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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해같이 변화되셨습니다. 더 이상 희어질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모습이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해 모진 핍박과 고난을 받고 죽으셨다고 부활하실 모습이었습니다. 함께 산에 올랐던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산에서 내려올 때까지 빛나셨습니다. 무리들은 여전히 빛을 발하시던 예수 그리스도께 압도되었습니다. 크게 놀랐습니다. 그때, 산 아래에 남아 있던 제자들은 복음의 권위를 무시하고 거부하는 서기관들이 빗발치듯 쏟아놓는 비난과 야유 앞에서 지극히 무기력했습니다. 변명하기에 급급했습니다.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사실 말다툼은 적극적인 측면에서든 소극적인 측면에서든 헛된 일이 분명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이 아니라 오직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곳에 모여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제자들을 추궁하듯 쏘아붙이면서 말다툼을 벌이던 서기관들은 대답할 어떤 책임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대답을 들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순간, 들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과 서기관들의 말다툼을 흥미진지하게 지켜보고 있었던 무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답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대단히 난감難堪해졌습니다. 말다툼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영적으로 얼마나 무기력하고 무능력한지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스스로 폭로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역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적靜寂이 이어졌습니다. 정적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정적을 깨뜨리고 나섰습니다. 그는 제자들과 서기관들이 의미가 전혀 없는 말다툼을 지켜보는 동안 너무 답답했습니다.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무리들을 헤집고 앞으로 달려 나왔습니다. 자초지종을 낱낱이 설명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 수시로 귀신에게 사로잡혔습니다. 그때마다 바닥에 고꾸라졌습니다. 입에 거품을 물었습니다. 괴성을 질렀습니다. 이를 갈았습니다. 몸은 막대기처럼 딱딱하게 굳었습니다. 심한 경련과 뒤틀림이 이어졌습니다. 간질병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어디에서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삶은 절망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갖 병을 고치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신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당장 찾아 나섰습니다.
마침,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리를 비우고 없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제발 아들을 고쳐달라고 부탁했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아들의 질병을 고쳐주기는커녕 오히려 서기관들과 원치 않았던 말다툼이나 벌이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귀신을 쫓아내며 복음을 전한 적이 있었던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탄식하셨습니다. 책망하셨습니다. 과거의 성공적인 신앙 행적들이 자동으로 오늘의 저와 여러분을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주지는 못합니다. 믿음은 관계입니다. 늘 자라야합니다. 힘겨운 환경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도록 다져져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처지를 매우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아이를 당신 앞으로 데려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순간, 귀신은 자신을 완전히 정복하고 추방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았습니다. 아이로 하여금 발작을 일으키게 만들었습니다. 아이가 입에 거품을 물게 만들었습니다. 바닥을 기어 다니게 만들었습니다. 아이가 고통을 당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실체를 구체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는 내내 줄곧 이어졌다고 대답했습니다.
귀신이 아이를 죽이려고 불 속이나 강물에 뛰어들도록 만든 것이 몇 번인지 모를 정도로 많다는 설명까지 덧붙였습니다. 혹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던 소문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어떤 일이든지 해서 고쳐달라고 외쳤습니다. 귀신들려 고생하는 아이와 아이 때문에 하루하루 절망적인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제발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쳤습니다. 제발 도와달라고 외쳤습니다. 이번만큼 제발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외쳤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쉬지 않고 반복해서 외쳤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간절했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고해와 같은 힘겨운 인생을 사는 동안 죽을 만큼 힘들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상황을 만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쉬지 않고 반복해서 쏟아놓는 그를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막9:23a)고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믿음이 결핍缺乏된 상태에서 병 고침받기만을 바라는 초라한 영적인 상태를 예리하게 꼬집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들을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당신의 거룩한 영광을 나타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계속해서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막9:23b)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믿음에 병 고침의 여부가 달려 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 하나만 가지고 있다면 충분히 병 고침 받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믿음 자체가 당신 안에 충만한 능력을 나타나게 만드는 능동적인 힘이라는 의미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귀신에게 완전히 사로잡힌 상태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아이의 경우에 한해서는 그렇다는 의미입니다. 같은 경우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누구에게나 다 똑같이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현실 속에서는 고침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는 언제나 밝게 웃었습니다. 받은 은혜에 대한 벅찬 감격을 고백했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면에서는 물론 구제와 선교에도 남다른 열심과 헌신을 나타냈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암이 발병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기도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 제물로 내놓으실 정도로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고쳐주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소식을 듣고 위로하기 위해서 찾아왔던 사람들에게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가까운 지인들에게는 자신의 상태를 나누며 중보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자신 역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교회를 들러서 기도했습니다. 현실은 그의 믿음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병세는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었습니다. 급기야 생활하는 자체가 힘들어졌습니다. 입원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이르렀습니다. 무균실에 격리 수용되었습니다. 마음이 약해졌습니다. 당시 중국에 머물고 있었던 저와 마지막으로 통화하던 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외쳤습니다.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저에게 정말로 살고 싶다며 애원했습니다.
