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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못 순교성지 - 서해안 노을에 비친 순교자의 뜨거운 피 |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375-2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오천해안로 610
갈매못 성지는 충남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 소재해 있으며, 보령시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오천(鰲川)은 자라 오(鰲)에 내 천(川) 자가 어우러져 이루어진 이름이다. 즉, ‘오천’이라는 명칭은 오천을 비롯한 천수만(淺水灣) 일대의 지형이 마치 자라와도 같다고 하여 유래되었으며, 영보리의 ‘영보 (永寶)’는 말 그대로 영원한 보물이 있다는 뜻이다.
갈매못은 예로부터 성지가 속해 있는 영보리 마을 뒷산의 산세가 ‘목마른 말이 물을 먹는 모습’과도 같은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의 명당이라 하여 ‘갈마무시’, ‘갈마연’, ‘갈마연동(渴馬淵洞)’이라 불렸던 곳이다. 그러므로 갈매못은 갈마연(渴馬淵)에서 온 이름이다. 이제 목마른 말이 아니라 지친 현대인들이 생명의 물을 제공하는 성지이라면 그 이름만으로도 영적인 곳이다.
병인박해의 한 가운데에서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직전 한국 천주교 지도부의 일각에서는 천주교 박해를 막기 위하여 대원군과의 정치적 타결을 시도했다. 대원군은 당시 러시아의 남하를 크게 우려하여 천주교 박해를 완화해주는 대신 프랑스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주기를 바란 것이다. 천주교 측에서도 고위 관리였던 남종삼 요한 등이 이를 적극적으로 중재하였으나 당시 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부주교는 지방에 있어서 만남이 지체되었다. 그러는 사이 대원군은 정치적 변동에 대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오히려 천주교를 더 극렬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일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병인박해였다. 정치가(政治家)한 사람의 독단으로 인해 이처럼 무서운 사회적, 역사적 상황이 펼쳐진다는 것이 몸서리쳐진다. 결국 1866년 2월 23일 조선 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어 3월7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베르뇌 주교 순교 후 다블뤼 주교가 교구장의 임무를 물려받았는데 당시 다블뤼주교는 홍주 신리(거더리)에 있는 손치호(니콜라오) 회장 집에 머물고 있었다. 손 회장은 바로 손자선 성인의 숙부이다. 다블뤼 주교는 같이 있있던 오매트르(Aumaitre, 吳) 신부와 위앵(Huin, 閔) 신부를 불러 그들을 피신시킬 방도를 의논하고 헤어졌는데, 3월 11일 갑자기 포졸들이 거더리로 몰려와 다블뤼 주교와 복사인 성 황석두(黃錫斗, 루카)를 체포하고 말았다. 주교가 된지 4일만이었다. 이어 위앵 신부와 오매트르 신부도 체포되었다. 박해 강도를 낮추기 위해 주교와 신부들 스스로 자진하여 체포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들 다블뤼 주교 일행은 서울로 압송된 후 몇 차례의 국문에 이어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의 판결을 받게 되었다. 이 때 제천 배론에서 체포된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 회장이 그들 중에 포함되었다.
왜 갈매못인가
효수형의 판결을 받은 이들 순교자 5명의 처형 장소는 충청 수영이 있는 서해안 충남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의 갈매못이었다.
처형지를 군사 주둔지인 병영이나 수영으로 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지만 이처럼 먼 곳으로 한 것은 특별했다. 이는 때마침 고종이 명성왕후와 국혼(國婚)을 한 달 앞둔 시기여서 도성 인근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250여 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 처형하기로 한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무당이 예언한 말이라고도 한다.그리고 부근에 있는 외연도(外烟島)와 관련한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외연도는 보령시에 속해 있는 70여 개의 섬들 중 가장 멀리 있는 섬으로서 1846년(현종12년) 6월에 프랑스 함대 세실 사령관이 3척의 군함을 이끌고 외연도에 정박해서 기해박해 때(1839년)에 앵베르, 모방, 샤스탕 신부 등 3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을 살해한 책임을 묻는 편지를 상자에 남겨 놓고 돌아간 적이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조선 영해 침입으로 간주하여 당시 옥중에 있던 김대건 신부의 처형이 앞당겨졌고, 1866년 3월 30일에는 흥성 대원군이 서양 오랑캐를 내친다는 의미에서 세실함장이 침범했던 외연도에서 가까운 오천의 수영을 택하여 다블뤼 안 안토니오 주교를 비롯하여오메트르 오 베드로 신부, 위앵 민 마르티노 루카 신부, 황석두 루카, 장주기 요셉 등 5명을 끌고 와 외연도를 바라보고 목을 쳐서 처형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들 다섯 명의 순교자는 갈매못으로 향하는 250여 리 죽음의 행진을 떠나게 됐다. 호송 일행이 갈매못을 향해 가는 도중에 길목인 내포 땅 아산시 음봉면 주막집에서 호송자들이 목을 축이며 쉬었다. 그런 사이에 5명의 사형수들은 주막집 옆의 바위 위에 걸터앉아 마지막으로 예수님 말씀을 나누며 성가를 불렀다고 한다. 그때 그 바위는 1973년 음봉 삼거리에서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현 절두산 순교성지 박물관) 광장으로 옮겨져서 ‘복자 바위’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1984년 5월 6일 다섯 분 모두 성인품에 오른 후 오성(五聖) 바위라고 고쳐 부르고 있다.
