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년 음반을 낸 다섯손가락은 85년 서울음반에서 본격적인 음반을 만들었지만 연주를 하던 베이스의 하광훈 그리고 최태완 드럼의 박강영이 탈퇴를 하면서 보컬이었던 임형순과 기타의 이두헌은 최준성(서강대 생물과)이라는 실력있는 연주자를 베이스 멤버로 받아들이고 키보드에 클래식을 전공한 강태원(추계예대 ) 그리고 이두헌이 다니던 동국대에서 박철하라는 학생을 영입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이상희라는 광운공대생이 드럼을 담당하지만 최준성이 입대를 하면서 팀은 위기에 빠진다.
이때 동국대 응원동아리에 소속된 백상( 흰코끼리)에서 후배인 박문일을 베이스 주자로 영입 활동을 이어간다. 당시 2집 음반이 나오며 여기의 머릿곡인 '사랑할 순 없는지' 가 알려지고 '풍선'은 힛트를 하며 86년도 다섯손가락은 방송에 얼굴을 알리며 공연을 하기 위해 파고다 극장 뿐 아니라 부산이나 광주 그리고 대학축제에서 활동을 한다.
그리고 아시안게임이 열리자 우리나라 대학생 밴드를 대표해 외국 대학생 밴드와 큰 공연장에서 공연도 한다. 그러나 건반주자 강태원이 입대를 하고 동생인 강태수가 키보드와 피아노를 담당하는데 10회 공연이 이들이 마지막 공연이었다. 그러나 유명해지는 것에 비례해 군대문제가 발목을 잡고 또한 졸업이후 이들이 진로가 중요했기에 갈등을 한다.
87년 봄 다섯손가락은 해체를 했고 프로의 발판을 만든 임형순은 서울음반에서 솔로앨범을 발표하는데 밴드를 할 때 보다 연주가 간결해지고 더 세련되 지긴 하지만 다섯손가락에서 보여줬던 꽉찬 느낌은 보기 어려웠다. 그리고 이두헌은 콘서트장에서 음반에서 표현하지 못했던 노랫말과 심의에 걸려 제대로 하지 못했던 노래들을 다시 만들어 87년 봄 발표를 하고 88년 파고다극장에서 '그리운 이름 다섯손가락 ' 이란 이름으로 콘서트를 한다. 이 콘서트가 11번째이며 이 때 군에서 돌아 온 최준성이 건반과 피아노를 강태수와 함께 하며 당시 꿈으로 유명한 '정유경' 이 ' 너를 보내며' '우울한 날엔 어떤 옷을 입을까?'를 발표한다.
이때 다섯손가락 리더였던 이두헌은 자신의 작품들을 기성 가수들에게 주고 발표하게 하고 본인의 역량을 넓히는데 다섯손가락을 걸쳐간 ' 최호섭(로보트 태권 V주제가를 부르고 돌개바람에서 고 김현식과 함께 활동: 세월이 가면으로 1집 앨범 발표, 작곡가 최창권의 아들 , 연극이 끝난 후를 만들고 샤프의 멤버 최명섭의 동생) 이 성공을 하고 베이스를 쳤던 하광훈이 변진섭에게 곡을 주고 연주자로 성공을 하며 그리그 드럼의 박강영이 자신의 전공을 살려 작곡을 하여 가수(강수지나 김혜림에게 곡을 주고 조용필도 부른다.) 들에게 곡을 줘서 성공한다. 그리고 최태완은 더 전문적 연주자로 파고들어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과 '봄 여름 가을 겨울'에 참여를 한다.
시작할 땐 대학생 그룹이니 아마추어 냄새가 날 줄 알았지만 다섯손가락을 거친 이들은 더 성장했고 나름의 영역에서 이름을 날린다. 단 2집에 참여했던 베이스의 박문일은 임재범 이지웅 손무현등과 '외인부대'를 결성하고 참여를 했으나 1집이 끝이었고 드럼의 이상희 그리고 키보드의 강태원과 그 이후 들어온 강태수는 보기 어려웠다. 특히 최준성은 부산의 대학생 연합밴드인 ' 평균율' 에 들어가 건반을 담당하지만 대단할 것 같은 이 밴드는 생각보다 당시의 분위기를 잡지 못하고 나눠지고 이색지대 그리고 모노로 나눠지고 이색지대에선 이범학이 ' 이별 아닌 이별'을 힛트하며 모노를 만든 박정원은 김보희와 함께 이름을 날리나 어느날 해체되었다. 그리고 당시 평균율에서 함께 했던 드럼의 강수호는 유학을 갖다온 후 세션계의 유명주자가 되고 포커션을 했던 임길상은 여러 연주자들과 활동을 한다.
넓으면서 좁은 가요계는 서로 연결이 되는데 김건모도 ' 평균율'에서 잠깐 활동을 하며 이상우도 왕성한 활동을 할 때 평균율과 함께 공연을 하는데 이상우에게 곡을 준 이가 학교(동아대) 친구인 박정원이었다. 다시 시간을 돌려서 임형순이 큰 공연장에서 솔로가수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서 활동한 연주자나 유영선이 만들었던 '오리엔탈쇼크'와 공연을 준비할 때 이두헌은 작은 파고다 극장에서 공연을 한다. 그러나 임형순 없는 다섯손가락의 공연은 파워가 약했다.
보통 사람들은 메탈밴드들의 가수나 연주자들의 파워만 강할 거라 생각하지만 다섯손가락의 연주나 임형순의 성량이나 파워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 때 발표한 노래는 3집과 4집에서 발표가 되며 사람들에게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 다섯손가락' 의 이두헌이 추구하던 시대의 뒷면 꼭 어렵고 참여적이지 않아도 고민하던 내용을 음악으로 선보였다고 생각한다.
'전자오락실에서'는 이두헌이 대학교 저학년 시절 술에 취해서 오락실에 갔을 때 당시 유행하던 1942라는 게임을 하면서 느꼈던 감정을 시로 적어 노래로 만들었다. 공연장에선 87년에 선을 조금씩 보이고 발표했으나 판으로 나온 건 이두헌이 군대를 입대할 쯤인 89년이었다. 나도 이 음반이 발표된 것을 안게 90년 초반이었는데 당시 군대에 있어 소식을 몰랐으나 휴가를 복귀하던 날 군산시내 음반점에서 ' 다섯손가락의 음반'을 보고 다시 재결성된 줄 알았으나 그건 그냥 꿈이었다. 세월이 지나 다섯손가락의 초창기 멤버들은 계속 음악을 하고 있고 연주자로 교수로 그리고 사업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며 간간히 모여서 공연도 한다. 지금은 기타 이두헌 보컬 임형순 건반 최태완 베이스 이태윤 드럼 장 혁이며 건반의 최태완 베이스 이태윤 드럼의 장 혁은 다른 밴드에서 활동을 하며 이두헌 또한 독자적 밴드가 또 있다.
새벽기차와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풍선' 정도를 다섯손가락의 노래로 알지만 이들이 하고 싶던 노래는 다양하며 어떤 가수나 밴드를 이야기 할 때 방송에 소개되는 모습 말고 그들이 발표한 음반과 공연장에서의 모습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의 모습은 과거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보통 헤어지면 다시 만들어지기 어려운 밴드가 모습을 보여주고 추억을 소환시켜 준다는 점은 설레고 반가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