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악연의 징조
신성한 매실 758
한날, 그의 부인이 간식을 갖다주려 그녀의 방을 들렀다.
마침 문이 열려있었다.
부인은 공부에 방해되기 싫어 조심조심 들어갔다.
그런데 아들과 민채원이 손을 붙잡고 기도하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아들이 그 나이 되도록 교회 한 번 나가지 않은 무신론자였다.
그걸 잘 알던 부인은 그 점이 꽤 이상했다고 영감에게 알렸다.
그뿐만 아니었다.
이후에도 부인은 간식을 들고 그녀의 방에 몇 번 갔다.
그런데 그날도 이상하게도 문이 열려있었다.
헉!
쨍그렁.
놀란 부인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이후로 아들은 못 마시던 술까지 마셨다.
물론 영감은 시험 압박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여 그리한 줄 알았다.
그런데 아들의 음주가 일주일에 서너 번이 되자, 영감은 서서히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를 따로 불러 주의시키었으나, 그녀는 딱 잡아떼었다.
한날, 아들이 외출한 사이에 그는 아들의 방에 들어가 보았다.
평소 자신의 방엔 허락 없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였기에 실로 오랜만이었다.
놀랍게도 아들의 방에는 소주병이 뒹굴고 있었다.
더 이상한 것은 아들의 책상 위에 있는 책들이었다.
영감은 이 책들이 고시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천년왕국’, ‘요한계시록’, ‘기독교 비판’ 등등의 책들이었다.
영감은 내친김에 아들의 책상 서랍을 열어보았다.
그곳에는 여러 통의 편지가 있었다.
궁금해진 그는 편지를 꺼내 읽어보았는데, 이건 당최 읽을 수가 없었다.
영어도 아닌 이상한 글자로 된 외국어투성이 편지였다.
더욱 아들이 수상하다고 느낀 영감은 맨 마지막 서랍을 열었다.
그 서랍에는 아들이 고이 모셔 둔 책 한 권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성경 같은 종교 서적이었다.
책 표지에는 빨간 글씨로 ‘666의 입문’이라고 적혀있었다.
그제야 아들이 사이비 종교에 빠진 것을 알았다.
영감은 너무 화가 나고 분통이 터져 아들이 외출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면서 얼마 전 아내가 말해 준 아들과 그녀의 섹스 장면을 떠올렸다.
마음 같아선 당장 민채원의 방에 가서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일단 아들의 말을 들어보자는 심산으로 아들을 기다렸다.
아들은 자정이 다 되어서야 들어왔다.
어디에 다녀오냐고 묻자 아들은 답답해서 산에 다녀왔다고 말했다.
아들의 입에선 심한 역한 술 냄새가 풍겼다.
영감은 아들이 태어나고 처음으로 손찌검했다.
그러면서 아들의 방에서 이상한 책들과 종교 서적을 봤다며 이게 다 민채원과 관련된 일이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하지만 아들은 이건 자신이 취미 삼아 보는 책이라며 극구 부인했다.
영감이 당장 민채원을 이 집에서 쫓아내겠다는 말을 듣자, 일부 인정하였다.
그렇지만 민 선생을 쫓아내면 자신도 집을 나가겠다고 협박했다.
그나마 아들은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 술을 끊고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맹세하는 바람에 영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 아들은 약속한 대로 공부에만 전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즈음에 민채원도 바쁜 모양이었다.
원룸에 자주 들어오지 않으면서 어떤 날은 남자를 데리고 온 적도 있었다.
이상한 점은 남자가 민채원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민채원은 일주일에 한두 번은 아들의 공부를 봐주었다.
그러기에 영감은 그간의 일을 모르는 척 덮어주었다.
어쨌거나 평상시의 모습을 되찾은 아들 때문에 일상은 평온했다.
그런데 그런 평온한 일상이 깨진 날이 결국 일어나고 말았다.
그날은 친척의 부음에 영감과 부인이 장례식에 가던 날이었다.
꽤 가까운 친척이어서 영감 내외는 밤을 새울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내가 몸이 좋지 않아 자정 무렵에 귀가하였다.
그날도 문이 열려있었다.
영감은 아들이 혹 외출하였다가 깜빡 잊고 문을 잠그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열린 문을 젖히고 거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너무나도 충격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거실엔 전등이 꺼져있었고 중앙 탁자 위에 초 한 다발이 켜져 있었다.
게다가 생전 처음 들어보는 기이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탁자 양편에 사람 둘이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영감은 혹시 누구 생일이라서 파티하고 있나 싶었다.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춤을 추는 사람 둘은 완전히 나체였다.
