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지게 / 정성수
나팔꽃, 논냉이, 개별꽃, 자운영, 벚꽃 등 사월의 꽃이 떨어지면서 오월의 꽃이 핀다. 영산홍, 클로버, 씀바귀, 탱자나무꽃, 아카시아, 이팝나무꽃, 꽃과 꽃들이 앞을 다투어 오월이 왔다고 아우성이다. 오월의 하늘은 맑고 사람들은 산뜻하다. 무논에는 개구리 가족이 네 활개를 저으며 꽈리를 불어대는 것을 보니 이래서 오월은 가정의 달인가 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시골집을 찾아가는 걸음이 뜸해졌다.
그것은 어머니가 없는 집은 이미 집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어머니가 계시지 않은 집은 세상 밖으로 나오는 통로였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조차 계시지 않는 집은 더욱 썰렁하다. 헛청에 무릎을 꿇고 있는 저 지게. 주인 잃은 지게가 봄이 온 지가 벌써 언제인데 나를 여기에 처박아 두기만 할 것이냐고 입이 한 자나 나와 있다. 어서 논밭에 나가 봐야 한다고 아버지는 어디 출타라도 하신 것이냐며 불만스럽다.
전라도 함열 땅에서 대대로 살아온 아버지의 지게는 동발과 동발 사이가 넓고 지게 자체를 지는 사람 쪽으로 구부려 놓았다는 점에서 다른 평야 지대의 지게와 구분이 된다. 가지가 조금 위로 뻗은 자연목 두 개를 위는 좁고 아래는 벌어지도록 세우고 사이사이에 세장을 끼웠다. 그리고는 탕개로 죄어서 고정시키고 아래로 멜빵을 걸어 어깨에 멘다.
등이 닿는 부분에는 짚으로 두툼하게 짠 등태를 달아놓았다. 이 지게를 세울 때는 끝이 가위다리처럼 벌어진 작대기를 세장에 걸어 땅바닥을 버틴다. 지게는 두 개의 목발과 작대기의 삼각 구조로써 짐을 안정되게 유지할 수 있다. 지게가 운반에 편리한 이유는 온몸으로 짐의 하중을 분산하기 때문이다. 짚으로 된 탕개는 등을 편하게 해준다.
지게의 백미는 역시 작대기에 있다, 작대기는 지게를 받치는 역할과 동시에 무거운 짐을 실었을 때 작대기에 힘을 주고 딛고 일어서는 지팡이 역할을 한다. 또한 작대기는 부피가 큰 짐을 지고 갈 때 몸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뿐이 아니다. 고된 하룻길을 돌아오는 지게가 빈 지게일 때 지팡이는 지겟다리를 두드리며 콧노래를 불러내기도 한다. 그 콧노래는 때로는 한이었다가 즐거움이었다가 눈물이 되기도 한다. 그런 지게는 자기 몸에 맞아야 힘을 쓸 수가 있기 때문에 손수 만들어야 한다고 하시던 아버지. 이런 지게의 주인인 아버지는 치매 병원에서 기약 없는 날을 보내고 있다.
굵은 다리와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지셨던 아버지. 가는 세월을 이길 장사가 없다고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징역살이 아닌 징역살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주인의 처지를 모르는 지게는 겨울을 견디어 냈으니 어김없이 아버지의 등에 업혀 논밭으로 종횡무진 일거리를 찾아 나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가 되어 일을 한다는 것은 지게에게는 즐거움이었고 보람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어느 날인가 밭에 나가 장다리를 한 바지게 지고 오는 아버지의 지게 뒤를 배추흰나비가 따라오고 있었다. 배추흰나비는 아버지가 발자국을 띨 때마다 출렁이는 장다리꽃을 따라 나풀나풀 춤을 추며 우리 집 안마당까지 따라오는 것이었다. 지게가 정미소에서 쌀가마니를 지고 오는 햇볕 따가운 가을날에는 이밥을 배부르게 먹기도 했고 어머니가 긁어주는 누룽지를 한 볼탱이 물고 골목길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아궁이에 불을 지필 나무가 없으면 아버지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가시고는 했는데 어느 때는 청솔가지 한 바지게를 지고 와서는 추우면 안 된다고 우리 형제들이 기거하는 방에 매운 연기에 눈을 비비며 군불을 때주시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지게는 우리 집 호구를 책임지기도 했고 자식 육 남매를 가르치는 “돈 나와라, 뚝딱!”이라는 도깨비 방망이기도 했다. 어릴 적 아버지는 지게 뒤에 태워 주시곤 하셨는데 그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지게 위에서 아버지의 뒤를 따라 오는 어머니에게 손을 흔들며 좋아했다.
