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90. 서안을 떠나며 - 唐代의 불교
업설.불성 사상 등에 업고 ‘중국적 불교’로 뿌리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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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존불> |
사진설명: 서안 섬서성역사박물관에 있는 삼존불. 단아한 얼굴에 위엄있는 자세를 한 이 불상에서 절정기의 당당한 불교를 읽을 수 있다. |
진시황 이래 천여 년 간 중국 정치,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서안(장안)을 떠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2002년 10월7일) 저녁이면 서안을 출발해 낙양으로 가야 된다. 섬서성역사박물관을 나오며 다시 자은사로 향했다. 대안탑에 올라 중국불교의 꽃을 피웠던 서안 시내를 다시 한번 더 보기 위해서였다. 자은사 입구에 있는 현장스님 상(像)에 예배하고, 대안탑에 올라갔다. 7층에 앉아 서안 시내를 내려다보며 중국불교의 흥망성쇠를 생각했다. 주지하다시피 중국불교는 당나라 때 절정을 맞이했다. 준비기(65~317), 토착기(317~589)를 거쳐, 수, 당 시대 불교는 명실상부한 ‘중국’불교가 되고, 국교로 성장했다. 당 황실이 도교를 지원하고, 회창(會昌)연간(841~846)에 폐불(廢佛)이 있었지만, 그래도 당나라 불교는 그야말로 욱일승천의 기세로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이유를 분석하기 전에 중국불교사를 짚어보자.〈중국불교〉(케네스첸 지음. 민족사 출간),〈중국불교학 강의〉(여징 지음. 민족사 출간), 〈중국불교사상사〉(키무라 키요타카 지음. 민족사 출간), 〈중국불교사〉(가마다 시게오 지음. 불교시대사 출간) 등에 의하면 한나라가 멸망한 220년경 불교는 중국적 토양에 불확실한 존재로 겨우 명맥만 유지한 채, 뿌리내릴 수 있는 근거를 만들기 위해 도교도들의 지지를 구하고 있었다. 589년 수나라가 대륙을 다시 통일했을 때, 불교는 이미 각지에 골고루 퍼져 있었다.
모든 사회계층에서 스님들이 배출됐으며, 어디에나 사찰과 부처님이 계셨다. 그리고 방대한 문헌이 축적된 상태였다. 위진남북조 시대 불교의 교세를 알려주는, 당나라 법림스님이 저술한 〈변정론〉에 따르면 동진시대(317~419) 강남에는 1,768개의 사찰과 24,000명의 스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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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섬서성역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낙타. 실크로드의 영화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
‘불심천자(佛心天子)’ 양무제가 다스린 양나라 시절(502~557)에 사찰은 2,846개로, 스님은 82,700명으로 각각 늘어났다. 위진남북조 시대 불교는 북방에서 더 ‘유행’했다. 법림스님의 계산에 따르면 북위 시대 전체 스님 수가 200만이 넘었다. 47개의 국립사찰이 건립됐으며, 30,000이 넘는 암자와 사찰이 백성들에 의해 세워졌다. 〈출삼장기집〉에 따르면 양(梁)대까지 한역된 경전이나 저술된 문헌이 모두 2,073종 3,779권. 〈수서(隋書)〉 편찬자가 “유통되는 불경의 숫자가 유교경전보다 수십 배에서 백배까지 많다”고 불평한 것에서, 당시 불교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우회적으로 알 수 있다.
물론 중국문화가 불교에 호의적이었기에 성장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인도와 중국 사람은 세계를 보는 눈이 달랐다. “인생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고, 추구해야 할 목표는 삶으로부터의 해탈이라고 하는 인도적 시각은, 인생이란 좋은 것이고 즐겨야 할 것으로 본 중국적인 시각과 반대”였다. 불교의 ‘독신생활’ 역시 가족과 많은 자손을 강조하는 중국적 생활과 다르며, ‘걸식행위(乞食行爲)’는 사회구성원 모두의 생산적 노동을 강조하는 유교와 반대되는 사고방식이었다. ‘출가(出家)’ 또한 조화로운 사회관계를 주장하는 중국인의 사회관과 배치됐다. 국가 법률에 복속되지 않는 ‘승단(僧團)’이라는 불교적 개념은, 모든 사람은 법률을 준수해야 한다고 보는 유자(儒者)들에겐 받아들여지기 힘든 사고였다.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중국인 사로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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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사자좌에 앉아 계신 부처님. 섬서성역사박물관에 있다. |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중국 전역에 확산된 배경엔 “위진남북조 시대라는 분열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220년경 후한이 망하고 위, 촉, 오 삼국시대, 사마염의 서진, 오호십육국, 남북조 시대를 가로지른 대륙의 분열이 불교 확산의 일등 공신이라는 설명이다. 케네스 첸은 “인도종교를 반대하는 유교적 정부 관리들이 움직이는 강력한 중앙정부가 없었기에 불교가 빠르게 퍼졌다”고 분석했다. 이것만이 확산의 이유는 아니다. 분열기(分裂期)이다 보니 그때까지 중국 대륙을 지배하던 유교를 대신할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행위 규범을 중국 지식인들은 찾고 있었다.
