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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트1세
오스트리아를 중심지로 하는 합스부르크 제국은 역사상 언제나 침략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 나라는 침략 루트가 10여 개나 있다고 거론된다. 게다가 걸핏하면 지난날의 동맹이 적이 되곤 했다. 그러니 이 나라는 늘 전쟁 중이거나, 전쟁이 없으면 전쟁 준비를 했다. 특히 서쪽의 프랑스와 남동쪽의 오스만제국이 가장 위험한 적이었다. 동쪽에서 팽창해오는 강력한 오스만제국은 근대 초부터 유럽 전체에 가공할 위협을 가했다.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서 수많은 경쟁 세력을 눌러 이기고 제국을 건설한 오스만제국의 군사 문화는 유럽과는 성격이 달랐다. 1463년 보스니아 왕국을 공격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메메드 2세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비잔틴 제국을 정복한 후 여세를 몰아 동유럽으로 진군했다. 1463년 보스니아 국왕 토마세비치(Stephen Tomasevic)는 클류츠(Kljuc) 요새에서 메메드 2세의 대군에게 포위되었다. 도저히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보스니아 측은 목숨을 살려준다는 약속을 받고 항복했다. 그러나 메메드는 국왕과 측근들을 모두 살해하고, 남은 귀족들을 전부 갤리선 노수(櫓手)로 보내버렸다. 오스만제국의 관점으로는 보스니아는 제국 내 작은 한 주로 격하된 상태였다. 그들은 국왕과 약속을 했으나, 그 국왕이 이제는 신하가 된 이상 그 약속을 지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기사도 운운하는 것은 그나마 전쟁이 제한된 범위 내에서 벌어지는 서유럽 이야기지 아시아와 동유럽에서는 그런 한가한 이야기는 통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유서 깊은 중세 왕국 하나가 5세기 동안 독립을 상실했다. 이후에도 유럽 동부 지역에 대한 오스만제국의 침략은 계속되었다. 이 가공할 위험을 전면에서 맞닥뜨린 나라가 헝가리였다. 1526년에는 술탄 모하메드가 20만 대군을 이끌고 동유럽 깊숙이 진격해왔다. 8월 29일, 베오그라드 북쪽, 다뉴브 강에서 멀지 않은 모하치에서 격전이 벌어져 두 시간 만에 헝가리군이 궤멸되었다. 1만~1만 5,000명이 사망하고 국왕 라조스 2세도 강에서 익사한 이 날은 헝가리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날로 꼽힌다. 이후 헝가리는 세 개의 지역으로 나뉘었다. 중앙 대평원과 트란스다뉴비아 일부, 수도인 부다는 오스만제국에 편입되었고, 트란실바니아는 약간의 자율성을 가진 채 오스만제국의 신하 국가가 되었으며, 북쪽의 남은 땅과 트란스다뉴비아 서쪽 땅에 남은 왕국은 합스부르크 황실의 지배하로 들어갔다. 17세기에 접어들어 오스만제국의 침략이 다소 완화되었지만, 그래도 신성로마제국과 오스만제국의 힘겨루기는 계속 이어졌다. 문제가 된 곳 중 하나가 트란실바니아였다. 1664년 이곳을 놓고 양측이 다시 전투를 치렀다. 최종 결과는 이전 상태와 큰 변동이 없었지만, 아주 중요한 현상이 벌어졌다. 그라츠(Graz) 동쪽 방면에서 벌어진 세인트 고타르드(St. Gotthard) 전투에서 몬테쿠콜리 등이 지휘하는 유럽군이 오스만군을 격퇴한 것이다. 오스만제국에게 명백한 승리를 거둔 것은 약 150년 만에 처음이었다. 이제 오스만제국이 최강 불패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고, 더 나아가서 전 유럽이 힘을 합쳐 오스만 세력을 막아야 한다는 데에도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다만 그런 가능성을 확인했을 뿐이지, 전체적인 전쟁의 결과를 보면 이번에도 오스만제국이 승리를 거두어 트란실바니아를 계속 지배했고, 레오폴트 황제는 조공을 바쳐야 하는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맺었다.
