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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성 시인 작품론
-정형시학 2023년 겨울호 ‘오목렌즈 & 볼록렌즈의 시학’
그리운 어머니 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 이한성論
- 이재창 (시인, 전 광주대 문예창작과 외래교수)
1. 한 포기 풀잎에서도 생명의 고동소리를 듣고
문단 등단 반세기, 이한성 시인의 작품에서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끈적끈적한 우리 민중사의 이야기 한 단면을 보여준다. 또한 시를 읽는 사람의 내면에 깊고 밝은 울림을 자아낸다. 그는 이제까지 세상사의 끊임없는 현상과 사물에 대한 해석과 분석 방법을 시조의 정형미학이라는 카테고리에 녹여내는 작업을 해왔다.
이한성 시인의 작품 특징은 여전히 현대적 감각의 은유와 상징, 현실인식의 새로운 이미지의 시적 기교를 보여주는 현대시조의 전범에 속한다. 시의(詩衣)를 폈다 접는 기교에서 파생되는 한국적인 멋과 가락을 창조하는 신선함이 그의 작품의 본질이다.
또한 의미의 긴장성과 이미지의 조형성, 상상력의 자유스러움과 인식의 명료성을 위한 대립과 갈등의 절제된 가락 속에서 현대적인 이미지가 섬세하게 도출된다.
그러한 가운데 이한성 시인이 시조시단에 보여준 가장 큰 업적은 현실의식의 문학적 반영과 울림이다. 5·18 광주의 증언, 체험의 재구성인 장시조 ‘울음 타는 市街 - 광주 5·18 그날의 점묘’는 시조단에서 그 어떤 시조시인도 해내지 못한 시인으로서 시인의 본분을 다한 대 역작이다.
그는 “광주의 그날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 그 피비린내 나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무언가 증언을 남기지 않았다면 이 시대의 문객으로서, 아니 광주 시민으로서 죄책감에 시달렸을 것이다”고 소회를 밝히고 있다. 비겁한 대다수의 문인들이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던 그 시절, 그는 시인으로서 직무를 유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아직까지도 몽매한 평자들의 눈에 보이지 않은 건 당연한 이치다. 사당화에 눈 먼 패거리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 한 시조단은 ‘돈 놓고 돈 먹는’ 시정잡배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한 개의 돌멩이에도 귀를 바로 세워 숨소리를 듣고 싶었고, 하찮은 한 포기의 풀잎에서도 생명의 고동소리를 듣고 싶었다던 이한성 시인. 그 흔한 돌멩이, 풀포기들이 비록 생각 밖의 미미한 존재라 할지라도 그에게는 가장 소중하고 큰 비중을 차지한다.
최근 그의 작품을 대하면 뉴 미디어 시대에 있어서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해답을 듣는다. 현대시가 감히 이루어내지 못한 긴장과 절제의 미학 속에서 당시대의 음울한 현실인식을 풀어가는 기법과 삶의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시인의 고향, 장흥군 용산면 어산리, 어린시절 어머니 그리움에 대한 투사가 엄청난 시적 영감을 발휘한다. 연작 ‘전각’ ‘장흥댐’ ‘빈집’ ‘어머니의 말’ 등 그의 작품은 어떤 잣대나 기준틀을 제시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패거리 문학이나 대량 생산되는 삼류시조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킴과 동시에 현대시조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그 전형을 제시한다.
그의 시가 보여주고 있는 또 하나의 장점은 현대시조의 다양한 시적 대상과 주제영역이 어느 한 부분에 머무르지 않고 폭넓게 확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많은 대상의 깊이 있는 통합과 사유를 통한 시적 언어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은 사물에 대한 뛰어난 감성과 관찰력이다. 또한 그것을 시적 언어로 간명하게 변환시키는 능력의 탁월함 때문이다.
