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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시식(觀音施食)05
원문
고혼청(孤魂請)
일심봉청(一心奉請)
실상이명(實相離名) 법신무적(法身無跡)
종연은현(從緣隱現)
약경상지유무(若鏡像之有無)
수업승침(隨業昇沈)
정륜지고하(如井輪之高下)
묘변막측(妙變莫測) 환래하난(幻來何難)
원아금차(願我今此)
지의성심(至意誠心) 생전효행(生前孝行)
사후(死後) (49일(日)) 지신(之辰)
천혼재자(薦魂齋者)
○거주(居住)
행효자(行孝子) ○○복위(伏爲)
소천망(所薦亡) (엄부(嚴父)) ○영가(靈駕)
유원(唯願)
승불위광(承佛威光)
내예향단(來詣香壇) 수첨법공(受霑法供)
일심봉청(一心奉請)
약인욕식불경계(若人欲識佛境界)
당정기의여허공(當情其意如虛空)
원리망상급제취(遠離妄想及諸趣)
영심소향개무애(令心所向皆無碍)
원아금차(願我今此)
지의성심(至意誠心) 생전효행(生前孝行)
사후(死後) (49일(日)) 지신(之辰)
천혼재자(薦魂齋者)
○거주(居住) 행효자(行孝子) ○복위(伏爲)
소천망(所薦亡) (엄부(嚴父)) ○영가(靈駕)
유원(唯願) 승불위광(承佛威光)
내예향단(來詣香壇) 수첨법공(受霑法供)
일심봉청(一心奉請)
인연취산(因緣聚散)
금고여연(今古如然)
허철광대영통(虛徹廣大靈通)
왕래자재무애(往來自在無碍)
원아금차(願我今此)
지의성심(至意誠心) 생전효행(生前孝行)
사후(死後) (49일(日)) 지신(之辰)
천혼재자(薦魂齋者)
○거주(居住) 행효자(行孝子) ○복위(伏爲)
소천망(所薦亡) (엄부(嚴父)) ○영가(靈駕)
영가위주(靈駕爲主) 복(伏) 위기부(爲記付)
상세선망(上世先亡) 사존부모(師尊父母)
다생사장(多生師長) 누대종친(累代宗親)
제형숙백(弟兄叔伯) 자매질손(姉妹姪孫)
원근친척(遠近親戚) 일체애고혼(一切哀孤魂)
제불자등(諸佛子等) 각열위영가(各列位靈駕)
유원(唯願) 승불위광(承佛威光)
내예향단(來詣香壇) 수첨법공(受霑法供)
향연청(香煙請) 3
가영(歌詠)
제령한진치신망(諸靈限盡致身亡)
석화광음몽일장(石火光陰夢一場)
삼혼묘묘귀하처(三魂渺渺歸何處)
칠백망망거원향(七魄茫茫去遠鄕)
안좌게(安座偈)
제불자등각열위영가(諸佛子等各列位靈駕)
상래(上來) 승불섭수(承佛攝受)
장법가지(仗法加持)
기무수계이임연(旣無囚繫以臨筵)
원획소요이취좌(願獲消遙而就座)
하유안좌지게(下有安座之偈)
대중수언후화(大衆隨言後和)
아금의교설화연(我今依敎設華筵)
종종진수열좌전(種種珍羞列座前)
대소의위차례좌(大小依位次第坐)
전심제청연금언(專心諦聽演金言)
수위안좌진언(受位安座眞言)
「옴 마니 군다리 훔 훔 사바하」 3
백초임중일미신(百草林中一味新)
조주상권기천인(趙州常勸幾千人)
팽장석정강심수(烹將石鼎江心水)
원사망령헐고륜(願使亡靈歇苦輪)
원사고혼헐고륜(願使孤魂歇苦輪)
원사제령헐고륜(願使諸靈歇苦輪)
ㅡㅡ역 문>>ㅡㅡㅡㅡ
참다운 모습은 이름을 떠나 있고
법신은 자취가 없건만
인연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거울 속의 모양이 있다가 없어짐과 같고
(업)연을 따라 오르고 내리는 것이
마치 우물 속을 두레박이 오르내림과 같아
묘한 변화 헤아릴 수 없으니,
환과 같은 옴이 어찌 어렵겠습니까'
원하건대,
지금 이제 지극한 정성으로
살아생전 효를 다하던 ○가
(돌아가신 아버지) ○영가의 49일재를 맞이하여
천도하고자
(돌아가신 아버지) ○영가를 청하오니,
바라옵나니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지하여
이 향단에 오시어서 법공양을 받으소서.