몸을 피하여 유럽을 구한 황제그 후 오스만제국은 방향을 바꾸어 폴란드와 약 20년에 걸쳐 전쟁을 벌였다. 1672년에 폴란드는 막강한 오스만군의 공격을 받아 공물을 바치기로 하고 휴전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오스만제국은 우크라이나와 포돌리아(현재 우크라이나 령)를 차지했다. 이런 굴욕적 패배 후에 얀 소비에스키 장군(Grand Hetman Jan Sobieski)이 곧바로 전쟁 준비에 돌입하여 다음 해인 1673년에 호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사실은 11월에 전투가 벌어져서 남쪽에서 올라온 오스만군은 추위 때문에 힘을 쓸 수 없었다. 먼 거리를 이동하는 원정군은 늘 이런 문제를 안고 있을 수밖에 없다. 하여튼 오스만제국의 공격을 막아내자 그는 전 유럽의 영웅이 되었고, 마침 그 시기에 폴란드 국왕이 사망하여 소비에스키가 국왕으로 선출되었다(얀 3세 소비에스키(Jan III Sobieski), 재위 1674~1696, 폴란드는 특이하게 선출왕 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오스만제국이 재침을 노릴 것은 명약관화했다. 그래서 소비에스키는 신성로마제국, 모스크바 공국과 일종의 상호방위조약 같은 동맹을 맺었다. 과연 1682년 여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오스만군이 다시 소집되어 북쪽으로 향하는 게 포착되었다. 막강한 대군이 폴란드로 향할 것인가, 오스트리아 쪽으로 향할 것인가? 당시 합스부르크 측은 헝가리 및 트란실바니아에 대해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강력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오스만제국은 자신의 예속 지역들을 보호하지 않으면 이 지역 내에서 위엄을 잃는다고 판단하고, 공격 방향을 오스트리아 쪽으로 잡았다. 소위 ‘대(大) 튀르크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1683년 오스만군은 베오그라드를 거쳐 빈으로 침공했다. 남부 오스트리아는 다시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이 지역 주민 약 10만 명 정도가 죽거나 노예로 끌려간 것으로 추산된다. 중동 지역 노예시장에서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당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독일인을 벌거벗겨 놓고 채찍을 휘두르며 얼마나 맷집이 좋은지 시범을 보이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가공할 대군이 밀려오는 것을 본 레오폴트 황제는 멀리 파사우(Passau)로 몸을 피했다. 사실 그는 음악 애호가 스타일이지 용맹한 전쟁 군주는 아니었다. 결과적으로는 황제가 몸을 피한 게 잘된 일이다. 만일 오스만군과의 전투를 직접 수행했으면 아마도 그는 살해되었을 테고, 그러면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유럽 전체 정세는 더 큰 격랑 속으로 휘말려들었을 것이다. 황제는 무사히 파사우에 도착한 데 대해 마리아에게 감사하는 의미로 언덕에 성처녀 마리아 소성당을 세웠다. 빈의 수비는 처남인 로렌 공작 샤를 5세에게 맡겼다. 오스만의 대군이 쳐들어오는 1683년 봄에 그는 합스부르크군의 총사령관직에 올랐다. 그의 군은 수가 부족한 데다가 그나마 일부 병력이 전쟁 전에 도주한 터라 직접 적과 대결할 수 없는 형편이므로, 병사의 수를 최대한 유지하고 적의 공격을 늦추며 응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는 작전을 취했다. 빈은 몇 달간 기근 속에서 적의 극심한 포격을 견뎌야 했다. 그러는 사이에 교황 이노센트 11세가 주도하여 주변 국가들이 참전을 결정했다. 폴란드의 얀 3세 소비에스키가 2만 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행군해왔고, 그밖에 작센, 바이에른, 바덴 등이 참여했다. 