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부처님은 깨닫기 전에는 보살菩薩이었습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오랜 세월을 윤회하면서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토끼나 사슴 같은 짐승의 몸을 받기도 하면서
깨달음의 공덕을 지으셨습니다.
이러한 경전을
《본생경本生經, 자이카》이라고 합니다.
그럼 《본생경本生經》에서는
깨닫기 전에는 어떻게 불렀을까요?
바로 보살菩薩이었습니다.
전생만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인간의 몸을 받을 때,
카필라성의 태자로 태어났을 때에도
깨닫기 전의 호칭은 오로지 보살菩薩입니다.
그렇게 모든 경전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이 후에야
비로소 ‘부처님’이라는 호칭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살菩薩이라는
부처님의 전생에만 관련되는 특별한 호칭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살입니다.
보살菩薩이라는 단어의 원어는
보디삿트바boddhaisattva입니다.
앞의 ‘보디’는 깨달음을,
뒤의 ‘삿트바’는 유정有情을 뜻합니다.
그래서 원어에서 깨달음을 뜻하는
보리가 '보'로 축약되고
생명체 즉 중생을 뜻하는 살타가 '살'로 축약되어
보살이라고 통칭되는 것입니다.
이 말이 한문으로 옮겨지면서 소리로 기록할 때는
‘보리살타菩提薩埵’,‘보리색다菩提索多’,‘모지살달박’등이 되고,
뜻으로 번역할 때는 도중생, 각유정, 도심중생이라고 했습니다.
상구보리하화중생이라는 말이
바로 보살이라는 말에 대한 해석입니다.
위上라고 하는 것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입니다.
그 목표가 바로 보리입니다.
부처님의 큰 깨달음, 지혜를 구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아래下라는 것은
낮아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실천이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중생을 교화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승의 글에서 (2021.03.13.05:52) 발췌하였습니다.
보살은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처럼 신앙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보살은 보고 닮아야 할
불자들의 이상적인 모델인 셈입니다.
하지만 도달하기에 너무나 먼 그런 존재는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법 안에 들어온
모든 존재는 이미 모두가 보살이기 때문입니다.
〈맹자孟子〉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중국의 제나라의 선왕이 높은 누각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가 소를 끌고 아래로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소를 보니
부들부들 떠는 것이 죽으러 가는 길인 것 같았습니다.
왕이 소를 끌고 가는 사람에게 묻자,
종을 새로 만들어 소를 제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러 가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왕은 수가 불쌍하여 소를 풀어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소를 끌고 가던 사람은
희생제물이 없으면 제사를 지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왕은 그렇다면 양을 희생 제물로 쓰라고 했습니다.
왕은 맹자에게,
소가 아까워서 그런 것도 아닌데,
양이 소보다 생명이 가벼웠던 것도 아닌데
그 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자기 일은 자신이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맹자는 알았습니다.
왕이 소를 아까워하여 양으로 바꾼 것이 아니라,
소를 보았기에 불쌍히 여긴 것이며,
양은 미처 못 보았기에
희생의 제물로 쓰라고 한 것이 아니냐고 해석하였습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
보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야말로
어진 사람들의 마음이며 보살의 마음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보살심을 늘 갖고 계셨고,
사람으로, 토끼로, 원숭이로, 개구리로 계시면서도
늘 상대를 헤아리시고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보살로 사셨던 것입니다.
이제 한 달 앞으로 다가온
부처님 오신날을 준비하면서 상대를 헤아릴 줄 아는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모두가 자애롭게 살았으면 하고
오늘의 따끈따끈한 글을 남깁니다.
이것이 오늘의 따끈따끈한 글입니다.
2024년 04월 17일 오전 06:21분에
남지읍 무상사 토굴에서 雲月野人 진각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