강인한 시인은 시평 ‘조형미와 현실 인식의 치열성’에서 그의 작품 특성은 “적절한 노출의 타이밍과 전체로부터 의미 있는 부분만을 끄집어내어 결합하는 주제적 집중은 바로 시인의 시정신에 다름 아니다. 이한성의 시들이 포착하는 것은 그러한 조형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렇게만 말하기엔 충분치 않다. 그의 시가 본질적 질료로서 다루고 있는 언어적 특징이 또한 가벼이 볼 수 없는 성질을 띠고 있는 까닭이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어떤 경우에서건 가식이 없는 질박한 육성으로 나타남을 볼 수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평론가 유성호 교수는 “시력 반세기가 되는 그의 정형미학은 시조시단에 가지는 위상이 크고 각별하다”며, “자연사물을 통한 존재론적 깨달음의 영역과 타자의 삶에 대한 애틋한 사랑은 이한성 시조미학의 고갱이가 되고 남을 것이다” 또한 “적막하면서도 역동적이기 그지없는 그의 내면 풍경은 정갈하고 심미적인 눈길을 통해 존재론적 결핍을 치유하는 상상의 매개물이 되고”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그의 작품은 “우리 서정시가 가지는 촌철살인과 같은 힘”을 지니고 있다.
이제 ‘오목렌즈 & 볼록렌즈의 시학’의 그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2. 꿈꾸는 공간 혹은 삶과 세상의 경계
비가 내리는 경계를 걸어 본 적이 있다
한쪽 어깨는 젖고 한 어깨는 더 뽀송한
한기가 각을 세운 날 머릿속은 뜨거웠다
달빛이 낮게 내려 발목을 붙잡을 때
바람은 살랑 불어 속옷을 더듬었다
사랑의 경계를 풀기에 더 없이 좋은 밤
길게 눕던 그림자가 일어나지 않는다
축축한 땅바닥에 맨 몸을 뒤집을 뿐
가을이 몸을 바꾼다, 아무 일도 없는 듯
- 「경계를 걷다」 전문
이 작품에서 삶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지혜로운 현자의 깊고 여유 있는 성찰을 담고 있다. 한 번 시적 상상을 해보자, 비가 내리는 경계를 과연 걸을 수 있을까. 그래서 한쪽 어깨는 젖고 한쪽 어째는 뽀송뽀송하게 걸을 수 있다고 상상할 수가 있을까. 그것은 새처럼 바람처럼 한 곳에 묶여 있을 수 밖에 없는 나무를 바라보듯이 시인이 꾸는 꿈 혹은 꿈꾸는 공간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것은 시인과 세상과 삶의 경계를 의미한다.
또한 바람이 살랑 불어 속옷을 더듬는 밤의 공간은 강제된 유폐의 공간이 아니라 타락하고 모순된 세계와 맞서서 자신의 삶을 확보할 수 있는 자유와 은신의 공간이 아닐까. 길게 눕던 그림자가 일어나지 않고 가을이 몸을 바꾸는 데에도 아무일도 없는 듯 달빛은 내리고 시인은 초연한 자세를 견지하며 경계를 걷고 있다.
이처럼 그의 시조는 언제 보아도 팽팽한 상상력으로 결속돼 있다. 어느 곳을 뒤져보아도 단점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만큼 단단하고 견고하다. 그의 시는 각 수가 전체적으로 하나의 틀로 잘 짜여 있다. 그 틀은 의미와 상상력의 짜임새를 말한다.
작품의 제목에서처럼 그의 시가 항상 하나의 힘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자신만의 완전한 정형의 틀에서 드러나는 신선한 맛과 멋을 가지고 있어서다.
밥상만 들어오면 저도 한 자리 차고 앉아
젓가락질하는 손을 번갈라 쳐다보고
입 속에 가득한 침을 엿가락처럼 늘인다.
간절한 놈의 눈빛에 오늘도 낚긴 아내
매번 빗물 먹은 토담처럼 무너져 내려
흰 밥풀 한 알이라도 꼭 입속에 적선한다.
17년 넘게 살다보니 허리가 굽어 있다
가족들을 돌려 보며 짠한 눈빛 건네는
우리 집 진갈색 푸들, 헤어짐이 두렵다.
- 「우리 집에는 새끼 낙타가 살고 있다」 전문
17년 넘게 함께 살아온 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삶과 세상의 경계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이 육체의 무게를 벗어나서 비상하려는 꿈과 자유의 정신을 강하게 보인다. 밥상 앞에서 한자리 차고 앉아 보호자를 번갈라 쳐다보는 것은 강한 생존 본능이다. 역으로 한때는 바람처럼, 날개의 생동적 이미지나 튀어오르는 경쾌한 탄력성의 이미지, 발랄한 그의 모습이 시인에게 그 모든 모습이 관통되고 대상과 일체가 되려는 사랑의 마음이 곳곳에 동반되고 있다.
