 손해를 봤다. 내가 피해를 봤다.’라는 의식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용서의 조건입니다. 화나고,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고, 괘씸하고, 마음에 안 들지만 감정을 억누르고 ‘그래 내가 용서하마.’라고 말하는 것이 용서가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님을 보면 애초에 분통이나 억울함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피해의식과 손해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좋음을 추구합니다. 이것은 스데반 집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에서 좋고, 아깝고, 보물로 여겨지는 것은 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몸이 돌에 맞아 죽는 상황에서도 하나도 잃어버릴 것이 없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은 ‘내가 비록 돌에 맞아 죽지만 손해 본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내 몸이 죽는다고 해서 내가 보물로 여기고, 아깝게 여기고, 좋음으로 여기는 것 중에서 손해 보는 것은 없다.’라는 의식이 있기에 용서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데반 집사님이 가졌던 좋음이란 무엇일까요?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을 보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스데반 집사님 마음도 좋음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에게 좋음이고, 보물이고, 아까운 것은 하나님 아버지이시고 예수님이시고 성령님이시고 천국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보물이고 그 아버지께 예수님이 내 마음을 데리고 가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듯이 예수님 안에 있는 나도 성령님을 통해 하나가 돼서 사위일체를 이룹니다. 사위일체가 일어나는 장소가 천국입니다. 이것이 스데반 집사님에게 진짜 좋음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의 가르침이나 이론이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이것을 진짜 좋음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에게는 천국이 좋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좋고, 내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불어 사위일체가 되는 것이 좋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세상 사람들이 돌로 쳐서 몸을 죽이든, 명예를 실추시키든, 돈을 약탈해 가든 무엇을 하더라도 내 마음의 진짜 좋음으로 여기는 것을 빼앗아 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빼앗아 갈 수 없으며, 하나님께 이르는 길 되신 예수님을 빼앗아 갈 수 없으며, 예수님과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가 되게 하시는 성령님을 빼앗아 갈 수 없으며, 천국을 빼앗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스데반 집사님이 천국과 삼위일체 하나님을 유일한 좋음과 보물로 여기고 있는 한, 이 세상에서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에서 이 보물을 빼앗아 갈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스데반 집사님은 전혀 피해의식과 손해의식을 갖지 않았기에 용서하려 노력했던 것이 아니라 애초에 용서할 건더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진짜로 보물로 여기고 아까운 것들은 아무것도 빼앗긴 것이 없는데 도대체 저들을 어떻게 용서하겠는가?’라고 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용서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은 어차피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자꾸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생깁니다. 딱히 내 돈을 사기 친 것도 아니고, 내 명예를 실추시킨 것도 아니지만, 하는 말이나 행동이 맘에 안 듭니다. 삶에서 이러한 상황이 빚어진다면 그것은 내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아버지만을 실제 좋음으로 보물로 유일한 아까움으로 대면하여, 아버지 가지기를 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명의 첫 번째 내용은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 되고 있는지 점검하는 방법은 스데반 집사님과 같은 용서가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내게 손해를 입히고 피해를 준 사람들이 마음에 안 들고 괘씸하다면 마음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손해와 피해는 발생할 수 있습니다. 다만 손해의식과 피해의식을 갖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손해의식과 피해의식을 갖는 이유는 이 땅의 것들이 좋음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것들이 좋음으로 여겨진다면 그것은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이름만으로 의식되는 하나님께 내 마음을 다 드려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상태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누군가 마음에 안 들거나 싫거나 하는 느낌이 들면 얼른 돌이켜야 합니다. ‘지금 내 마음이 땅에서 뒹굴고 있구나. 이름만으로 의식할 수 있는 하나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는데, 내 마음은 땅에서 뭘 하고 있느냐? 얼른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고 하늘로 올라가자.’라고 점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향한 잘못에 대하여 용서하는 참 마음이란 손해의식과 피해의식이 없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께로 가야만 합니다. 아버지께로 가면 아버지에 대한 잘못도 없어집니다. 내게 잘못한 자를 용서하듯이 아버지께 잘못한 나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에는 이러한 의미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께 잘못하여 아버지께 마음을 다 드리지 않으면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함을 보고 ‘내가 아버지께 잘못을 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잘못도 사라집니다.