모든 군대가 빈 북쪽의 칼렌베르크라는 언덕에 집결했다. 당시까지도 이 언덕은 사람이 살지 않는 버려진 곳이었다. 후일 신성동맹이라 이름 붙는 이 연합군의 총지휘관은 소비에스키가 맡았다. 이들은 칼렌베르크에서 특별 미사를 드린 다음 전원이 말을 타고 적을 향해 돌진했다. 역사상 최대의 기병 돌진으로 알려진 이 공격으로 오스만군이 무너졌다. 아마도 이 시기가 폴란드의 마지막 전성기였을 것이다. 전 유럽의 영웅이 된 소비에스키가 1696년에 사망한 뒤 폴란드는 점차 패망의 길로 접어든다. 하여튼 이런 대군을 불러 모은 것은 멀리 몸을 피한 레오폴트 황제의 외교 덕분이었다. 적이 물러나고 끔찍한 포위가 풀린 뒤 살아남은 시민들이 성 바깥으로 나와 보니 튀르크인들이 마시는 시커먼 음료가 있었는데, 이것이 비엔나커피가 시작된 계기라고 야사는 전한다. 유사한 이야기를 한 가지 더 말하자면, 1529년에도 오스만군이 빈을 포위 공격한 적이 있는데, 이때에는 적이 물러난 후 빈 시민들이 튀르크의 상징인 초승달 모양으로 빵을 만들어 씹어 먹음으로써 보복했고, 이것이 크루아상(croissant, 원래 불어로 초승달이라는 뜻)의 시초라고도 한다. 달달한 비엔나커피와 비에누아즈리(viennoiserie, 빈풍의 빵)가 모두 튀르크의 가공할 침략의 결과라는 이야기인데, 물론 이는 믿거나 말거나... 이런 결정적 패배를 겪은 후에도 오스만제국은 다시 대군을 동원해서 공격했다. 이 시기에 동유럽 지역은 유럽과 오스만제국이 군사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격렬하게 싸우는 격전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런데 오스만제국이 몇 차례에 걸쳐 유럽에게 패배를 당한 걸 보면, 군사적으로 정점을 지나 쇠락기로 접어들었음이 분명하다. 유럽 군사력의 약진을 논하는 ‘군사혁명’(근대에 들어와 유럽에서 다른 문명권을 압도하는 군사 발전이 일어났다는 주장) 관련 논쟁 중에 17세기 후반에 유럽 군대가 오스만제국 군대를 격퇴한 사건이 가장 중요한 계기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는 점을 아울러 지적해두기로 하자. 이후 오스만 세력이 밀려나고 중동부 유럽이 점차 합스부르크의 세력하에 들어간다.
반대편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시소 : 오스만제국의 쇠퇴역사의 큰 흐름이 바뀌었다. 과거에는 엄청난 무슬림 세력이 몰려와서 기독교도를 축출했다면, 이제 반대로 기독교 세력이 무슬림들을 몰아냈다. 예컨대 부다는 무슬림과 유대인의 도시였다가 이 시기부터 기독교 도시가 되었다. 이 지역에 수 세대 살아온 무슬림들은 퇴각하는 군을 따라가야 했고, 그러지 못하고 현지에 남은 사람들은 학살의 희생자가 되었다. 끔찍한 인종 청소 현상이 벌어졌다. 정치 갈등과 종교 문제, 인종 문제가 뒤섞인 전쟁으로 인해 이 지역에는 지옥 같은 장면이 벌어졌다. 메리 몬터규(Mary Montagu) 부인은 이 지역의 참상을 증언하는 글들을 남겼다. 그녀의 남편이 오스만제국 주재 영국 대사로 부임하게 되어 빈에서 이스탄불로 여행을 했다. 그녀는 직접 목도한 이 지역 상황을 서신을 통해 지인들에게 알렸다. 전쟁과 내전을 겪으며 도시와 농촌 모두 폐허로 변했다. 광대한 지역에서 농사를 포기했다. 숲에는 늑대가 출몰했고, 곳곳에 사람, 말, 낙타의 뼈들이 산재하여 지난 전쟁의 참상을 알렸다 1697년의 젠타(Zenta, 현재는 세르비아 내에 위치해 있다) 전투는 실상 전투라기보다는 살육이라고 표현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외젠 공이 지휘하는 신성로마제국 군대는 티사(Tisa) 강을 건너는 오스만군을 기습 공격하여 수천 명을 살해하고 많은 포로를 잡았다. 빈에 돌아온 외젠 공이 여름 궁전으로 지은 것이 벨베데레 궁전이다. 현재 이곳에는 클림트의 ‘키스’, 에곤 쉴레의 ‘가족’ 같은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명화들이 전시되어 있다. 오스트리아의 역사는 이상하게도 피비린내 진동하는 처참한 전쟁과 향기 높은 예술이 공존하는 경향이 있다. 