지금 내가 아버지가 되어서 생각하니 그때의 아버지 마음을 조금은 헤아릴 것 같다. 그런 아버지의 지게가 이 봄, 헛청에서 주인을 잃은 채 논밭으로 나가자고, 나가게 해달라고 보채는 것을 본다. 아버지의 삶을 짓눌렀을 멜빵에, 아버지의 등을 휘게 했을 지게의 등태에 내 손을 얹어본다. 아버지의 힘들었을 시간과 보람이 한꺼번에 전해오기도 한다. 오랜 시간 주인을 기다리던 작대기는 지쳐 어디론가 사라졌다. 장다리꽃을 얹혀 오던 바지게도 다 헤졌다. 멜빵도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이 낡아 있다. 이 지게는 아버지의 굴레이자 멍에이기도 하였다. 몸으로 때워야 했던 아버지의 젊은 시절은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시간보다 지게에 등을 대는 시간이 더 많았다.
지게는 아버지의 분신이었다. 아버지의 지게는 늘 어깨와 등에 걸쳐 전신의 힘으로 무거운 짐을 들 수 있도록 허리에 무게 중심을 잡고 있었다. 일어설 수만 있다면 아버지의 몸무게 두 배 이상까지도 너끈했다. 그래서 왼쪽 지겟다리는 무게 중심을 잡느라 유난히도 까맣고 번들거렸다. 그것은 짐을 지고 일어설 때 왼손으로 지겟다리를 잡고 균형을 잡으며 작대기를 오른손에 잡고 순간 힘을 주면 지게는 일어서기 때문이다. 등태 역시 늘 반들거렸다.
오늘날 아버지가 치매 병원에 계시는 것도 다 젊은 나이부터 이골이 난 지게질 때문에 몸의 진기가 빠진 탓이다. 아버지의 지게는 나뭇단을 지고 산비탈을 뒤뚱뒤뚱 내려오기도 했고 지겟발이 볏단에 걸려 논바닥에 나뒹굴기도 했다. 아버지는 동산이 밝아지기도 전에 바쁘게 자리를 떨고 일어나서 야산이나 논둑에 나가 풀을 한 짐 해서 안개 낀 식전 길을 돌아오는 것이었다.
풀단이 퇴비가 되면 맨 손으로 논에 뿌리거나 밭둑에 쌓아 놓고 흐뭇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그리고 너희만은 애비를 닮지 말고 공부해야 사람 구실을 한다고 말을 하곤 했다. 자식들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사방팔방 헤집고 다녔던 아버지의 지게. 이제 진액까지 다 빠진 채 헛청에 쓰러져 썩어간다. 누가 저 자욱한 먼지를 털어 일으켜 줄 것인가!
오늘, 나는 아버지의 지게를 보면서 세상 모든 아버지들의 지게는 다 같다고 생각한다. 해질 무렵 아버지가 헛청에 지게를 내려놓고 왜 내게 등물을 시켰는지 내 이름을 한 번씩 불러보셨는지 나이 사십이 넘어서 알게 되었다. 적막하디 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멜빵 자국이며 등짝의 시커먼 굳은살을 본 것은 아버지를 치매 병원에서 목욕을 시켜 드릴 때 처음이었다.
그 자국을 바라보면서 언젠가 아버지의 “농사꾼은 죽으면 어깨와 등부터 썩는다.”는 말이 콧등에 걸려 시큰했다. 짐을 지고 길을 가면 장딴지에 푸른 핏줄이 꿈틀거리는 농사꾼, 그게 우리 아버지였다. 늦게라도 철들은 사람들은 허전하고 할 일 없는 날은 아버지의 지게를 져 볼 일이다. 늙고 병든 우리들의 아버지가 이제 고려장을 시켜달라고 지게처럼 보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