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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예수, 내가 만든 하느님
그리스도교는 행위의 종교일까. 행위의 종교라면 ‘룰(rule)’만 지키면 된다.
주일이면 빠짐없이 교회에 가고, 십일조에 맞춰 헌금을 하고, 교회를 위해
이런저런 봉사활동을 하면 된다. 어쩌다 예수를 모르는 불신자에게 전도까지
하면 금상첨화다. 그 불신자가 타종교를 믿던 사람이라면 뿌듯함은 더 커진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성서의 메시지를 온몸으로 내가 실천하는 기분이다.
그 정도만 해도 왠지 든든하다. 천국에 복을 쌓는 느낌이다. 그러니 내가
천국의 문 앞에 섰을 때 그 문이 ‘스르르’ 열리지 않을까. 왜 그런 확신을 하느
냐고? 나는 룰을 지켰으니까.
유대인 청년이 경문곽을 머리와 손에 대고 통곡의 벽에서 기도를 하고 있다.
성경 구절을 적은 양피지를 조그만 상자에 넣는다. 이어진 검정 가죽끈으로
손은 세 번, 팔은 일곱 번 둘러서 감는다.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나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착용했지만, 바리새인들은 하루 종일 착용했다.
예루살렘이 파괴된 자리에 지금은 이슬람 성전이 세워져 있다. 예수 당대에는 이곳에
거대한 규모의 유대 성전이 있었다. 유대인에게는 하느님을 만나는 공간이었다.
누가복음에는 바리새인과 세리(세금 징수원)가 등장한다. 두 사람은 기도를 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갔다. 바리새인은 꼿꼿이 서서 기도하며 혼잣말로 말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하느님께 바칩니다.”(누가복음 18장11절)
해롤드 코핑(1863~1932)의 작품 ‘바리새인과 세리’.
자신을 내세우며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달리 세리는 멀찍이 떨어져 회개하고 있다.
바리새인과 함께 성전에 올라간 세리의 기도는 달랐다. 세리는 멀찍이 섰다.
‘하늘을 향해 눈을 들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누가복음 18장13절) 이렇게 기도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예수 당대에 세금 징수원 세리는 로마 제국의 앞잡이였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벌레처럼
취급했다. 그런 세리가 하느님에게 이런 기도를 했다.
두 사람의 기도에 대한 예수의 판정은 어땠을까.
예수는 그들에 대해 뭐라고 말했을까. 이 역시 누가복음에 기록돼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새인이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누가복음 18장14절)
영국 화가 존 밀레이의 작품 ‘바리새인과 세리’.
바리새인이 바깥을 향해서 기도할 때 세리는 자신의 내면을 향해서 기도했다.
그럼에도 예수는 손을 내저었다. 바리새인은 의로워지지 않았다고 했다.
의로워진 채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오히려 세리라고 했다. 왜 그랬을까.
‘의로움’은 히브리어로 ‘체다카(Tzedakah)’다. ‘어떠한 기준에 부합하다’는 뜻이다.
무언가에 맞아떨어지는 걸 의미한다. 그게 뭘까. 세리는 기도를 통해 무엇에
맞아떨어지게 된 걸까. 그건 ‘신의 속성’이다. 우리가 ‘신의 속성’에 부합될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 안에 거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속성으로 녹아들게 된다.
세리를 칭찬하던 예수는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였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누가복음 18장14절)
예수가 말한 ‘높아짐’은 달랐다. 우리가 생각하는 ‘높아짐’과 차원이 달랐다.
그건 ‘행위’를 쌓아서 올라가는 높아짐이 아니었다. 왜 그럴까. 행위를 쌓아서
올라갈 때는 에고도 쌓여서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체다카’가 작동하지
않는다. 세리는 달랐다.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자신을
무너뜨렸다. 늘 그렇다. 에고를 무너뜨릴 때 ‘체다카’가 작동한다.
누가복음 18장을 펼치면 의미심장한 대목이 나온다. 바리새인와 세리의 일화를
말한 사람은 예수였다. 그럼 예수는 누구에게 이 일화를 들려주었을까. 예수
주위에 빙 둘러앉아 있던 이들이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누가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누가복음 18장9절) 그러니 예수가
이 이야기를 들려줄 때 주위에는 바리새인들이 앉아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들처럼 생각하는 유대인들이 앉아 있지 않았을까.
유대인이 지었던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됐다.
