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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열왕 1-11장 | 솔로몬의 통치 역사 |
1열왕 12장 – 2열왕 17장 | 분열된 왕국의 병행 역사 |
2열왕 18-25장 | 기원전 587년에 멸망할 때까지의 남왕국 역사 |
사건의 연대
열왕기 상권과 하권에 기록된 사건들은 대략 다윗 임금의 마지막 해인 기원전 970년부터 여호야킨 임금이 바빌론 감옥에서 풀려난 기원전 561년까지의 역사를 담고 있다. 이 시기에 이탈리아에서는 에트루리아인들이 활동했고 로마가 건국되었으며, 아프리카에서는 카르타고가 건국되었다. 아시리아 제국이 등장했으나 이어서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론 제국에 의해 정복당했다. 이집트 21왕조부터 26왕조까지 해당하는 시기다. 이 시기는 침략과 정복이 되풀이 되는 기간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문서보관소에서 나온 점토판과 함께 중동 곳곳에서 발견되는 미문이나 비석은 열왕기 안에 묘사된 많은 전쟁과 정치적인 사건들을 파악하고 연대를 설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기원전 970 | 다윗의 죽음과 솔로몬의 계승 |
932 | 예로보암 1세 때 북쪽 지파들이 떨어져 나감 |
927 | 이집트 파라오 시삭 1세의 공격 |
888-871 | 오므리가 복왕국의 새 수도 사마리아 건설 |
874-852 | 엘리야의 활동 |
854 | 서쪽으로 진군하는 아시리아를 일시적으로 막은 카르카르 전쟁 |
852-793 | 엘리사의 활동 |
734-732 | 시로 에프라임 전쟁과 아시리아의 티글랏 필에세르 3세의 공격 |
724-722 | 살만에세르 5세와 사르곤 2세의 지휘아래 아시라아가 포위 공격하여 사마리아 파괴 |
715-686 | 728년에 공동 통치자 · 상속자로 임명된 히즈키야가 29년동안 통치 |
701 | 아시리아 산헤립의 예루살렘 공격과 포위 |
640-609 | 요시야가 31년 동안 통치 |
622 | 성전의 율법서 발견과 종교개혁 |
612 | 바빌론 임금 나보폴라사르가 니네베 함락 |
609-598 | 여호야킴이 11년 동안 통치 |
605 | 카르크미스 전쟁, 바빌론이 이집트-아시라 동맹에 승리 |
598 |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 함락, 첫 번째 유배 |
598-587 | 치드키야가 11년 동안 통치 |
587 | 네부카드네자르의 예루살렘 포위와 파괴, 솔로몬 성전 파괴, 유다 백성 유배, 다윗 왕국의 종말 |
561 | 유배된 여호야킨이 감옥에서 석방됨 |
성경 문학의 출발 들여다보기
편집자들이 그들의 해설과 평가로 나중에 첨가된 내용들은 기원전 6세기 중반 무렵 열왕기가 최종적으로 편집되던 시기에 ‘모세법’또는 ‘모세의 율법서’가 존재했음을 언급한다.(1열왕 2,3; 2열왕 10,31; 14,6) 그러나 줄거리 사건을 제공하는 더 오래된 사료들은 기원전 622년경 요시야 임금 통치 기간에 ‘율법서’가 발견되기 전까지 그 책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는다.(2열왕 22,8-13) 그때까지 하느님의 인도는 예언자들의 구두 가르침을 통해 이루어졌다. 기원전 7세기에 일어난 이 사건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출발점이다.
편집 과정에서 첨가된 내용이 아니라면, 2열왕 23,21-23에서 파스카 축제를 요시야 통치(기원전 640-609)와 강조해서 연결하는 것은 이 시대에 이집트 탈출 전승이 크게 발전했음을 입증한다.(1열왕 6,1; 8,51.53; 2열왕 21,15 참조) 이 율법서의 배경이 무엇이든 그 율법서(아마도 신명기에 가까운 것)의 본문은 유배 이전에 존재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유배 이후에 유다인의 정체성을 재건하는 수단으로 율법에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을 설명하기 힘들다.(느헤 8-9장 참조)
솔로몬 이야기는 그가 지닌 지혜와 잠언 짓는 기술을 강조한다.(1열왕 5,9-12) 궁궐에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새로운 계층이 생겨난 것도 우리에게 잠언서로 알려진 책의 초기 발전을 촉발시켰을 것이다. 잠언은 훨씬 오래된 이집트 문학을 차용한 것이다. 솔로몬 시대에 시작되어 분열 왕국 시기를 거쳐 안정된 사회적 배경도 학자들이 현재의 창세기, 탈출기, 그리고 민수기 안에 얽혀 있다고 인정한 사료 전승(J와 E)을 발전시키면서 족장들과 이집트 탈출과 관련된 구두전승을 문서로 구성하게 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에 발전된 성전 전례라는 종교적 배경도 많은 시편을 최종적으로 구성하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의 예언서들도 이 기간에 생겨났을 것이다. 기원전 8세기부터 북왕국과 남왕국에서 예언자들이 등장했는데 그들의 설교는 사람들에 의해 기억되었다. 예언자들이 제자들이 스승의 구두 가르침을 기록했고 이 기록들이 수집되어 더 긴 ‘책들’로 편집되었다. 이 모음집은 유배 전에 특별한 예언자 집단이 보관했을 것이다. 그리고 예언자들이 죽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예언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사건들이 일어난 후에야 이 예언들이 높이 평가받게 되었을 것이다.
편집자의 편집, 곧 기원전 6세기 신학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계약 또는 호렙(시나이) 전승과 결합하기 위해 이집트 탈출 전승을 자주 언급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신명기계 학파의 어휘와 주제에서 알 수 있듯이 1열왕 8장은 신명기계 역사가의 작품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계약 궤’와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은 호렙에서 모세가 넣어둔 두 개의 돌파’(1열왕 8,9; 8,21.51-53; 2열왕 17,36 참조)이라는 표현을 발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토라(모세오경)와 최소한 신명기에 나오는 탈출이야기가 이때 형성되었다.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계약’(2열왕 13,23)이라는 말은 신명기계 역사가의 해설로 추정되는데, 이런 판단은 신명 4,31과의 유사성에 근거한다. 그러나 초기 엘리야 이야기(1열왕 18,36) 안에 나오는 ‘아브라함, 이사악,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족장들에 대한 구두전승이 엘리야 시에 떠돌아다녔음을 보여주는데(1열왕 18,31 참조), 이것이 현재의 창세기 안에 들어있는 전승이다.
엘리야 이야기의 다른 세부사항은 모세 이야기에 나오는 요소들과 병행한다.(1열왕 18,21-19,18 참조) 그러나 이 요소들이 엘리야 집단에서 생겨났는지 아니면 모세 집단에서 생겨났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솔로몬부터 그 후 임금들의 시대는 현재의 모세오경 안에 있는 유배 이후의 사제 전승(P)과 초기 전승들(J, E, 그리고 D)이 발전하는 기간이었을 것이다.
열왕기의 신학
열왕기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백성과 그 임금들의 역사에 관한 신학적 반성이다. 열왕기에 나오는 역사 자체는 대체로 매우 간결하다. 예를 들어 열왕기 저자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임금들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오므리 임금의 통치를 매우 간단하게 다룬다(1열왕 16,23-26). 그리고 세 해 동안 계속된 사마리아의 포위와 북왕국의 붕괴는 불과 몇 절로 처리한다(2열왕 17,3-6; 18,9-12). 가장 일반적인 견해에 따라, 신명기적 용어와 표현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이 작품을 신명기계 신학이 (그리고 이 신학을 통하여 예언자들의 신학도) 배어있는 위대한 역사 문헌으로 여길 수 있다. 여기에서는 열왕기의 중요한 주제 몇 가지만 강조하고자 한다.
가. 왕정제도
이 책은 신명기계 저자와 예언자들이 생각하는 왕정 신학을 그대로 반영한다. 참다운 임금은 주님의 규정을 지키는 인물이다. 그는 주님의 길을 걸으며 모세의 율법에 쓰여진 대로 그분의 법과 계명과 관습과 명령을 따른다(1열왕 2,3). 임금의 임무는 백성이 하느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1열왕 3,8-9 참조), 그 백성을 지혜와 정의로 다스리고, 동시에 백성을 “섬기는”(1열왕 12,7) 것이다. 주님께 충성을 다하고, 예루살렘에서 그분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데에 전념하는 일은 임금에게 부여된 의무이다. 열왕기 저자는 이런 의무를 기준으로 모든 임금의 통치마다 짧은 평가를 내린다.
불행히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임금들은 매우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 엄격한 비판을 받는다. 열왕기 저자는 서른네 명의 임금들에 관해 “주님의 눈에 악한 짓을 저질렀다.”는 비난을 후렴처럼 되풀이한다. 그는 실례들을 들어 이를 설명한다. 주님에 대한 불충은 여러 가지이다. 이를테면 우상을 숭배하고, 거짓 신들에게 신전이나 제단을 세워 바치며, 이방 신들에게 문의하고 온갖 억압과 불의로 백성을 괴롭히며, 주님의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하느님의 동의 없이 전쟁에 임하고 아이들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것 등이다.
저자의 가장 큰 비난은 율법을 거스르는 경신례를 끌어들여, 이스라엘을 죄짓게 한 임금들에게(특히 북왕국 임금들) 떨어진다. 때때로 어떤 임금들은 뉘우치고 용서를 받기도 하지만, 왕국의 전체적인 모습은 어둡다. 열왕기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이스라엘과 유다 두 왕국의 멸망은 결국 임금들과 그들에게서 책임을 부여받은 자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마땅하고 필연적인 결과라 할 수 있다.
나. 다윗과 그의 왕조 유다
임금들의 맨 앞에는 가끔 하느님의 “종”이라고 불리는(1열왕 3,6; 8,24; 11,13 등), 이 왕조의 창시자 다윗이라는 인물이 자리잡는다. 주님에 대한 다윗의 충성과 열심은 올바른 임금의 본보기가 되어, 그의 후계자들의 평가 기준이 된다. 솔로몬은 자기 아버지 다윗의 규정을 따라 걷고(1열왕 3,3), 아사는 자기 선조 다윗처럼 주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였으며(1열왕 15,11), 요시야는 자기 선조 다윗이 걸어간 길을 정확하게 따라갔다(2열왕 22,2). 요시야에 관해서는 저자가 1열왕 13,2에서, 다윗의 자손들 가운데 요시야라는 인물이 이스라엘의 불충을 그치게 할 것이라고 예고한다. 그러나 역대 임금들에게 적용된 다윗과의 일치라는 평가 기준은 매우 엄격하다. 아히야 예언자는 여로보암이 다윗과 같지 않았다고 해서 부정적 평가를 내린다(1열왕 14,8).
열왕기 저자는, 다윗 후계자들의 불순종을 이스라엘과 유다 두 왕국의 분열과(1열왕 11,9-11) 유다 왕국의 멸망을(2열왕 23,26 이하 참조) 가져온 직접 원인으로 본다. 그러나 열왕기 저자는 1열왕 2,4에서 경고하는 위협에도 다윗 집안에 내리신 주님의 약속은 영원하리라고 믿는다. “네 자손들이 제 길을 지켜 내 앞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성실히 걸으면, 너에게서 이스라엘 왕좌에 오를 사람이 끊어지지 않으리라”(1열왕 2,4. 그리고 2사무 7,12-16 참조). 주님께서는 “다윗을 생각하시어” 예루살렘에 “등불을” 하나(다윗 왕조의 왕자) 남겨두신다(2열왕 8,19. 그리고 1열왕 15,11 참조).
