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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베드로의 통곡, 믿음의 손익분기점>의 줄거리:
예수님을 세번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베드로가 닭이 운 뒤에 심히 통곡합니다. 바로 이 순간이 베드로 신앙의 손익 분기점입니다. 이때부터 예수님을 신앙하는 일에 이익이 발생합니다. 베드로는 오히려 그 순간을 완전한 실패로 인식했을 것입니다. 이 통곡의 지점을 누구나 통과해야 합니다. 아니면 신앙의 유익이 전혀 발생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의 통곡, 믿음의 손익분기점
(마26:69-75)
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베드로의 통곡, 믿음의 손익분기점>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뒤에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심히 통곡을 하게 되는데, 베드로에게 있어서 인생의 완전한 실패로 보이는 이 지점이, 이 통곡의 순간이 바로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예수님을 믿는 베드로의 신앙에 있어서 비로소 신앙함으로 인해 이익이 발생되어지는 손익분기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손익분기점이라는 말의 뜻을 다 아실 겁니다.
그러니까 물건을 만들어서 팔 때에, 어느 정도까지 진행되는 동안 들어간 비용이 계속 빠져나가고 있다가 매출액이 어느 정점에 도달하게 되면 비용과 이익이 완전히 제로점이 돼요.
바로 even point가 됩니다, 그 even point로부터 매출이 늘어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이익이 발생하는 거죠.
이게 바로 손익분기점입니다.
예를 한번 들어볼까요?
어느 중소기업에서 판매가가 십만 원짜리 물건을 만들어서 팝니다.
그런데 이 물건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단가가 8만원입니다, 그리고 고정적으로 들어가는 비용이 한 달에 1000만원입니다, 그러면 이 기업에서 10만 원짜리 물건을 한 달에 몇 개를 팔아야 이익이 창출되는 손익분기점에 도달하게 됩니까?
고정비용 1000만원 나누기 판매가에서 원가를 뺀 2만원을 하면 500이 나옵니다.
다시 말해 한 달에 500개를 팔 때가 손익분기점이고 그 이상을 팔아야 이익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 손익분기점이 신앙에서는 바로 베드로가 통곡하는 이 순간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베드로가 심히 통곡하고 있는 이 순간의 베드로의 상태를 지나야, 신앙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이익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지점을 통과하지 못하면 신앙 하면 할수록 손해로 끝나버리고 마는 거예요.
자, 베드로의 통곡이 신앙의 손익분기점이 되는 이유가 뭘까요?
‘바로 이 통곡의 순간으로부터 비로소 신앙의 이익이 시작된다.’
바로 이 통곡의 순간에 베드로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통곡하는 이 순간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난 순간이었다는 겁니다.
‘어? 바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을 저주까지 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이라는 겁니다.
이제부터 신앙의 이익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왜? 진짜 예수님을 만나기 때문에.
‘그러면 3년 동안 동고동락한 순간들은 다 뭐였느냐? 그건 예수님을 만난 순간이 아닌가?’
예수님을 만난 게 아니에요.
지금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예수님이 재판을 받는 과정에 참여해서 멀리서 관망하고 있다가, ‘너도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말하는 계집종의 질문으로부터 세 번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게 됩니다.
이게 지금 예수님을 진짜로 만나기 위해 가고 있는 과정이에요,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고 있는 이 단계가 진짜 예수님을 만나기 바로 직전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거예요.
지금 베드로가 어떤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습니까?
3년 동안 베드로가 예수님과 동고동락한 것은 진짜 예수님을 만난 게 아니었습니다.
투자였고 비즈니스였습니다, 자기 인생의 미래를 위해서 투자를 한 것이에요.
베드로가 자기의 시간을 다 바쳐서, 생업과 재산을 다 뒤로 하고, 가정을 돌보지 않고 예수님만 쫓아다녔습니다.
베드로 자신으로써는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한 겁니까?