병인년 3월 29일 주님 만찬 성목요일에 처형장 근처에 도착하여 포졸들이 다음날 이웃 읍내를 돌며 사형수들을 구경시킬 계획을 짜자, 다블뤼 주교는 도착 다음날 3월30일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수난 성금요일이어서 그날 순교하게 해달라고 강력히 요청하여 이를 관철시켰다고 한다.
무덤 이장 과정
1866년 3월 30일, 성금요일에 갈매못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한 5위의 성인의 참수된 머리는 사흘 동안 효수되다가 사흘 후 교우들에 의해 몰래 모래밭에 가매장이 되었다. 약 3주 후 황석두 루카의 유해는 가족들이 거두어 인근 삽티를 거쳐 고향인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에 안장했고, 나머지 네 분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장주기의 아들 장노첨은 당시 남포 서짓골에 사는 이화만 바오로를 찾아가서 그의 적극적인 동의를 얻는 데 성공했다. 이리하여 신자들은 1866년 5월 21일 갈매못 임시 매장지에서 순교자들의 목과 시신을 일치시키고 염을 한 뒤 10리 가량 떨어진 오포리의 야산(일설에 콩밭)에 암장하였다. 이것이 갈매못 순교자들의 두 번째 무덤이며 이 무덤은 이후 신자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그러던 중 순교자들의 무덤이 여우에 의해 훼손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첫 번째 이장을 주도했던 이화만이 1866년 6월 직접 무덤 상태를 확인하고 홍산 도앙골(현 부여군 내산면 금지1리) 교우촌에 살던 김순장(요한 금구)와 두 번째 시신 수습 및 이장을 의논했다. 두 사람은 이장 비용을 신자들에게 추렴하고 이장 장소는 남포 서짓골 이씨 집 뒤편 골짜기 담배 밭으로 결정했다. 물길을 통한 이장은 1866년 7월(음력)에 이뤄져 서짓골에 안장되기까지 10-15일이 소요되었다. 이 서짓골의 세 번째 무덤은 1866년 7월 25일(음력)부터 1882년 1월까지 15년 6개월 동안 그대로 보존되었고, 그 결과 이곳은 순교자들의 피와 살, 잔뼈들이 진토가 된 거룩한 땅이 되었다.
약 16년 간 묻혀 있던 4위 성인의 유해는 1882년 11월 6일 일본 나가사키 오우라 성당 내 조선대목구 대표부로 보내졌다. 그후 블랑 주교에 의해 1894년 5월 23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귀환 안치되었다. 6년 뒤인 1900년 9월 5일에는 명동 성당 지하묘역에 옮겨진 후,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시복식(1968년 10월 6일)을 1년 앞둔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성해실로 다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지 조성 과정
순교자의 후예였던 부여군 금사리 쇠양리 본당 주임 정규량 레오(1883-1952년) 신부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발굴하게 된다. 정규량 신부는 1867년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132위 하느님의 종' 중의 한분인 정은 바오로의 증손자로 순교자 후손이시다. 1925년 정규량 신부는 인근 지역 두 신부와 함께, 순교 당시 순교자의 시신을 이장했던 공소 신자들의 체험담과 목격담을 바탕으로 참수했던 자리, 머리를 매단 깃대 자리, 매장 구덩이 세 곳 등을 확인하고 목격 증인들의 증언 등 더하여 순교지를 확인하고, 이듬해에 20평의 땅을 우선 매입해 1929년에 서울교구 천주교 유지재단에 귀속시켰다.