마침내 열왕기는 한 가닥 희망을 남기며 끝을 맺는다. 다윗 왕조의 마지막 후손은 비록 갈대아에 유배된 몸이라 할지라도, 자기를 둘러싼 상황이 바뀌어가는 것을 체험한다. 바빌론 임금은 그에게, 죄수복을 벗고 날마다 임금의 식탁에서 음식을 들 수 있는 은혜를 베푼다.
다. 예루살렘과 성전
신명기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받은 열왕기는 예루살렘과 성전 안에서 거행되는 예배에 특별한 자리를 부여한다. 우선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성읍이다(1열왕 8,12). 그리고 그곳은 성전의 성읍이다. 1열왕 8,15-19에 따르면 이 성전 건축은 원래 “주님의 이름을 위한” 집 한 채 짓기를 간절히 바라던 다윗의 소원이었다(2사무 7,1-16 참조). 성소의 중요성은 성전 봉헌 때에 솔로몬이 바친 기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1열왕 8,23-53).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이 민족의 어떠한 생존 환경에서도 하느님과 교류하는 “만남”의 장소이다(탈출 33,7의 “만남의 천막” 참조). 요시야의 종교 개혁도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2열왕 22-23). 율법 두루마리를 발견한 것도 성전 안에서이다. 그리고 종교 개혁의 첫 시도는 성전을 정화하는 일이다. 이후 성전은 이스라엘의 모든 경신례 생활에서 중심이 된다. 열왕기 저자가 미리 예루살렘 밖에서도 제사가 바쳐졌음을 여러 차례 언급한 것은(1열왕 3,2; 22,44; 2열왕 12,4; 14,4; 15,4.35) 종교 개혁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사전 포석이다. 예루살렘 성전 밖에서 제사를 바친 실례로 가르멜산에서 엘리야가 바친 제사를 들 수 있다(1열왕 18).
성전을 예배의 중심으로 부각시킨 까닭에, 사제들은 경신례 안에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요시야의 종교 개혁에 따라 제사를 바치는 권한은 오로지 사제들, 곧 레위 지파에 속한 사제들에게만 귀속된다. 1열왕 8,1-6은 솔로몬의 성전 봉헌 때부터 이미 그들이 본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묘사한다. 열왕기 저자는 나중에 아달리야가 다윗 가문의 혈통을 끊어버리려 할 때에 다윗 왕조의 존속을 가능하게 한 일도 사제들의 공적으로 돌린다(2열왕 11). 저자는 요아스가 주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게 된 것도 여호야다 사제가 그를 잘 지도하였기 때문이라고 밝힌다(2열왕 12,3). 사실 솔로몬을 도유한 사람도 사제였다(1열왕 1,39).
예루살렘 중심으로 레위 지파 사제들의 손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예배를 철저히 강조하면서, 열왕기 저자는 다른 한편 여로보암의 주도로 단과 베델 같은 다른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예배를 완전히 배척한다. 저자는 “여로보암의 죄” 또는 “여로보암의 길”(이런 표현은 스무 번 가량이나 나온다)을 엄하게 단죄하고, “이스라엘을 죄짓게 한” 여로보암 자신과 그를 따른 그의 후계자들의 잘못을 고발한다(역시 스무 번 가량). 열왕기 저자의 견해로는 예루살렘에서만 제사를 바치라는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한 왕국에 총체적인 단죄와 심판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하다. 비록 그 왕국의 임금이 바알의 제단들을 철거하여 주님께 충성을 보인다 할지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2열왕 3,1-3 참조). 이같은 실제적 분열은 사마리아가 함락되기까지 한탄의 대상이 된다(2열왕 17,23 참조).
라. 예언자들의 개입
예언자들과, 그들의 말이나 행동을 통한 개입은 열왕기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전승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엘리야와 엘리사뿐 아니라, 나단, 스마야, 아히야, 미가야, 이사야, 여예언자 훌다도 큰 권위를 지닌 이들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이 행한 기적들(특히 엘리야와 엘리사의 기적들) 못지않게 그들의 정치적 행동도 매우 중요하게 드러난다. 나단은 다윗이 솔로몬을 후계자로 삼도록 영향력을 행사한다(1열왕 1,11-17). 엘리야는 하자엘을 아람의 임금으로, 예후를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도유하라는 명령을 받는다(1열왕 19,15 이하. 그리고 2열왕 9,1-3; 8,11-13 참조).
죽음의 신탁을 전함으로써 임금과 그 가문의 파멸을 선언하는 것도 예언자들의 몫이다. 아히야 예언자와 여로보암 임금(1열왕 14,10-11), 엘리야 예언자와 아합 임금의(1열왕 21,21-24) 경우가 그 좋은 예들이다. 이 밖에 이사야는 바빌론 임금의 승리를 예고한다(2열왕 20,14-19).
그런가 하면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임금의 승리를 알려주거나(엘리사: 2열왕 7,1; 13,17-19. 이사야: 2열왕 19), 군사 행동에 개입하기도 한다(이름모를 예언자: 1열왕 20,13-14. 미가야: 1열왕 22,19-28. 엘리사: 2열왕 3,9-19; 6,8-7,20). 이스라엘과 유다의 분열에 얽힌 이야기에서 스마야 예언자는 동족 사이의 전쟁을 막는 자로 나타난다(스마야: 1열왕 12,22-24).
마지막으로 엘리야는 아합 임금 앞에서, 임금이 포도밭 주인 나봇의 조상 대대로 이어오는 권리를 짓밟았다고 비난한다(1열왕 21,3-17 이하).
이 모든 경우에 예언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면서 그분께 순종할 것을 호소하고, 그분께서 충성하는 이들을 보호하시리라는 약속도 선언한다. 열왕기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과 규정을 존중하도록 하려는 예언자들의 의도를 명백하게 드러낸다. 요시야의 종교 개혁을 유도한 법전이 발견되었을 때, 여예언자 훌다가 한 역할이 그 좋은 예이다(2열왕 22,14-22). 이처럼 열왕기에 나오는 예언자들은 종교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윤리와 정치 영역에서도 탁월한 자리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이런 영역들이 다같이 이스라엘의 한 분 “임금님”께 속하기 때문이다(이사 6,5; 44,6; 즈가 14,16. 시편 입문 19-20쪽, '하느님의 통치에 대한 노래들' 참조).
1열왕 1,1-4 다윗과 수넴 처녀
1열왕 1-2장은 다윗 궁정 역사의 결말과(2사무 9-20장; 1열왕 1-2장) 솔로몬의 왕위 계승 이야기를 다룬다. 다윗의 맏아들 아도니야는 다윗의 군사령관인 요압과 사제 에브야타르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다윗의 계승자로 선언하려고 시도한다(1,5-10). 그러나 나탄 예언자가 개입하여 밧 세바로 하여금 자신의 꾸며낸 거짓 언약을 다윗에게 가서 전하게 한다(1,13). 이 두 사람은 솔로몬을 임금으로 지명하도록 다윗을 설득하고(1,11-40) 사제 차독이 이들과 한편이 되어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준다(1,11-40). 이야기 해설자는 솔로몬의 계승에 기도가 동반되지만(1,36-37.48) 그를 선택하는 데 있어 하느님이 개입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다.
“다윗 임금이 늙고 나이가 많이 들자, 이불을 덮어도 몸이 따뜻하지 않았다”(1). 남자는 도둑놈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모르겠다. 본문은 다윗 왕의 노환(老患)이 기록되어 있는 부분이다. 이처럼 열왕기 저자가 본서 초두에 다윗 왕의 노환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다윗 왕이 노환으로 인해 더 이상 국정(國政)을 돌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함으로써, 아도니야가 다윗의 후계자로 자처하고 반란을 꾀하게끔 되는 배경을 제공해 준다. 같은 맥락에서 다윗 왕의 서거(逝去) 이전에 솔로몬이 급히 즉위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을 제공해 준다.
한편 노환으로 인한 다윗의 나약한 모습을 다루고 있는 본문은 인생의 무상감(無常感)을 느끼게 해준다. 베들레헴의 이름 없는 목동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위대한 통치자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다윗은 실로 파란 만장한 세월을 경험하였다. 이스라엘의 왕이된 이후에도 다윗은 많은 날들을 전쟁터에서 보냈고, 그 결과 이스라엘 영토를 확장하고 성정 건축의 기반을 다지는 등 성군(聖君)으로서의 역량을 한껏 발휘했다. 그러나 그 영화로웠던 세월들도 유수처럼 흘러 지나가고, 이제 다윗은 칠십 노인이 되어 바야흐로 인생의 황혼기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다윗은 30세 왕이 되어 헤브론에서 7년, 예루살렘에서 33년, 도합 40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이때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몸의 온기가 떨어진 것은 단순히 나이 많음에서 오는 것 뿐만 아니라 다윗의 젊은 날의 고생 때문이기도 하다. 혹 병이 들어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다윗은 초기에는 외부적으로 망명 생활, 숱한 전쟁 등으로 인해 온갖 풍파를 겪었으며, 말년에는 내부적으로 집안의 불화, 반란, 살인, 음모 등으로 인해 심신이 지칠대로 지쳤다. 더욱이 밧 세바와의 간음 사건 이후 하느님의 징계로 겪었던 집안의 불화는 결정적으로 다윗을 노쇠케 만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모든 일이 말년에 노환(老患)이 되어 다윗을 쇠약케 만든 듯하다. 한편, 열왕기 서두에서 이처럼 다윗의 몸의 증세를 상세히 알리는 것은 그가 더 이상 나라를 통치하기에는 너무 쇠약해졌음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 처녀로 다윗의 품에 눕게 한 것은 분명 그같은 치료 방법을 통하여 다윗의 원기를 회복시켜, 그로 하여금 통치를 계속할 수 있도록 목적한 것이 확실하다.
간호와 온기(溫氣)로써 다윗 왕의 봉양할 의무를 띠고 이스라엘 중에서 뽑힌 수넴 출신의 아리따운 처녀 아비삭을 다윗에게 데려갔다. 아비삭이란 이름의 뜻은 '나의 아버지는 방랑자'이다. 여기서 '아브' 또는 '아비'는 '아버지'란 의미로서, 히브리인들의 이름 중에서 흔히 발견되는 합성어이다. 예컨대 아비야, 에브야타르, 아비멜렉, 아비가일, 아비새 등이 있다.
4절에서 ‘임금은 그와 관계하지 않았다“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다윗이 아비삭과 동침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해석으로는 다음 두 가지가 있다. 아비삭은 다만 간호의 역할을 하는 시녀였으므로 다윗이 동침하지 않았다는 견해가 있다. 다른 해석은 다윗이 노쇠하여 무기력했기 때문에 동침할 수 없었다는 견해 등이다. 첫째 견해의 경우, 이 구절은 후에 솔로몬의 이복형 아도니야가 아비삭을 요구할 수 있었던 배경을 제공해 준다(2,13-18). 그러나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요구를 부왕(父王)의 후궁을 요구하여 왕위까지 노리는 불측한 것으로 간주하여 그를 죽인다(2,22-25).
성경저자는 여기에서 다윗의 성적 불능을 조심스럽게 암시한다. 옛날 사람들에게 성 불능은 나라를 통치할 능력이 없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다윗 주변에 왕위를 빼앗으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1열왕1,5-10 아도니야가 임금 행세를 하다
“한편 하낏의 아들 아도니야는 ‘내가 임금이 될 것이다.’ 하면서 거만을 부렸다. 그러고는 자기가 탈 병거와 말을 마련하고, 호위병 쉰 명을 두었다”(5). 아도니야는 헤브론 통치 시절에 다윗이 하낏을 통해 낳은 넷째 아들이다. 다윗의 아들들 가운데 첫째는 암논인데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을 통해 낳은 아들이며, 둘째는 킬압인데 카르멘 여인 아비가일을 통해 낳은 아들이다. 그리고 셋째는 압살롬인데 그수르 임금 탈마이의 딸 마아카를 통해 낳은 아들이며, 넷째가 바로 이 하낏에게서 난 아도니야이다. 다윗은 그의 나이 30세부로부터 37세 때까지 헤브론 통치 시절 도합 6명의 아들을 낳았다(3사무 3,2-5). 따라서 아도니야 역시 헤브론에서 태어났으니. 당시 아도니야의 나이는 33세로부터 40세 사이였을 것이다.