인연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은
옛과 지금이 모두 같아
텅비어 맑고 넓고 커서 신령스레 통하여서
가고 옴이 자유로와 걸림이 없습니다.
원하건대,
지금 이제 지극한 정성으로
영혼을 천도하려는 재자 ○가 엎드려서
(돌아가신 아버지) ○영가의
49일재를 맞아 망부 ○영가를 청하오니,
오직 원컨대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지하여
이 향단에 오시어서 법공양을 받으소서.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경계(경지)를 알고자 하면
마땅히
그 마음을 허공과 같이 하여
망령된 생각과 모든 헐떡거림을 멀리 떠나보내고
그 마음으로 하여금
일체의 걸림이 없게 하라 하였습니다.
원하건대 지금
이제 지극한 정성으로
살아계실 때 효행을 다하던
○거주 ○가
(돌아가신 아버지) ○영가의 49일재를 맞아
망부 ○영가와
영가의(를 복위나 기부로 하여 먼저 가신)
부모나 스승되는 모든 영가,
여러 대에 걸친 종친들과
백부나 숙부가 되는 영가,
형제 자매 조카가 되는 영가,
멀고 가까운 모든 친척되는
슬프고 외로운 영가들과
모든 인연 있는 영가들을 청하오니,
오직 원컨대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지하여
이 향단에 오시어서 법공양을 받으소서.
향을 사러 청합니다 (3번)
(노래로 맞이함)
모든 영가시여,
목숨(기한)이 다하여 몸을 잃었으니
돌불같이 빠른 세월 속의 한바탕 꿈이로다
삼혼은 고요히 어디로 돌아가셨으며
칠백은 아득히 먼 곳으로 가버렸네
(안좌게)
모든 불자등과 각 여러 영가시여,
위에서 이미 부처님의 섭수하심을 받아
법의 가지에 의지하여
이미 죄에 얽매임이 없어져서
법연에 임하였으니
원컨대
한가로움을 얻어 법연에 나가소서.
아래에 편안하게 앉는 노래가 있으니
대중은 따라서 합창하시오.
내가 지금 가르침에 의거하여 화연을 베풀고
갖가지 진수를 자리 앞에 마련하였습니다
크고 작은 영가시여, 차례대로 앉으셔서
일심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자세히 들으소서
지위따라 편안하게 앉는 참말씀
「옴 마니 군다리 훔 훔 사바하」(3번)
(차를 드리는 노래)
백 가지 초목 중 새로운 한 맛을
조주스님은
몇 천 번이나 권했던가
돌솥에 강심수 고이 달였사오니
망령이여,
드시고서 윤회에서 벗어나소서
고혼이여,
드시고서 윤회에서 벗어나소서
모든 영가여,
드시고서 윤회에서 벗어나소서
ㅡ진 행 >ㅡㅡㅡ
법주 요령을 세 번 울리고 나서
앉은 채로 합장하고 반배하면서
'일심봉청'을 하면서
요령을 잡고 진행하다가
'유원'에서 요령을 한 번 채고 내리면 된다.
이와 같이 세 번을 하고 나면
바라지는 목탁이나 태징을 내리고
향연청을 세 번 외우고 가영을 외우면 된다.
다음에 법주 요령을 세 번 울려
위에서 청한 영가들이 모두 자리에 앉도록
착어를 하고 난 후
바라지가 받아서 안좌게
'아금의교설화연~'을
외우면서 목탁을 내린다.
다시 법주
요령을 세 번 울리고
'수위안좌진언'을 하고
바라지는 다게를 외우면 된다.
다게를 외울 때는
재자들에게 삼배를 하도록 한다.
ㅡ해 설>ㅡㅡㅡ
관음시식의 고혼청은
천도에 있어서
처음 대령에서의 고혼청과 같다.