외젠 공은 파리에서 태어나 원래 루이 14세에 봉사하고자 했으나 루이가 ‘몸이 약해 보인다’, ‘코가 못생겼다’ 운운하며 퇴짜를 놓았다. 거의 ‘전쟁의 신’이라 불릴 정도로 탁월한 장군을 내쫓은 것이 후일 루이에게 뼈아픈 결과를 가져왔다. 프랑스에서 거절당한 후 빈으로 건너와 합스부르크 측의 장군이 된 외젠 공은 레오폴트 1세, 요제프 1세, 카를 6세 등 세 황제에 봉사하며 한편으로 오스만군, 다른 한편 프랑스군과 벌인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젠타 전투 이후 양측은 1699년 카를로비츠(Karlowitz), 현재의 스렘스키카를로브치(Sremski Karlovci)에 튀르크식 텐트를 짓고 담판을 벌였다. 영국과 네덜란드의 중재 하에 오스만제국과 신성로마제국 동맹 대표들이 만나는데, 어느 쪽이 우위를 점하는 건지 문제가 될 수 있으므로 텐트 입구를 네 개 만들어 당사자들이 동시 입장하도록 했다. 문이 하나인 경우 누가 먼저 들어가느냐를 놓고 강아지들처럼 실랑이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텐트 안에는 유럽의 전통인 원탁을 두어 상석권 문제도 없앴다. 전쟁 후 늘 선처를 애원하는 불쌍한 인간들을 만나곤 했던 오스만제국으로서는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제 오스만 제국은 ‘유럽 문명의 원수’가 아니라 국제관계상 강대국 중 하나로 취급되기에 이르렀다.
‘이러려고 프랑스 국왕이 되었나?’동쪽에서 오스만제국과 대결을 벌이는 동안 서쪽이라고 무사태평인 것은 아니었다. 레오폴트는 루이 14세와도 동시에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루이 14세는 신성로마제국을 주적으로 삼고 주변 각국과 침략 전쟁을 벌였다. 이에 맞서 레오폴트는 자국의 역량을 총동원하는 한편 반불동맹을 결성하여 압박했다.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의 경우를 보면 영국-네덜란드, 스페인, 사보이, 그 외에 제국 내 여러 세력들이 참여했는데, 이는 합스부르크가 주도한 동맹 전략이 실제로 작동한 흔치 않은 사례다. 이를 보면 레오폴트는 의외로 정치 외교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당시 전쟁은 유럽 대륙 내부뿐 아니라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아메리카 식민지에서도 벌어져 나름 세계전쟁의 성격을 띠었다. ‘루이 14세 : 세상을 암울하게 만든 태양왕’ 편에서 보았듯이 그동안 루이 14세는 1678년에 네덜란드를 침공했고, 1683~1684년에 소위 귀속전쟁을 벌였으며, 1685년에 낭트칙령을 폐기한 후 1688년 라인 강 너머로 공격하여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을 유발했다. 루이 14세는 동쪽에서 튀르크가 신성로마제국에 승리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이런 기대가 완전히 어긋나버렸다. 제국이 동쪽에서 강력한 오스만군에 꼼짝 못 하고 묶여 있는 동안 서쪽에서 여유 있게 유린하려 했는데, 레오폴트의 통치하에서 제국은 오스만제국의 침략을 생각보다 훨씬 더 잘 이겨냈다. 1697년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을 마감하는 라이스바이크 조약을 맺을 때는 프랑스의 국력이 이미 바닥났고, 그동안 점령한 영토를 거의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이러려고 프랑스 국왕이 되었나?’ 하며 자괴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제 루이 14세의 프랑스는 더는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건만 이런 상황에서 다시 전쟁의 암운이 일었다. 이번에는 스페인이 발원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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