말끝마다 “하나님께서 저를 아주 데려가려는 것은 아니겠지요?”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믿음을 아주 내려놓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당황해 하며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저와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삼십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받아들이기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누구는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원하게 해결해 주십니다. 누구는 기도하고 또 기도해도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는 것 같은 도무지 바라지 않는 안타까운 현실과 맞닥뜨립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실 정도로 똑같이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의 기도에 각기 다르게 반응하시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솔직하게 저는 모르겠습니다. 굳이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 설명이 정답이라고 확신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각자를 위한 거룩한 뜻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당장 숨이 끊어져 가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공허하고 무책임하며 마치 마약 같은 말로 희망 고문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죄책감을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를, 귀신들려서 고생하는 아들 때문에 절망하고 있었던 아버지에게 요구하셨던 믿음을, 바라는 모든 일을 무조건 다 이루어낼 수 있는 절대적인 근거로 제시합니다. 아니 절대로 식언食言하는 법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철썩 같이 약속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주실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고 장담하듯 가르칩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생각과 기대에 맞아 떨어지는 그 가르침이 옳은지 그른지의 여부를 따져보지도 않습니다. 덮어놓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입니다.
목구멍까지 차 올라와 있는 탐욕을 채우는 여러 가지 많은 수단들 가운데 하나 정도로 받아들입니다. 믿는다기보다는 맹신盲信합니다. 굳이 탐욕이라고 평가절하平價切下할 필요까지는 없다손 치더라도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의 생각과 판단과 계획과 욕구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었다고 단정을 지어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대로 이루어주신 것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습니다. 혹 바라는 그대로 다 이루어졌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라고 한다면 죽음이라도 기꺼이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죽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서 모은 자신의 소유 전부를 내놓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온갖 희생을 기꺼이 감수甘受합니다. 어떤 사람은 생전보지도 못한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정든 고향을 떠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믿음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믿음을 아주 내려놓지는 않더라도 흔들리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절대 다수입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절대 다수에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믿음은 원하는 모든 것이 튀어나오게 만드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램프의 요정도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수단 정도가 아니라 저와 여러분이 추구해야할 궁극적인 목적 되시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고백입니다. 또 믿음은 저와 여러분이 갖겠다고 마음에 결심하거나, 믿는다고 고백한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안에서 값없이 선물로 허락해 주실 때 비로소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은혜를 받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당당하게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이유 역시 하나님께서 은혜 안에서 값없이 선물로 허락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자랑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자리에 앉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의 믿음의 여부나 크고 작음을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정죄는 더 더욱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경륜經綸을 바탕으로 믿음을 허락해 주기도 하시고, 그렇지 않기도 하시는 하나님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어떤 환경과 상황과 조건 속에 던져진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완벽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세상에 재림하실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리 많지는 않지만 평소와는 전혀 다른 완벽한 믿음으로 무장하는,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무장하게 되는 예외의 경우들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당신의 방법으로 역사해 주실 때입니다. 이래저래 믿어진다고 자랑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들이 귀신에 쫓아내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곧 믿음으로 무장할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호하게 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기서 기도는 초자연적인 결과를 불어오는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리킵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기도προσευχῇ”는 “향하여”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προσ와 “원하다, 머물다, 거하다” 등의 뜻을 가진 동사εύχομαι의 합성어입니다. “하나님 안에 머물다,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다, (마음과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다, 하나님께 고정하다.” 등으로 직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할 때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은 사람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절대 주권과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탁월한 섭리로 지으신 세계와 자신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 안에 머뭅니다. 하나님의 뜻을 추구합니다. 자신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자신의 뜻은 기꺼이 내려놓습니다. 자신의 뜻으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뜻이 완벽하게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없고, “하나님”만 있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15:4a)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 성취됩니다. 이때 비로소 은혜 안에서 믿음이 값없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주어진 환경과 상황과 조건이 제아무리 어렵고 힘들지라도 결단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흠향하실 수 있는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기름지고, 윤택하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을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두드러진 특징이었습니다. 그들David Johnson & Jeff Van Vonderen은 함께 쓴 “영적 남용의 부작용”이라는 책을 통해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완벽주의자가 되라고 강요하시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은혜를 완벽주의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조금도 흠을 찾을 수 없는 완벽한 믿음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아니 여전히 죄에 취약한 몸을 입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완벽한 믿음을 가질 있는 능력 자체가 없습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하나님 안에 거하기 위해서 몸부림칠 때 비로소 값없이 받을 수 있는, 분에 넘치는, 공로가 전혀 없는, 가진 모든 것을 조금도 남기지 않고 아낌없이 다 투자해도 절대로 갚을 수 없는 엄청난 호의 곧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믿음을 값없이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고해와 같은 힘겨운 인생을 바로 그 믿음을 힘입어 살아낼 수 있습니다.
그John Wesley는 감리교Methodism의 창시자입니다. 18세기 영국 복음주의 운동의 핵심 인물입니다. 기독교 신앙과 실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때때로 우수한 자질과 양심이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하곤 한다. 두려워해야할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두려워한다. 잘못한 일이 전혀 없음에도 스스로 책망한다.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죄로 규정하지 않은 일에 대한 죄책감을 느낀다. 성경에서 요구하지 않는 일까지도 의무감을 느낀다. 이것은...일종의 죄악이다. 이런 현상은 기도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 건강한 마음 또한 회복할 수 있다.”라고 조언했습니다.
죽었다가 깨어난다 할지라도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죄악으로부터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 기도하라고 조언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은혜 안에서 값없이 선물로 주어지는 믿음으로 무장하는 복된 삶, 아무리 힘든 환경에서도 결단코 흔들리지 않는 복된 삶, 기꺼이 살아내는 곧 감당해내는 복된 삶, 무엇보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는 하나님의 역사로 가득한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