그 후 갈매못이 순교성지로 다시 눈길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1962년 대전교구 대천 본당이 설립된 후 순교자 현양운동과 함께 1975년 9월 당시 대천 본당 주임이었던 고 정용택 사도 요한(1998년 7월 3일 선종) 신부가 순교 당시의 위치를 재확인하고 순교복자 기념비를 세우면서부터이다. 그 후 1985년 9월에 다섯 분의 순교성인 기념비와 야외제단이 세워졌다. 2003년 2월 17일 대전교구는 갈매못을 성지본당으로 설정하고 상주사제를 두어 성지개발과 순례자들을 위한 사목에 박차를 가했다. 2004년 4월 성지 전시관 앞에 다블뤼 안 주교 동상을 건립해 축복하고, 2006년 10월에는 성지 언덕 위에 처형장인 바닷가를 내려다보는 승리의 성모 성당을 완공해 봉헌식을 가졌다. 2008년 4월에는 기존의 경당과 전시관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수리해 갈매못 순교성지 기념관으로 새로 꾸며 성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2013년 2월 12일에는 갈매못 성지가 ‘보령 갈매못 천주교 순교지’라는 명칭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83호로 지정되었고, 2016년 10월 15일에는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 순교자 현양대회를 거행하며 승리의 성모 성당 옆에 새로 세운 다블뤼 주교 등 다섯 성인상 축복예식을 가졌다.
다락골 성지를 출발한지 30-40분 걸렸을까, 오후 5시에 보령시 오천면 충청 수영에서 약 십리 떨어진 갈매못 순교성지에 도착했다. 도착해보니 갈매못 성지라는 이름과는 달리 갈매못은 못이 아니라 서해안 바닷가였다. 다만 해안이 섬과 육지로 둘러싸여 마치 연못처럼 보여서 갈매못이라 하는 것이다.
안내게시판과 성지 홈페이지에 나오는 안내도를 따라 일단 가장 중요한 곳인 기념관 및 소성당을 거쳐 언덕 위에 있는 승리의 성모 대성당을 가기로 한다. 그리고 그 뒤 야외 전시장 시설물을 하나하나 돌아보는 것을 동선 코스로 잡는다.
갈매 순교성지 기념관
순교터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갈매성지 기념관은 소성당을 겸하고 있기에 기도의 공간이면서 갈매못 순교자들을 가까이 만날 수 있는 뜻 깊은 장소이다. 출입문에 ‘기도의 집입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은 이유이다.
기념관 출입구 벽에는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 자다(Qui a Jésus a tout)라는 성 다블뤼 주교의 좌우명이 적혀있다.
기념관 내부 벽면에는 성인 유해와 순교화, 유물과 유품을 전시해 갈매못이 담고 있는 순교의 역사를 말없이 속삭여준다.
기념관 벽면에 여러 전시품이 있다. 먼저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섯 성인의 순교 장면을 나타내 성화 6개가 걸렸는데 전율을 느끼게 한다.
다섯 성인의 순교화
1.조선에 도착하는 안토니오 다블뤼 신부 일행
안토니오 다블뤼 신부는 1845년 8월 31일 3대 교구장이신 페레올 주교님과 서품된지 2주된 김대건 신부와 용감한 신자 10명과 함께 상해를 출항한다. 그러나 폭풍을 만나 42일간 표류한다. 제주도 남쪽 용수리 해안까지 떠내려 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같은 해 10월 12일에 강경 황산포에 도착한다.
2. 고문당하는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
주교와 사제들은 신자를 지키기 위해 자수했다. 다블뤼 성인은 주뢰형을 받으면서도 “내 양들을 고발하는 것은 내 믿음을 잃는 것입니다. 모진 형벌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차라리 내 몸이 화를 입을지언정 남에게 해를 미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 다리는 잘라지면 그만입니다.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헤아려 처분하소서,”라고 소리쳤다.
3. 오성바위
다블뤼 주교 일행은 한양을 떠나 형장인 오천의 충청 수영으로 향하던 중 지금의 충남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사거리에 있는 바위 위에 잠시 쉬었다. 아 바위는 둘레가 11m,지름 4m, 두께 1m, 무게 16톤이다.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는 5명의 사형수들은 호송포졸들의 호의로 잠시나마 바위 위에서 포승을 풀고 짧을 휴식을 즐겼다. 순교자들은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서로 격려하고 기도하면서 성가도 불렀다. 이 바위는 오성바위로 불리며 지금은 절두산 순교기념성당 정원에 있다.