아도니야가 자신이 임금이 될 것이라는 자만심을 갖은 이유가 잇따. 그것은 장자의 권리가 가장 기초적인 이유였다. 왜냐하면 압살롬이 죽은 후 다윗의 남은 아들들 중에서는 아도니야가 가장 연장자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때마침 다윗이 늙고 무기력해졌으므로 아도니야가 왕권에 대한 욕심을 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데 있어서는 장자권 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느님의 선택이었다(신명 17,15). 그리고 이 선택은 이미 솔로몬에게 주어졌었다(2사무 7,12-17). 또한 아도니야도 이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 한 것은 분수를 넘는 일일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 행동이 된다. 그래서 아도니야의 왕의 찬탈 시도에는 '거만을 부렸다'라는 부정적 표현이 사용되었다.
아도니야는 당시 생존한 왕자들 중 최연장자였으므로 순서대로라면 왕위 계승 서열 1위였다. 또한 아도니야는 용모가 준수한 자로 다윗의 총애를 받도 있었다(6절). 그리고 아도니야는 주위의 인물들 특히 군대 장관 요압이나 대제사장 에브야타르과 같은 사람들을 포섭할 만한 정치력이 있었고, 또한 그 같은 사람들에 의해 사주(使嗾)를 받았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아도니아는 교만해져서 왕이 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도니야는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뜻과 다윗 왕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역사의 모든 사건은 결국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거스리는 자는 결국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다. 하물며 메시아의 족보로 선택받은 다윗 집의 사건에 관해서야 더 말할나위 없는 것이다.
6절에 의하면 아도니야는 이스라엘 최초의 왕 사울과 같은 준수한 용모를 가졌으며, 다윗 왕에 대해 반역을 일으킨 압살롬도 그러하였다. 그리고 다윗도 준수한 용모를 가졌던 것으로 나타난다. 사실 지도자에게 있어 준수한 용모는 백성들의 인기를 끄는 데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요인이다. 그러나 육체의 아름다움 보다 마음의 중심이 하느님께 선택받은 것이 더 중요한 자격이다.
아도니야가 태어난 날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책망을 들은 일이 없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말은 5절의 방자한 행동에 대한 감시 소홀 내지는 후계자로 생각해서 내버려 둔 것이다. 다만 아도니야의 교만한 행위의 원인 중 하나가 다윗이 그를 적절히 훈계치 못한 데에 있음을 암시할 뿐이다(잠언 22,6). 여기에 더하여 다윗이 노쇠해지자 아도니야는 부친을 무시하고 동의도 없이 멋대로 왕이 되려 하였던 것이다(18절).
7절과 8절에 아도니야를 지지하는 요압과 야브야타르 사제가 있고, 그의 편이 아닌 차독 사제, 브나야, 나탄 예언자 등에 대해 말한다. 츠루야의 아들 요압은 다윗의 군대 최고직의 장군으로 전공을 많이 세운 인물이다. 비록 요압은 다윗에게 충실하였지만, 그러나 그는 자주 다윗을 거슬렀다. 그래서 다윗에게 잘못 보인 그는 다윗과 예언자 나탄의 영향 하에서 자란 경건하고 온유한 성격의 솔로몬보다는 야심 만만하고 준수한 용모의 아도니야에게 가담하여 다윗 사후에도 계속 권세를 확보하려 했다. 즉 요압은 다윗의 바램이나 하느님의 뜻 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실리를 좇아 행동했던 것이다.
에브야타르 사제는 사울이 놉의 제사장들을 학살할 때 피하여 다윗의 보호를 받다가(1사무 22장), 이후 다윗 통치 하에서 차독과 더불어 대제사장이 된 인물이다(2사무 20,25). 오랜 역경의 세월 동안 다윗과 동거 동락해 온 그가 다윗의 뜻을 거스리고 아도니야의 음모에 가담한 이유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추측컨대 에브야타르는 당시 공동 대제사장이었던 차독 사제를 시기한 끝에 아도니야의 음모에 가담한 것으로 해석된다. 에브야타르는 자신의 대제사장적 가문의 회복을 위하여 아도니야의 음모에 가담한 것 같다. 그들은 다윗 사후 자신들의 정치적 종교적 강화하기 위한 실리적 목적으로 아도니야의 음모에 가담했다. 결국 요압의 처형(2,28-35)과 에브야타르의 추방(2,26)이라는 비극적 결과가 이들의 그러한 사욕을 입증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차독 사제는 사울이 죽은 후 헤브론에 있던 다윗에게 가담한 무리 중 한 사람으로(1역대 12,28), 아론의 셋째 아들인 엘르아살의 후손 아히툽의 아들이다(2사무 8,17). 압살롬의 반란 때 그는 다윗을 편들어 왕궁에 머물면서 후세를 도와 첩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편 차독은 다윗시대에 에브야타르와 더불어 공동 대제사장으로 있었는데, 이처럼 다윗 시대에 2명의 대제사장이 있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곧 다윗은 도피시절에 사울의 손을 피해 에폿을 가지고 자신에게로 도망쳐 온 에브야타르를 대제사장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후 사울 사후에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를 통치하고 있을 때, 이미 아론의 집 족장 여호야다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된 차독이 사울의 나라를 다윗에게 돌리기 위해 헤브론의 다윗에게서 나아왔다. 그리고 이때 다윗은 또한 차독을 대제사장으로 맞아들였으므로, 결과적으로 다윗의 통치하에서는 2명의 대제사장이 존재케 된 것 같다.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다윗의 전성기에 크렛족과 펠렛족을 지휘하였던 인물이다(2사무 8,18). 크렛 사람과 펠렛 사람들은 외국인 용병으로 왕의 친위대를 구성하고 있었고(38절), 브나야는 이들의 대장이었다(1역대 18,17). 본래 브나야는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로서 레위인이었으나, 그의 뛰어난 무용(武勇)으로 인해 다윗 왕의 시위대장으로 발탁된 것 같다. 그러다가 브나야는 솔로몬의 명령을 받고 아도니야의 반란 사건에 가담한 요압을 죽인 후 대신 군대 최고 장수가 된다(2,28-35).
예언자 나탄은 다윗의 신임을 받는 왕궁의 조언자였다. 당시 예언자 나탄은 다윗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나탄은 다윗의 성전 건축 계획을 솔로몬에게 넘겨주도록 하였고(2사무 7,4-17), 밧 세바를 취한 일로 다윗을 꾸짖기도 하였다(2사무 12,1-14). 그리고 나탄은 솔로몬 출생시 하느님의 명으로 솔로몬에게 '여디디야'(‘주님의 사랑을 입은 자'란 뜻)라는 이름을 붙여 준 일이 있으므로, 일찍부터 나탄은 솔로몬이 다윗 왕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강력히 암시받은 바 있었다(2사무 12,24).
따라서 요압과 에브야타르가 구세력의 세력이라면, 차독과 나탄 등은 후기 예루살렘에서 기반을 잡은 신흥 세력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브나야를 비롯한 다윗의 용사들은 요압의 영향권 하에서 벗어난 다윗의 친위 세력이었다. 따라서 아도니야는 이들을 포섭하는 데 실패했고, 이들 역시 다윗의 뜻을 좇아 예루살렘에서 자라난 새 인물 솔로몬을 지지하는 것이 옳을 뿐 아니라 유리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아도니야의 반역 음모에 가담치 않았다.
9절에서 아도니야는 엔 로겔 근처 조헬렛 바위에서 솔로몬을 제외한 다른 왕자들을 불러 양과 소 그리고 송아지를 잡아 제사를 드렸다. 조헬렛 바위는 “미끄러지는 바위” 또는 “뱀 바위”로 옮기기도 한다. 엘 로겔은 예루살레 남쪽 키드온 골짜기에 있는 로겔 샘을 말한다. 이곳은 유다와 벤야민의 경계로서(여호 15,7) 오늘날에는 비르 아윱(욥의 우물)이라고 불린다.
동물을 잡아 제사를 바치는 것은 새로운 임금의 즉위식에 동반되는 종교 의식이다. 또한 제사에 곁들여지는 식사에 친지들을 초대한 것은 임금의 자격으로서였다. 일찍이 사울이 왕이 될 때도 제사를 드렸고, 압살롬도 제사를 가장하여 반역을 자행한 바 있었다. 마찬가지로 아도니야 역시 제사 잔치를 베풂으로써 반역 거사를 도모한 것이다. 이처럼 반역 거사에 제사 형식을 도입하고 있는 이유는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제사 형식을 갖춤으로써 종교계 및 군부 실력자들의 회합 의도를 자연스럽게 은폐시킬 수 있으며 둘째, 자신들의 거사 행위에 신적(神的) 근거 및 정통성을 부여하고 셋째, 거사에 가담한자들 상호간에 정신적, 종교적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였다. 한편, 거사 장소로서 아도니야는 수도 예루살렘 남동쪽 키드론 골짜기에 있는 엔 로겔 근처를 택했는데, 이로 미루어 아도니야는 자신의 거사에 상당히 많은 세력의 지지를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으며, 따라서 거사의 성공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군대 장관 요압의 동조와 대제사장 에브야타르의 후원을 얻음으로써, 아도니야는 그러한 확신을 굳혔던 것 같다. 하지만 아도니야는 신정 국가 이스라엘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하느님의 뜻'에는 유념치 않았다.
당시로서는 아도니야가 최연장자였으며, 솔로몬을 제외한 그의 동생은 모두 14명이었다(이외 많은 다윗의 첩의 아들들도 있었다). 이들 아도니야의 동생들도 아마 솔로몬 보다는 최연장자인 아도니야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아도니야는 이들도 자신의 거사 잔치에 참여시켰다.
아도니야는 의도적으로 솔로몬을 초청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이것은 아도니야가 솔로몬이 약속된 왕위 계승자임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즉 예언자 나탄이 하느님의 명을 좇아, 다윗의 범죄에 대한 사죄의 징표로서 다윗과 밧 세바 사이에 태어난 아들 솔로몬에게 붙여준 이름 '여디디야'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2사무 12,24). 그러므로 이 이름이 암시하듯 다윗의 왕위 계승자로 일찍부터 솔로몬이 선택받은 자임이 널리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2사무 7,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도니야가 연장자임을 내세워 왕위를 노린 행위는 하느님과 부왕 다윗의 뜻을 정면 거스린 모반(謀叛)행위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신정적(神政的) 왕정 국가인 이스라엘에 있어서 왕위의 정통성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있는 것이다. 한편 아도니야가 솔로몬과 더불어 예언자 나탄, 시위 대장 브나야, 데제사장 차독, 그리고 다윗의 (삼십)용사들을 초청해서 제외시킨 것은, 그가 다윗의 의중(意中)을 따르고 있는 솔로몬의 핵심 추종 세력을 익히 간파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1열왕 1,11-27 나탄과 밧 세바의 계책
“그때에 나탄이 솔로몬의 어머니 밧 세바에게 말하였다. ‘주군이신 다윗 임금님께서도 모르시는 사이에 하낏의 아들 아도니야가 임금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셨습니까?”(11). 예언자 나탄은 아도니야의 반역 음모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음모를 분쇄하고자 적극 노력하였다. 그런데 나탄이 곧장 다윗에게 달려가지 않고 먼저 밧 세바에게 찾아간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노약한 다윗 앞에 반역 사건이라는 충격적 사건을 가지고 자신이 먼저 나서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겼고, 따라서 아도니야의 반역이라는 충격적인 보고를 다윗에게 전함에 있어서 당시 다윗의 총애를 받고 있던 밧 세바가 그 적격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밧 세바는 다윗의 침실에 자유로이 들어갈 수 있는 왕비의 신분이고(15절), 또한 친아들인 솔로몬의 일에 가장 헌신적일 수 있는 인물이며, 그리고 다윗의 맹세를 받았던 당사자로서(17절)다윗에게 행동을 촉구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아도니야의 반역 인물을 진압하고 분쇄하는 데 있어, 예언자 나탄의 역할은 결정적일 뿐 아니라 나탄의 주도면밀한 지혜가 드러나는 바, 나탄은 매우 지혜롭고 신중하게 일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나탄의 지혜는 일찍이 밧 세바와 우리아에게 관련된 다윗의 범죄를 지적하고 일깨우는 데 있어서도 잘 나타난다.
