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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깊은 상처를 받은적이 있었습니까?
찬송: 91장 (슬픈 마음 있는 사람)
말씀: 히4:14~16 (담대히 나아가자)
지금까지 천사보다 뛰어나시고 모세보다 위대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던 히브리서 기자는 이제 부활 승천 하셔서 대제사장으로 계신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셨다. 그러므로 이제 은혜의 보좌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자.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히 나아갈 때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 있다.(16절)
(1) 긍휼하심을 받게 되고
(2)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된다.
나눔
(1)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임하면 내 인생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 되는데 나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얼마나 갈망하는가?
(2)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큼 기대하는가?
기도
(1) 노기천 목사님 :
(2) 이동기 목사님 :
(3) 고광옥 목사님 :
(4) 임영석 목사님 :
『치유하는 인간』
권수영 지음
근대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는 “치료는 자연이 하고 의사는 조력자 일 뿐” 이라는 말을 남겼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는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이요, 신이 인간에게 허락한 무한한 능력이다. 그래서 나를 자연과 우주의 한 부분으로 느끼고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을 선물로 인식하며 사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제 상처 받은 우리 자신을 우리 스스로 치유하는 마치 본능과도 같은 그 놀라운 힘들을 살펴보자.
(1) < 안아줌 그리고 뜨거운 안아줌 >
영국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도널드 위니콧은 막 태어난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출산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당연히 젖을 물리는 일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위니콧은 다소 다른 주장을 폈다. 젖을 먹이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강조한다. 그건 다름 아닌 안아주기라는 것이다. 왜 그럴까? 새로운 세상에 나와서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빠진 아이에게 평안함을 줄 수 있는 최초의 방법은 엄마의 안아주기였다. 갓난아이 모두가 사실은 엄마 품에 안길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엄청난 공포와 불안에서 빠져나와서 마음에 평안을 찾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가 풀어내야 할 첫 번째 힐링의 비밀은 홀딩(holding), 즉 안아주기다.
교육학자들이나 사회복지학 연구자들은 이 위니콧의 안아주는 환경을 가정뿐 아니라 학교나 사회로 연장해서 해석하기도 한다. 우리의 학교와 사회가 상호 공격이 난무하는 공간이 아니라, 충분히 좋은 돌봄이 있는 안아주는 환경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힐링이 필요한 사람에게 꼭 심리상담사 자격증이나 박사학위를 가진 전문 상담사가 필요한 건 아니다. 우리 모두가 태어날 때부터 온몸으로 경험했던 홀딩을 회복하는 것, 그런 환경이 되어주는 것이 곧 힐링의 시작이다.
(예) 발달장애를 가진 초등학교 1학년생 만수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p56~)
(나눔) 어떤 사람을 충분히 공감하면서 꼭 안아주었던 기억이 있는지?
(2) < 감정의 웅덩이 밑바닥 까지 내려가는 법 >
웅덩이에 한 사람이 빠졌다. 이 사람은 어두운 웅덩이 안에서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 거기서 큰 소리로 도움을 요청했다.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요! 저 좀 살려주세요!” 이때 지나가는 두 행인이 있다. 한 사람은 동감(sympathy)하는 행인, 다른 한 사람은 공감(empathy) 하는 행인이다. 동감하는 행인은 이렇게 반응할 것이다. “어떡해요! 웅덩이에 빠졌네요! 어떻게 하지?!” 웅덩이에 빠진 사람과 함께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상대방과 같은 고통을 자신도 느낀다. 여기에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행인이 웅덩이에 빠진 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려고 할 때, 행인의 위치를 생각해보라. 행인은 웅덩이 위 자신의 자리에 그대로 있다. 도움을 받는 사람은 저 밑아래에 위치해 있다. 왠지 도움을 주는 사람은 저 위에 있는 시혜자, 자신은 수혜를 입는 아랫사람의 느낌이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누군가에게 동정을 받는 느낌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우리는 누군가가 동정심을 보일 때 약간은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저기에 비해서 공감하는 행인은 어떻게 행동할까? 공감은 그저 똑같이 고통을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웅덩이에 직접 내려가서 상대방의 고통을 함께하는 것이다. 웅덩이 아래로 내려가는 행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고작 고통을 겪는 이와 함께 머무는 일이다. 그런데 이 ‘고작’을 무시할 일이 아니다. 아래에 내려가 고통받는 그 사람과 부둥켜안고, 함께 붙들고 울어주는 것이 바로 공감이다. 여기서 앞서 다룬 안아주기가 다시 등장한다. 꼭 안아주기, 그리고 고통당한 이와 함께 웅덩이 바닥에서 우는 일이 공감이다.