그런데 오늘 공회에서 재판받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이 순간, 진정으로 배반한 것은 예수님이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한 게 아니에요.
베드로가 부인한 게 아니라 예수님이 부인을 한 겁니다.
좀 심하게 말씀하자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기 치신 거예요.
한 번도 그런 약속을 해주시지는 않으셨지만 얼마든지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간접적으로 그런 약속을 받아낸 것과 같아요.
어떤 약속?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르게 될 경우, 집도 버리고 생업도 버리고 하루 24시간 365일 전적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께 내 인생을 다 투자했을 때 내 인생의 미래가 확고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기적적인 능력과 그분의 메시아 칭호와 하나님의 아들 된다고 하는 그 사실을 볼 때, 간접적으로 약속을 받은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공회 장면에서 장부를 놓고 계산을 하다보니까 그렇게 투자한 모든 것이 다 제로 상태가 돼버리고 손해로 끝나버리고 맙니다.
이제는 더 이상 자기 인생의 미래를 위해서 예수님이 쓸모가 없는 상태가 돼버렸습니다.
왜냐하면 3년 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한 이유는 그분의 능력, 그분의 지혜, 그분의 리더십, 그분이 메시아라는 사실, 메시아라고 하는 것이 갖는 의미가 뭐였습니까? 나라의 독립이었습니다, 이방인을 짓밟고 승리로 이끄는 자가 메시아였습니다, 그 메시아라는 칭호, 거기에 자신을 걸고 투자를 했던 것이에요.
그런데 공회 장면을 통해서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사라집니다, 베드로가 보고 있는 능력이 사라집니다.
베드로가 알고 있는 메시아 칭호가 사라집니다.
베드로가 알고 있던 예수님의 리더십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 지혜가 사라집니다.
바다 위를 걷고 파도를 잠잠케 하던 신적인 권세가 예수님에게서 사라져버립니다.
능력도 없고, 권세도 없고, 지혜도 없고, 리더십도 없고, 메시아도 아닌 자기가 알고 있는 그런 개념 안에서 메시아도 아닌 그런 예수님을 베드로는 믿어본 적도 따라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부인하고 저주해버립니다.
한편으로는 솔직한 거예요, 그런 예수님은 모르는 거예요, 저렇게 침 뱉음을 당하고 뺨 맞고 무력하게 재판 받고 있는 저런 예수님을 베드로는 안 적이 없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내면적으로 굉장히 솔직하고 정직하게 대답을 한 겁니다.
그리고 진짜로 배반한 것은 베드로가 아니고 예수님이에요.
모든 기대를 다 저버리고 무력하게 죽음을 향해 가는 예수님이 베드로 이하 열두 제자를 배반한 것이죠.
자, 이렇게 완전한 실패로 끝난 이 지점이 왜 이제 신앙의 손익분기점이 돼서 이제부터 예수님을 신앙하는 것이 이익으로 전환되게 됩니까?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서 통곡하는 이 순간에 베드로는 진짜 예수님을 만나는 거예요.
한 번도 인격자이신 예수님 그 자체를 만나본 적이 베드로는 없었습니다.
내 인생을 위하여 능력으로 채색된 예수님, 권세로 옷 입은 예수님, 메시아라는 칭호를 머리에 쓰고 있는 예수님을 만났지, 인격자이신 예수님 그 자체를 만나본 적이 없었던 거예요.
마치 뉴스에서 가끔 보는 것처럼, 돈 없고 직업 없고 나이 드신 부모님들을 자식들이 종종 버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내 인생의 미래에 있어서 투자가치가 없어요.
부모님께 전화해서 안부를 묻거나, 연로하심에 따라 병이 들고 하시는 것에 대해서 신경을 쓰거나 할 투자가치가 없어요, 내 인생의 미래를 위해서.
부모님이 재산을 잔뜩 갖고 계시면 거기에 투자가치가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을 만나는 게 아니에요, 비즈니스를 하는 거고 부모자식 관계도 투자유치관계가 되지요.