부왕(父王)인 다윗 조차도 모르게 은밀히 아도니야가 왕위 계승식을 추진한 것으로 보아 아도니야의 행위는 분명 합법적인 왕위 계승자인 솔로몬을 제거하고 왕위를 찬탈코자 시도한 쿠데타였다고 볼 수 있다. 밧 세바와 나탄은 아도니야의 쿠데타에 대한 소식을 다윗에게 구체적으로 말하였다.
1열왕 1,28-53 솔로몬이 다윗의 명령으로 임금이 되다
“다윗 임금이 ‘차독 사제와 나탄 예언자, 그리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불러오너라.’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임금 앞으로 나오자”(32). 이제까지 줄곧 수동적으로 듣기만 하던 다윗이 갑자기 명령하는 자로 나타난다. 이것은 15절의 늙고 무기력한 인상의 다윗과 뚜렷하게 대조된다. 한편 27절의 예언자 나탄과의 말 사이에 아무런 설명 없이 곧장 다윗의 행동을 기록함으로써 다윗의 결정이 단호하고도 신속했음을 보여 준다. 다윗은 차독 사제와 나탄 예언자 그리고 브나야를 부른다. 이들은 솔로몬의 대관식에 반드시 참석해야 할 인물들이었다. 즉 제사장은 왕에게 기름을 부어주는 자로(39절), 그리고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자로서 대관식을 진행해야 했다. 또한 군부 실력자인 브나야는 그 예식을 경호하는 일을 담당했을 것이다.
33절에 다윗은 차독과 나탄 그리고 브나야에게 자신의 근위대와 함께 솔로몬을 노새에 태워 기혼으로 가서 기름을 부으라고 명령한다. 노새는 왕족이 타는 짐승으로, 그 위에 태워오는 행위는 특별히 영예로운 대우이다(에스 6,7-8). 기혼 샘은 예루살렘의 키드론 골짜기에 있다. 두 세기 반 뒤에 히즈키야 임금은 바위를 뚫고 운하를 만들어 기혼 샘의 물을 도성 안으로 끌어들였다(2열왕 20,20).
당시 기혼은 예루살렘성의 주요 수원지(水源池)로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더구나 이곳은 아도니야의 잔치 장소인 엔 로겔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아도니야의 음모를 분쇄하려고 일부러 기혼을 택하였을 것이다.
“차독 사제가 기름 담은 뿔을 천막에서 가져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고 나서 나팔을 분 다음, 모든 백성이 “솔로몬 임금 만세!” 하고 외쳤다”(39). 기름부음은 이미 오래된 전통으로 굳어진 예식이다. 이 예식은 새 임금이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게 하면서, 그에게 거의 초자연적 힘과 생명력을 부여한다. 당시 '기름 부음'은 주로 통치의 직분에 취임하는 왕의 대관식 의식에서 행해진 공식 행사였다(1사무 10,1;2사무 12,7). 그리고 이 기름 부음의 의식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특별히 구별된 자로서 그에게 권위가 주어지며, 또한 이 권위를 부여하시는 이는 바로 하느님이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기름 부음 속에 내포된 사상은 신정(神政) 국가 이스라엘의 왕은 하느님에 의해 세워지고, 하느님의 통치 아래 있으며, 하느님을 대신해서 다스린다는 사상이다.
양의 뿔로 만든 나팔은 갑작스럽게 찢어지는 듯 한 높은 소리가 난다. 이는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지만(레위 25,9), 특히 왕의 즉위식 때에 사용되었다(2사무 15,10). 따라서 다윗 왕은 솔로몬의 대관식 때에도 이것을 무리들에게도 그 소리가 들리도록 하여 솔로몬의 왕위 즉위가 만천하에 공식 선포되고 드러나도록 조처하였던 것이다.
천막은 솔로몬이 성전을 세우기 전에 예루살렘에서 성소 구실을 하였다. 이 천막 안에는 기름 붓는 예식을 사용하는 특별한 뿔이 보관되어 있다. 기름은 사제, 예언자, 왕, 그리고 성전의 기물들을 거룩히 구별할 때 특별히 사용하는 거룩한 기름(sacred oil) 곧 '관유'(灌油, 탈출 30,22-33)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거룩한 기름은 게약의 궤가 보관된 성막 안에 보존되어 있다. 한편 만일 아도니야가 제사장 에브야타르를 통해 기름 부음을 받았다면, 그때 기름 뿔은 응당 엔 로겔에 가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도 본절에는 그것이 예루살렘 천막 안에 그대로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는 아도니야가 도유식(塗油式)을 거치지 않고 왕위 즉위를 선포했던 것이다. 솔로몬의 대관식에 참석한 모든 백성이 만세를 부른 이후(39절) 솔로몬은 명실 상부한 저들의 왕이 되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 왕의 명과 뜻을 좇아 솔로몬을 따른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뜻은 다윗의 순종과 신하들의 충성을 통해 결국 백성들의 환영에서 완성된 것이다.
아도니야의 반역은 실패로 돌아가 반역 세력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도니야도 솔로몬을 대하기가 두려워서, 일어나 제단으로 가 그 뿔을 움켜잡았다”(50). 제단 뿔은 곧 번제단의 네 모퉁이에 튀어나온 돌기 부분이다(탈출 38,1-7). 제사를 드릴 때 여기에 짐승을 매기도 했고, 또 희생 제물의 피를 바르기도 하였다(탈출 29,12). 그런데 성경에서 '뿔'(케렌)은 주로 힘과 능력을 상징한다(신명 33,17). 그러므로 제단의 뿔은 하느님께로부터 임하는 힘과 능력을 상징한다. 아울러 그러한 하느님의 힘과 능력으로 약자와 억울한 자 및 죄인을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은혜를 상징한다. 따라서 이 제단 뿔을 잡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혜와 보호를 호소하는 상징적 행위이다. 그런데 이처럼 제단 뿔을 도피처로 삼는 행위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 이후 잘못 사람을 죽인 경우의 사람의 도피 제도(탈출 21,13)와 더불어 시작되었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왜냐하면 출애굽 시대 이후부터 성소의 제단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범죄자의 피신처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탈출21,12-14). 이후 모세 율법은 이러한 자들을 위한 사회적 보호제도로 도피성(逃避城) 규례를 만들었고(민수 35,9-34), 그 규례는 가나안 정착 후 그대로 실시되었다(여호 20,1-9). 여하튼 그때 이후 성소의 제단은 도피성과 아울러 범죄자가 하느님의 보호와 긍휼을 호소하고 바라는 피신처의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맥락 하에서 반역 거사를 주도한 아도니야도 사형 집행을 두려워 하여 하느님의 은혜를 간절히 바란다는 의미로 이처럼 제단 뿔을 잡은 것이다.
아도니야는 자신의 입으로 솔로몬을 '왕'으로 시인하고, 자신을 그의 '종'으로 인정함으로써 이제 왕위(王位)을 포기했음을 고백한다. 아울러 목숨만을 구걸하는 허울좋은 겁장이로 나타남으로써, 그의 오만함이 솔로몬의 권위 아래 여지없이 부숴진 사실이 적나라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아도니야는 교활했다. 일단 대세가 솔로몬쪽으로 완전히 기울자 이처럼 굴복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역모를 계획하다가 결국 처형당하고 말았다(2,13-25).
53절에서 솔로몬은 아도니야를 성전에서 나오게 하여 집으로 보내준다. 솔로몬의 이러한 처분은 그의 관용을 나타낼 뿐 아니라, 경고의 의미가 크다. 왜냐하면 이와 비슷한 명령을 다른 기록에서 찾아보면 언제나 징계, 연금의 의미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2,36;2사무 14,24). 그러므로 최소한 왕궁을 노리던 아도니야에게 사적(私的)인 개인으로서 이제 제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앞으로는 분수에 넘는 짓하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는 경고가 충분히 담겨있는 것이다.
1열왕 2,1-12 다윗의 죽음
다윗은 솔로몬에게 하는 ‘고별 인사’이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너는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2-3). 이 시작 구절은 신명기계 편집자들의 손길을 보여준다. 이 인사는 모세법 안에 기록된 규정, 계명, 법규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느님께 충실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여호수아기 이래로 기록된 하느님의 율법에 대해 처음 언급한다. 다윗이 솔로몬을 왕으로 임명한 때로부터 그에게 최종 유언을 하는 현 시점에 이르기까지가 어느 만큼의 기간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상당 기간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역대기에서는 솔로몬 즉위 후 다윗이 다시 건강을 회복하여 성전 예배의 새로운 규례 제정, 제물 봉헌, 그리고 솔로몬의 왕위 계승을 공포하는 의식을 성대히 행하는 등 여러가지 활동을 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1역대 23장-29장).
열왕기에는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들’이라는 말이 반복되는데, 이는 편집자가 삽입한 흔적이 있는, 신명기계 역사가의 사고와 스타일을 반영하는 대목에 많이 등장한다. 여기서도 2사무 7,14-15의 무조건적 약속과 대조적으로, 왕조가 쇠퇴하지 않으리라는 하느님 약속의 조건적인 성격을 신명기계 역사가가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주님께서 너에게 ‘네 자손들이 제 길을 지켜 내 앞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성실히 걸으면, 네 자손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의 왕좌에 오를 사람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당신 약속을 그대로 이루어 주실 것이다”(4).
‘성실히 걸으면,.. 것이다’ 이 조건절은 원래 나탄의 메시지(2사무 7,8-16) 속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로는 계속 나타나고 있다(8,25;9,5 등). 그런데 애초 이 내용은 신명기에 기록된 바(신명 6,1-9)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전체 백성들에게 위탁한 교육적 책임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왕도 이러한 의무에서 면제되고 있지 않다(신명 17,18-20).
요압이 아브네르와 아마사를 죽인 까닭은 무엇보다도 이들에게 군대 장수 지위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시기심 때문이었다(2사무 3,6-39;20장). 여기서 특기할 것은 요압의 그러한 살해 행위를 다윗은 마치 자신에게 행한 일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아마 요압이 아브네르과 아마사를 죽인 것은 다윗의 권위에 대한 멸시와 도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요압은 다윗 왕에 대해서는 끝까지 충성을 바친 훌륭한 전사였지만, 그러나 지나치게 방자하고(2사무 18,5,14) 거칠었던 것 같다(2사무 3,27;18,14). 그래서 끼친 공(功) 못지 않게 자주 다윗 왕가를 괴롭혀왔던 것이다. 그 중에서 요압이 아브네르과 아마사를 죽인 행위는 도저히 묵과될 수 없었던 요압의 치명적 실수로서, 다윗은 그 사실에 대해 아들 솔로몬에게 응분의 조치를 내릴 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아브네르와 협상하여 평화적으로 통일 왕국을 이루려 했었다(2사무 3,21). 또한 압살롬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마사를 등용한 것은 내란을 종식시키고 왕국의 재정비를 도모하려던 때였다(2사무 19,13;20장). 그런데 다윗의 이러한 평화의 노력이 요압의 살해 행위로 인해 크게 방해를 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요압이 사울의 군대 장관 아브네르와 압살롬의 군대 장관 아마사를 계략으로 살해한 행위는 다윗을 심히 분노케 했다(2사무 3,29).