4.솟재를 넘은 다섯 분의 순교자
순교자들이 충청 수영 인근에 도착했을 때 포졸들은 처형 일정을 늦추려 했다. 이에 다블뤼주교님은 “안 될 말이오. 우리는 내일 죽어야 하오.” 하고 소리쳤다. 예수님의 수난 성 금요일에 죽고 싶었던 것이다. 충청 수영에서 하룻밤을 지낸 순교자들은 오천 남쪽의 솟재를 넘어 이곳 갈매못으로 끌려왔다.
5. 순교의 날
형장으로 택한 곳은 바닷가 모래사장이었다. 장총으로 무장한 9명의 군인들이 관장을 호위하였고 군사 200명이 죽 늘어서서 사방에서 몰려드는 구경꾼들의 접근을 막았다. 망나니는 다블뤼 주교의 목을 반쯤만 쳐놓고는 돈을 더 받기 위해 관속들에게 가서 흥정을 했다. 그동안 주교의 머리와 사지는 뒤틀리고 경련을 일으켜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500냥에 흥정을 마친 망나니는 두 번의 칼질에 주교의 머리를 떼어내었다. 나머지 순교자들은 단칼에 또는 두 번의 칼질에 머리가 떨어졌다.
6. 장깃대에 매달린 다섯 성인
다섯 순교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수난 성 금요일에 이 갈매못 바닷가 모래사장의 장깃대에 자신들의 머리를 매달았다. 그리고 사흘동안 전시되었다. 그 많던 까마귀떼도 개들고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순교자들의 머리가 매달린 그 시간 바닷가 먹구름 사이로 다섯 개의 은빛 무지개가 떴다.
▲다섯 성인들의 생애
△성 안 안토니오 다블뤼(Daveluy) 주교 (1817∼1866)
한국명은 ‘안돈이’(安敦伊)이며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이었던 안 안토니오 주교는 한한불(韓漢佛)사전을 비롯하여 많은 번역서와 저서를 남겼고, 10여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여 <조선 순교자 비망기>를 완성하는 큰 업적을 이룩하였다. 프랑스의 상류층 가정에서 자라나 한국 풍속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데다 위장병과 신경통에 시달렸지만, 한국말을 잘하고 보신탕을 즐기는 등 가장 한국적인 사제로 알려져 있다.
1845년 10월 조선에 들어와 20여 년 동안 봉사하던 안 주교는 1866년 3월 11일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민 신부, 오신부, 황석두 루카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고, 유창한 한국말로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반박하여 다른 이들보다 더 심한 형벌을 받았다. 안 주교 일행을 충청도 갈매못으로 압송한 형리들은 일행을 며칠간 마을에 조리돌리며 형 집행을 지연시키려 하였지만, 안 주교가 3월 30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순교하기를 강하게 요구하여 이 날 형이 집행되었다.
