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김후 묘(山淸金後墓)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산청군 신등면
평지리에 있는, 15세기~18세기에 걸쳐 상산김씨 13대 후(後)를
비롯한 모두 6기의 무덤이다.
▲ 商山金氏나무리(法勿)入鄕祖金後墓
2003년 9월 18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251호 산청 상산김씨 김후
묘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인《산청 김후
묘(山淸金後墓)》로 변경되었다. 경남 산청군 신등면 평지리 산 33
번지에 있는 이 묘지는 나무리 상산 김씨(商山金氏) 13세 김후(金
後: 1365~1397)의 묘지인데, 김후(金後)는 나무리 상산 김씨(商
山金氏)의 이 마을 입향조(入鄕祖)로 본관은 상산(商山; 경북 상주
의 옛지명)이다.
피장자(被葬者) 김후(金後)는 고려말(高麗末) 사람으로 포은 정몽주
(圃隱 鄭夢周: 1337~1392)에게서 사사(師事)하였고, 정4품 직제학
(直提學)의 벼슬에 올랐으나, 1392년 4월 4일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杜門洞)에 은거(隱居)한 72현(賢)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 후 두문동(杜門洞)에서 나와 처가(妻家)인 이곳 단성현(丹城縣) 법
물(法勿) 나무리로 낙향(落鄕)했다.
▲ 나무리에 들어와 은락재를 짓고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김후(金後)는 동지들과 이별하고 두문동을 떠나면서 다음과 같은 안타까운 마음을 남겼다.
同被白雲像 (동피백운상) 동지들과 높고 깨끗한 기상을 가지고
遊於北岳中 (유어북악중) 한때는 북악산 속에서 놀았는데
今我沒塵土 (금아몰진토) 이제 속세에 묻혀 작은 티끌이 되어서
奇身莽蒼空 (기신망창공) 이름은 저 하늘에다 맡기고 가네.
두문동에서 나와서 은락재를 지은 후 남긴 시에서 평온해진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空荒園裏數株花 (공황원리수주화) 황량한 정원에 몇 그루 꽃송이는
潤色山村寂寞家 (윤색산촌적막가) 산촌에 적막한 집을 화사하게 빛내주네
入室更看樽有酒 (입실경간준유주) 방에 들어와 술항아리 다시 보니
宦情從此薄於紗 (환정종차박어사) 이제 벼슬길 나갈 생각 거의 없구나.
이 시(詩)는 현재 은락재(隱樂齋) 주련(柱聯)으로 걸려있다.
▲은락재기(隱樂齋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忠)을 붉은 ‘단(丹)’자로, 무너지지 않는 큰
언덕을 비유하여 언덕 ‘구(邱)’자를 붙여 호(號)를 ‘단구(丹邱)’ 라 지
었다.
또한 《중용(中庸)12章》 구절(句節)의
「君子之道(군자지도)는 費而隱(비이은)이니라。」에서
‘군자(君子)의 도(道)는 무변광대(無邊鑛大)하지만 본체는 은미(隱微)
하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와
《논어(論語)》<학이편(學而篇)>
「有朋(유붕)이 自遠方來(자원방래)면、不亦樂乎(불역락호)아라。」에서
‘벗이 나를 알고 스스로 멀리서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에서 ‘은락’
(隱樂)이라고도 했다.
▲ 상단에 위치한 김후의 묘엔 夫人張氏와 합장봉분이다
고려(高麗) 16공신의 한 분인 고려 정당문학(高麗政堂文學) 문충공(文忠
公) 난계 김득배(蘭溪金得培: 1312~1362) 선생 또한 상산인(商山人)으
로 포은 정몽주(圃隱鄭夢周: 1338~1392)의 스승이었다. 난계(蘭溪) 선
생이 모함(謀陷)을 받아 참수(斬首)되었을 때, 목숨을 걸고 스승의 시신
(屍身)을 거둔 사람은 포은(圃隱) 선생이다. 그 후 포은(圃隱) 선생이 선
죽교(善竹橋)에서 피살(被殺)되자 아무도 돌보지 않던 시신(屍身)을 김
후(金後)가 거두어 장례(葬禮)를 치렀다. 난계(蘭溪)가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에게 진 빚을 김후(金後)가 갚은 격이다.
상산김씨(商山金氏) 나무리 입향조(入鄕祖) 김후(金後) 선생은 이곳에
은락재(隱樂齋)를 지은 후, 그 이름대로 숨어 은둔(隱遁)하면서 시문(詩
文)을 즐기며 초명(初名)이던 김준(金浚)에서 김후(金後)로 개명(改名)
하고, 고려의 절신(節臣)으로 세상을 등지고 지내다 향년(享年) 33세에
조서(早逝)하였다. 이 은락재(隱樂齋)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언덕에
는 그의 묘소(墓所)가 있다. 모두 4단으로 이루어진 이 묘역(墓域)에는
15∼18세기에 걸쳐 상산 김씨(商山金氏) 13대 후(後)를 비롯한 모두
6기의 묘(墓)가 조성되어 있다. 이중 13대 후(後)와 14대 장(張)의 묘
는 방형분(方形墳)이고, 19대 경근(敬謹)과 25대 규한(奎漢)의 부인
평산 신씨(平山申氏)의 묘는 원분(圓墳)이다.