“그러니 너는 지혜롭게 처신하여, 백발이 성성한 그자가 평안히 저승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하여라”(6). 요압은 그때까지도 군대 최고의 장수이었고(35절), 다윗의 조카로서 다윗이 왕이 되는 데 큰 공로를 세운 당대의 세도가였다. 그러한 인물을 명분없이 처단한다면 민심의 동요와 같은 어려움이 생길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이 말은 나쁜 술수로 요압을 처단하라는 뜻이 아니라, 납득이 갈 만한 처벌의 정당성과 적절한시기를 가려 시행하도록 충고하는 말이다. 실제로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불측한 시도가 재차 드러나자 그의 동조자였던 요압도 함께 처단한다.
아무튼 다윗은 요압의 불의한 살해 행위를 잊지 않고 있다가 결국 솔로몬을 거스려 아도니야의 반역 행위에 가담한 요압을 솔로몬이 처리하도록 그에게 위임하는 것이 오히려 솔로몬 왕국의 강화를 위해, 그리고 하느님의 공의 실현 차원에서 더 유익하다고 판단하고 요압의 처리 문제를 자신의 손으로부터 솔로몬에게 넘겨준 것 같다.
다윗은 7절에서 압살롬의 난을 당하여 다윗이 정처없는 피난 길에 나서는 극도의 곤경에 빠졌을 때, 바르질라이는 여러 가지 식물로 다윗과 그의 일행의 굶주림과 목마름을 채워주는 선행을 베풀었었다(2사무 17,27-29). 따라서 후일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진압하고 다시금 환궁 길에 오르게 되었을 때, 그는 바르질라이에게 그의 후손들을 보살피겠노라고 약속했다(2사무 19,31-39). 7절은 다윗이 바로 그러한 바르질라이의 선행을 기억하면서 자신이 바르질라이와 맺은 약속을 솔로몬 역시 계속 지켜 나가도록 요청하고 있는 장면이다.
8절은 다윗이 압살롬에게서 도망갈 때 벤야민 사람 시므이의 저주의 말을 듣어야 했다. 그리고 다시 마하니힘에서 다시 돌아올 때 환영을 받은 시므이를 유언으로 죽이라고 하였다. 당시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하고 막 환궁하는 시점에서 사울 왕의 지파인 베냐민 기파 소속의 유력자 시므이를 처형하는 것은 시기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결코 바람직스럽지 못하다고 판단하고 일단 시므이의 죄를 용서해 주었다. 그러나 다윗의 이 용서는 시므이의 범죄를 용인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에 대한 징계를 보류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너는 지혜로운 사람이니, 이제 그런 자에게 벌을 내리지 않은 채 그냥 두지 마라. 너는 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 것이다. 백발이 성성한 그자가 피를 흘리며 저승으로 내려가게 해야 한다”(9).
다윗은 시므이의 행위(2사무 16,5-13)를 단순히 한 개인에 대한 저주와 모욕이 아닌 하느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시대에는 비록 민심(民心) 수습이란 현실적 문제로 그를 처단하지 않았지만 끝내는 처단해야할 존재로 작정했다. 사실 시므이와 같은 기회주의적 인물은 때가 되면 또다시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히 있었으므로, 다윗은 솔로몬의 견고한 왕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시므이와 같은 암적(癌的) 존재가 반드시 제거될 필요가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다윗은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 성에 묻혔다”(10). '조상들과 함께 잠들다'란 표현은 곧 '죽음'을 가리키는 성경적 표현이다. 이리하여 통일 왕국 이스라엘의 위대한 성군(聖君) 다윗도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2절) 가고 말았다. 다윗은 자신의 남은 마지막 재임 기간을 새 왕 솔로몬과 백성들을 준비시키는 일로 보냈다. 이처럼 다윗은 죽는 그 순간까지 맡은 바 소임을 다하다가 마침내 하느님의 축복 하에서 예루살렘의 다윗 성에 장사되었다. 이스라엘 역사상 다윗은 가장 위대한 왕이요 의로운 왕이었다. 이런 맥락하에서 다윗이 세운 도시 예루살렘은 ‘다윗 성'으로 간주되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이후 이스라엘 모든 왕들의 의(義)의 척도가 되었다. 하느님께서 유다의 가증한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멸하지 않은 것은 바로 다윗을 생각해기 때문이었다(2열왕 8,19). 무엇보다도 다윗은 장차 그의 가계를 통해 오실 메시야의 조상으로서 그 뚜렷한 의의를 지닌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지칭했으며(마태 1,1), 백성들 역시 그리스도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다윗을 기렸던 것이다(마태 21,9).
다윗은 그의 나이 30세 때인 기원전 1010년 경에 헤브론에서 왕위에 올라 그의 나이 70세 때인 기원전 970년경까지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치리한 후 밧 세바를 통해 낳은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를 양위한 후 그의 통치를 마감하였다. 다윗의 헤브론 7년 통치는 유다 지파만의 왕으로서 통치한 기간이다. 이후 다윗은 사울 왕국을 통합하여 명실 공히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서 33년간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다.
1열왕 2,13-25 아도니야가 죽다
다윗의 죽음 후에 아도니야의 파멸을 묘사하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아도니야는 다윗의 마지막 아내인 수넴 여자 아비삭을 자기 아내로 맞게 해달라고 밧 세바에게 청한다. “그는 이렇게 청하였다. ‘솔로몬 임금님에게 말하여 수넴 여자 아비삭을 제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해 주십시오. 임금님은 모후의 청을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17). 아도니야의 이 간청은 다만 아비삭의 미모를 탐냈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아도니야의 이러한 요구는 궁극적으로 왕위를 노리는 행동으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아비삭은 다윗과 동침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그의 첩(후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파사 제국을 비롯한 고대 근동에서늘 선왕(先王)의 첩을 아내로 삼음으로써 후왕(後王)이 자신의 왕위를 널리 인정받는 관습이 있었다.
이런 맥락하에서 압살롬도 백성들의 목전에서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함으로써 왕권 쟁취를 널리 선언한 바 있있다(2사무 16,20-23). 따라서 비록 밧 세바는 이러한 아도니야의 숨은 저의를 정확히 간파하지 못하고 쉽사리 그의 청을 들어 중재자의 자격으로 나섰지만, 지혜로운 솔로몬은 밧 세바의 말을 통해 아도니야의 숨은 저의를 정확히 간파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마침내 아도니야를 처형시키고 만다(25절). 그 이유는 솔로몬이 아도니야에게 일찍이 주지시켰던 바 "그에게서 악이 드러나면 마땅히 죽을 것이다"(1,52)라는 말대로 아도니야의 아비삭 요구 속에는 다시금 왕위를 노리는 '악한 의도'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분명 밧 세바는 아도니야의 이 부탁을 단순한 남녀간의 애정 문제로 인식하고, 이처럼 솔로몬에게 아도니야의 청을 들어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적어도 밧 세바의 생각으로는, 수넴 여자 아비삭은 다윗과 동침하지 않았으므로(1,4), 그녀는 한낱 수종드는 시종에 블과할 뿐이라고 간주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 밧 세바는 왕위 경쟁에서 실패한 아도니야에 대한 일종의 동정심도 작용하여 이 문제를 '한 가지 작은 일'로 보았던 것이다(20절). 그러나 당시 일반 백성들은 분명 아비삭을 다윗의 첩(후궁)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관례상 선왕(先王)의 후궁을 계승하여 소유한다는 것은 곧 그 왕좌를 계승한다는 하나의 상징적 행위였다(2사무 3,7). 그러므로 만일 아도니야의 뜻대로만 된다면, 그는 왕권회복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 되고, 또한 아도니야의 추종 세력들은 크게 힘을 얻는 계기가 될 것이었다(2사무 16,21).
“그러고 나서 솔로몬 임금이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어 아도니야를 내려치게 하니, 아도니야가 죽었다”(25). 솔로몬 왕의 명을 받은 브나야의 책임 하에 아도니야에 대한 처형이 공식 집행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한편, 혹자들은 이유야 어떻든 솔로몬이 자신의 이복 형인 아도니야를 처형시킨 것은 당대히 세속적인 왕권 쟁탈 싸움과 다를 바 없는 비윤리적인 행위라고 비난한다. 사실 얼핏 보면 솔로몬이 아도니야를 구태여 처형시킨 일은 가혹한 일로 비쳐질 수도 있다. 그러나 솔로몬은 혈연 관계를 초월하여 하느님께로부터 대권을 위임받은 신정 왕국의 통치자로서 그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고, 공의를 구현하는 데 주력해야만 했다. 따라서 1차 경고(1,52)에도 불구하고 재차 반역을 시도함으로써, 신정(神政) 왕국 이스라엘의 근간 질서를 문란케 한 아도니야의 죄는 엄중히 다스려져야 마땅하였다. 즉 솔로몬의 아도니야 처형 사건은 단순히 '왕권 도전 세력의 제거'라는 정치적 차원에서 평가될 것이 아니라, '신정 왕국의 확립 및 강화'라는 신적 공의로움의 실현 차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솔로몬이 자기 형 아도니야를 처형시킨 사건은 불행한 사건이었지만, 그러나 정당했고, 결과적으로 선을 이루었다.
1열왕 2,26-46 에브야타르와 요압의 운명
이어서 에브야타르의 사제직 무효화(2,26-27), 요압의 죽음(2,28-35), 다윗을 저주했지만 용서받은 벤야민 지파 시므이의 죽음(2,36-46)이 이어진다.
“임금은 에브야타르 사제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아나톳에 있는 그대의 땅으로 가시오. 그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지만, 그대가 나의 아버지 다윗 앞에서 주 하느님의 궤를 날랐고, 또 아버지와 온갖 고난을 함께 나누었으므로 오늘 그대를 죽이지 않겠소”(26). 그러나 그는 주님의 사제직에서 내쫓겨진다. 제사장직을 파문한 솔로몬의 조치는 제사장을 세우고 폐하는 일이 왕에게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에브야타르의 경우,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왕에 대항하여 계속 반역을 모의함으로써 스스로 제사장직으로부터 이탈하였으므로, 솔로몬은 그에 상응하는 합당한 조치를 취했을 뿐이다. 한편, 추방 당한 이후의 에브야타르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추측컨대, 추방당할 때의 나이가 80세 가량의 노령이었으므로, 이후 오래 살지 못했으리라 짐작된다.
일찍이 하느님께서 익명의 예언자를 통하여 엘리의 집에 선포한 예언의 구체적인 내용은 1사무 2,27-36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죄악으로 말미암아 엘리 가문의 제사장직이 폐하여질 것이라는 경고였다. 그런데 여기서 열왕기 저자는 27절에서 에브야타르의 제사장직 파면 사건을 그 예언의 성취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이로써 에브야타르는 엘리 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던 제사장 중 마지막 제사장이된 셈이기 때문이다. 원래 아론의 네 아들들(나답, 아비후, 엘아자르, 이타마르) 중 나답과 아비후는 잘못된 분향 사건으로 인해 일찍 죽었기 때문에(레위 10,1-2), 엘아자르과 이타마르가 유력한 제사장 계열로 남는다(레위 10장). 그런데 에브야타르는 엘리 집안 소속으로서 이타마르 계열에, 차독은 엘아자르 계열에 각각 속한다. 그러므로 에브야타르이 역모죄로 말미암아 솔로몬에 의해 파면된 것은 곧 대제사장직이 엘아자르 계통으로 완전히 일원화 되었음을 의미한다.결국 엘리 집안에 대한 하느님의 예언이 성취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 역사의 시종을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섭리 주관해 나가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뚜렷이 감지할 수 있다.