깜짝 놀란 영감은 거실 등을 켰다.
불을 켜보니 놀랍게도 그 둘은 아들과 민채원이였다.
상황 파악이 된 영감은 그다음 날 아침, 민채원을 찾아가 방을 빼달라고 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들은 민 선생을 나가게 하면 자신은 죽어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영감은 아들의 요구를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들과 타협점을 찾았다.
그건 아들이 여기를 떠나 인근 산에 있는 절로 들어가서 공부하는 대신에 민채원은 그대로 두고 주말에 한번 과외를 받게 했다.
이후 아들은 절에서 사나흘 정도 머물다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때부터 아들은 친구 한 명을 끌어들여 민채원에게 과외를 함께 받았다.
친구 역시 영어 실력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영감은 아들이 친구와 함께 있어 안심되었다.
과연 아들과 친구는 기대한 대로 그녀의 방에서 공부만 열심히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한동안 공부에만 열중하는 줄 알았던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해 겨울 무렵, 돌연 민채원이 원룸을 떠나자 다음 날 종적을 감추었다.
아니, 아들뿐만 아니었다.
아들의 친구마저 집을 나갔다는 소식을 그의 부모에게서 들었다.
영감은 하늘이 무너질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곤 이 모든 것은 민채원, 그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최림은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 ‘악연’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의 고백은 사건을 해결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룸 주인은 마음이 후련했든지 소주 한 병을 더 시켰다.
최림은 행여, 이 젊은이들이 원지 둔치 사건의 용의자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한편, 권 팀장은 사무실에서 재수색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리산 일대는 폭설로 모두 통제된 상태였다.
답답한 권 팀장은 김유리에게 그날 점집에서 체포한 박수무당에 관하여 물었다.
“네. 조서는 다 꾸며두었고 내일쯤 검찰에 송치할 계획입니다.”
김유리의 대답은 명쾌했다.
“내 말대로 공연음란죄에다 시체 유기, 사체 절취·절도죄도 추가했지?”
“네.”
“그놈 데려와 봐.”
권 팀장은 눈만 그치면 지금이라도 당장 수색을 전개할 생각이었다.
그전에 그를 불러 그때 윤 보살이 한 말의 사실 여부를 확실히 하고 싶었다.
잠시 뒤, 유치장에 있던 박수무당이 조사실로 들어왔다.
오늘 보니 그는 그저 한심하고 초췌한 중늙은이일 뿐이었다.
권 팀장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그에게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권했다.
처음엔 경계하는 모습이 역력했던 그는 이내 긴장을 풀었다.
“윤 보살에게 이야기 다 들었으니 하나만 묻겠습니다. 정말 한 달에 한 번 솔봉에 올라가면 건너편 공동체 마을에서 버리는 사체가 있단 말입니까?”
권 팀장의 질문에 그는 모든 걸 체념했는지 의외로 순순히 자백했다.
“맞습니다. 거의 한 달에 한 번꼴입니다.”
“매월 보름달이 뜨는 밤, 사체는 늘 불에 시커멓게 그을렸다고 했다던데?”
“네.”
“사체의 성별이나 나이대는 어떻던가요?”
“주로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체가 건너편 공동체 마을에서 왔다는 건 확실한가요?”
“그럼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선생은 그 마을에 가본 적이 있습니까?”
권 팀장의 날카로운 질문에 그는 잠시 주저하는 듯 보였으나, 이내 입을 열었다.
“사실, 처음에는 그들이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다 아마 세 번째 되던 날, 저도 너무 궁금하여 그들을 미행한 한 적이 있습니다.”
“미행했어요?”
“네, 그들을 따라 솔봉에서 아래쪽으로 내려갔는데 그곳에 마을이 있었습니다.”
“마을이 있었다?”
“네, 그때 제가 팻말을 봤거든요. 얼핏 봐서 상세한 이름까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공동체 마을인 것은 확실합니다.”
권 팀장은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그 마을이 점점 궁금해졌다.
“선생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뭘요?”
“왜 그 마을에서 한 달에 한 번 시체가 나오는지. 그것도 불에 탄 채로.”
그때였다.
여태 순순히 자백하던 그가 돌연 권 팀장 앞에 무릎을 꿇었다.
권 팀장은 이자가 왜 이러나 싶어 의아했지만, 일단 그를 일으켜 세웠다.
“팀장님. 저를 좀 살려주십시오. 이제 열흘만 기도하면 제 아들이 살 수가 있습니다. 제발 저를 이곳에서 좀 빼주십시오. 그리해주신다면 권 팀장님이 알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순간, 권 팀장은 이자가 의외로 열쇠를 쥐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