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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의 행정 구역은 2읍 10면, 177 법정리와 304개의 행정리, 1,192반, 790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군청 소재지는 예산읍이다. 예산군의 면적은 542.31㎢로 충청남도의 6.28%를 차지한다.[1] 인구는 2011년 7월 31일을 기준으로 36,476 세대, 88,036명이 살고 있다.[2]
읍면동 | 한자 | 면적 | 세대 | 인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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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읍 | 禮山邑 | 42.8 | 15,168 | 37,897 |
삽교읍 | 揷橋邑 | 49.6 | 3,447 | 8,328 |
대술면 | 大述面 | 60.7 | 1,362 | 3,101 |
신양면 | 新陽面 | 61.7 | 1,542 | 3,621 |
광시면 | 光時面 | 58 | 1,709 | 3,741 |
대흥면 | 大興面 | 35.8 | 932 | 2,075 |
응봉면 | 鷹峰面 | 26.3 | 1,268 | 3,009 |
덕산면 | 德山面 | 59.7 | 3,204 | 7,385 |
봉산면 | 鳳山面 | 35.2 | 1,294 | 3,046 |
고덕면 | 古德面 | 44.9 | 2,297 | 5,674 |
신암면 | 新岩面 | 35.9 | 1,940 | 4,455 |
오가면 | 吾可面 | 32.3 | 2,313 | 5,704 |
예산군 | 禮山郡 | 542.31 | 36,476 | 88,036 |
충남도의 신도시
동경 126°35′∼126°58′, 북위 36°32′∼36°48′에 있다. 동쪽은 공주시, 서쪽은 홍성군과 서산시, 남쪽은 청양군, 북쪽은 당진시·아산시와 접한다. 예산읍이 중심지가 되어 온양방면, 당진방면, 홍성방면, 공주방면 등 네 갈래의 교통로가 이곳으로부터 펼쳐져 있어 충청남도 북서부지역 도로교통의 중심이자 분기점 역할을 한다.
지형은 일반적으로 구릉과 산맥이 연결되어 있으며, 특히 동부 군계는 차령산맥, 서부에는 가야산(678m), 남부 군계는 봉수산(484m)을 중심으로 산이 겹친다.
군의 중앙부는 무한천·삽교천 등 2개 하천이 북으로 흐르며, 그 유역에는 기름진 예당평야가 펼쳐져 쌀의 주산지를 이룬다. 한편, 구릉지대는 사과를 중심으로 한 과수지대가 많다.
기후는 해안에서 그리 멀지 않으나 바다의 영향은 비교적 적어 기온 교차가 심하다. 한반도의 기후형인 여름철의 남동풍과 겨울철의 북서풍이 탁월한 온대계절풍 지대이며, 여름이 몹시 덥고 겨울이 추운 대륙성기후가 나타난다. 강수량의 반 이상이 여름에 내리는 하계 다우형기후이며, 연평균기온은 11.8℃, 1월 평균기온 -4℃, 8월 평균기온은 26.3℃이다. 연평균강수량은 1,133mm이다.http://100.naver.com/100.nhn?docid=114489 12/6/7 06"38 ad
예산군
은 동경 126°35′∼126°58′, 북위 36°32′∼36°48′에 있다. 동쪽은 공주시, 서쪽은 홍성군과 서산시, 남쪽은 청양군, 북쪽은 당진군과 아산시와 접한다. 예산읍이 중심지가 되어 온양방면, 당진방면, 홍성방면, 공주방면 등 네 갈래의 교통로가 이곳으로부터 펼쳐져 있어 충청남도 북서부지역 도로교통의 중심이자 분기점 역할을 한다.
충청남도의 연혁
삼한시대에는 충청북도와 함께 마한의 지역이었다. 서기전 18년 북부여에서 남하한 온조는 도의 동북부에 거점을 두고 마한의 땅을 통일해 백제를 건국하였다. 문주왕 때 도읍을 한성(漢城)에서 웅진(熊津)으로 옮겼고, 538년(성왕 16)에 다시 도읍을 부여로 옮겼다.
660년(의자왕 20) 백제가 망한 뒤 한때 당나라 도독부의 통치를 받다가 신라에 병합되어 9주의 하나인 웅주(熊州 : 현재의 公州)에 속하였다. 그 뒤 신라가 쇠퇴하자 후백제·후고구려가 운주(運州 : 현재의 洪城)·웅주에서 활약했으나 931년(태조 14) 고려에 통합되었다. 995년(성종 14) 관제개정에 따라 전국을 10도로 나누었는데 그 중 하남도(河南道)가 되어 공주·운주 등 11개 주를 관할하였다.
