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258) 보은
고 생원은 사냥꾼이다.
어릴 적 꿈이 포도대장 되는 것이라 항상 나무칼을 차고 삼촌이 만들어준 활을 어깨에 메고 다녔다.
하지만 철이 들자 자신은 무과에 응시할 자격도 없다는 걸 알고는 사냥꾼이 됐다.
황 궁수를 따라다니며 여러가지를 배웠다.
온갖 짐승들의 똥을 구분하는 게 왕초보 사냥꾼의 첫 과제였다.
이어서 짐승들의 먹이·습성·출산시기 등을 배웠다.
활 쏘는 법, 창 던지는 법, 올무 놓는 법, 함정 파는 법을 모두 배웠을 때 황 궁수는 무릎이 아프고 노약해졌다.
혈기방장한 고 생원은 하산해 어엿한 소백산 최고의 사냥꾼이 됐다.
산돼지·노루는 잡아서 풍기장·단양장에 고기로 팔았다.
가끔씩 반달곰을 잡으면 그놈을 통째로 메고 한의원에 가서 돈 많은 영감님과 흥정해 웅담을 비싸게 팔았다.
발바닥은 요릿집에 넉넉한 값으로 넘겼다.
고 생원은 웅담을 팔아 전대가 두둑해져도 색싯집 한번 가지 않고 기껏해야 곰탕집에 가서
약주 한 호리병 마시고는 전대를 꼭꼭 닫았다.
그렇게 알뜰하게 모은 돈으로 소백산 남향받이 산자락 꼭대기에 화전 밭뙈기 여러 필지를 품은 너와집을 샀다.
그리고 단양 사는 참한 색시와 조촐한 혼례를 치르고 살림을 차렸다.
계곡물이 워낙 좋아 화전 밭뙈기 몇필지는 논으로 만들었다.
가을이면 나락가마가 곳간에 쌓였다.
살림 늘어나는 재미에 새색시도 달뜨지 않고 밭을 매 보릿고개에도 양식 걱정이 없었다.
고 생원은 농사도 짓고 사냥도 했다.
꽃 피고 새 우는 춘삼월이 됐건만 소백산 골짜기에는 아직도 잔설이 쌓였다.
고 생원은 열흘 전에 쳐놓은 올무를 살피러 산골짜기를 올랐다.
산허리 한 자락을 돌았을 때 산죽 숲에서 ‘쿠륵쿠륵’ 소리가 들렸다.
창을 치켜들고 다가갔더니 집채만 한 멧돼지 한마리가 누워 있었다.
창을 치켜들어 목을 겨눴는데도 멧돼지는 가쁜 숨만 쉬었지 드러누운 채 움직이지 않았다.
커다란 눈을 뜨고 고 생원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고 생원은 직감적으로 이놈은 올무를 놓은 열흘 전 그날 밤에 걸렸다는 걸 알았다.
얼마나 발버둥을 쳤는지 올무 철사가 옥죈 왼쪽 발목의 가죽과 살은 피와 엉켰고 뼈가 드러났다.
멧돼지 배가 산더미처럼 불렀다.
“도둑질에도 도가 있는 법이여.
가난한 집 물건을 훔치면 안되고 도둑질하러 가서 사람을 해쳐서도 안돼.
마찬가지로 사냥에도 도가 있어.
새끼 밴 짐승과 젖먹이 새끼들을 데리고 다니는 어미는 죽여서는 안돼!”
작년에 돌아가신 사부, 황 궁수가 생전에 하시던 말씀이 귓가에 쟁쟁했다.
고 생원은 힘없이 창을 내려놓고 올무를 풀었다.
하지만 멧돼지는 일어날 힘도 없이 그대로 누워 있었다.
사냥꾼이면 누구나 갖고 다니는 비상약 약쑥을 올무에 묶였던 발목에 붙여주고 광목천을 감았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삼베 보자기에서 주먹밥을 꺼내 멧돼지 입에 넣어주자 우걱우걱 단숨에 먹어치웠다.
얼마 후 고 생원이 자리를 비키자 멧돼지 일가족이 모여들어 웅성거리더니 누워 있던 어미 멧돼지도
일어나 산죽 숲으로 사라졌다.
큰놈을 못 잡았다는 아쉬움보다는 어미와 배 속의 새끼들을 살렸다는 흐뭇함이 고 생원의 가슴을 채웠다.
한달 보름쯤 지났다.
왼쪽 발목에 아직도 광목천을 감은 채 그 덩치 큰 멧돼지가 열두어마리 새끼를 거느리고 골짜기를
지나며 고 생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고 생원은 화전에 콩을 심어 한시름 놓고 나서 활과 창을 들고 산에 오르는 길이었다.
고 생원이 걸음을 멈추고 활시위를 당겼다.
살쾡이 한마리가 웅크리고 뭔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시위에 걸린 화살이 자기를 겨냥하는 줄도 모르고 족제비를 보고 있었다.
족제비는 살쾡이가 자신을 덮치려는 것도 모른 채 뱀을 노려보고 있었다.
뱀은 개구리를, 개구리는 사마귀를, 사마귀는 잠자리를, 잠자리는 나비를….
고 생원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호랑이가 덮쳐왔다.
그때, 콰르르 멧돼지가 호랑이에게 달려들고 고 생원도 창을 잡았다.
호랑이는 도망갔다.
첫댓글 9월의 첫 번째 화요일 활기찬 발거름으로
즐겁게 시작하시는 기분좋은 하루
행복이 가득한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