(예) 가습기 살균제로 자녀를 잃은 유가족 (85p~)
(나눔) 실의에 빠진 사람의, 감정 웅덩이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경험이 있는
지?
(3) < 창과 방패의 귀걸이를 한 남자 >
희랍어 에포케는 판단을 일시 중지한다는 철학 용어인데, 우리가 힐링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 주목해야 할 개념이다. 이 에포케는 공감의 영역과 연결되어 있다. 문제해결에 대한 의지로 가득 찬 부모, 혹은 답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선생님이나 회사 상급자들은 성급히 판단부터 하는 경우가 많다. 공감은 애시당초 안중에 없으니 시작도 못 하고 실패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제 초등학생이 된 아이가 화를 낼 때 부모들은 쉽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어디 조그마한 게 화를 내고 그래! 버릇없이 무슨 짓이야!” 직장 상사도 이에 못지않다. “야! 내가 널 몰라? 내가 이 회사에서 몇 년째인 줄 알아? 너 같은 사람 숱하게 봤거든. 난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알고 있어!” 대체 나도 날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부모님이나 직장 상사는 내 마음을 그리도 잘 안다는 것일까. 그래서 부모나 직장 상사는 자녀의, 또는 팀원의 마음 바닥에까지 내려오기가 쉽지 않은 것인지 모른다. 이 공감을 제대로 구동시키려면 우선 에포케, 그러니깐 판단 중지의 태도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축적해 온 경험을 수없이 많이 가지고 있다. 이런 경험이 현재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때도 있지만 때로는 방해를 할 때도 있다. 우리 마음속에 지우개가 있어서 과거 경험을 필요에 따라 지워버릴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이는 불가능하다. 마음의 지우개가 없다면, 잠시라도 내 과거로부터 온 어떤 기억들, 지금 여기에서의 경험에 영향을 줄 것들을 잠시만 괄호 안에 묶어두면 어떨까? 그런 의미로 사용하는 용어가 바로 ‘괄호 치기’다. 판단 중지를 가능하게 만드는 마음 자세라고 보면 된다. 그래야 상대방을 이해하는데 방해를 받지 않고 진정한 공감을 이룰 수 있다.
(예) 금발로 염색하고 양쪽 귀에 창과 방패 귀걸이를 한 남자 (p97~)
(나눔) 선입견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고 헤아렸던 적은 없었는지?
(4) < 두 번째 화살을 맞지마라 >
두 번째 화살은 맞지 마라. 무슨 뜻일까. 불가에서 전하는 유명한 격언인데, 첫 번째 화살을 신체적인 불쾌감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두 번째 화살은 마음의 불쾌감, 즉 심리사회적인 해석적 감정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2020년 우리는 코비드19의 대유행으로 인해 전 세계 전 인류가 첫 번째 화살을 맞았다. 바로 바이러스 감염이다. 우리 모두의 신체에 바로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화살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화살은 무엇일까? 두 번째 화살은 그로 인해서 전 세계가 극도의 공포감에 빠져들고 모두가 지나치게 불안해하며, 또 다른 사람을 경계하고 혐오감을 품는 심리사회적인 여파가 아닐까. 이런 심리사회적인 경험은 오히려 첫 번째 화살보다 더욱 위험한 독화살일 수 있다. 그런데, 두 번째 화살은 맞지 마라는 말은 무엇인가. 두 번째 화살은 피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 이는 스스로 조절이 가능하다는 의미일 수 있다. 여기 생리통이 유난히 심한 여성이 있다. 이 생리통이 시작되는 날이 매달 15일경부터 한 열흘간이라고 가정해보자. 이때 열흘간의 생리통이 첫 번째 화살이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신체적 고통을 수반한다. 이 여성에게 두 번째 화살은 무엇일까? 매달 생리통에 시달려온 이 여성은 생리가 시작하기도 전에, 그리고 끝난 이후에도 일주일 가까이 거의 한 달 내내 불안에 떨 수 있다. 한 달 중 생리통 스트레스가 없는 날이 별로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 여성은 두 번째 화살을 한 달 내내 맞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시작하기도 전에, ‘이제 일주일 있으면 또 시작이네, 어떡하지?’ 끝이 나도, ‘끝난 거 맞아? 아닌 것 같은데? 다시 시작하는 거 아니야? 아직도 많이 아픈 것 같은데?’ 등 초조함과 불안감이 한 달 내내 지속될 수 있다. 열흘간만 피할 수 없는 통증을 이는 그대로 느끼고 그 앞뒤로 사전, 사후에는 불필요하게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그래서 이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으려면 아예 첫 번째 화살부터, 즉 신체적 통증도 무조건 피하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마음의 태도를 바꿔보는 시도가 필요하다. 수용의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예) 마약하는 청소년과의 상담 (p.149~)
(나눔) 어떤 사람에 대해서 끝까지 참고 인내하며 그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수
용했던 적은 없었는지?