지금 남아 있는 건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일부 성벽뿐이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그곳에 가서
기도를 한다. 단지 옛날의 영화를 그리워해서가 아니다. 성전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라는
생각이 아직도 깔려 있기 때문이다. 옛날의 성전에 가장 가까운 게 ‘통곡의 벽’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내다보이는 곳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
어쩌면 우리가 바로 바리새인이 아닐까. 내게만 하느님이 있다고 착각하는 바리새인이
아닐까. 아무리 기도의 버튼을 눌러도 ‘체다카’가 작동하지 않는 바리새인이 아닐까.
예수의 지적처럼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바리새인이 아닐까.
바리새인들도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다. 사실 그들은 오랫동안 유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형식적인 존경이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는 존경이었다. 이스라엘은 고대로부터
주변 국가의 침략을 수시로 받았다. 그 와중에 오랜 세월 식민지가 되기도 했다. 기원전
171년 수리아(시리아)는 이집트를 물리쳤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삼았다. 예루
살렘 성전에는 그리스신 조각상이 세워지고 돼지의 피로 제사가 행해졌다. ‘하느님의
구원을 약속받은 민족’이란 징표인 할례도 금지됐다. 유대인들이 받았던 모욕감이 얼마나 컸을까.
유대인들은 항거했다. 그 저항의 중심에 바리새인이 있었다. ‘바리새인’이란 당파가
등장한 것은 이스라엘이 수리아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펼칠 때였다. 20년간 전쟁을 치른
끝에 이스라엘은 수리아를 물리쳤다. 당시 바리새인은 제사장 집안인 마카베오 가문을
중심으로 결집했다. 마카베오 가문은 곧 변질됐다. 사치를 일삼고 세속적인 사업에 몰두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왕권과 대제사장직을 통합하고자 했다. 그건 성서의 지침을 정면
으로 거스르는 일이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신으로부터 받은 말씀과 어긋나는 조치
였다. 바리새인이 보기에는 신에 대한 배신이었다. 그래서 마카베오 가문에 맞서 싸웠다.
당시 마카베오 가문의 권력은 막강했다. 그럼에도 바리새인들은 반기를 들었다. 유대인들이
다들 무서워서 고개를 숙일 때 바리새인들은 목숨을 걸고 저항했다. 순교한 이들도 상당수
였다. 그걸 유대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어땠을까.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이익만 좇고, ‘유대의
정체성’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다들 두려워서 아무도 “노(NO)!”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때
손을 번쩍 들고 “그건 아니오!”라고 외친 이들이 바리새인이었다. 그러니 유대 백성들은 그
들을 믿었다. 그들을 존경했다.
제임스 티소의 작품 ‘함께 음모를 꾸미는 바리새인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이는 사형에 처한다’는 율법을 목숨처럼 모시는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한 예수는 이단이었다.
예수 당대에도 그랬다. 바리새인들의 꼿꼿함은 그대로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황제와 유대 왕족인 헤롯 가문에 충성을 맹세했다. 사두개파인 제사장들도 헤롯 가문에
협력하고, 그 대가로 성직의 지위를 유지했다. 그때도 바리새인들은 반기를 들었다.
황제와 헤롯 가문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에서
‘당시 바리새인의 숫자는 6000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유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무척 컸다. 바리새인들이 말을 듣지 않자 왕은
급기야 벌금을 부과할 정도였다.
바리새인의 꼿꼿함은 시간이 흐를수록 박제가 돼 갔다. 종교로 따지면 ‘율법주의자’가 됐다.
그들은 ‘행위’에 방점을 찍었다. 행위는 격식으로 굳어졌고, 그들의 눈에는 예수가 격식을
파괴하는 ‘위험한 인물’로만 비쳤다. 그럼 예수는 어땠을까. 예수는 행위를 강조하지 않았을까.
아니다. 예수도 행위를 중시했다.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가 예수는 아버지 뜻에 대한 ‘행함’
이라고 했다. 그럼 예수의 행위와 바리새인의 행위는 무엇이 다른 걸까.
예수는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버리기 때문이다.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마태복음 23장13절)고 말했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복음 7장21절)
예수는 정확하게 ‘실행’이란 단어에 힘을 주었다. 그리스어로는 ‘포이에오(poieo)’다.
영어로는 ‘act(행하다)’‘make(만들다)’‘produce(생산하다)’의 뜻이다. 예수는 앉아서
암송만 하지 말고, 기도만 하지 말고, 실행하라고 했다. 그래야만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가 생긴다고 했다.
뿐만 아니다. 그 대목에 이어서 예수는 이렇게도 말했다.
그러므로 나의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마태복음 7장24~25절)
이번에도 ‘행함’이다. 예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이라야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고 했다.
그래야만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바리새인들도 ‘행위’를
강조했다. 예수도 마찬가지다. 그럼 둘은 무엇이 다른 걸까.