부모가 완전히 돈이 없고 능력이 없고, 내 인생을 아름답게 설계해 가고 성취해 가는데, 아무 도움이 안 될 때라야 비로소 부모님을 인격자로서 만나는 순간이 오게 되는 겁니다.
그전에 부모님이 능력이 있어서 부모님께 갈 때는 그건 투자고 비즈니스예요.
구분이 안 가는 겁니다.
북한에 있는 이산가족 상봉, 북한에 있는 부모님, 아무 도움이 안돼요.
그런데 울며불며 그 부모님을 찾기 위해 난리를 합니다.
바로 부모님이기 때문에 내 인생에 아무 도움이 안 돼도, 오히려 만나면 짐이 돼요.
물리학적, 산술적으로는 짐이 될 뿐입니다, 그 부모님을 찾는 마음이에요.
자, 베드로가 이제 비로소 능력 없는 예수님, 지혜 없는 예수님, 침 뱉음을 당하고 뺨 맞는 예수님, 그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서 통곡하는 순간에 인격자로서 예수님 그 자체를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 이 순간부터 이익이 발생합니까?
베드로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예수님을 비용으로 투자하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 예수님의 지혜, 그 능력과 지혜 때문에 예수님이라고 하는 인격체 자체를 간과하면서 예수님의 인격체를 완전히 내 인생의 성공을 위해 비용으로 지불한 거예요.
이것은 금 1kg을 구리 1kg을 얻기 위하여 투자한 것과 똑같다는 겁니다.
내가 사업이 잘 안 되기 때문에 사업 잘되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기도하면서 예수님과 관계 맺는 모든 시간, 그 기도하는 모든 시간을 내 사업을 위해서 예수님의 능력을 끌어들이려고 예수님을 불렀다면 예수님이라고 하는 금 1kg을 사업이라고 하는 구리 1kg을 위해서 투자한 거와 마찬가지라는 얘깁니다.
이 말은 사업이 잘 됐을 때, 내가 기쁘고 행복한 가치가 구리 1kg이라고 한다면, 그냥 예수님을 사업에 써먹지 말고 예수님을 예수님 자체로 만나서, 예수님의 인격 그 자체를 나의 상대자로 만나고,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었을 경우에 금 1kg의 행복과 기쁨이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 이전까지는 자기 인생의 성취와 인생의 성공을 위해서 구리 1kg과 같은 인생을 위해서 금 1kg과 같은 예수님을 투자해버렸다는 얘기에요.
이게 웬 바보 같은 짓입니까?
지금 예수님이 누구예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좇는 자들의 눈앞에서 침 뱉음을 당하시고 이 세상 권세 앞에 무릎을 꿇고 계시고 뺨을 맞으시고, 천하에 무력한 자의 모습으로 서계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하나님이 아버지이십니다.
세상의 아버지도 그 하나님의 백만분의 일밖에 안 되는 능력이 있어도 나를 이 지경으로 놔둘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근데 하늘의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고 하는데 지금 내 꼴이 이게 뭡니까?
우리 아버지가 그 하나님의 백만분의 일의 재력만 있어도 내가 이렇게 살지는 않아요, 내가 이 사회에서 이런 대접을 받고 살지는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아버지라면서 독생자까지 희생시키면서 나를 아들과 딸로 삼았다고 하시면서 왜 나의 삶을 이 모양 이 꼴로 인도하시는 겁니까?
왜 아무것도 주시지 않는 겁니까?
왜 제자들의 소원처럼 내 인생을 향한 내 소원 인생에서 갖고 있는 내 꿈과 비전 중에 백분의 일도 이루어주시지 않는 겁니까? 왜?
우리는 하나님아버지라고 하는 다이아몬드 1kg을 내 인생이라고 하는 지푸라기 1kg에 비용으로 지불하려고 합니다.
사업이 안 됩니까?
자식이 문제입니까?