에브야타르가 사제직에서 파문당했다는 것을 요압은 듣는다. “이 소식이 요압에게 전해졌다. 그는 압살롬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아도니야를 지지하였기 때문에, 주님의 천막으로 도망쳐 제단의 뿔을 잡았다”(28). 아도니야와 에브야타르의 운명을 전해들은 요압은 다음은 자기 차례일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아마 요압은 아도니야의 전례를 기억하고는 이렇게 단 뿔을 잡았을 것이다(1,50). 그런데 요압의 이러한 행동은 솔로몬에 대해 스스로 떳떳치 못함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것이 곧 2차 거사의 음모가 있었음을 확증하진 않는다. 오히려 오압은 이전의 살인 행위와 관련되어 처벌되고 있다(31-33절). 따라서 요압이 제단 뿔을 잡은 행위는 별 효과가 없었다. 왜냐하면 탈출 21,13-14의 규례에 의하면, 제단을 도피처로 삼을 수 있는 자는 오직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에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압은 다윗의 뜻을 정면 거스려 자기의 야욕과 복수심으로 이스라엘의 두 장수 아브네르과 아마사를 죽였던 것이다(2사무 3,23-27;20,4-10).
“임금은 요압의 자리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임명하여 군대를 지휘하게 하고, 에브야타르의 자리에는 차독 사제를 임명하였다”(35). 왕국이 솔로몬의 인물들로 새롭게 체제 개편되었음을 말해 준다. 그 핵심 내용은 군대 장관에 '브나야', 대제사장에 '차독'이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브나야는 시위 대장에서 군대 장관으로 영전된 것이며, 차독은 명실 공히 단독 대제사장으로 지위 격상된 것이다.
1열왕 2,36-46 시므이가 죽다
“그 뒤 임금은 사람을 보내어, 시므이를 불러다 놓고 말하였다. “너는 예루살렘에 집을 짓고 거기에서 살아라. 그리고 거기에서 다른 어느 곳으로도 나가면 안 된다. 나가서 키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을 줄 알아라. 네 피에 대한 책임이 네 머리 위로 돌아갈 것이다”(36-37).
솔로몬에게 위협적이었던 아도니야, 에브야타르, 요압가 죽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므이가 있다. 시므이는 사울의 친척으로서 강력한 반(反) 다윗 인사였고(2사무 16,5-8,13), 또한 소속 지파인 베냐민 지파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지도급 인사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예루살렘에만 머물도록 하였다. 일종의 주거 제한 및 감시를 위한 조치이다. 그리하여 베냐민 지파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차단하여 반란의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한편 본래 시므이가 살던 '바후림'(8절)은 수도 예루살렘에서 약9km 가량 떨어진 곳으로, 베냐민 지파의 요충지였다.
키드론 시내는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영토를 구분 짓는 예루살렘 동편의 경계천(境界川)이다. 우기(雨期)의 폭우 때를 제외하곤 거의 물이 흐르지 않는 시내이다. 이 시내 건너편에 시므이의 본 거주지인 '바후림'이 있었다(2사무 15,23). 시므이가 예루살렘에만 거주하면서 살던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 때 시므이의 종 둘이 도망을 가서 잡기 위해 키드론 시내를 건나갔다 왔다. 이 소식을 들은 솔로몬은 그를 불러 사형언도를 내렸다. “그러고 나서 임금이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에게 명령하니, 브나야가 나가서 시므이를 내려치자 그가 죽었다. 이리하여 솔로몬의 손안에서 왕권이 튼튼해졌다”(46).
이 대목은 솔로몬의 “손안에서 왕권이 튼튼해졌다.”(2,46)라는 묘사로 마무리된다. 저자-편집자들은 이 모든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가? 그들은 다윗이 요압과 시므이를 죽이라고 조언했다고 분명히 묘사한다(2,5-9). 솔로몬의 왕위 등극 과정은 다윗의 왕위 등극과 대조된다.
1열왕 3,1-3 솔로몬이 파라오의 딸과 혼인하다
“솔로몬은 이집트 임금 파라오와 혼인 관계를 맺었다. 그는 파라오의 딸을 맞아들여, 자기 집과 주님의 집과 예루살렘을 에워싸는 성벽을 다 짓기까지 그 아내를 다윗 성에 머무르게 하였다”(1).
이 혼인은 무엇보다 정략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솔로몬은 이 혼인으로 나주에 파라오에게서 해안 길을 통제하는 성읍 게제르를 얻게 된다(9,16). 이처럼 솔로몬은 내부의 적들을 제거한 뒤(2장) 외국과의 동맹을 통해 왕국을 강화하려 했다. 그래서 왕국 강화의 일환으로서 솔로몬은 정략(政略) 결혼을 통해 이집트와 동맹 관계를 맺은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파라오 왕은 이집트 21대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서 35년간 이집트를 통치한 프수센네스 왕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다음에 이어지는 22대 왕조의 초대 왕 쉐숑크(Sheshonk)는 르호보암 5년에 예루살렘을 침략했던(14,25) 시삭(Shishak)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대적 관계인 22대 왕조 이전에 상호 동맹이 있었으리라고 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당시 이집트가 왜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으려 했는지 분명치 않으나, 당시 다윗과 솔로몬 치하의 이스라엘이 매우 강력했던 사실이 그 주요 이유일 수 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대국의 왕인 이집트왕들이 다른 국가에게 딸을 주는 일은 이례적이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주님을 사랑하여, 자기 아버지 다윗의 규정을 따라 살았다. 그러나 그도 여러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고 향을 피웠다”(3). 율법의 첫째가는 계명은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다(신명 6,5). 솔로몬의 번영과 업적은 이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율법에 순종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윗은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특별히 하느님께 택함을 받은 자이다(8,16). 그리하여 다윗은 그 자신의 시대를 넘어 이스라엘 역사 내내 그의 가치를 인정받아, 향후 이스라엘 모든 왕들이 따라야 할 의로움(義)의 척도로 등장한다. 따라서 백성들은 하느님을 다윗의 하느님으로 알았고, 이후 이스라엘 왕들은 축복을 받으려면 다윗의 행함을 본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도 여러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고 향을 피웠다’ 대부분이 주석가들이 본질적속3절을 부정적 의미로 해석한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정복 당시 주님께로부터 가나안 족속의 '산당'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았고(민수 33,52), 이후 열왕기에서 '산당'은 우상 숭배와 밀접히 관련된 부정적 의미로 나타남을 기억할 때 그것은 타당하다. 게다가 이스라엘 역사의 황금기를 회상하며 기록했을 열왕기 저자는 여기 3절에서 솔로몬 왕국의 번영 이유와 타락 이유를 나란히 기록했음직도 하다. 그러나 당시 주님의 성전이 지어지기 전이고(2절), 다음 장면에서 산당은 솔로몬이 주님께 지혜를 받는 긍정적 장소로 나타나는 점을 고려할 때(4-15절), 아직 지나치게 부정적 의미를 부여하지는 말아야 한다. 다만 위험한 가능성을 가질 뿐이다. 그 위험의 가능성은 다음 두 가지이다. 즉 주님의 유일 중앙 성소 명령(신명 12,5-14)을 소홀히 할 위험성과 산당을 중심으로 드려지는(신명 12,2) 가나안 족속의 우상 숭배 행위를 본받을 위험성이다.
따라서 주님의 성전이 완공된 이후, 이러한 산당은 전혀 불필요했고 또한 결코 합법적이 될 수 없었다. 다만 철저한 파괴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과 통치자들은 너무나 오래도록 산당 제사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선왕(善王)들 조차도 산당을 없애는 데 소홀히 했으며, 이로 인해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당으로 말미암아 우상 숭배 행위에 빠져들고 말았다.
1열왕 3,4-15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꿈을 꾸다
“임금은 제사를 드리러 기브온에 갔다. 그곳이 큰 산당이었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그 제단 위에서 번제물을 천 마리씩 바치곤 하였다. 이 기브온에서 주님께서는 한밤중 꿈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느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셨다”(4-5).
'기브온'(Gubeon)은 예루살렘 북서쪽 약 10km지점에 위치한 해발 722m 가량의 이스라엘 중부의 주요 성읍이다. 가나안 정복 후 처음 이곳은 베냐민 지파에게 분배되었으나(여호 18,25), 후에 레위 지파의 성읍으로 구별되었다(여호 21,17). 이곳 기브온의 산당이 특별히 유명하게된 것은 사울의 놉(Nob) 사제들 학살 사건(1사무 22,11-19)이후 놉에 있던 주님의 장막이 기브온으로 옮겨지고 나서 부터였다. 즉 그 때 이후로 하느님의 성막이 있는 기브온과 하느님의 법궤가 있는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2대 제사 중심기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즉위 후 솔로몬은 '일천 번제'라는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제단'이 있는 기브온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하고, 신하들과 백성의 대표들을 이끌고 기브온으로 올라갔던 것 같다(2역대 1,2-6). 기브온에서 솔로몬이 꿈에 본 계시는 그의 통치를 이스라엘, 특히 다윗과 맺는 하느님의 계약으로 통합시키는 역할을 한다(3,5-14).
“하느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셨다” 하느님의 나타나심은 솔로몬의 강렬한 헌신인 일천 번제에 이어 발생한 것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솔로몬의 희생 제물을 기쁘게 받으셨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을 통해 큰 일을 하시고자 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솔로몬의 일천 번제는 이제 시작될 통치에 대해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청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솔로몬에게는 주님의 뜻에 부합될 정당한 간구를 할 만반의 채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자신의 소원을 말하기 전에 솔로몬은 먼저 이미 베푸신 하느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있다. 이처럼 과거에 이미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크신 은혜를 기억하고, 먼저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은 모든 간구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기본 자세이다.
“그러니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어느 누가 이렇게 큰 당신 백성을 통치할 수 있겠습니까?”(9). 솔로몬이 요청한 첫 선물은 사람들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하는 데 필요한 “듣는 마음”(3,9)이었다. 주님께서는 그의 청에 기뻐하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것을 청하였으니, 곧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너 같은 사람은 네 앞에도 없었고, 너 같은 사람은 네 뒤에도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11-12). 하느님은 솔로몬에게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지혜와 분별하는 마음을 주는 것으로 응답하신다.
하느님은 지혜와 더불어 부, 명예라는 선물을 솔로몬에게 더 내려주신다. ㄱ리고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걸었듯이 내 길을 걸으며, 내 규정과 내 계명을 지키면 네 수명도 늘려주겠다”(3,14)고 약속하였다.
1열왕 3,16-28 솔로몬의 판결
이 일화는 솔로몬의 지혜를 드러내려는 한 예이다. 이 지혜는 철학자의 자질이 아니라, 구체적 상황에서 진실을 알아내고 밝히는 데 필요한 분별력을 말한다. 한 아이를 가운데 놓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며 싸우는 어머니들을 다룬 이야기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면서 임금은 ‘칼을 가져오너라.’ 하고 말하였다. 시종들이 임금 앞에 칼을 내오자, 임금이 다시 말하였다. ‘그 산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쪽은 이 여자에게, 또 반쪽은 저 여자에게 주어라”(24-25). 그러자 산 아이의 어머니는 울면서 아이가 산 아이를 자기 아이라로 주장하는 여인에게 주라고 말한다. 자기 아이가 아닌 여인은 아이를 둘로 나누라고 말한다. “그때에 임금이 이렇게 분부하였다. ’산 아기를 죽이지 말고 처음 여자에게 내주어라. 저 여자가 그 아기의 어머니다”(27).
여기서 지혜는 장수, 부 그리고 적을 이기는 것보다 더 훌륭한 것으로 등장하며(3,11), 선한 삶을 위해서는 분별하는 마음과 정신이 중요하다는 확신을 보여준다. 그런 지혜는 하느님의 선물이고 사실상 하느님의 삶으로 인도해 주는 것이다(3,28).