〔고려시대〕
1106년(예종 1)에는 관내도(關內道)·중원도(中原道)와 합쳐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라 했고, 1171년(명종 1)에는 두 도로 나뉘었으나 1315년(충숙왕 2) 다시 합쳐 양광도라 하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비로소 충청도로 개칭하였다. 우왕 말년에는 평창현(平昌縣)을 교주도(交州道)에 이속시켰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395년(태조 4)에 양주(楊州)·광주(廣州)의 관할 군현은 경기도(京畿道)로 옮기고, 충주·청주·공주·홍주(洪州)의 관할 군현은 충청도라 해 충주에 관찰사를 두었다. 1399년(정종 1)에는 영월군(寧越郡)을 강원도에 붙이는 대신 강원도의 영춘현(永春縣)을 편입시켰다.
1413년(태종 13)에 여흥(驪興)·안성(安城)·음죽(陰竹)·양지(陽智)·양성(陽城)의 5군현을 경기도로 옮기고, 경상도 옥천(沃川)·황간(黃澗)·영동(永同)·청산(靑山)·보은(報恩)의 5군현을 편입해 4목 12군 38현을 관할하게 되었다. 그 뒤 1598년(선조 31)에 감영을 충주에서 공주로 옮겼다.
충청도의 명칭은 충공도(忠公道)·청공도(淸公道)·청홍도(淸洪道)·공청도(公淸道)·공홍도(公洪道)·충홍도(忠洪道)·공충도(公忠道) 등으로 자주 바뀌었다. 이는 주·목의 소속 고을에서 역모나 강상(綱常)의 윤리를 범한 변이 일어나면 충주·청주·공주·홍주 중 그 고을에 해당하는 머리자를 빼고 다른 주·목의 머리자를 넣어 명칭을 고쳤기 때문이다.
또한 행정상 편의에 따라 충청좌도(忠淸左道)·충청우도로 나누고 관찰사는 한 사람을 두었다. 1896년에 8도를 13도로 나눌 때 충청좌도를 충청북도로, 충청우도를 충청남도로 해 완전히 구분하였다. 충청남도는 37개 군으로 구성되고 도청은 공주에 두었다.
〔근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평택군이 경기도로 편입되고 어청도(於靑島)·연도(煙島)·개야도(開也島)·죽도(竹島)의 4개 섬이 전라북도로 이속된 반면 전라북도 익산군의 일부(현재 강경읍의 일부)가 편입되었으며, 공주·연기·대전·예산·서산·당진·아산·천안·논산·부여·서천·보령·청양·홍성의 14개 군으로 편성하고 공주읍에 도청을 두었다.
〔현대〕
1932년에 도청을 대전읍으로 이전했으며, 1935년 부제(府制)의 실시에 따라 대전읍이 대전부로 되고 나머지 지역은 대덕군이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1949년 대전부는 대전시로 개칭되었다.
196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전라북도 금산군(錦山郡)이 편입되었으며, 익산군 황화면(皇華面)도 논산군 구자곡면(九子谷面)에 편입되어 연무읍이 되었다. 대덕군 유천면(柳川面)과 산내면(山內面)의 4개 이, 회덕면(懷德面)의 3개 이가 대전시로 편입되고, 천안읍이 환성면(歡城面)을 합쳐 천안시로 승격되었으며 나머지 지역은 천원군으로 개칭되고, 보령군의 대천면(大川面)과 당진군의 당진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
1973년에는 대덕군의 유성면(儒城面)과 북면(北面)이 유성읍·신탄진읍으로 각각 승격되었으며, 예산군의 삽교면은 삽교읍으로, 서산군의 태안면은 태안읍으로, 천원군의 성환면은 성환읍으로 각각 승격되었다. 1979년에 서천군 서천면과 청양군 청양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0년에는 서산군 안면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에는 대대적인 시·군·읍·면의 경계 조정이 있었다. 대덕군의 유성읍·구즉면·탄동면·기성면·진잠면 등의 일부와 회덕면이 대전시에 편입되고, 천원군 풍세면 구룡리가 천안시에 편입되었다.
또 보령군 오천면 삽시도리의 내파수도·외파수도·외도 등이 서산군 안면읍에, 서산군 고북면 대사리와 홍성군 결성면 와리가 홍성군 갈산면에, 아산군 신창·배방·탕정면 등의 일부가 온양읍에, 공주군 이인·계룡·장기·우성면 등의 일부가 공주읍에 편입되고, 대덕군 유성읍과 회덕면이 폐지되는 등 많은 행정구역의 변화가 있었다.