다만 청사의 내용과 법문을
바꾸어서 할 수 있겠으나
여기에서는 삼청을 진행하는 청사의 순서만
바뀌었을 뿐 내용은 동일하다.
그동안 여러 번의 의식절차를 통하여
영가를 청하는 내용을 접하게 되었는데,
이제 다시 영가를 청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천도재를 진행하는 순서상
처음에 대령을 할 때에
고혼을 청하는 의식을 집전하였으면
그만일텐데 그 뒤에도
여러 번의 영가를 청하는 의식 절차가 등장하고
똑같은 고혼청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왜 이렇게 번잡하게 되었을까'
하나는
대령과 관음시식을 분리하여
따로 진행하는 경우에는
각각의 고혼에 대한 청사를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또 하나는
인간의 심성이 자주 변하고 어지럽듯이
영가의 마음도 다를 바 없으므로
의식을 진행하는 동안
혹여 영가가 다른 데
정신을 팔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다.
천도하려는 모든 영가가
빠짐없이 참석하도록 하기 위하여
여러 번에 걸쳐
간절한 마음으로 청사를 진행하는 것이다.
관음시식의 고혼청에서
청사를 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청사를 진행하는 법주의 마음이
법계의 실상
- 참다운 모습을 관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법주가 올바로 법계의 실상을 관한다면
바로 그 자리가
극락정토로 변화하게 된다.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손가락으로 대지를 툭 건드리는 순간,
우주법계가 화장장엄세계로 변하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영가를 불러서 천도하는 데 첩경은
영가로 하여금
법계의 참다운 모습을 깨닫도록 하여,
그 법계에서 노닐도록 하는 데 있다.
대령강의를 진행할 때는
청사의 자세한 내용은
관(觀)을 통해서 증득해야 할
선구(禪句)이기 때문에 해설을 하지 않았으나,
여기서는 대강을 언급하고자 한다.
법계의 참다운 모습은 이름을 떠나 있고
법신은 자취가 없어
업연따라 일어났다 없어지는 것이
마치 우물 속의 두레박이
오르내림과 같다고 하였다.
법계의 진정한 모습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직관을 통해서
법계의 모습을 관해야만 그 모양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어떤
고정된 실체를 갖고서
왔다갔다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기가 지은 업연을 따라
과보를 받아 태어나서
어느 정도 생을 누리다가,
다시 업연이 다하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 업을 따라 윤회하는 모양은
마치 깊은 우물에서 물을 푸기 위한
두레박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모습과 같으며,
천상'인간'아수라'축생'아귀'지옥의 6도에
업을 따라 오르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오르내리는 변화는
헤아리기가 어렵지만,
하나로 통해버린 실상의 세계(법계)에서는
오고 가는 것이 실체가 있지 않아
환 - 그림자 같다.
그러므로 먼 곳에 있다 하더라도
못오실 바가 없으니,
오늘 49재(천도재)를 맞아
아드님이나 따님
또는 부인이나 남편, 손자 등이
간절한 마음으로 영가를 청하오니,
부디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지하여
천도재를 올리는 이 자리
- 법석에 와서 법공양을 받아 해탈하거나
극락세계에 왕생하시라는 말이다.
실상에서 올바로 보면
삶과 죽음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어
인연따라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태어남이라는 것도 죽음이라는 것도 없다.
이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으므로
각자 법계의 모양을
잘 관해 보아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재청에서 보면
인연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은,
옛과 지금 다르지 않고
우주의 본체는 텅텅 비어
넓고 크고 신령스레 통하여서
오고 감에 자유로와
아무런 걸림이 없다고 하였다.
인연이 모였다 흩어진다는 것은
태어남과 죽음을 말한다.
즉 인연이 주어지면 모양새가 나타난다.
이것을 태어났다고 하고,
그 인연이 다하면 모양새가 허물어게 된다.
이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그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혀 다르지 않은 진리라는 말이다.
그런데 법계의 모양은
텅비었고, 아주 맑고, 넓고 클 뿐만 아니라
신령스레 통하였다 하였다.