1열왕 4,1-20 솔로몬의 대신들
“솔로몬 임금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임금이었을 때,”(1). 솔로몬이 왕이 된 사실을 새삼스럽게 기술하는 까닭은 다음에 계속해서 내각, 행정 구역, 문화 및 건축 등 솔로몬 왕국의 일반적인 면모를 기술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마치 국정(國政) 보고서의 첫 서두와도 같은 공식적 서술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시작되는 4장 전체는 연대순으로 기록되었다기 보다는 솔로몬 통치의 업적을 총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이스라엘이 왕정 체제로 들어서게 된 이후 솔로몬 이전에 두 왕이 있었다. 그 두 왕은 곧 사울과 다윗이다. 먼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판관 시대에서 왕정시대로 이전되어 가는 과도기의 왕으로서, 당시 이스라엘은 지파들 간의 동맹(同盟)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관료 정치나 세금 체제, 궁정생활 등이 미숙했을 뿐 아니라 매우 단순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이스라엘 왕국은 다윗에 의해 발전되었고 확장되었다. 즉 다윗은 국내적으로는 여러 조직을 확대 개편하고 체계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는 주변 여러 국가들을 정복하여 국경을 넓히고 조공을 거두어 들였다. 무엇보다도 여부스 족으로부터 예루살렘을 빼앗아 강력한 수도를 만들었다. 다윗은 이러한 모든 일을 수행키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 했다. 따라서 다윗도 그의 통치 초기에는 이스라엘의 일부만을 통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부왕 다윗이 숱한 피를 흘려 이룩해 놓은 거대한 왕국을 순순히 이어 받았다. 따라서 솔로몬의 역할은 거대한 왕국 이스라엘을 더욱 결속력있게 하나로 결합시켜 유지해 나가며, 그로 인해 대내외로 힘을 확장시키는 일이었다. 이러한 일을 위하여 솔로몬은 무엇보다 정치, 행정, 외교, 세제 등의 조직을 더욱 확대 개편하고 체계화시키는 일과 중앙 집중화시키는 일을 착수해야했다. 아무튼 솔로몬은 통일 왕국 이스라엘 최전성기의 왕으로서, 그 이전과 그 이후에 솔로몬처럼 그의 생애 내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므로 결국 이 모든 것은 다윗 언약(2사무 7,12-16)에 근거하여 기브온 산당에서 솔로몬에게 약속하신(3,11-14) 하느님의 약속 성취의 결과였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그 수가 바다의 모래처럼 많았다. 그들은 먹고 마시며 행복하게 지냈다”(20). 창세 22,17의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라는 표현이 20절에서 그대로 반복 사용되었다. 이것은 일찍이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자손 번성의 약속이 솔로몬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전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고자 함이다. 솔로몬 시대의 백성들이 일반적으로 풍요를 누리는 태평 성대(太平聖代)의 상태임을 보여 주고 있다.
1열왕 5,1-14 솔로몬의 이름을 떨치다
“솔로몬은 유프라테스 강에서 필리스티아 땅까지, 그리고 이집트 국경에 이르기까지 모든 나라를 다스렸다. 그들은 솔로몬이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조공을 바치며 그를 섬겼다”(1).
솔로몬 왕국의 판도가 북(北)으로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서(西)로는 지중해 연안의 필리스티아, 그리고 남(南)으로는 이집트의 국경에까지 이르는 광활한 지역이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그 판도내의 모든 국가들이 솔로몬의 속국이 된 것이다. 물론, 모압, 소바, 에돔 등은 선왕 다윗이 정복한 국가들이지만 솔로몬 시대의 국력이 여전히 강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지배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2사무 8,1-14). 이처럼 이스라엘이 주변 국가들에 대해 종주국의 지위를 가진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드문 일이다.
일반적으로 고대 국가에서 강력한 통치자가 죽게 될 경우 주변 속국들은 조공을 철회하고 독립을 꾀하곤 하였다. 이것은 새 왕의 통치 능력에 대한 일조의 시험이기도 한데, 따라서 새로 즉위한 왕은 자신의 통치 능력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 정벌 원정에 나서곤 하였다. 그러나 다윗 사후 솔로몬 통치하에서는 이러한 정벌 원정이 필요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주변 속국들이 변함없이 조공을 바침으로써 충성을 다짐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는 솔로몬으로 하여금 평화 중에서 성전 건립에 전심 전력케 하려는 하느님의 축복의 결과였다. 한편, 당시 공물로 사용된 것으로는 금, 은, 옷,향품, 갑옷, 말, 노새 등이 있었다(10,25).
“솔로몬의 하루 양식은 고운 밀가루 서른 코르와 거친 밀가루 예순 코르, 살진 소 열 마리와 목장 소 스무 마리와 양 백 마리였고, 그 밖에 수사슴과 영양, 수노루와 살진 새들이 있었다”(2-3).
'코르'(*)는 액체나 고체로 된 물질의 용량을 재는 제일 큰 단위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얼마만큼의 양을 가리키는지는 확실치 않다. 대략 1석은 230리터로 추정된다. 많은 주석가들은 데니우스(Thenius)의 계산을 따라 2절에서의 밀가루 구십 코르란 14,000명의 하루치 빵을 만들 수 있는 양으로 본다. 한편 여기서 '고운 밀가루'(fine flour)와 '거친 밀가루'(meal)를 구별하여 기록한 이유는 확실치 않다. 아마 궁궐 내에서 비교적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가는 밀가루로 만든 빵을 먹었던 것 같다.
살진 소는 살이 찌도록 외양간에서 사육한 비육우(肥肉牛)를 가리키고, '목장의 소'는 방목(放牧)하여기른 목장의 소를 가리킨다. 살진 소 10마리와 목장 소 20마리란 솔로몬 궁궐과 관련 있는 14,000명의 인원이 각기 한근 이상을 먹을 수 있는 분량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소비량은 고대 동양의 다른 강대국 왕궁들의 그것과 비교하면 지나친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솔로몬 왕국의 경제적 풍요를 가히 짐작케 하는 것이다.
‘살진 새들'(바르부림 아부심)이란 말은 여기서만 찾아볼 수 있는 말이다. 아마도 '거위'같은 식용(食用)으로 사육된 조류를 지칭하는 듯하다.
“솔로몬에게는 병거 끄는 말을 두는 마구간이 사만 칸 있었고, 기병이 만 이천 명 있었다”(6). 여기서 '사만'(아르바임 엘레프)은 '사천'(아르바아 엘레프)의 필사상 오기(誤記)일 것이다. 이렇게 판단할 수 있는 까닭은 병행 구절인 2역대 9,25은 '사천'으로 기록되어 있다. 1열왕 10,26의 병거 일천 사백과 마병 일만 이천의 숫자로 미루어 '사천'이 보다 타당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와 매우 뛰어난 분별력과 넓은 마음을 바닷가의 모래처럼 주시니, 솔로몬의 지혜는 동방 모든 이의 지혜와 이집트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났다”(9-10).
'지혜'라는 말인 '호크마'는 매우 실제적(practical)인 것으로서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하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적절히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지칭한다. 원래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 때는 '솜씨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서 비단 장인(匠人)들 뿐만 아니라 시, 음악 등 모든 문화의 분야에서 재능과 총명을 발휘하는 인물을 뜻한다. 즉 '지혜로운 사람'이란 인생의 전반적인 문제에 대하여 남다른 분별력과 통찰력을 지닌 사람을 말한다. 또한 '지혜'는 온전한 영적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가장 실제적인 능력은 자신과 하느님간의 온전한 영적 상태에서 나온다는 사상이 여기에 담겨 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지혜는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지혜(호크마)의 근원은 주님을 경외함이니"(시111,10), "보아라, 주님을 경외함이 곧 지혜며 악을 피함이 슬기다"(욥 28,28) 등의 성구는 이러한 사상의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분별력’이라는 말인 '테부나'는 예리한 판단력으로서 어렵고 복잡한 문제를 정확히 해결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것 역시 '지혜'와 마찬가지로 매우 실제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넓은 마음’의 '로하브 레브'는 '다방면에 걸친 해박(該博)한 지식'을 뜻한다. 원문의 뜻은 '큰 넓이를 가진 마음'이라 할 수 있다. 특별히 여기서 '마음'은 '두뇌','지식'의 뜻에 해당한다. 그리고 '넓이'는 다양한 분야의 광범위한 지식을 수용(受容)할 수 있는 두뇌의 용량(容量)을 말한다.
'바닷가의 모래'라는 표현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음과 풍부함을 표현하는 관용 어법이다. 여기서는 앞의 '넓은 마음'과 관련하여 솔로몬이 다방면에 걸쳐 광범위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1열왕 5,15-32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준비하다
“솔로몬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임금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티로 임금 히람은 언제나 다윗을 좋아하였던 까닭에 솔로몬에게 신하들을 보냈다”(1). 솔로몬의 탁월한 지혜의 명성은 많은 민족들에게 널리 퍼졌고, 결국 많은 나라의 왕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방문토록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이 문화 예술 등 제반분야에서 선진국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변의 국가들은 솔로몬 왕국과의 교류를 적극 원했을 것이고, 왕들은 직접 혹은 대사를 통해 접촉을 시도하고자 했을 것이다(5,1;10,1). 그리고 솔로몬은 개방 정책을 펴서 많은 방문객들을 맞아들였던 것이다. 스바 여왕의 방문은 여기에 대한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10,1-13).
히람이 보낸 사절단을 계기로 솔로몬은 사절단의 편으로 성전 건축에 협력을 요청하는 서신을 히람에게 전한다. 그런데 이 서신은 히람의(8절)와 함께 두로의 문서 보관서에 보존되었다는 내용이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나타난다.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한 많은 준비를 생전에 했었다(대상 22장). 그 중에는 많은 기술자 및 백향목을 티로와 시돈으로부터 공급받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티로 왕 히람 역시 이러한 다윗의 성전 건축 준비 작업을 이미 도운 바 있었다. 그러므로 마땅히 히람은 다윗의 성전 건축 계획과 성전건축을 향한 열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 건축을 시도할 수 없었던 까닭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윗이 성전 건축을 열렬히 소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도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한다. 즉 다윗은 잦은 전쟁을 치러야 했으므로 성전 건축의 기회나 여유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형편에도 불구하고 다윗 자신은 성전 건축을 기대했으나 하느님께서 이를 허락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빈번한 전쟁을 치른 결과, 다윗은 피를 많이 흘리게 하였으므로, 하느님 보시기에 평화의 성전 건축에 적격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나탄을 통하여 '성전 건축'에 대한 당신의 뜻을 명확히 전달한 바 있었다. 즉 2사무 7,12에 나타난 말씀으로, 그것은 다윗의 후계자로 말미암아 성전 건축을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다윗은 자신의 후계자가 될 솔로몬에게 이러한 성전 건축 사역에 대해 간곡히 권했던 것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려는 것은 자신의 야심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과 부친 다윗의 유지(遺志)를 따르려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목재를 교섭하는 교역 약조를 솔로몬이 티로 왕 히람에게 제안하고 있다. 이로 보아 향백 나무 숲이 있는 레바논 일부 지역이 히람의 통치 영역에 속했던 것 같다. 아무튼 레바논은 고대에 행백나무의 산지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향백나무는 성장하는 데 수백년이 걸리고, 곧고 아름다우며, 목재의 쓴맛 때문에 병충해가 적다는 특징 등으로 해서 매우 값진 건축재였다.
티로 왕 히람은 솔로몬의 교역 제의를 받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 주된 이유는 당시 강력한 세력을 지닌 이스라엘과 탄탄한 정치적 우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통상 관계를 통해서도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 페니키아(티로와 시돈) 지역은 좁은 해안지대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작물 재배가 여의치 않았다. 따라서 페니키아는 이스라엘에 곡물 수입을 의존해야만 했다.