1985년에 천원군 성거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6년에는 공주군 공주읍과 보령군 대천읍, 아산군 온양읍이 각각 시로 승격되었다. 또 보령군 미산면 성주출장소와 서산군 안면읍 고남출장소가 각각 성주면·고남면으로 승격되었다. 1987년에도 시·군·읍·면의 경계조정이 있었으며, 청양군 적곡면과 사양면, 서산군 이북면이 각각 장평면, 남양면, 이원면 등으로 개칭되었다.
1989년에는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 분리됨으로써 대덕군이 대전시에 편입, 폐지되고(진잠면 남선리는 논산군 두마면에 편입), 서산군 서산읍이 시로 승격되었으며 서산군을 분할해 태안군이 설치되었다. 또 온양시의 신동은 아산군 염치면에, 서산군 안면읍 죽도리는 홍성군 서부면에, 아산군 염치면 석정리 일부는 온양시 실옥동에 각각 편입되었으며, 주포면 주교출장소가 주교면으로 승격되었다.
예산군의 역사
〔고대〕
이 지방에서는 주목할 만한 선사유적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부근에서 발견된 신석기·청동기시대의 유물·유적으로 미루어 선사시대의 유물·유적도 발견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군은 예산·대흥·덕산이 병합된 곳이다.
예산은 백제 때 오산현(烏山縣)이라 했는데, 삼국통일 후인 757년(경덕왕 16)에 고산현(孤山縣)으로 개칭하여 임성군(任城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대흥은 백제 때 임존성(任存城) 혹은 금주(今州)라 했고, 경덕왕 때 임성군으로 고쳤다. 덕산은 백제 때 마시산군(馬尸山郡)이라 했으며, 경덕왕 때 이산군(伊山郡)으로 고치고 웅주(熊州)에 예속시켰다.
조선 초에 덕산으로 병합되는 덕풍현은 백제 때 금물현(今勿縣)이었고, 경덕왕 때 금무(今武)로 개칭하여 이산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봉수산 마루에 있는 임존성은 백제 멸망 후 흑치상지(黑齒常之)가 백제부흥운동의 근거리로 삼았으며, 후삼국시대에도 왕건(王建)과견훤(甄萱)이 격전을 벌였던 곳이라고 한다.
〔고려시대〕
고산현은 919년(태조 2) 예산현(禮山縣)으로 개칭되었고 1018년(현종 9) 천안부에 속했으며,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임성군은 940년 대흥군(大興郡)으로 개칭되었으며, 1018년 홍주(洪州)에 속하였고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두었다. 이산군은 1018년 홍주에 속했고, 뒤에 감무를 두었다. 금무현은 고려 초에 덕풍(德豊)으로 고치고 현종 때 홍주에 속했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다.
1018년 거란의 침입 때 강감찬(姜邯贊)의 부장으로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격퇴시켜 공을 세운 강민첨(姜民瞻)은 벼슬이 지중추사병부상서에 올랐으며, 죽은 뒤 태자부에 추증되고 예산현 감천동에 예장되었다.
〔조선시대〕
1405년(태종 5) 이산현과 덕풍현을 합쳐서 덕산(德山)으로 개칭했고, 예산현·흥현·산현에 각각 현감이 임명되었다. 이 곳 출신 인물로는 권근(權近)의 외손이며 ≪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 등을 지은 조선 초기의 대학자로서 6대 임금 아래서 요직을 역임한 서거정(徐居正)·조선 전기 서도의 4대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김구(金絿), 불세출의 명필이자 고증학·금석학의 대가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등이 있다.
〔근대〕
1868년(고종 5) 독일 상인인 오페르트(E.J Oppert.)가 우리나라와의 통상요구가 이루어지지 않자 덕산현 가야산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하고 민가를 약탈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의 쇄국양이정책(鎖國壤夷政策)이 더욱 강화되었다.
1895년 홍주부 예산군·대흥군·덕산군으로 개편되었다가 1896년 충청남도 예산군·대흥군·덕산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흥군과 덕산군의 11개 면, 공주군의 일부를 합하여 현재의 예산군이 성립되고 12개 면으로 개편되었다. 1940년 예산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근대의 인물로는 학문과 덕행이 뛰어났던 조선 말의 의사로서 일본의 침입에 항거하다가 투옥되어 아들과 함께 순국한 이남규(李南珪), 1932년 상해 훙커우 공원〔虹口公園〕에서 열린 일본의 상해사변전승축하회에 폭탄을 던진 윤봉길(尹奉吉) 등이 있다.