△성 오 베드로 오매트르(Aumaitre) 신부 (1837∼1866)
프랑스 앙굴렘 교구 출신인 오 신부는 1862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1863년 6월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았다. 경기도 수원 근처에 있는 샘골에서 한국말을 익혔으며 충청도 홍주 거더리에서 전교하였다. 1866년에 박해가 일어나고 그 해 3월에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자 피신하려고 했으나 결국 거더리로 돌아와 체포되었다. 오 신부는 안 주교, 민 신부 등과 함께 서울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3월 30일 갈매못에서 안 주교 다음으로 두 번째 칼날을 맞아 29세의 젊은 나이로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성 민 루가 위앵(Huin) 신부 (1836∼1866)
민 신부는 프랑스 랑그르 교구 출신으로, 1861년 사제가 되었고 1865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백, 김, 서 신부와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충청도 내포에 머물며 안 주교에게 한국말을 배운 뒤 홍주 황무실에 부임하여 전교하였다. 1866년 3월 11일 안 주교가 체포되자 자수하여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고, 갖은 고문을 겪은 뒤 3월 30일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음으로써 30세의 나이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 성 황석두(黃錫斗) 루가 (1813∼1866)
황석두는 충청도 연풍의 양반 가문에서 자라나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 시험을 치르러 상경하다가,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하였다.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 벙어리 행세를 하며 교리서를 탐독하였고, 이에 감동한 부친과 가족들도 입교하게 되었다. 그는 덕행이 뛰어나고 교리 지식이 풍부하여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로,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고 주교에게 금욕과 절제를 위하여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받고 독신 생활을 하였으며, 안 주교를 도와 교리서 번역과 교회 서적 출판에도 참여하였다. 1866년 3월에 먼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던 안 주교를 몇 십 리나 따라간 황석두는 결국 함께 체포되어,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5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 (1803∼1866)
장주기는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나 1826년에 세례를 받았다.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를 피해 충청도 배론으로 이사하였고, 회장이 되어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에는 자신의 집을 임시 신학교로 내어 주고,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땅에서 농사일을 하며 잔일을 도맡아 하였다. 1866년 3월 1일 배론 신학교에서 푸르티에 신 신부와 프티니콜라 박 신부가 체포되자 장주기는 제천 부근의 노럴골로 피신하였지만,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자수한 뒤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의 포청에서 고문을 견뎌 내며 끝까지 신앙을 지켜, 때마침 홍주 거더리에서 끌려 온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등과 함께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6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다블뤼 주교관의 주춧돌 ▲다블뤼 주교의 제의
▲저술활동을 하는 다블뤼 주교와 황석두 루카
▲ 순교자의 유해 - 다블뤼 주교의 유해(상)와 4대교구장 베르뇌 주교의 유해(하)
▲저술가 다블뤼 주교의 저서들
승리의 성모 대성당
승리의 성모 대성당은 높은 언덕 위에 있다. 따라서 성당에 가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길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 오르는 길의 담 위에 14처가 조성되어 있다.
오르막길을 다 오르면 견고한 성벽 같은 성모 대성당 벽면이 나타나는데 그 입구에 성체조배실 출입문이 나 있다.
성체조배실에서 나오면 다시 벽을 따라 성당 입구로 가는 계단 길이 있고 길 따라 다섯 성인의 성상이 일정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다. 가장 밑에는 성상을 봉헌한 교우들이 소개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맨 위에 승리의 성모님이 채색으로 모셔져 있다.
성당 내부로 들어가니 제대 후면에는 숲 속에 다섯 성인이 서 있는 유리화가 조성되어 있고 두꺼운 왼쪽 벽에도 다섯 성인 유리화가 창마다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 벽은 왼쪽과 달리 벽 중간쯤에 십자가의 길 14처가 한꺼번에 모아져 있고 그 밑에는 성인 유해 공경실 입구 출입문이 나 있다. 제대 앞 코너에는 승리의 성모상이 있다.
유해 공경실
엄숙한 침묵이 흐르는 성인 유해 공경실에 들어가면 공경실이라는 이름이 필요 없을 정도로 저절로 무릎이 꿇려진다. 각각 다섯 성인들의 영정 위에 유해 안치 감실이 있고, 영정 밑에는 금빛 유해 성광이 빛나고 있다. 금빛이 왜 귀한 색인지 알게 한다.
성 장주기 회장 성 다블뤼 주교
성인 유해실을 참배하고 승리의 성모 대성당을 나오면 성당 뒤의 야외 회중석과 순교자 조각상 6처로 가게 된다. 순교자 회중석은 마치 야외 공연장 스탠드 같은데, 일종의 신앙 집회의 교우석이다. 여기서도 꼭대기에는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다불뤼 주교의 신심 명언이 적혀 있다.
순교 조각화
순교 조각화는 대성당 뒤 한적한 공간에 다섯 성인이 한양에서 고문과 사형언도를 받고 갈매못을 내려오는 과정과 갈매못에서 순교하는 장면을 조각화한 것이다. 이는 갈매못 기념관에서 본 6본의 성화와 테마를 같이 하고 있다.
1. 조선에 도착하는 다블뤼 신부, 페레올 주교, 김대건 신부 - 상해를 출발하여 폭풍을 만나 제주도까지 표류하다가 1845년 10월 12일 강경 황산포에 도착했다.
2. 고문당하는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 - 주리를 틀리면서도 목자가 자기 양들을 고발하는 것은 믿음을 잃는 것이라면서 다시 할 말이 없으니 마음대로 처분하라고 했다.