“이렇게 솔로몬의 건축가들과 히람의 건축가들과 그발 사람들이 돌을 깎아 내고, 주님의 집을 지을 나무와 돌을 마련하였다”(32). 솔로몬이 히람과 협정을 맺은 목적인 성전 건축 준비 작업이 마무리 되었음을 보여 준다. 한편, 70인역은 이 모든 준비를 갖추는 데 3년이 걸렸다고 덧붙인다. 이러한 추론은 아마도 본격적인 성전 건축 공사가 솔로몬 즉위 제 4년째부터 시작되었다는 1열왕 6,1의 연대기적 진술에 근거한 것 같다. 왜냐하면 솔로몬과 히람의 협정은 분명 솔로몬 즉위 초에(5,1) 진행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후대의 성경 편집자들이 모세를 율법서의 저자로, 다윗을 시편 저자로 간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의 지혜문학에 해당하는 책들은 솔로몬을 저자로 돌린다. 성경의 지혜문학은 실제로 솔로몬 시대에 생겨났다. 이스라엘에 이제 처음으로 등장한 부유한 궁궐 사람들은 지혜와 관련해서 교육의 필요성에 직면한다. 그리하여 부와 군사력보다 인간의 변화, 마음 또는 정신을 갈고닦는 것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기원은 솔로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열왕 6,1-38 솔로몬이 성전을 짓다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은 고대 세계의 경이로운 건축물 가운데 하나인데 최초로 하느님께 봉헌된 정교한 건물이었다. 이 성전은 히브리어로 단순히 ‘그 집’이라고 불린다. 현대 고고학에 따르면 그 건물은 다윗의 도성 북쪽 언덕에 세워졌는데, 오늘날 무슬림의 ‘바위의 돔 사원’이 있는 곳이다. 1역대 22,1에 따르면 이 장소는 오르난(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었을 것이다(2사무 24,15-25 참조). 건축공사는 페니키아인들(5,20)과 이스라엘 부역꾼에 의해 행해졌다(5,27).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사 년째 되던 해 지우 달,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은 주님의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1). 왜 480년인가. 이 480년은 대략 광야 생활 40년, 가나안 정복기 및 평정기 32년, 판관 시대 331년, 사울의 통치기 33년, 다윗의 통치기 40년, 솔로몬의 즉위 후 4년 등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한편, 열왕기 저자가 성전 건축 시기를 특별히 에집트 땅에서 나온 것으로 기준해서 기술한 까닭은, 성전 건축은 곧 약속의 땅에 대한 그 때까지의 임시적 상태에 종지부를 찍고 항구적 소유를 표징(表徵)하는 신기원(新紀元)으로서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솔로몬 임금이 주님께 지어 바친 집은 그 길이가 예순 암마, 너비가 스무 암마, 높이가 서른 암마였다”(2). 히브리어로 암마는 팔꿈치에서 손가락 끝까지를 가리키며 한 암마는 약 45cm이다. 따라서 성전의 규모를 환산해 보면, 대략 길이가 27.36m, 너비가 9.12m, 높이가 13.68m 가량이다. 그런데 이 규모는 당시의 대 건축물에 비하며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다. 이유인 즉 아마 이곳은 일반 백성들이 모여 예배하는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하느님이 거처하는 상징적인 장소로서 오직 제사장들만이 드나드는 곳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에는 제의에 사용되는 기물과 신성한 비품이 보관되었다. 그 성소 안쪽은 지성소로 길이와 너비가 각각 스무 암마였다. 이곳에는 계약 궤를 날개로 덮어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커룹상과 계약 궤와 다른 보물들(창세 3,24; 에제 28,14-16 참조)이 있었다. 커룹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진 존재이다. 그것의 구실과 모습은 다양하게 묘사된다. 6장에서 커룹의 모습은 사람의 머리와 날개를 가진 네 발 달린 짐승으로 나타나고, 그 구실은 계약 궤를 날개로 덮어 보호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창세 3,24).
이 안쪽 성소는 ‘거룩한 곳 중에 거룩한 곳’(8,6)이라고 불리는데 ‘가장 거룩한’이라는 형용사 최상급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표현이다. “솔로몬은 집의 가장 깊숙한 곳에 안쪽 성소를 마련하고, 그곳에 주님의 계약 궤를 모셨다”(19).
이 건물 주위에는 곁채와 사람들이 모이는 넓은 곁방들이 이어져 있었다. 일반적인 성전 건축 양식은 1열와 5,15-32에서 인정하듯이 페니키아의 영향을 반영한다.
솔로몬 성전은 규모 때문만이 아니라 채석장에서 다듬은 돌, 향백나무를 사용한 목공예, 금, 은, 값진 직물로 지어진 건물의 아름다움 때문에, 그리고 지성소 안 계약 궤 위에 있는 하느님의 ‘신비스런 현존’(후대에 세키나라고 불림) 때문에 널리 알려졌다.
“제사년 지우 달에 주님의 집 기초가 놓였다. 그리고 제십일년 불 달, 곧 여덟째 달에 그 집은 모든 부분이 설계한 대로 완공되었다. 솔로몬이 그 집을 짓는 데에는 일곱 해가 걸렸다”(37-38).
제사년은 기원전 986년경이다. 자우 달은 히브리 종교력의 둘째 달(2월)이다. 그리고 '지우'는 '밝음', '찬란함' 등의 의미를 가진 가나안어에서 생긴 말로 추정된다. 그래서 지우 달은 오늘날의 태양력으로는 4, 5월 경이므로 꽃들의 찬란함에서 주님의 집 기초를 놓았던 것이다.
‘제십일년 불 달 곧 여덟째 달’이라는 말에서 '불'은 히브리 종교력의 여덟째 달(8월)로, 오늘날 태양력으로는 10-11월에 해당한다. '불월'에 해당하는 히브리 종교력 8월(오늘날 태양력 10-11월)은 팔레스틴의 기후상 우기(雨期)일 뿐더러 과수의 열매를 추수하는 달이므로 이처럼 명명된 것 같다. 솔로몬 성전의 전체 건축 내용은 일찍이 선왕(先王) 다윗이 솔로몬에게 일러준 것이다. 나아가 성전의 설계와 식양은 다윗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성전 건축은 솔로몬 즉위 4년 불월(B.C. 966년 2월)에 기초석을 놓음으로 시작하여(6,1), 솔로몬 즉위 11년 완공되었다. 따라서 건축 기간은 보다 정확히 7년 6개월 걸린 셈이다. 그런데 성전 건축에 걸린 이 기간은 고대의 다른 대건축물에 비하면 그리 길다고는 할 수 없다. 에페소의 다이아나(Diana) 신전 건축은 무려 200여 년이 걸렸다고 한다. 또한 이집트의 피라밋 건축에는 대개 20년이 소요된다. 이와 비교하면 그토록 화려하고 정교한 건물을 완공하는 데 7년 남짓 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성전이 비교적 작은 규모였다는 점, 많은 인력이 집중적으로 투입되어 최선을 다했다는 점, 그리고 다윗 시대부터 세심한 준비가 축척되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솔로몬 성전 건축은 긴 세월 동안 정성을 다한 대건축 사업이었던 것이다.
이 역사를 편집한 신명기계 역사가들에게 성전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하느님께 희생 제사를 바치는 곳으로 하느님이 선택하신 유일한 장소였다(신명 12,4-6).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480년(12×40)후라는 상징적인 성전 건축 연대는 이 성전이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마지막 도구였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기 위해 솔로몬에게 주어진 신탁(6,11-13)은 성전이 지속적으로 현존하기 위해서는 조건을 지켜야 함을 암시한다(3,14; 9,4-9 참조). 순종이 희생제사보다 더 중요하고 하느님은 성전보다 위대하시다.
1열왕 7,1-51 솔로몬의 궁전을 짓다
“솔로몬이 열세 해에 걸쳐 자기 궁전을 짓고, 궁전 전체를 마무리하였다”(1). 솔로몬 궁전은 ‘레바논 수풀 궁’(2), ‘기둥 별실’(6), ‘왕좌 별실’(7), 그리고 솔로몬 거처와 파라오 딸의 거처로(8)로 이루어 졌다.
“그는 또 ‘레바논 수풀 궁’을 지었는데, 그 길이가 백 암마이고 너비가 쉰 암마이며 높이가 서른 암마였다. 넉 줄로 된 향백나무 기둥 위에다 향백나무 서까래를 얹고”(2). 아마도 이 궁은 매우 서늘하고 쾌적한 장소였을 것이다. 왜냐 하면 향백나무의 숲이 근동의 더위를 잊게 할 만큼 시원한 그늘을 형성했었기 때문이다. 레바논 수풀 궁의 크기는 길이 백암마(52-54m), 폭이 50암마(26-27m), 높이 30암마(15-16m) 가량 이다. 즉 높이만 성전과 같고 길이와 폭은 성전보다 두배 가량 더 크고 넓다(6,2).
솔로몬 임금은 사람을 보내어, 티로에서 히람을 데려왔다. 히람은 청동 기술자로 청동 기둥을 만들었다. “그는 성소 현관에 기둥을 세우고, 오른쪽에 세운 기둥의 이름을 야킨이라 하고, 왼쪽에 세운 기둥의 이름을 보아즈라 하였다”(21). 이 두 기둥이 왜 있는지, 그리고 왜 이런 이름이 붙여졌는지를 두고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아직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야킨은 ‘그가 굳건히 세웠다’는 뜻이고, 보아즈는 ‘그에게 힘이 있기를!’이라는 뜻이다.
“그다음에 그는 청동을 부어 바다 모형을 만들었다. 이 둥근 바다는 한 가장자리에서 다른 가장자리까지 지름이 열 암마, 높이가 다섯 암마, 둘레가 서른 암마였다”(23). 바다란 큰 청동 대야를 말한다. 이 큰그릇은 우주적 대양의 상징이었던 것 같다. 2역대 4,6에 따르면 이 바다 모형에 담아 놓은 물로 사제들이 씻었다고 하는데, 이 그릇의 정확한 용도는 추측만 할 뿐이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바다의 두께는 한 테파이며, 그 가장자리는 나리꽃 모양으로 된 잔의 가장자리처럼 만들어졌다. 이 바다는 물 이천 밧을 담을 수 있었다”(26). 테파는 길이의 단위로 한 뼘을 가리킨다. 그리고 1밧은 40리터이다. 이천 밧은 80,000리터이다. 청동 바다 모형은 이렇게 많은 양의 물을 반밖에 담아 두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또 청동으로 받침대 열 개를 만들었다. 각 받침대는 길이가 네 암마, 너비가 네 암마, 높이가 세 암마였는데,”(27). 이 열개의 청동 받침대는 물두멍을 받치기 위한 것이다. '두멍'이란 물을 길어 붓고 쓰는 통을 말한다. 그이 열 개의 물두멍은 희생 제물을 씻는데 사용되었으며 성전의 좌우 양편으로 다섯 개씩 갈라져 위치하였다. 이 청동 받침대 크기는 길이와 폭이 각각 2-2.16m 똑같았고, 높이는 1.5-1.5m였다. 따라서 이 청동 받침대는 사각형의 상자 모양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솔로몬 임금이 시행한 주님의 집 공사가 모두 끝났다. 솔로몬은 자기 아버지 다윗이 봉헌한 물건들, 곧 은과 금과 기물들을 가져다가 주님의 집 창고에 넣어 두었다”(51). 열왕기 분문은 주님의 집에 속하는 보물들과(15,18) 임금의 집에 속하는 보물들을 구별한다(14,26). 이 보물들은 가끔 임금이 섬기게 될 적국에 바쳐야 햐는 조공으로 이용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