이 기도를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 삶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내게 어떤 잘못을 하든지, 어떤 손해나 피해를 주든지, 내 마음에서는 손해의식과 피해의식이 생기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럴 수 있도록 삶의 현장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내 마음은 예수님을 옷 입고 하늘에 올라가 아버지만을 보물로, 아까움으로, 좋음으로 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마음은 하늘에 머물면서 쉬지 않고 아버지만을 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를 놓침이 진정한 손해요, 결정적인 피해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주님께서는 이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어서 13절을 보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명의 두 번째 내용인 내가 아버지의 주권이 내려오는 착륙지점이 되고, 내 몸으로 맺는 모든 관계에 아버지의 주권적 다스리심이 흘러 들어갈 수 있는 주권의 센터가 되느냐를 점검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주권의 착륙지점이 되고, 모든 관계로 아버지의 다스리심이 흘러 들어가는 주권의 센터가 잘 되고 있다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험에 든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아버지에 관련된 모든 사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내 것이 됩니다. 창조주로서의 유일하신 있음은 나의 존재감을 채워주십니다. 아버지의 유일하신 좋음은 나의 만족감을 채워주십니다. 또한 아버지가 창조주로서 모든 것들을 있게 하셨고, 내가 있음을 의식하는 모든 대상을 주권적으로 이끌어가실 계획과 생각이 있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엄연한 하나님 관련 사실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시험에 듦이란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시면서 나를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실까? 내가 이렇게 주의 기도를 드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응답은 되는 것일까?’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므리바에서 물 때문에 모세와 다툰 사건을 떠올려 봅니다. 출애굽기 17장 7절을 보면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태도가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사실들이 내 마음에서 의미가 없어져 버립니다. 이것은 지금 내가 아버지 주권의 착륙지점이 못 되고, 몸으로 맺어진 관계들로 흘러 들어가야 되는 아버지의 주권적 다스리심의 센터가 못 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증거가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떨 때 이러한 시험에 들게 될까요? 내 마음이 이 세상에서 어떤 대상을 붙잡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며 세상에 대해 죽는다고 하는데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놓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식을 놓지 않고, 돈을 놓지 않고, 건강을 놓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다고 하는데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을 붙잡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럴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붙잡고 있는 것이 세상적으로 잘되기를 바라고 소원하고 열망하게 됩니다. 내가 붙잡고 있는 세상 것에 대한 열망이 계속 이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은근히 지속적으로 바라고 있는 일들이 내가 붙잡고 있는 대상에 실제로 일어나지 않으면 삶은 무거워집니다. 힘들고 축축 처지게 됩니다. 마음으로 세상 것을 붙잡고 이렇게 되면 좋겠고 저렇게 되면 좋겠다는 바람과 희망과 열망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세상에 대한 바람이 삶을 뿌리부터 흔듭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라고 붙잡고 놓지 않는 중에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시험에 듭니다.
‘과연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그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고 나를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내가 붙잡고 있는 일이 이렇게까지 진전이 없을까? 어떻게 내가 이렇게까지 재정적으로 쪼들릴 수가 있지? 어떻게 내가 이렇게까지 몸이 아플 수가 있지? 어떻게 내 자녀가 이렇게까지 형통하지 않을 수가 있지? 어떻게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나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있지?’라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한다고 하는데도 세상에 대한 크고 작은 바람들이 계속되는 이유는 십자가를 메스 삼아 세상에 대한 바람의 뿌리를 끊어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한 바람은 계속되는데 그 바람이 이루어지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 아버지의 주권을 의심하게 됩니다. 이는 곧 특정한 대상들에 대해서는 내가 그것을 붙잡고 내가 주체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어느 한 대상이라도 마음에서 붙잡고 바란다면 내가 주체가 된 것입니다. 노골적으로 바라지 않고 은근히 바라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깜짝 놀라며 좋아한다면 은근히 바란 것입니다. 좋음이 아니라면 좋아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돈을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막상 돈이 많이 벌리니 기분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자녀의 형통을 십자가에서 못 박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가 서울대에 합격을 하니 기분이 참 좋습니다. 그렇다면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은근히 바라면서 일어나면 좋을 것들이 하나도 안 일어날 때 화가 납니다. 앞서 사람을 용서함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하나님이 용서가 안 됩니다. ‘주권자라며, 사랑한다며, 창조주라며, 나의 아버지라며, 그런데 왜 이렇게 내가 원하는 것이 안 이루어져?’라고 생각하며 시험에 듭니다.
십자가 복음을 처음 듣고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가면 소식이 감감합니다. 떠나버린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십자가 생활화가 좋게 들렸던 이유는 내가 은근히 바라는 세상 것들이 십자가 생활화를 하면 잘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자 십자가 생활화를 포기합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버리는 경우는 예외 없이 마음에서 붙잡고 있는 것이 하나 이상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놓지 않는 한 십자가 생활화를 할 수 없고, 십자가 생활화의 의미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마음으로 붙잡은 것을 절대로 원하는 대로 이루어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그것 하나 때문에 하늘로 올라오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내가 붙잡은 그것에 대해서 절대로 원하는 대로 잘 되게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시험에 든다는 것은 포괄적으로 말하면 삶에 대해서 감사가 없습니다. 내가 바라는 방향이 있고, 내가 바라는 구체적인 목적이 있고, 결실과 결과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한 사랑이 잠재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럴 때 툭 건드리면 화가 납니다. 아직도 마음으로 이 세상 것을 붙잡고 내가 주체가 되어서 좋고 나쁨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이렇게 돼야 돼.’라고 바라고 있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시험에 듭니다. 시험에 들면 아버지의 유일하신 있음과 좋음과 아버지의 살아계심과 아버지가 나를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이 다 의미 없는 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이 나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것도 전설처럼 여겨집니다.