3. 오성바위 - 한양에서 오천 수영으로 오는 중 바위 위에서 쉬면서 예수님 말씀 나누고 기도하며 성가도 불렀다. 그 바위가 오성바위이며 지금 절두산 성지에 있다.
4. 솟재를 넘는 다섯 순교자 - 충청 수영에 도착했을 때 포졸들은 처형을 늦추려했다. 그러자 안 주교는 내일 주님 수난일에 죽겠다고 강하게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이튿날 솟재를 넘어 갈매못에 가서 순교했다.
5. 순교의 날 - 망나니는 안 주교의 목을 반쯤 쳐놓고 돈을 더 받으려고 관속들과 흥정을 했다. 500냥을 받고 목을 마자 쳤다.
6. 장깃대에 매달린 다섯 성인 - 다섯 성인의 목이 장깃대에 매달리자 다섯 개의 은빛 무지개가 먹구름 사이로 떠 올랐다.
이제 대성당이 있는 언덕을 내려와서 야외 전시장 주위를 둘러볼 차례다. 내려오면서 쉼터와 식당 등 편이시설을 들어가지는 않더라도 둘러보면서 내려온다.
야외 전시장
성당 언덕길 바로 밑은 사무실과 성물방인데 사무실과 처음 갔던 기념관 사이에 성모동산이 있다. 여기에는 승리의 성모님이 계신다.
▲승리의 성모상
이 성모상은 1629년 프랑스 파리에 건립된 승리의 성모 대성당에 모셔진 성모상이다. 다블뤼 주교는 성모의 은혜를 수 없이 체험한 선교사였다. 그가 신학생일 때 파리 ‘승리의 성모 대성당’ 주임이던 데즈네트 신부가 죄인의 회개를 위한 성모 성심회를 창설했다. 학생 다블뤼는 그 창설자를 직접 만나 큰 감화를 받았고, 그 심신을 널리 알리려고 노력했다.
특히 그는 보좌신부로 재임했던 20개월 동안 성모 신심에 대한 중요한 체험을 했다. 그는 4년간 병으로 누워있던 수녀의 쾌유를 위해 9일 기도를 하자고 제의했고, 수녀는 9일째 되던 날 병석에서 일어났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본당에 성모 성심회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성모님의 도우심을 직접 느끼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보좌신부 시절 만들었던 성모 성심회는 결국 전교의 땅 조선에서 그대로 이어졌다. 1846년 11월 2일 공주 수리치골에서 페레올(Perreol) 주교와 다블뤼(Daveluy) 신부가 성모 신심회를 설립했다.
다블뤼 주교는 김대건 신부와 라파엘호를 타고 위험한 여행을 하면서 성모님께 의지하고 보호를 받았던 일을 상기하면서 성모님께 감사를 표시하고 성모 마리아의 전구로 조선 교회가 박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한국에서 성모 신심회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갈매못 성지에는 대성당 앞과 성당 안 제대 옆에도 승리의 성모상이 모셔져 있다.
▲야외 제대
야외제대는 갈매성지 기념관 바로 앞, 야외 미사를 드릴 수 있는 넓은 정원에 있다. 돌로 된 제대 뒤편 벽돌 벽에는 십자가 아래 다섯 성인 얼굴이 새겨져 있고, 좌우 양쪽 끝에는 다블뤼 주교와 황석두 루카 상이 서 있다.
▲다섯 성인 순교터
다섯 성인 순교터에는 다섯 성인의 사진과 약력이 새겨진 순교비가 있고 그 양쪽에 무명순교자를 기리는 기념비와 이곳이 순교터임을 밝혀주는 순교터비가 있다. 그리고 그 뒤편에는 순교성인비와 순교복자비가 서 있다.
▲예수님 부활상
▲프랑스 순례단 기념식수 나무 - 갈매못 순교 150주년을 맞이하여 프랑스 순례단이 성지를 방문하여 기념식수를 했다. 1916년 프랑스 주교단과 대전 교구에서 기념 표지석을 세웠다.
▲십자가의 길 - 잔디밭 울타리를 따라 난 십자가의 길이다. 갈매못 성인과 함께하는 십자가의 길로 2001년 갈매못 성지 후원회에서 세웠다. 제1처에 가기 전에 다블뤼 신부의 기도를 먼저 읽는다.