(5) < 괜찮아, 그냥 울면 돼 >
누군가와 함께 슬픔의 느낌을 나누는 애도. 즉 슬픔을 수용하는 과정이 힐링의 한 방편이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애도의 중요성을 잘 아는 민족이었다. 우리의 전통 장례 문화를 떠올려보자. 지금은 찾아보기 쉽지 않지만 예전에는 독특한 장례식장의 모습이 있다.
문상객이 함께 곡을 하고 심지어 시골에 가면, 장례식장에서 곡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일부러 울음을 조장하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 유족이 슬픔을 꾹 눌러 참기보다는 자연스럽게 곡을 하는 여러 문상객과 함께 슬픔을 담지 말고 쏟아내도록 허용하는 문화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안전하게 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문화 이것이 바로 우리 조상들의 장례 문화였다.
(예) 저자 부친의 장례식 (p.194~)
(나눔) 쪽팔리니까 남자는 울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으로 눈물을 억눌렸던 경험
은 없는지?
(6) < 수도사의 멘토링 >
정신분석학에서는 남들에게 보여주는 마스크를 쓰고 살아가는 사람을 ‘거짓 자기(flase self)’를 가졌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는 친밀감의 배신을 당한 사람들이 더이상 내면의 아픔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 방어적으로 사용하는 자기다. 거짓 자기를 가진 이의 내면에는 아주 유약한 자기가 숨겨져 있다. 거짓 자기는 이런 상처 받기 쉬운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 낸 자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이제 타인을 대할 때 자신의 유약한 진짜 모습이 아니라 겉으로 웃고 착한 척하는 가면 혹은 겉으로는 센 척하거나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가면 등을 쓰는 것이다.
(예) 저자가 만나 상담했던 내담자 (p.206~)
(나눔) 경계성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과 교제할 때가 있었는가?
(7) < 우리는 생각보다 더 깊이 연결되어있다 >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인해 우리는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는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다. 이제 우리가 지구촌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바로 이 SNS 때문이다. 인류가 거의 이웃처럼 느껴질 정도다. SNS는 단순한 정보 교환뿐 아니라, 서로를 가까이 느끼도록 만드는 정서적인 네트워크 역할을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워낙 표현을 잘 못 하는 민족이었다. 우리 문화는 겸양의 덕을 강조해서 자기표현을 굉장히 부담스러워했다. 조금만 자기 자랑을 해도 ‘근자감(근거없는자신감)’이 심하다며 흉을 본다. 공적인 자기표현의 기회가 통 없었다. 그런데 요즘 이 가상의 공간, 이 SNS 공간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야말로 자기애(narcissism)의 장이다. 올리는 여행 사진, 쇼핑한 물건, 먹고 있는 음식, 모두가 자기 자랑 천지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 중 하나는 내가 올린 글이나 사진에 ‘좋아요’를 눌러줄 때 느끼는 연대감이다. 조회 수를 통해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서로 연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공유하게 된다. 나는 마음속 감정을 두 가지로 분류하고는 한다. 먼저 첫 번째 범주의 감정을 ‘원심력 감정’이라 부르고, 또 다른 범주의 감정을 ‘구심력 감정’이라 부른다. 원심력은 힘의 방향이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지 않는가. 그럼 원심력 감정은 그 방향이 외부로 향한다. 다른 사람을 향한 감정, ‘대인 감정’이라 부를 수 있다. 대표적인 원심력 감정은 분노, 혐오 감정을 들 수 있다. 상대방에게 화를 내고 상대방을 미워하는 감정은 모두 방향이 바깥에 있는 대상을 향하고 있다. 꼭 부정적인 정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에 대한 ‘좋아요’도 분명 원심력 감정이다. 그렇다면 구심력 감정은 무엇일까. 방향이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다. 