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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 요한계시록 강해(87) -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 Ⅰ
본 문 : 계시록19: 15 ~ 16
계19:15~16절입니다. “ⓐ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에 밟겠고
ⓐ 그 옷과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먼저 말씀을 분석하여 그 의미를 설명하고 난 후 이어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는 주제에 대한 의미를 자세히 강해하려고 합니다.
15절에 보면, 15절ⓐ ‘그의 입에서 이한 검’(,ῥομϕαία ὀξεια=sword sharp)이 나온다’고 합니다. 여기의 ‘이하다’(ὀξεία)라는 말은 ‘날까롭다’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계1:16절의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ῥομϕαία δίστομος ὀξεια=sword two mouthed sharp)이 나온다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또한 이는 사11:4에서 메시아가 세상을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라는 말씀을 배경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계시록에 서 ‘이한 검으로 만국을 치겠고’라고 한 것은 사11:4의 ‘막대기로 치다’라고 한 것과 비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의 두 본문에서 ‘치다’라는 동사가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고,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이사야에서의 ‘막대기’를 ‘검’(칼)로 바꾸어 표현하는 것은, 사49:2절의 “내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살(화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라는 말씀에서 사용되는 ‘칼’과 ‘화살’과 같은 표현의 영향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 15절에서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라는 말씀은 사11:4절과 49:2절의 조합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형을 통하여 우리는 요한이 그리스도를 우주적 심판의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 표현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70인경(B.C.2세기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을 보면, 사11:4절의 ‘그 입의 막대기’를 ‘그 입의 말씀’(τω λόγο του στόματος αὐτου)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70인경 번역자는 ‘그의 입의 막대기’를 곧 ‘말씀’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11:4절을 배경으로 하는 본문 15절의 ‘이한 검’ 곧 ‘날카로운 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은 올바른 판단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검이 날카롭다’는 표현이 주어지는 것은 그 말씀의 역사가 매우 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본문 15절에 이어지는 말씀, 15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라는 말씀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것으로’는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검으로’라는 의미로,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입에서 날카로운 검이 나오는 것은 바로 말씀으로 만국을 심판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히4:12~13절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히4:12~13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위의 히브리서 말씀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의 예리함과 하나님의 심판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기록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어지는 말씀 15절ⓒ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는 앞의 ‘이한 검’과 ‘치다’라는 말씀과 동일한 내용을 달리 표현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곧 ‘이한 검’을 ‘철장’으로 바뀌고, ‘치다’는 ‘다스리며’로 변형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시2:9절의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라는 말씀을 배경으로 주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5ⓓ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라는 말씀은 15ⓐⓑⓒ에서 이야기한 내용보다 좀 더 직접적인 표현으로 그 의미를 선명하게 해 주는 목적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에서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모든 심판의 사역에 있어서 완전하신 분이심을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백마 타고 오시는 예수님께서 심판의 사역에 있어서 완전함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을 것임을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맹렬한 진노’(του θυμου της ὀργης=the anger of the wrath)란 직역하면 ‘분노의 진노’라는 말인데, 이를 진노에 대한 강조로 보고 이를 ‘맹렬한’이란 형용사를 사용하여 번역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이중적 표현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심각하게 주어지고 있는가를 드러내려는 목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도주 틀을 밟는다’라는 구절은 이미 계14:19~20절에서 언급하였던 것으로 심판에 대한 이미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포도주 틀을 밟을 때 튀어 오르는 포도즙에 의해 옷이 젖게 되는데 이러한 정황은 계19:13절에서 피에 흠뻑 젖은 옷을 입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잘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도주는 ‘피’에 상응하는 상징적 이미지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이는 계17:2절에서 ‘포도주’를 계17:6절에서는 ‘성도들의 피’로 비유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만국이 진노의 포도주 틀에 밟히듯 심판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그들 역시 성도들의 피를 흘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다음 16절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에 대해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16절ⓐ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여기에 의하면 그 이름이 옷과 다리에 쓰여져 있다고 합니다. 이는 ‘다리 부분의 옷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리 부분에 있는 옷에 예수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이름은 ⓑ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입니다. 예수님에게 붙여진 이름은 계19장에서만 네 번 째입니다. 첫 번 째가 ‘충신과 진실’, 두 번째가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는 이름, 세 번 째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바로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라는 주제에 대해 강해하겠습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Βασιλεὺς βασιλέων κύριος κυρίων=King of king Lord of lord) 여기에 쓰인 ‘바실류스, 큐리오스’는 왕, 통치자, 다스리는 자, 주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엡1:10절에 보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는 그리스도의 나라 안으로 들어와 그 안에서 통일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이었습니다. 오늘 계시록 본문이 바로 그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이 가시적으로 완성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은 창세전에 성자 하나님과의 언약으로부터 시작이 되었고, 성자 하나님은 이 땅에 인간 예수로 오셔서 그 언약을 지켜내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영적으로는 이미 완성이 된 것입니다.
엡1:20~22절을 펴십시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이처럼 하나님은 이미 만물을 우리 주님의 발아래 복종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이 본문의 내용처럼 반드시 이 시간이라는 역사 속에서도 완성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계획을 완성하시기 위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이 완벽하게 이루어지게 될 것임을 미리 보여 주고 있습니다.