주님, 핍박 중에 있는 교우들을 위해 기도하오니, 저들 불쌍한 형제들의 원을 들어 주소서. 저들은 당신의 사랑을 원하나이다. 그러나 주님, 이 땅은 지금 당신을 알고, 당신 말씀을 따르기에는 너무 벅찬 고난의 시기이옵니다. 핍박과 환란이 오늘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많은 형제들이 박해를 피해 집을 버리고, 논과 땅도 버리고 산으로 피했습니다.
그들은 고통 중에도 당신을 찾고 있사옵니다. 그들에게 빛을 주소서. 그들에게 용기를 주소서. 그들에게 지혜를 주시어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알기에 충분한 신덕을 주소서. 당신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소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아멘. (다블뤼 주교의 기도)
▲다섯 성인 첫 매장지
이곳은 병인년 3월 30일 다섯 성인이 참수되어 3일간 장대 끝에 효수되어 있다가 처음으로 가매장된 곳이다. 두 개의 바위 위에 이후의 이장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3일 후 용감한 교우들에 의해 머리와 몸이 수습되어 이곳 모래밭에 매장하였다. 약 3주 후 황석두 루카 성인의 시신은 가족이 수습하여 삽티에 안장하였다가 지금은 연풍 성지에 묘가 있다. 이후 박해가 좀 뜸해지자 이치문 힐라리오와 장주기의 아들 장노첨이 이장을 위해 나머지 네 분의 시신을 거두었다. 이때 시신은 각각 칡으로 머리와 몸이 묶여져 있고 안가(安家), 오가(吳家) 등 나무 명패가 함께 있었다. 이들은 네 분의 유해를 각각 4개의 지게에 얹어 지고 약 10리 떨어진 곳에 옮겨 광중은 따로 했으나 봉분은 하나로 무덤을 만들었다. 그후 7월에 이 무덤은 다시 서짓골로 이장을 했고, 일본 나가사끼에 갔다가 귀환하여 용산신학교와 명동성당을 거쳐 1967년 이후 지금까지 절두산 성지 대성당 지하에 모셔져 있다.
6시가 가까워지는 시간, 지는 해는 수평선에 이르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무겁게 가라앉는 갈매못 바닷가를 뒤로하고 순교자들이 마지막 머물렀던 충청 수영성으로 출발했다.
충청 수영성(사적 제501호)
충청 수영은 조선 초기부터 충청도 서해안 지역에 위치하여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漕運船)을 보호하고 왜구침탈을 방지했고, 근대에는 이양선(夷洋船)을 감시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또한 충청 수영은 경상좌 · 우수영, 전라좌 · 우수영, 경기 수영과 함께 6대 수영의 하나이다. 수영의 장은 수군 절도사(종3품)이다.
보령의 충청 수영성은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하여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지역으로 성내의 영보정(永保亭)이 유명했고, 서문 밖 갈마진두(渴馬津頭)는 충청수영의 군율 집행터로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여러 명의 천주교 신자가 순교한 곳이다.
근대에 들어 도로개설이나 호안매립 등으로 인하여 훼손된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충청수영성은 나머지 성지(城址)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형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군사목적에서 마련된 충청지역 수군 지휘부로써 충남의 수군편제와 조직, 예하 충청지역 해로(海路) 요해처(要害處)에 배치되었던 수군진과의 영속 관계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일단 아치 성문을 통해 성안에 들어와서 계단길을 통해 가장 높은 곳에 솟아있는 큰 건물인 영보정(永保亭)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진휼청이 나온다. 진휼청(賑恤廳)은 흉년에 빈민구제를 담당했던 관청이다.
동해안 하면 일출이 멋지고 서해안은 일몰이 아름답다. 따라서 서해안 여행이나 순례는 낙조나 일몰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 일과는 이로써 끝이다.
이제 내일을 걱정하고 당장 오늘 숙소를 걱정해야 한다. 일단 내일 일정인 홍주 성지가 홍성에 있으니 홍성에가 숙소를 정하기로 했다. 무작정 홍성 시가지에 들어왔으나 숙소가 잘 눈에 띄지 않아 식사도 할 겸 식당에 들어가 물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목도 좀 타고 해서 길가에 무슨 면옥 식당 간판이 커다랗게 붙어 있어 이 참에 냉면이라도 먹을까하여 들어갔더니 간판 따로 메뉴 따로였다. 아예 냉면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상호만 냉면이었던 것이다. 다시 나오기도 그렇고 하여 된장찌개를 먹고 종업원에게 모텔이 많이 있는 곳을 물어서 숙소를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