〔현대〕
1973년 7월 1일 삽교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3년 2월 15일 오가면 효림리와 월곡리 일부를 합하여 월산리로 개칭하고, 좌방리 일부를 방아리로 개칭하여 삽교읍에 편입하였다
2003년 현재 예산읍·삽교읍과 고덕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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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은 동경 126°35′∼126°58′, 북위 36°32′∼36°48′에 있다. 동쪽은 공주시, 서쪽은 홍성군과 서산시, 남쪽은 청양군, 북쪽은 당진군과 아산시와 접한다. 예산읍이 중심지가 되어 온양방면, 당진방면, 홍성방면, 공주방면 등 네 갈래의 교통로가 이곳으로부터 펼쳐져 있어 충청남도 북서부지역 도로교통의 중심이자 분기점 역할을 한다.
수덕사대웅전 |
지형은 일반적으로 구릉과 산맥이 연결되어 있으며, 특히 동부 군계는 차령산맥, 서부에는 가야산(678m), 남부 군계는 봉수산(484m)을 중심으로 산이 겹친다.
군의 중앙부는 무한천·삽교천 등 2개 하천이 북으로 흐르며, 그 유역에는 기름진 예당평야가 펼쳐져 쌀의 주산지를 이룬다. 한편, 구릉지대는 사과를 중심으로 한 과수지대가 많다.
기후는 해안에서 그리 멀지 않으나 바다의 영향은 비교적 적어 기온 교차가 심하다. 한반도의 기후형인 여름철의 남동풍과 겨울철의 북서풍이 탁월한 온대계절풍 지대이며, 여름이 몹시 덥고 겨울이 추운 대륙성기후가 나타난다. 강수량의 반 이상이 여름에 내리는 하계 다우형기후이며, 연평균기온은 11.8℃, 1월 평균기온 -4℃, 8월 평균기온은 26.3℃이다. 연평균강수량은 1,133mm이다. 바람과 구름과 카페- 문화 지리지-
예산군 행정구역과 지명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68051
행정지명 > 군
충청남도 예산군
삼국시대 : 오산현(烏山縣)→마진(馬津), 금물현(今勿縣), 마시산군(馬尸山郡), 임존성(任存城), 지삼촌(只彡村)→지심(支潯)
통일신라시대 : 고산현(孤山縣), 금무현(今武縣), 이산군(伊山郡), 임성군(任城郡)
고려시대 : 예산현(禮山縣), 덕풍현(德豊縣), 이산현(伊山縣), 대흥군(大興郡)
조선시대 : 예산현(禮山縣), 덕산현(德山縣), 대흥현(大興縣), 대흥군(大興郡)
대한제국 : 예산군(禮山郡), 덕산군(德山郡), 대흥군(大興郡)
1945년 : 예산군(禮山郡)
충청남도의 중서부에 위치한 군이다. 예산군의 서쪽에는 덕산 도립공원이 있다. 동쪽에는 차령산지, 서쪽에는 가야산지가 남서쪽으로 달리고 있어 동부와 서부는 산지를 이루며, 중앙부에는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이들 산지 사이를 삽교천과 무한천(無限川)이 북류하면서 유역에 예당평야를 형성한다. 현재 예산읍· 삽교읍 · 고덕면 · 덕산면 · 대흥면 등 2읍 10면을 관할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고산현(孤山縣)은 원래 백제의 오산현(烏山縣)이었던 것을 경덕왕 16년(757)에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예산현이다."라는 관련 기록이 처음 수록되어 있다. 『고려사지리지』에는 919년(고려 태조 2)에 지금 명칭, 즉 예산으로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해가는 과정에서 아산만 일대의 해상세력과 동맹관계를 맺었는데, 이 일대의 민심이 왕건을 지지하고 견훤을 배척하였다. 따라서 왕위에 오른 다음 해에 오산을 예산으로 고치면서 '태조에게 예절을 지킨 지역'이란 의미의 지명으로 바뀐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 시대에는 계속 현으로 존재하다가, 1895년(고종 32)에 부제가 실시되어 홍주부 예산군이 되었고, 1896년(건양 1)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충청남도 예산군이 되었다. 1914년 예산군 · 대흥군 · 덕산군이 예산군으로 통합되면서 오늘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