창1:26~28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창1:28절의 말씀을 단순히 인간에게 주신 문화명령이라고만 알고 있어요? 그런 생각의 배경에는 화란의 유명한 개혁주의 신학자인 ‘아브라함 카이퍼’가 이 명령을 근거 삼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문화의 다양한 영역에서 세상의 왜곡된 문화를 개혁하고 기독교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또 그렇게 살다가 갔습니다.
그러나 이 명령은 단순히 아담에게 주신 문화명령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구절의 말씀은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국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미리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무산 된 것처럼 보였지만 여자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이 창1:28절의 명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 될 것임을 성경 전체가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창3:15절을 보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 보면 하나님은 이미 죄라는 매개체로 하나가 되어 버린 여자와 뱀을 원수로 만들어 버리시겠다고 공언하십니다. 그 말은 둘 중의 하나는 여자의 후손을 통해 내 편으로 만들겠다는 복된 은혜 언약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1:28절과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창3:15절을 연결시켜 보십시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들을 품에 품고 만물을 영원히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완성하실 거라는 것을 미리 계획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영원한 계획은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어졌고, 오늘 분몬 계19장에서 가시적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품에 안고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의 등장하심으로 언약을 완성시키시는 장면인 것입니다. 아담이 실패한 창1:28절의 명령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품에 안고 십자가 안에서 완성해 내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왕 노릇은 종말에 가서 가시적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은 지금도 성도로서의 우리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와 있으며, 우리는 이 역사와 시간 속에서, 이 물질 세계 속에서도 이미 그 왕 노릇을 하고 있음을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골1:13~15절을 찾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여기서 증언하기를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미 그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라고 확언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을 우리가 성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실이 이미 믿음으로 확인된 사람들은 이 땅에서 다가오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을 미리 살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왕 노릇이란, 내가 어떤 존재 위에 군림하는 그런 왕 노릇이 아닙니다. 진정 어떤 것이 하나님 나라의 왕 노릇입니까? 우리의 주인이신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떻게 왕 노릇을 하다가 가셨습니까?
빌2:6~11절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끓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께서 자기를 비우시고 종의 모습으로 원수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것은 단순히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일회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의 삶 자체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왕이 담고 있는 내용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삶의 원리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자리에 올라앉아 있는 ‘나’라는 거짓된 자아를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나’ 이외의 다른 이들을 공격하고 통제했던 그 육적인 ‘나’를 해체시키고, 다른 이들을 위해 내가 희생하여 그 상대방을 살려내고, 그의 유익을 위한 삶을 살게 만드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유쾌한 종노릇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왕 노릇’인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자기를 비워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끓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왕 노릇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으로 가봅시다.
요13:4~5, 13~15절입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이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우리가 싫어도 억지로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바로 종의 발까지도 성심껏 닦아주시는, 곧 다른 이들을 섬기는 종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왕의 모습이라는 것을 본보기로 보여 주시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 그분과 함께 할 모든 추종자들에게 너희도 이 종의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곧 ‘자기 부인’(自己 否認)인 것입니다. 내가 낮아져서 다른 이들이 유익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한 사도들은 그 주님의 말씀대로 다른 이들을 섬기는 종으로서의 삶을 살아 냈던 것입니다.
고후4: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이처럼 예수님께서 나의 주인,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위해 내가 다른 이들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라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종’이 되는 연습을 하다가 가는 것입니다.
정말 멋지고도 거룩한 이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이름! 모든 사도들이 자신을 그렇게 불렀던 이름 - ‘둘로스 예수 크리스토‘(δουλος Χριστου)라는 이름입니다.
내 자아가 죽고 새로운 자아, 예수에게 다스림을 받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에 순종하는, 그 새로운 피조물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 바로 성도인 우리들의 삶인 것입니다.
고대시대의 노예들은 모두 전쟁에서 패한 나라의 일반 백성이나 귀족, 왕족들이었습니다. 나름 귀하게 살던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자기 나라에서 살던 ‘습관, 성격, 자유민의 정신’ 등, 이런 것들을 다 내려놓게 만드는 데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렇게 전문적으로 노예를 길들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둘라 고게오’(δουλαγωγέω)였다는 것입니다. 그 단어가 고전9:27절에 나옵니다.
고전9:27절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여기서 ‘쳐서 복종하게 하다’라는 단어가 바로 ‘둘라 고게오’(δουλαγωγέω)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인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 위해 ‘둘라 고게오’ 곧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하도록 하는’ 그 과정을 통과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신앙생활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자가 되거나 가난하거나, 병에 걸리거나 병이 낫는 것, 유명해 지거나 그렇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것 등 이런 것들은 신앙생활과 전혀 함수 관계가 없는 것들입니다. 신앙생활의 열매는 ‘여러분의 육이, 그 거짓 자아가 얼마나 죽었느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변해있는가가 바로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5:22~23) 이 모든 것이 다 뭡니까? 모두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 입으로 자기 안에서는 그러한 열매가 분명히 나타났다고 수차례 언급하고 있습니다.