예수는 그게 아니라고 했다.
성서 속의 ‘자전거 타는 법’을 직접 행하라고 했다. 자전거의 핸들을 잡고서 이리저리 돌려보라고 했다.
안장 위에 앉아서 딱딱한지, 부드러운지 엉덩이의 감촉을 느껴보라고 했다. 두 발을 페달 위에 놓고서
돌려보라고 했다. 발이 땅에서 떨어진 느낌, 허공에서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기분이 어떤 건지 느껴
보라고 했다. 그걸 시도하며 넘어져 보라고 했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어보라고 했다. 성서를 읽을 때는
몰랐던 시행착오를 직접 체험해 보라고 했다. 그게 없다면 어찌 될까. 그런 시행착오가 없다면 어찌 될까.
나는 머리로만 자전거를 타게 된다.
그래서 예수는 행하라고 했다. 직접 핸들을 잡고 페달을 밟아보라고 했다. 그건 단순히 ‘자전거를 탈
줄 안다’는 결과물을 겨냥한 메시지가 아니다. 예수의 자전거는 바리새인들이 집착했던 ‘행위의 자전거’가
아니다. 예수는 ‘행함’을 통해 ‘자전거의 속성’을 체득하라고 한 것이다. 핸들과 안장과 페달만이 자전거의
전부가 아니다. ‘자전거의 속성’에는 귓가를 스치는 바람과 바람을 가를 때의 상쾌함과 이마에서 흐르는
땀까지 포함돼 있다. 고개를 들면 펼쳐지는 푸른 하늘까지 담겨 있다. 그 모두를 통해 ‘자전거의 속성’을
익히라고, 그 속성과 하나가 되라고 한 것이다.
신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이가 세 발 자전거를 타면서 ‘자전거의 속성’을 익혀가는
것과 닮지 않았을까.
그럼 예수가 내민 자전거는 뭘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다. 자전거를 탄다는
건 그 뜻을 행함이다. 그 뜻을 행하면 어찌 될까. 우리는 ‘신의 속성’을 체험하게 된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자전거를 타면서 우리는 ‘신의 속성’을 체험하게
된다. 내가 부서지고, 이웃이 그 자리에 들어서는 경험을 통해 비로소 ‘자전거의
속성’을 깨닫게 된다. 내가 부서질 때의 시원함과 신의 속성이 드러날 때의 깊은
고요를 알게 된다.
그게 바로 ‘반석(盤石)’이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강물이 밀려와도 무너지지 않는
반석이다. 그 반석은 사라지지 않는다. 영원하다. 그 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 나의 삶이
라는 집을 그곳에 지어야 한다. 반석이 무너지지 않아야 집도 무너지지 않는다. 그
반석이 바로 ‘신의 속성’이다. 예수가 ‘행함’을 그토록 강조한 것은 반석을 찾기 위함이다.
“주여! 주여!”한다고 그 반석이 찾아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직접 페달을 밟아봐야 그
반석이 찾아진다. 그 페달이 바로 ‘행함’이다.
그렇다고 ‘행함’이 목적이 아니다. ‘행함’을 통해 반석을 찾는 게 목적이다. 바리새인들은
그걸 몰랐다. 그래서 ‘행함’에만 계속 방점을 찍었다. 반석이 빠져버린 행함은 이데올로기가
되게 마련이다. ‘신의 속성’은 이치를 관통한다. 나와 삶과 세상과 우주에 대한 이치다.
그런 이치를 관통할 때 우리는 지혜로워진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복음 7장24절)
내가 뿌리내린 반석(신의 속성)을 통해 나의 눈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기로워진다.
통곡의 벽이 있는 광장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려면 오른편에 보이는 구름다리를 통과해야 한다.
나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갔다. 통곡의 벽 광장에서 성전으로 올라가는 구름다리가 설치돼 있었다.
유대 성전은 파괴됐고, 지금은 이슬람교의 성전이 세워져 있다. 그 앞에 섰다. 이 어디쯤에서 누가복음
속의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를 했을 터이다. 물음이 올라왔다.
‘나만 아는 예수. 상대는 모르는 예수. 우리만 아는 예수. 저들은 모르는 예수. 그런 예수일까.
그렇다면 예수의 가슴이 너무 좁지 않을까. 무소부재(無所不在)의 하느님이다.' 바람이 불었다.
성전 앞 뜰에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이 물었다. '나의 하느님은 다른가. 바리새인이 믿던 하느님과
다른가. 내가 만든 하느님, 내 입맛에 맞는 하느님. 그것과 과연 다른가.’ 바람이 불고, 또 불었다.
<백성호의 예수뎐> 24회에서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