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18> 서장 (書狀)
조대제에 대한 답서
낯선 곳은 익숙하게, 익숙한 곳은 낯설게
"세간의 번다한 일들을 들었다 놓았다 끝없이 반복하면서 가고·머물고·앉고·눕는 일거수 일투족 가운데 여태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득한 옛날부터 그와 맺은 인연이 깊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반야의 지혜와는 아득한 옛날부터 맺은 인연이 얕기 때문에, 잠시 선지식의 말을 들어도 이해하기가 하나같이 어렵게만 느껴지는 것입니다.
만약 아득한 옛날부터 세간의 번다한 일들과 맺은 인연이 얕고 반야와 맺은 인연이 깊다면, 이해하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다만 깊은 곳은 얕게 하시고 얕은 곳은 깊게 하시며, 낯선 곳은 익숙하게 하시고 익숙한 곳은 낯설게 하십시오."
선의 체험이란, 근본자리에서 보면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것으로서 새로울 것이 조금도 없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의식의 입장에서 보면 여태껏 경험한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경험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색(色)과 상(相)의 세간(世間)만을 경험하며 그것에만 익숙해져 왔으므로 공(空)과 성(性)의 선(禪)은 낯설기만 한 것이다. 선은 전혀 미지의 세계인 것이다. 선이 전혀 미지의 세계인 만큼 선을 직접 맛보기 위하여 선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발견하는 것 역시 막막하기만 하다.
그리하여 간화(看話)니 묵조(默照)니 관법(觀法)이니 하는 여러 가지 방편과 수행의 과정이 제안되기도 한 것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어느 방법도 세간에서 학습을 통하여 습득하는 방식처럼 분명하고 손쉬운 그런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세간의 일이란 이미 경험한 것을 발판으로 삼아 유추하고 학습하여 단계적으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지만, 선은 아직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으므로 발판으로 삼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즉 세간의 공부는 의도적인 노력[유위행(有爲行)]을 통하여 일정한 과정만 거치면 성취될 수가 있으나, 선의 공부는 그런 의도적 노력을 통하여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의 공부란 무위행(無爲行)이기 때문이다.
무위행이기 때문에 선의 공부에 특정한 육체적 정신적 행위를 요구하거나 일정한 과정을 거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공부를 그르칠 위험이 크다. 이렇게 하는 것은 모두 유위행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화두(話頭)의 참구(參究)가 그래도 가장 유위행에 빠질 위험이 덜하다고 할 수 있다.
화두의 참구는 그저 가슴 속에 의문(疑問)을 품을 것을 요구할 뿐이고, 어떤 종류의 육체적 정신적 행위나 과정의 의무적 수행(遂行)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화두 참구에도 유위행의 위험은 있다. 그것은 바로 화두를 가지고 의식적으로 상상하고 논리적으로 추리하려는 의도적 노력이다. 그러나 이런 의도적 노력을 통해서는 결코 화두가 타파되지 않는다는 것은, 화두를 참구하는 사람에게는 이미 상식이 되어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무위행의 공부에서 힘을 얻어 나아갈 수 있을까? 무위행의 공부에서 힘을 얻는 원천은 믿음[信]이다. 믿음이란 의심하지 않고 신뢰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에 관한 신뢰인가?
불교의 진리에 대한 신뢰이며, 부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이며, 선의 체험에 대한 신뢰이며, 조사들의 가르침에 대한 신뢰이며, 깨달음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에 대한 신뢰이며, 자신에게 진리[佛性]가 갖추어져 있다는 사실에 대한 신뢰이다. 진실한 마음으로 이러한 믿음을 가질 때, 그 믿음은 무의식 속에서 공부를 끌고 나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즉 의도적으로 공부를 하려고 하지 않더라도 자신도 모르게 공부가 나아가는 것이다.
믿음이 깊을수록 의문도 커지게 되므로, 자신도 모르게 알고자 하는 무의식 속의 갈망이 커지는 것이다. 의문이란 알고자 하는 갈망이며, 알고자 하는 갈망은 그 대상에 대한 믿음에 비례하여 커지며, 이 갈망이 바로 선문을 두드려서 여는 힘이 된다.
[찾으라 그러면 구할 것이요,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는 말과, [믿음은 지혜의 공덕을 잘 키워서 반드시 여래의 지위에 도달케 한다.]라는 말이 모두 이것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공부인은 모름지기 확고한 믿음을 가져서 커다란 의문의 덩어리가 가슴 깊이 생겨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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