진갈색 푸들의, 한 집안의 구성요소로서 세월의 모든 구속, 육체의 무게와 정신적 속박을 벗어나려는 시인의 꿈은 ‘새끼 낙타’의 삶과 세상의 경계에 집중돼 있다. 허리 굽어 짠한 눈빛 건네는 그와의 얼마남지 않은 이별이 안타깝고 두렵지만 그 속에서도 생명의 숨소리가 들린다.
우리 주위에는 반려견과 반려묘들을 키우는 집들이 많다. 언제부터인지 반려견은 한 가족의 일원이 되어서 사람과 더불어 살아간다. 가정에서 뿐만 아니라 산책, 반려견 놀이터 등에서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학습해 심리학적이나 사회학적으로도 가족의 구성원이나 다름아니다. 일부에서는 인간과 개나 동물은 반려라고 불릴만한 동급의 존재가 아니고 서로간 완전한 의사소통과 교감을 하고 의식을 완전히 공유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하지만 ‘새끼 낙타’ 푸들은 17년을 함께 살아왔으니 그도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3. 한국적 정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가끔씩 끼니때에 옆집 아줌마 찾아오면
놋쇠 그릇에 흰 밥을 고봉으로 내놓던
어머니 나눔의 정을 노상 보고 자랐다
필시 웃어른들의 눈 밖에 날 행위지만
이 부유함도 이들에게서 나온 것이라며
어머닌 내 손을 잡고 가슴으로 품었다
- 「나눔 - 어머니」 전문
작품 ‘나눔’에서는 한국적 정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느낀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사회지도층에게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국민의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단어이다. 하지만 이 말은 사회지도층들이 국민의 의무를 실천하지 않는 문제를 비판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이것은 과거 로마제국 귀족들의 불문율이었다. 로마제국의 귀족들은 자신들이 노예와 다른 점은 단순히 신분이 높다는 게 아니라, 약한 자를 돕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 사회적 의무를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것들은 현대사회의 타락한 금권만능주의를 떠올리며 깨우치게 한다.
한국전쟁 이후 60년대와 70년대를 거쳐 오면서 우리의 빈곤한 생활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 시절 하루 세끼를 제대로 찾아 먹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금의 아프리카 빈민촌의 뼈만 앙상한 어린아이의 몰골처럼 기아에 허덕이던 시절이었다. 주위의 이웃들을 위로하고 생각하고 도우며 살아갈 환경은 더더욱 아니었다. 미군부대에서 보급한 옥수수 가루로 죽을 쑤어 먹고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살았던 기억은 21세기를 사는 우리를 다시 울컥하게 만든다.
‘나눔’은 그러한 어려운 시절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몸소 실천한 어머니의 사랑을 절절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끼니때 옆집 아줌마에게 고봉으로 흰밥을 내어주던 모습을 보고 자란 시인의 품성 또한 어디로 가겠는가. 어머니의 그 작은 ‘나눔’이 감동스러운 것은 이 부유함도 이들에게 나온 것이라며 서슴없이 웃어른의 눈치를 보면서도 실행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닐까. 사회지도층이나 부유한 재벌들의 생색내기 말잔치, 보여주기식 성금이나 기부의 그 무엇에 비하겠는가.
4. 어머니, 그리운 어머니
1
산달이 가까워지면 아랫배 트는 산모처럼
대나무도 장마철엔 물배 불러 터진다는
어머니 우수개소리가 마냥 그리워지는 밤
2
피가 나게 살 비비는 댓잎소리 수상하다
사그락, 삭, 사그락 한 음보 높은 소리
어둠이 묽어질 무렵 비가 든다, 후두둑
- 「어산리 대숲」 일부
공갈 젖꼭지를 물린다, 칭얼거린 아이에게
속임수를 쓰는 것이 가슴에 저려 와서
풍뎅이 목을 비틀 듯, 아픈 시늉을 한.
어릴 적 동냥젖을 얻어먹은 병철 아제
빈속에 술만 들면 한 마을을 뒤엎는다
지난 날 아픈 기억이 새롭게 싹 트는가
너무 저 놈 탓만 말어, 똘것*으로 크다 본께
위아래도 몰라보고 그냥 한풀이 한 거여.
그 누가 제 새끼 안 듯 가슴으로 품어 봤남
- 「어머니 말씀 - 동냥젖」 전문
그리운 어머니, 끝없는 자애와 헌신으로 자식을 위해 한평생을 바치는 어머니의 모습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세계 곳곳 많은 문학 작품에 투영돼 왔다.