이런 감정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자격을 가진 사람인지에 대한 평가를 동반하는 감정이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끼는 감정이어서 ‘존재감’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느낌이라는 측면에서는 ‘정체성 감정’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우리가 사는 초연결 사회의 SNS가 그동안 억압된 우리의 감정 표출과 공유의 장이어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는 하지만, 분명 문제가 있다. 이 가상공간이 주로 원심력 감정 표현의 장으로만 활용된다는 점이다. SNS가 진정한 치유의 길로 이끄는 정서적 네트워크가 되려면 갈 길이 멀다. 치유로 가는 진정한 공감이 이루어지려면 원심력 감정이 아닌, 바로 구심력 감정을 잘 공유하는 공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 엄마가 남편에 대한 불만을 딸에게 표출한 것 (P.238~)
(나눔) 상대방의 구심력 감정에 대한, 나의 정서적인 공감능력은 어느 정도인
지?
(8) < 자신의 상처는 치유될 수 없을 거라는 사람에게 >
나는 가끔 상담 첫날부터 자신은 상담을 받아도 절대 치유가 힘들 것이라고 우기는 내담자를 만난다. 적잖은 비용을 내고 왔는데, 왜 초장부터 포기하고 체념하는지 내면의 진짜 동기가 궁금했다. 내 임상 경험으로는 대부분 이런 엄포를 놓는 내담자들은 보통 두 가지 강력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첫 번째는 과거에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 있어서, 그 사건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다. 마음에 지우개가 있어서 싹 지우면 좋겠는데 그걸 어떻게 해소하지 못해서 상담가를 찾아온 경우다. 두 번째는 내담자가 외부환경 때문에 치유가 불가하다고 믿는 경우다. 주로 이 경우는 가족 탓을 하는 경우가 많다. 가족이 정말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이라고 한탄한다. 흙수저로 태어난 자신의 환경이 문제이고, 폭력적인 부모와 가정환경 때문에 도저히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다. 정리하면 자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긴 과거의 사건 때문에, 아니면 어떻게 해도 없어지지 않을 가족이나 외부환경 때문에 현재의 변화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판단을 앞세운다. 가끔 두 가지 이유가 합해진 경우도 있다. 과거에 어떤 트라우마가 있다고 모두가 장애를 안고 사는 것은 아니다. 최근 트라우마 연구자들은 ‘외상 후 성장’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한다. 외상 후에 반드시 스트레스 장애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성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우도 많다는 의미이다. 내가 만난 세월호 유가족이 자주 들려주던 말이 있다. “자녀를 이렇게 떠나보내고 나서 제가 참 많이 변했어요. 과거에는 정말 살림만 하면서 살았는데, 제가 이렇게 용감하고 의지가 강한 사람인 줄 예전에는 몰랐어요.”새로운 변화다. “정말 예전에는 세상 물정도 하나도 모르고 살았는데, 이제 세상을 구석구석 살피는 눈도 생겼어요. 얼마나 힘없이 당하는 사람이 많은지,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도 남몰래 울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이제 알았어요. 다른 사람에 대한, 그리고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생긴 것 같아요.” 연구자들이 지적하는 세상을 보는 지평인 세계관의 확장이다. 연구자들은 역경 후 성장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가 바로 영적 성장이라고 주장한다. 영적인 성장은 과연 무엇일까? 영적 성장은 꼭 어떤 특정 종교에 입교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변화가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세계를 초월해서 타인을 위한 이타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진정으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 바뀌어갈 때 영혼이 성장하는 것이다.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을 쓴 헨리 나우웬은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자신이 입은 상처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원천이 될 수 있다.” 그렇다 상처가 생명의 숨으로 변화되는 것이 영적 성장이다.
(나눔) 나와 같은 상처를 겪고있는 사람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