자식이 문제라고 하는 관점조차도 전부 이 세상에서 내가 사업이 안 돼서 애달파하는 그런 관점으로 보고 있는 거 아닙니까?
세상에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자식에게 주어지지 않을까봐 겁나하는 것 아닙니까?
그 관점이 하나님으로 얻을 수 있는 다이아몬드 1kg 아니, 100kg 같은 그런 행복과 기쁨을 지푸라기 1kg과 같은 이 세상의 일을 위하여 다 꼬나 박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베드로가 통곡하는 순간이 뭡니까?
능력만 보고, 지혜만 보고, 권세만 보고 쫓아 다녔어요, 내 인생을 위해서.
그러다가 무력한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비로소 예수님을 인격 자체로 처음으로 대합니다.
그리고 순간에 3년의 생애를 돌아봅니다, 영화 필름이 돌아가듯 머릿속이 돌아가는 거예요.
3년 동안 예수님이 나한테 뭘 잘못하셨나?
나를 사랑만 해주신 분이었습니다, 나를 벼슬에 올리지는 못했고 내 꿈을 이루어주시지는 못했고, 내 소원대로 움직여 주시지는 못했고, 내 인생의 미래에 대해서 쓸모없는 분이 되었지만 3년을 돌아보면 뼛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나를 사랑해주셨던 분이에요.
내 이 땅 위에서의 삶을 돌아보면 아무 유익도 없이 결국은 투자한 모든 시간들이 손해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예수님으로써 만나게 됩니다.
능력도 제거되고, 지혜도 제거되고 권세도 제거된 예수님, 메시아라고 하는 정치적인 리더십도 제거된 그 예수님을 인격으로 만나면서 통곡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 통곡의 시간을 지나면서 베드로는 이제 이 세상의 지푸라기 1kg와 같은 인생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됩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이 충만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맛을 하나님 되신 예수님, 하나님 되신 하나님아버지의 맛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생겼다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 그 하늘나라의 100kg의 다이아몬드의 무게와 같은 그 행복감에 겨워 있을 때, 이제 이 땅에서의 인생은 더 이상 베드로의 인생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실천해나가시는 거죠.
베드로의 인생은 이제 하늘을 갖고 천국을 갖는 신앙의 이익발생의 방향으로 치솟아 오르기 시작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내가 무엇을 이루면 주님 그 자체의 인격 되신 그분의 값을 넘어서는 기쁨과 행복이 있겠습니까?
아직도 주님의 능력과, 권세와, 지혜와 주님의 리더십으로 이 세상에서 내가 꿈꾸는 인생을 한번 잘 해보고 싶다는 그런 생각으로 사십니까?
아직 베드로가 부인하는 시점까지도 오지 못했고, 통곡하는 시점까지도 오지 못한 거예요.
그 예수님을 부인하세요.
그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서 이루고 싶은 것에 몸달아하는 나를 부인하는 겁니다.
그 예수님은 부인되어야 하고, 권세 빠진 예수님 능력 없는 예수님, 침 뱉음 당하는 예수님, 이 예수님을 사랑하세요!
지금 재판받고 있는 이 예수님을 사랑할 때 비로소 예수님을 통해 주시려고 했던 다이아몬드 100kg 아니 1000kg에 해당되는 그 행복과 기쁨이 내 것이 되는 신앙의 유익이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아직도 우리는 예수님을 예수님 자체로 만나지 못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주님, 차라리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권세 있는 예수님, 능력 있는 예수님을 부인하게 해주시고, 그리고 아무 능력 없는 침 뱉음 당하는 예수님 앞에서 통곡하며 예수님을 만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오늘 예배전 주일설교 이 성경구절을 읽으면서 통제할수없는 마음의 울컥함을 경험하고 다시금 십자가복음을 상고하면서 한량없으신 예수님 사랑을 다시금 마음에 새겨 봅니다. 오늘의번제 1시즌을 계속 유지하여 주심을 깊이 감사드립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