그 양상을 보면, 하나는 자식을 위하여 다 하지 못한 모정을 드러낸 작품들이고, 다른 하나는 끝없는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사모의 정을 표현한 작품들이다. 어느 작품이나 모두 순수하고 고귀한 심중에서 쓰여져 독자들에게 무한한 감동을 준다.
‘어산리 대숲’은 가족끼리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정겹다. 아랫배 트는 산모와 대나무 물배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어머니의 이야기 소리가 마음의 거리만큼 가깝게 들려온다. 살 비비는 수상한 댓잎소리가 사그락, 삭, 사그락 한음보 높게 그려지는 저물무렵의 풍경이 정겨운 시골 밤을 한 폭의 액자로 드러나게 한다.
이렇듯 우리는 ‘어머니’하고 부르기만 하여도 벌써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포근함과 지고의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또한 가정과 자식을 위한 자기희생은 즐거움이었고, 자식을 훌륭히 키우고자 하는 열정은 그 무엇에 비할 바가 없었다. 우리들의 훌륭하였던 어머니들의 삶을 돌아보면, 받는 것보다는 베푸는 것을 천명처럼 생각하며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끝없는 자기희생 속에서 가정과 자식을 위해 묵묵히 몸 바치는 어머니의 모습은 마치 성직자의 모습과 같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담긴 어머니의 모습은 숭고하고 거룩한 아름다움을 지닌다.
멀리 떠나 있어도 우리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감미롭고 포근하며, 따뜻하고 든든하다. 그래서 우리들은 가장 힘들고 괴롭고 절망적일 때 어머니를 부르며 어머니의 가슴에 안기기를 갈망하지 않는가.
‘어머니 말씀’은 출산과 유아기의 양육, 성인이 될 때까지의 보살핌은 모든 인간사회의 과제 이며 모성애의 출발이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동냥젖을 얻어 먹여 키운 병철아제의 근본적 문제도 당연히 어머니의 사랑이다. 모성애를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자란 병철아제의 똘것 행동을 나무라지 않는다. 꾸짖기 전에 그의 한풀이와 아픈 기억, 누군가 그를 위해 제 새끼 안 듯 가슴으로 품어 봤냐고 되물어 본다.
모성의 초원에 도란거리며 내리는 한 줌의 빛처럼 이 한 줄의 시가 한 인간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사랑과 따뜻함이 얼마나 성스러운지를 잘 그려내고 있다.
5. 문명에 갖힌 어두운 그림자
깎아 친 시멘트 옹벽 그림 한 폭 걸려 있다
푸르름이 암갈색으로 몸을 바꾸는 계절
해질녘 바람이 일자, 붉은 노을 질퍽했다
싸락눈 내리던 날 다시 찾은 광천교 밑
지워진 액자 속에 심줄석* 저 암각화
이어진 선의 흐름이 피가 돌아 퍼렇다
짧은 생 악착같이 기어오르던 저 담쟁이
남기고 싶은 무슨 말 있을 것만 같아서
한 동안 못 박혀 서서 화폭 속을 응시했다
- 「응시」 전문
이 작품은 문명에 갖힌 삶의 그림자를 응시하고 있다.
깎아 친 시멘트 옹벽이 자연현상에 대한 시각적이고 회화적인 이미지로 색칠되어 단아한 맛을 낸다. 옹벽 그림 손에 쥐면 뚝 뚝 뚝 노랗고 붉은 물감이 떨어지듯 한 폭의 사생화처럼 머리 속에 스쳐간다. 그것을 관찰하는 시적 자아의 회화적 몰입은 온몸이 채색이 되는 과정까지 그려냄으로써 계절이 바뀌며 해질녁 질퍽한 노을의 미학까지 수용해 냈다
겨울녘 광천교 밑 액자 속에는 싸락눈이 내리고 있다. 그건 바로 시적 상상력 속에서의 혈실사회의 모습이다. 인생의 모든 사연과 사물들이 덧없이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환영처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잊혀지고 허물어지고 소멸되어 가는 현대인의 삶의 모습을 응시한다. 지워진 심줄석의 암각화 선의 흐름이 피가 돌아 선연한 것처럼 깨우침의 근원에는 인간의 생명과 자연의 생명력이 자리하고 있다.