이것은 무척 무서운 일입니다. 시험에 들 때 ‘내가 왜 십자가 생활화를 해야 해? 내가 왜 날마다 싸우듯이 십자가에서 세상을 향한 나의 죄와 저주의 체질을 죽여야 해? 그럴 의미가 뭐가 있어?’라고 여기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이 든다면 사명의 두 번째 내용인 아버지 주권의 착륙지점이 되고, 모든 관계로 주권적 다스림이 흘러 들어가는 주권의 센터가 전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주권의 착륙지점이 되고, 주권의 센터가 되어 있다는 증거는 어떻게 나타날까요? 세상 사람 눈에 아무리 안 좋게 보여도 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주권이 내려오시면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주권이 시원하게 내 속으로 들어오시고, 아버지의 다스리심이 쭉쭉 뻗어나갈 때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다 감사하게 됩니다. 감사가 사라지고 불평이 생기면 반드시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을 지적하게 됩니다. 이것이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며!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며!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라며! 하나님이 주권자이시라며! 어떻게 이럴 수 있어?’라고 하나님을 탓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악이란 무엇일까요?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버지의 뜻 안에서 이미 다 결정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뜻을 생각으로 받아서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 모든 것이 다 악입니다. 이전 설교에서 악에 대해 아버지를 빗나가는 것이고, 이 세상 것을 맛있어하는 썩은 입맛의 상태를 그대로 보존한 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다 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좋음을 추구하는 내 마음이 하늘로 다 올라가 아버지만을 먹고 아버지만을 갖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없는 이 세상에는 아버지의 주권이 내려와 아버지의 나라가 다스려집니다. 이 두 가지가 이루어지면 나는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을 따라 말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내 마음이 아버지를 유일한 좋음으로 거듭 확인하고 나에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버지만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범사에 감사할 만큼 아버지의 주권이 확실하게 임하는 통로가 되어 드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악입니다. 이것이 지속되면 한없이 악에 빠지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지 못하고, 아버지의 주권이 내려오심에 대해 범사에 감사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면 불평, 불만, 걱정, 근심이 생깁니다. 일과 상황에 쫓기는 중에 두렵고 불안하고 화가 나고 분통이 터집니다. 그러는 가운데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를 계속하면 점점 더 깊은 악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설령 인류를 위한 일을 하더라도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지 못하고, 아버지의 주권이 내려오심에 대해 감사도 없다면 지독한 악입니다. 오히려 인류를 위해 일한다는 명분이 좋기에 악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인류를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정해놓으신 뜻대로 살아야만 합니다. 내가 가족과 인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가족과 인류에 대해 내 마음이 죽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만을 좋음으로 가지고 이 세상에 대해서는 범사에 감사하면서, 오직 아버지가 정해놓으신 뜻대로만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족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인류를 위해서 제일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 감사가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만을 좋음으로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 상태에서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렇다면 다 악입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기도는 이것을 알아차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생각할수록, 말할수록, 행동할수록 더 깊은 악에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바람은 단 한 가지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성공적으로 결실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내 말과 행동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으로 인생이 더 나아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삶을 통해 바라는 것은 아버지의 뜻만을 그대로 받아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뿐입니다. 그 외에는 모두 악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하고 행동할 때 바랄 수 있는 것은 악에만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성공하는 것, 인정받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악에만 빠지지 않으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용서의 문제, 시험에 드느냐의 문제, 악에 빠지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나의 사명의 세 가지 내용인 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을 잘 수행하는가를 우리는 끊임없이 점검해야 합니다. 주의 기도는 위선자의 외식하는 기도도 아니고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닌 참된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가져다주시려고 하신 은혜의 진수를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내 것으로 만들고 느끼고 경험할 수 있게끔 하는 기도입니다.
기도에 대해 너무 인색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를 위해서 아침저녁으로 시간을 뚝뚝 잘라서 할애해야 합니다. 기도할 수 없을 만큼 바쁜 삶은 구조를 바꾸고, 바쁘게 만드는 그 일을 포기하고서라도 기도의 시간을 확보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에 대해 ‘5분 하기도 힘들다’라고 말하는 대신, 주 기도의 내용을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열 번이라도 반복하여 들으며 각 구절의 의미가 내 속에서 살아있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각 구절의 살아있는 의미가 내 구체적인 삶에 연결되고 적용됩니다. 내게 적용되는 상황에서 말씀으로 들은 기본 의미를 바탕으로 한 구절 한 구절 의미를 생각하면서 1시간도 기도할 수 있고 2시간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자식 잘 키우는 어머니가 아니라 남편 내조 잘하는 아내가 아니라 기도하는 어머니, 기도하는 아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돈 잘 버는 남편이나 훌륭한 아버지가 아니라 기도하는 남편이자 기도하는 아버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생활화가 없으면 안 되고, 또한 이것은 주의 기도를 생활화함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몇 시간에 걸쳐 나눴습니다. 이제 기도하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게 하시고, 과감하게 기도의 시간을 할애함으로써 주님이 주시려는 은혜가 살아서 꿈틀거림을 느낄 수 있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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