갈6:17절을 펴십시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여기서 ‘예수의 흔적’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스티그마타 투 예수스’(στίγματα του `Ιησου=brands of Jesus)입니다.
옛 로마 시대 이전 시대, 그러니까 헬라 시대나 그 이전의 폴리스 시대 때는 노예들의 인권이 상당히 보장이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근대 시대 이후 노예하면 무조건 사탕수수 밭이나 목화밭에서 죽어라고 일만 하는 ‘쿤타킨테’를 떠올리는데, 고대 시대의 노예들은 그렇게 육체적인 노동을 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음악 하는 사람들, 미술 하는 사람들, 연극인, 이런 예술 하는 사람들과 의사, 상담가, 가정교사‘ 이런 사람들이 모두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인권을 존중해 주었는가 하면 당시 헬라 시대의 어떤 주인이 쓴 일기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 집 노예들이 너무 말을 듣지 않는다. 밭을 좀 갈라고 매일같이 잔소리를 해도 전혀 듣지를 않는다. 어제도 나 혼자 밭을 갈았다. 오늘도 우리 노예들은 놀고 나 혼자 밭 갈러 나간다’ 주인이 속이 터집니다.
그런데 로마 제국 시대로 접어 들면서 강력한 중앙 집권체제가 확립되고 노예들은 그 막강한 제국을 떠받치는 중요한 노동력이 되었기 때문에 노예들은 귀족들과 확실하게 구분시켜서 노예들에게는 주인의 소유를 표시하는 문신을 새겼습니다. 바로 그 문신이 ‘스티그마’(στίγμα=brand)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흔적’(스티그마타 투 예수스)이라는 말은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인의 소유된 그분의 종’이라는 흔적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몸에 있던 ‘예수의 흔적’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담고 있는 내용과 더불어 성령의 열매 곧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온유와 절제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 등 이러한 성품들이 사도 바울에게 ’인두로 지진 흔적‘처럼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나는 매일 죽노라’라는 고백처럼, 그는 옛 자아가 죽고 예수그리스도의 성품만이 확연하게 그의 삶 속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고, 내 이웃의 유익과 성장을 위해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을 신학에서는 ‘기독자의 자유’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었다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전에는 마귀의 손아귀에 있었기 때문에 진심으로 나 이외의 존재, 곧 하나님과 내 이웃을 위해 살 수 없는 존재였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어서 자유롭게 나 이외의 존재를 섬기며, 그들의 유익을 위해 살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바로 ‘기독자의 자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 ‘내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6)고 확실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셨는데 왜 우리에게서 그러한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을 찾기가 쉽지 않을까요?
제가 볼 떼 오늘날 기독교는 오히려 육적인 ‘나’를 펄펄 뛰며 살아나게 만들어 주는 이상한 잡교처럼 되어 버린 것 같아 몹시 불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온통 ‘나’뿐입니다. ‘나의 구원, 나의 행복, 나의 감격, 나의 부유함, 나의 유명세, 내 병의 치유’ 이런 간증이 공동체 안에 넘쳐납니다.
여기 어디에 아무 대가없이 나를 죽여 다른 이의 유익을 추구하는 종의 모습과 섬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교회공동체란 우리 기독자들의 자유를 훈련하고 연습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공동체 안에서 ‘내가 옛 자아의 성품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건’ 등 이러한 것들을 경험케 하시면서 나를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다니세요? 예배도 참석하십니까?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교회가 뭡니까? 한 마디로 서로 사랑해 주고 섬겨주어야 하는 곳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그토록 험담과 분열과 시기와 질투가 난무할까요? 만약 그렇다는 것은 아직도 내 안에 그 옛 자아인 ‘나’가 시퍼렇게 살아서 내가 욕하고 험담하는 사람들을 내 아래로 몰아놓고 짓밟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밟아서 내가 높아지려는 아주 악질적인 아담들의 고질적인 병인 것입니다.
교회는 내가 죽어서 다른 이들이 유익을 보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열심히 그들의 진가를 발휘해 내는 곳입니다. 다른 이들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스티그마타 투 예수스’ 곧 ‘예수의 흔적’을 드러내는 연습을 하는 곳이 교회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 다른 사람들의 흠을 보게 된다 하더라도 그들의 흠을 바라보며 내 속에는 혹시 저러한 흠이 없는가를 살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나도 저런 흠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을 텐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렇게 거룩한 일에 힘을 쓰는 성도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 한가’라고 감사의 고백을 하며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 안타까운 마음으로, 예수의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정 그리스도인이십니까? 그렇다면 나에게 유익이 되면 삼키고 나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뱉어버리는 그런 세상 사람들하고는 달라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나에게 유익이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이라면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기꺼이 기쁘게 갑시다. 내가 나의 인생의 주인이 아닙니다. 주님만이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이심을 잊지 맙시다. 진정 왕 노릇의 자리는 종의 자리를 내려가는 것임도 잊지 맙시다.
첫댓글 계시록(87)강해~
내가 내인생의 주인이 아니고
주님만이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이심을...
말씀 수고하심 감사 ~유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