짧은 생을 악착같이 기어오르는 담쟁이처럼 우리 인생은 아슬아슬하다. 세상의 끄트머리에 붙어 끈질기게 목숨을 부지하는 것, 삶은 결코 진부하고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신비롭고 부조리하고 초월적일 수 있다는 것, 사랑과 이별과 기쁨과 고통의 이야기 속에서 진정한 삶과 존재의 큰 의미를 읽을 수 있다. 남기고 싶은 무슨 말이 있을 것만 같아서 음울한 세상으로 대변되는 화폭을 응시한다.
남을 팔며 흔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쉬 떠나지 못한 것은 애증 때문이었다
뭇 사람 깔아뭉개다 시궁창에 빠진 자의
장長 자리도 밀어내며 욕심 없이 살았는데
등짝을 떠밀었다, 뒤돌아설 틈 주지 않고
사람의 도리도 모르는 저 두꺼운 낯짝이여
돌아설 때 뒷모습이 고아야 한다는데
등짝에 눈총 맞고 피 흘리는 꼴이라니,
반평생 집사로 살던 그 곳이 똥밭이었다
- 「똥밭」 전문
세상 사는 일이 쉽지만 않다. 모든 일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처신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이익 앞에선 물불을 가리지 않는 현대인의 부조리한 모습들을 우리는 수없이 보고 느끼고 살아간다. 셀 수 없이 범람한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보고 듣는 것이 가짜뉴스와 비리 고발과 부패의 타락상이다. 우리의 가까운 주위에서부터 살펴 보아도 없는 듯 활개치는 것들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은 시인의 올곧은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숨어 웃는 자의 비리와 횡포를 보면서 스스로 앞장서 나설 수 밖에 없는 문학인의 자세가 부럽고 정의로워 보인다.
시인이 ‘나의 시론’에서 밝힌 것처럼 사학의 부도덕한 이사장의 비리는 시인의 심장을 끓게 했을 것이다. 그대로 보고 모르는 척 회피한다는 것 또한 시인의 가슴은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똥밭”에서 나 보다는 주위의 동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일, 평생 학생을 가르쳐 온 교단에서 등짝을 떠밀려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안타깝게 보인다. 하지만 그게 인생살이의 승리가 아닐까.
“여러 교사의 목과 그 가정의 파탄을 막을 수 있게 해준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며 초연하게 받아드린 시인의 목소리가 더욱 더 경건하게 들린다.
6. 숨바꼭질마저 사치인 국민놀이
아프리카 대륙엔 숨바꼭질 놀이가 없다
하얗게 밤을 새운 술래가 돌로 굳어
동구 밖 수문장으로 왕방울의 눈을 뜨고
한낮에도 어두움이 뿌리 내린 죽음의 땅
헛배 부른 아이들이 휴지처럼 버려진
흙모래 골고다 언덕, 바람소리 사나운
- 「아프리카에는 숨바꼭질이 없다」 전문
숨바꼭질은 세계 곳곳의 많은 문화권에 현존하는 아주 간단하고 즐겁게 시간 보내기 좋은 어린이들의 놀이문화 중 하나다. 한 사람이 술래가 되면 나머지 사람들이 몸을 숨기고, 술래가 숨은 사람들을 찾아내는 놀이를 말한다. 어떤 세대든 어린 시절엔 누구나 다 해봤을 법한 추억의 국민놀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엔 이러한 놀이를 할 아이들의 숨바꼭질이 없단다.
이 작품은 현대사회의 당면과제인 아프리카 빈곤과 병마 탈출을 위한 현실의식의 문제제기를 한다. 하얗게 밤을 세운 술래가 왕방울의 눈을 뜨고 돌처럼 굳어 나가는 현실과 한낮에도 인적없이 어둠이 뿌리내린 죽음의 땅이 되어버린 곳에서 아이들에겐 희망도 용기도 가질 수가 없다. 그들의 주검마저 휴지처럼 버려진 흙모래 골고다 언덕에서 그들은 살아날 수 있을까 절규한다. 시인은 숨바꼭질마저 사치일 수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
서구의 현대사회에서 볼 수 없는 빈곤한 기아와 질병, 파괴된 생태적 환경은 인간이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현실이다. 아니 인간 파괴적인 환경을 고발한다. 하루 한끼도 먹지 못하고 수백만명의 어린이들이 기근으로 아사 직전이다. 또한 인간생존의 열쇠인 식수의 부족으로 야생동물의 배설물과 폐수로 오염된 물을 음용하는 모습은 가히 비인간적이라는 것을 고발하고 있다.