이때 불교는 중국 지식인들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철학적,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다. 불교사상이 불교의 중국 확산에 크게 기여했던 것. 교리적으로 중국인들을 매료시킨 것은 ‘업설(業說)’과 ‘불성(佛性)사상’이었다. “불확실성과 불안정성 시대를 살며 고통과 비애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북돋워준 것은 ‘개인적 과보’가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한다는 업설이었다”고 적지 않은 학자들은 강조한다. 과거에 저지른 악행 때문에 현재 고통을 받고 있지만, 현세의 공덕으로 미래엔 보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업설이 그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공했다. 반면 “현재 행복을 누리지만 포악한 행동을 하는 위정자도 반드시 과보를 받게 된다”는 합리적 설명 또한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을 불교에 귀의하게 만들었다. 업설은 이처럼 어둡고 희망 없는, 분열과 전쟁 시대를 사는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었다.
불성사상 역시, “아무리 천하고 보잘것없는 생명도 그 안에 불성을 가지고 있어 성불, 해탈을 이룰 수 있다”는 불성사상 역시 중국인들을 매료시켰다. “이같이 고귀하고 고무적인, 그러면서 강렬한 구원의 메시지는 그 때까지 중국인들에게 제시된 적이 없었다(케네스 첸).” 불성사상과 업설은 많은 사람들을 불교로 끌어들이는 자석의 역할을 했다. 교리를 이해한 지식인들은 자연스레 불교에 관심을 기울였고, 일반인들도 따라서 서서히 불교 쪽으로 마음이 쏠렸다. 지식인들과 백성들이 불교에 마음을 기울이자, 국가도 불교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됐다. 통치에 활용할 수 있는 방안까지 모색했고, 적극적으로 방법을 강구했다. 국가가 불교를 흥륭하는 데 마음을 기울이자, 역으로 백성들은 더욱 불교의 가르침에 경도됐다.
회수(淮水) 이북을 지배한 민족들은 특히 불교에 호의적이었다. 남방의 한족(漢族)사회는 불교가 들어오기 전, 이미 상당한 수준의 사상적, 문화적 토대를 갖고 있었다.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질만한 문화적 요소를 풍부하게 밟고 있었다. 그런 그들도 혼란한 시대를 맞아 결국 불교에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사상적 토대가 남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고 여겨지는, 북쪽을 지배한 민족(흉노, 갈, 강, 저, 선비족)들은 더욱 당연히 불교에 젖어들었다.
불교는 게다가 한족사회가 아닌 인도에서 들어온 이민족의 종교라는 사실이, 불교에 대한 북방 민족의 관심을 드높였다. 불교가 너무 성하자 후조(後趙. 319~352)의 왕도가 석호왕(石虎. 재위 334~349)에게 상소를 올려 “불교를 너무 흥하게 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이에 석호왕은 “나는 이민족이기에 불교를 좋아 한다. 우리가 불교를 믿는 것이 당연하다”며, 왕도의 상소를 일축했다. 북방민족은 ‘특히’ 자신들의 문화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수준 높은 불교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열성을 다 했다.
승조스님도 ‘유마경’읽고 불교에 귀의
‘자신(불교)’을 중국인들의 마음에 더 잘 맞게 만든 불교(인)의 적응력 또한 불교를 확산시킨 원동력 중 하나였다. 중국 불교인들이 유교의 핵심 덕목의 하나인 ‘효(孝)’를 지지한 것이 대표적이다. 불교가 유교에 적응하고자 한 이런 저런 노력 덕분에 〈유마경〉의 주인공 유마힐이 - 진리에 통달하고, 자기수양을 갖추며, 모든 법규를 잘 지키며, 항상 스스로를 제어하고 욕망을 누를 수 있는 부유한 귀족이라는 - 유교의 이상적인 군자로 여겨질 수 있었다. 결국 유마힐 같은 삶의 방식은 학식 있는 중국의 학자, 사대부들의 모범이 됐고, “뛰어난 학자였던 승조(僧肇)스님(374~414)이 〈유마경〉을 읽고 불교에 귀의”한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중국인들이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불교는 효, 충, 중용, 자기수양 같은 유교적 덕목을 지지하고 거기에 적응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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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섬서성역사박물관에서 만난 중국인 연인. 물어보니 “불교를 믿는다”고 대답했다. |
이렇게 기반을 다진 불교는, 수나라가 완성한 통일의 기초 위에 성립된 당(618~907)나라 시절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미 중국 전역에 퍼져 있었기에 불교는 당대에 들어와 제왕의 후원 아래 미증유의 성장을 이룩했다. 왕족 귀족 대부호 평민 등 모든 사회계급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사회적 지지 위에서, ‘인도적 불교’는 완전히 ‘중국적 불교’로 탈바꿈했고, 가장 중국적 불교인 천태종, 화엄종, 선종 등이 태동해 불교계를 이끌어갔고, 아울러 ‘종파(宗派)불교 시대’가 태동됐던 것이다.
당나라 시절 극성기를 경험한 불교는, 미국의 불교학자 아서 라이트(1913~1976)가 〈중국역사와 불교〉(Buddhism in chinese history)에서 말한 것처럼 ‘동화의 시대(900~1900)’를 거치며, 중국에 유, 무형의 자신을 남긴 채 오늘에 이르렀다. 근현대의 사상적 혼란기에 중국 근대 지식인들(강유위 양계초 담사동 등)에게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던 불교가 앞으로 어떤 나래를 펼칠까를 대안탑에서 마지막으로 생각한 다음, 탑에서 내려와 또 다른 천년고도 낙양(洛陽)으로 출발했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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