이것은 법계의 모양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육신의 눈으로 보면
서울과 부산은 서로 떨어져 있고,
한국과 미국은 따로 떨어져 있으며,
너와 나는 서로 떨어져 있는 모양으로 보인다.
하지만 법계에서는
본래 한 세계이므로 여기에 계합만 하면,
곧 하나임을 알게 되므로
서로 통하여 있다는 말이다.
오늘 영가를 청하건대
부처님의 위신력을 입는다면
어디 계시더라도 즉시에 오실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곧 오시라는 말이다.
삼청에서 보면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경지를 알고자 하면,
그 마음을 맑히기를 허공과 같이 하여
망령된 생각과
모든 헐떡거림(집착)을 멀리 떠나보내고
그 마음으로 하여금
일체의 걸림이 없게 하라 하였다.
부처님은 진리를 올바로 깨달아
깨달은 바대로, 즉
진리 그대로 사시는 분이다.
부처님의 경지를 알고자 한다면
곧 진리의 세계,
참다운 법계에 계합해야 한다.
법계에 계합하려면
일체의 망령된 생각과 헐떡거림,
즉 번뇌를 없애야만 한다.
그리고
법계의 참모습을
배반하고 이루어진
번뇌의 업과 과보로 이루어진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이 없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마음에 일체의 걸림이 없게 된다.
걸림이라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 무엇인가
건더기를 남기는 것을 말한다.
탐욕심을 가진 자,
성냄을 가진 자,
어리석음을 가진 자는
모든 것에 걸림을 갖게 마련이다.
내가 남보다 무엇을 하더라도
더해야 하는데,
더 잘나야 하는데,
더 많이 가져야 하는데 등등
걸리는 것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모든 할 일을 다 마친 사람을
무위진인(無爲眞人)이라고 하였다.
즉 무슨 일을 하더라도
탐진치 삼독을 떠난 상태에서
밥먹고 말하고 똥누고 가고 오는 사람을 말한다.
욕심을 가지지 않은 자는
집착하지 않아 성을 낼 필요가 없고,
성을 내지 않은 자는 헐떡거리지 않으며,
지혜있는 자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래야만
부처님의 경지를 알 수 있는
법계의 모양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
모든 영가들은 허공과 같은 마음으로
모두 이 법연에 내려와서
법공양을 받으라는 말이다.
여기서는
향화청이 아니고 향연청이다.
향을 사르며 청한다는 말이니
다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가영은
대령에서 자세히 해설하였으므로 생략한다.
안좌게는 편안하게 앉는 노래이다.
위에서 이미 부처님의 섭수하심을 받아
법의 가지에 의지하여
이미 죄의 얽매임이 없어져서 법연에 임하였으니,
원컨대
한가로움을 얻어
법연에 나가소서 라고 하였다.
대령과 관욕을 통하여
온갖 번뇌에 물든
몸과 마음을 정화시킨 영가들에게
다시 법의 가피에 의지하도록
법문을 계속 일러주어
번뇌를 끊게 하는 것이 천도의식의 기본이다.
그러므로
관음시식에 있어서
고혼을 세 번 청하는 데 있어서도
그냥 청하는 것이 아니다.
법계의 참된 모양을 보여주고
그 법계의 움직이는 모양을 보여주고,
법계를 배반하고
생사계에 떨어진 영가의 실상을 알려주어
그 생사의 세계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법문으로 일관된 것이 고혼청의 내용이다.
그렇게
법계를 관하고
생사의 세계를 벗어나
열반의 세계에서
한가롭게 노닐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49재는
단순하게 영가에게 음식을 주는 것이 아니다.
속적으로 법문을 일러주어
영가로 하여금
진여법계의 실상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
그 참다운 목적이다.
그러므로 영가들에게
순서대로 편안하게 앉아
부처님 말씀을 자세하게 들으라는 것이다.
이렇게
수위안좌진언을 통하여
편안하게 앉은 영가들에게 다시
- 조주 스님이
법을 물으러 오는 모든 이들에게 차를 권하였듯이
- 차를 대접하여
목마른 갈증을 해소시켜주고,
그 다음에 진수를 들어
일체의 허기를 면하고
윤회하는 마음을 씻어내도록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