7. 현실인식과 한국적인 멋과 가락의 창조
이제까지 이한성 시인의 최근 작품을 간략하게나마 살펴 보았으나, 전체적인 그의 문학적 특성은 다음의 몇 가지로 집약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첫째, 시조 형식의 다양한 시도를 통해 현대시조의 시적 역량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 하였다. 그는 초기부터 평시조, 사설시조, 양장시조 등의 형식을 동원한 연작시조를 섭렵하고, 무거운 역사성의 주제를 장시조로 소화해 내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장시조 ‘과정’, ‘물레돌리기’, 연작시조 ‘비가’ ‘보름제’, ‘은유’ ‘땅’ ‘해학’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둘째, 은유와 상징, 그리고 새로운 이미지 창조 등 시적 기교가 돋보인다. 평단에서도 그의 시조를 두고, "시의(詩衣)를 폈다 접는 기교에서 유로되는 한국적인 멋과 가락을 창조하고 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셋째, 이한성 시인이 시조시단에 보여준 가장 큰 업적은 현실의식의 문학적 반영과 울림이다. 5·18 광주의 증언, 체험의 재구성인 장시조 ‘울음 타는 市街 - 광주 5·18 그날의 점묘’는 시조단에서 그 어떤 시조시인도 해내지 못한 시인으로서 시인의 본분을 다한 대 역작에 속한다.
넷째, 현대 시조의 다양한 주제 영역을 넓혀 가고 있다. 그의 시조는 시적 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통해 드러나는 감각적 언어를 구사한다. 그는 뛰어난 감성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그것을 시적 언어로 간명하게 변환시키는 능력이 탁월한 시인이다.
그는 시와 진실한 사람들을 미치도록 좋아한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친구를 팔고, 애인을 팔고, 양심을 파는 그런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분노를 꿀꺽꿀꺽 삼키면서 늘 동정의 뜨거운 눈물을 보내곤 한다. 인간의 내부가 시를 쓸만큼 완성되어야 참된 시가 비치고, 또 하나의 인간이라는 시가 된다고 믿는다. 참된 인간의 내부를 표출하는 작업이 곧 시를 쓰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의 작품들은 꾸밈이 없이 진솔하다. 그리고 그 진솔한 감동은 가슴에 와 박힌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젊은 습작시절 애송했던 그의 초기 작품 한편을 소개하며 이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항상 먹물이 뜨거워도 감히 찍지 못할 나의 땅
따스한 흙 한 줌을 어디 가서 찾을거나.
쓰러져, 뒹굴어도 잡을 끄나풀 하나 없는 하늘.
흙에 서지 못한 뜻은 文字 밖에 울고 있다.
오직 남은 것은 힘없는 이 빈 주먹 뿐
슬픔은 絶頂을 달려 바람으로 길을 낸다.
가난한 마음밭에 사랑으로 피는 꽃을
나는 야 입맞추며 어느날에 눈물 흘릴까
바램은 오늘을 사르고 내일 먼저 타는 불꽃
- 「悲歌․Ⅰ」 전문
뜨거운 가슴으로 우리의 땅을 사랑하고 자신의 위치에 대한 겸손함이 묻어있는 작품이다. 따스한 흙 한 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결국 비관하지 않는 시정신이다. 비록 빈 주먹으로 이 세상 태어났지만 그에게는 마음속에 사랑으로 피는 꽃을 항상 간직한 듯 싶다. 한 원로시인의 따뜻하고 진정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끝>
*이재창 시인은 /
1959년 광주광역시 학동에서 태어나
1978년 《시조문학》에 「옛 동산에 올라」로 1회 추천과
1979년 《시조문학》에 「墨畵를 옆에 두고」로 2회 천료,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거울論」 당선,
1991년 《심상》 신인상 시 「年代記的 몽타주 · 2」 외 4편 당선돼 문단 활동.
문학평론집 『아름다운 고뇌』 (시와사람, 1999),
창비 6인 시조집 『갈잎 흔드는 여섯 악장 칸타타』 (창작과비평사, 창비시선189번, 1999),
시조집 『거울論』 (태학사, 2001),
시집 『달빛 누드』 (시선사, 2005) 등이 있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10여년간 ‘시조창작’을 강의함.
현재, 濟州와 光州에 거주.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