방형분(方形墳)은 15세기 형식이고, 원분(圓墳)은 16세기 말 이후로,
이것은 고려 말(高麗末)에서 조선 초(朝鮮初)에 걸쳐 유행하던 방형분
의 종말과, 원분(圓墳)이 조성되기 시작하는 시점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가장 상단에 위치한 김후(金後)의 묘는 부인 장씨(張氏)와 합장되어 하
나의 봉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갑석의 각 모서리는 끝이 가볍게 들어
올려져 있어, 탑의 옥개석이나 한옥 처마의 부드러운 곡선미를 연상케
한다.
▲ 통정대부보문각직제학단구선생상산김공지묘
또한 김후(金後)의 묘(墓) 면석(面石)에 새겨진 명문(銘文)은 묘지(墓
誌)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 고인(故人)의 생전 행적(生前行績)과 이름,
본관(本貫), 자손관계(子孫關係), 묘(墓)의 조성연대(造成年代)와 위
치(位置) 등이 기록되어 있다. 방형분의 면석에 연대나 이름이 새겨진
예가 있지만 대부분 후대에 가필한 것들임에 반해, 이 면석은 묘를 조
성할 당시 새긴 점과 묘지의 구성내용을 모두 갖추고 있어 당대의 사료
적, 학술적 연구가치가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산청군 신등면 평지리는 일반적으로 '나무리' 또는 ‘법물’(法勿)이라고
부르는 이 고을은 ‘법이 없어도 된다’ 는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상산
김씨(商山金氏)들이 600년 이상 대대로 살아오며 김후(金後)의 충의
정신(忠義精神)을 그대로 후손들이 이어받아 양반사상이 강하고 자
부심이 대단하였다. 두류봉이 어린 시절인 1950년대에는 이 마을에
는 200호가 넘는 대단위 상산김씨(商山金氏) 집성촌으로, 6.25전쟁
중에도 인민군에게도 국군에게도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지금은 50호
쯤 되는 그냥 농촌으로는 큰 편에 속하는 마을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시기에는 13명의 상산인(商山人)이 의병장(義兵
將)이 되어 순절(殉節)하였고, 김성일(金誠一 : 1538~1593)과 함께
일본 사신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직접 대면한 김명윤
(金命胤: 1564~1609)을 비롯하여 남명기념관(南冥紀念館)내 작전도
(作戰圖)에 나오는 진주단성 의병장(晉州丹城義兵長) 대하재 김경근
(大瑕齋金景謹: 1559~1597), 촉석루 대첩(矗石樓大捷)에서 순절(殉
節)한 김준민(金俊民: ?~1593), 김씨팔군자, 소산 김석(小山 金碩 :
1627-1680), 묵재 김돈(默齋 金墩: 1702~1770), 해기옹김령(海寄翁
金欞: 1805~1866), 단계 김인섭(端溪 金麟燮: 1827~1903), 물천 김
진호(勿川金鎭祜: 1845~1908) 등 조선 초기(朝鮮初期)부터 말기(末
期)까지 꾸준한 학맥(學脈)이 이어졌다.
특히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 및 만호(萬戶)를 지내고, 고양군수(高
陽郡守)와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역임한 김행(金行: 1532~1588)은
당대(當代)의 석학(碩學)인 남명 조식(南冥曺植: 1501~1572)의 사위
이다. 김행(金行)은 슬하에 두 딸을 두었는데, 동강 김우옹(東岡金宇
顒: 1540~1603)과 홍의장군(紅衣將軍)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
祐: 1552~1617)의 장인(丈人)이기도하다.
이러한 학풍(學風)은 근대(近代)까지 이어져, 나무리 출신으로 덕망
높은 마지막 유학자(儒學者)라고 말할 수있는 김영숙(金永淑: 1876~
1952)은 1919년 3월 20일 오후 2시 단계장터에서 500~600명의 군
중을 모아 산청(山淸) 최초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고종(高宗)의 장
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아들 김상준(金相峻)과 윤규현(尹圭鉉)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와 서울의 만세시위소식을 고향에 알
리면서 비롯되었는데, 제자 정태륜(鄭泰侖) 등에게 활동책임을 맡겨
각 마을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출처] ㉯ 나무리 상산김씨- 산청 김후 묘(山淸金後墓)|작성자 두류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