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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현각 증도가] ⑨ 크게 베푸는 문은 열려 막힘이 없다 “비방도 할 수 없고 찬탄도 할 수 없네. 본체는 허공과 같아 한계가 없다. 여기 이 처소를 떠나지 않고 언제나 꽉차있지만 (이를) 구하려고 하면 그대는 볼 수가 없음을 안다.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네. 얻을 수도 없는 가운데 다만 얻을 뿐이다.” 앞 절의 의미를 연계하여 노래한다. 선자와 교학자의 진리를 깨닫는 것에 대한 견해차가 보인다. 교학자는 법수(法數)를 중요시 하지만 선자는 그러한 법수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다만 논리와 차제(次第)를 넘어선 ‘돈오’가 중요할 뿐이다. 이를 현각은 ‘영각(靈覺)’이라고 했다. 오직 불성의 달마가 현현(顯現)함이 중대할 뿐, 법수에 따르거나 그 틀에 끌려 성제(聖諦)를 지해(知解)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침묵의 말, 말함의 침묵. 크게 베푸는 문은 열려 막힘이 없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떤 종지를 깨쳤냐고 묻는다면 마하반야의 힘이라고 말해 주리라.”
침묵도 설법이고 설법도 침묵이다. 문수보살이 반야가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유마는 침묵한다. 이를 ‘유마일묵(維摩一默) 우레와 같다’고 했다. 여기서 현각은 ‘지마득’을 ‘어묵일여(語默一如)’로서 표명한 것이다. 『운문광록』에 “묻건데, 어떠한 것이 말함의 침묵인가요?” 운문은 “청기력장(淸機歷掌)”이라고. 또 묻기를 “어떠한 것이 침묵의 말함인가요?” 스님은 (소리죽여) “하-”라고. 다시 묻기를 “침묵도 말함도 아닐 때는 어떠합니까?” 스님은 방망이로 그를 내 쫓았다.
“어느 때는 긍정하고 어느 때는 부정함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역행 순행, 하늘도 예측하지 못한다. 나는 일찍이 오래 전부터 수행해 왔다. 사람들을 부질없이 속이려고 함은 아니다.”
현각자신의 수행의 모습을 토로한다. 긍정과 부정, 순행과 역행을 사람도 신들도 알 수 없는 행이며, 또한 다겁으로 수행해 온 현각은, 자신의 행이 결코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임을 강조한다. 외도처럼 수행을 통하여 인천의 복을 바라거나 범부를 속이기 위한 것은 절대 아니었음을 분명히 말한다.
혜원 스님 [출처 : 법보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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