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3차 대전문화유산답사 “지붕없는 박물관, 보문산” 후기
□ 언 제 : 2016년 10월 22일 09:00-12:00
□ 어디로 : 보문산입구 케이블카-보물주머니조형물-대전지구전승기념비와 6.25 한국전쟁이야기-보문사와 후지추간장공장 후일담-을유해방기념비-송병선선생순국기념비
□ 누구와 : 최장문(강사 : 대신고등학교 역사교사), 안여종, 이미령, 이춘희, 안수형, 허혜경 총 6명
1. 보문산입구 케이블카
보문산은 대전광역시 중심부 남쪽에 위치한 해발 457.6m인 대전의 대표산 중 하나로 1965년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보문산의 대표적인 명물이었던 케이블카는 1968년부터 운행하기 시작해 2005년 3월초까지 운행했다.
보문산의 케이블카를 처음 운행할 당시에는 서울의 남산타워에 있는 케이블카(1962년 운행시작) 외에는 유일한 케이블카여서 중부권 이남 지역에서는 보문산으로 케이블카를 타려고 몰려들었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젊은 세대들에게는 케이블카 못지않게 인기 있었던 게 보문산의 바이킹이었단다. 원래도 긴장감 넘치는 놀이기구이기도 한데 산위에 있으니 훨씬 높고 무섭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하게 되니 보문산 바이킹을 남녀가 함께 타면 그 커플이 잘 이뤄진다는 소문까지 나서 더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2. 보물주머니 조형물 데크
일행은 산책로를 따라 조금 걷다 등산로 입구 근처에 보물주머니 조형물이 멋있게 세워져 있는 데크에서 보문산의 이야기를 나누며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보물주머니 조형물 우측에는 보문산이 보물이 묻혀있어서 ‘보물산’으로 부르다가 ‘보문산’으로 되었다는 유래와 ‘효자 전설’이 적혀있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효자 전설은 다음과 같다.
옛날 노부모를 모시고 있는 착한 나무꾼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그 소문이 이웃 마을까지 퍼져 있었다. 그런데 이 나무꾼에게는 술만 먹고 주정을 일삼는 형이 하나 있어 부모와 동생을 몹시 괴롭혔다. 어느 날 나무꾼은 나무를 한 짐 해가지고 내려오는 길에 조그마한 옹달샘 옆에서 쉬게 되었다. 그때 샘 옆에서 물고기 한 마리가 따가운 햇볕을 받으며 죽어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무꾼을 물고기를 샘물 속에 넣어 주었고, 물고기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듯 하다 사라졌다. 조금 후에 눈을 돌려보니 물고기가 놓여 있던 곳에 하나의 주머니가 놓여 있었다. 주모니를 집어보니 그곳에 ‘은혜를 갚는 주머니’라고 적혀 있었다. 신기해서 나무꾼은 집에 돌아와 주머니에 동전 하나를 넣었더니 순식간에 주머니에 동전이 마구 쏟아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무꾼은 큰 부자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안 형이 그 보물주머니를 빼앗을 욕심으로 동생에게 주머니를 한번만 보여 달라고 했다. 착한 동생이 주머니를 형에게 보여주자 형은 주머니를 가지고 도망치려고 했다. 동생이 알아차리고 형을 쫓아 주머니를 도로 찾으려 옥신각신 하는 가운데 주머니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화가 난 형이 주머니를 발로 짓밟는 통에 그 주머니 안에 흙이 들어갔다. 그러자 주머니에 흙이 걷잡을 수 없이 계속 쏟아져 나와 쌓이고 쌓이게 되었다. 이렇게 쌓인 흙이 드디어 큰 산을 이루니, 그 산 속에 보물주머니가 묻혀 있다 하여 보물산이라 하였고, 그 후 보문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한다.
3. 대사동 별당 스토리
우리가 쉬던 보물주머니 데크에서 강사님께 대사동 별당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대사동 별당은 공주갑부 김갑순이 지은 별장이었던 곳으로 1930년대 초중반에 지어졌다고 추정하기도 하고, 1920년대 지어진 건물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또, 이곳은 대전이 임시수도이던 한국전쟁 당시 도지사공관에 이승만대통령이 머물렀을때 이시영 부통령이 숙소로 사용하였던 가옥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국무회의를 개최했었던 의미있는 장소이다.
이 가옥은 일제시대에 지어져 일본식 양식(창문 등)과 한옥양식(목조 팔작 기와 등)이 절묘하게 조화된 독특한 건축양식으로서 건축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건물이었다.
한때는 식당으로도 사용되기도 했었는데 더 이상 보존되지 못하고 2010년 6월에 철거되어 사라졌다. 현재 그 자리에 불가마사우나가 자리하고 있다.
▲보문산 입구(현재 띠울 불가마사우나 자리)에 있던 대사동 별당
4. 비밀의 ‘보문산 동굴’ 스토리
2009년 4월 21일자 아시아경제 기사를 토대로 작성한다.
‘충무시설’ ‘지하벙커’ 등으로 불리며 내부엔 전시상황실 흔적들 ‘햇볕’
-대전시 중구, 재활용 컨설팅협약 맺고 공개 추진…복합체험실 등 관광코스 검토
대전시 중구 대사동 198-14번지에 있는 출입금지구역 ‘보문산 동굴’.
36년 간 군사보호시설로 베일에 가려있던 곳이다. ‘충무시설’로 불리며 일반인들의 접근이 철저히 금지돼 궁금증을 갖게 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보문산 기슭에 자리 잡은 이 비밀의 동굴이 곧 시민 품으로 돌아올 채비를 차리고 있다.
우리 일행이 머물며 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보물주머니 데크 오른편 아래쪽에 보이는 아쿠아리움이 바로 보문산 동굴자리였던 것이다.
이곳은 자연동굴을 개조해 만든 전시대비용 지하벙커다. 20여 개의 크고 작은 방과 전기, 수도, 통신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전체면적은 6000㎡이고 U자 형이다. 당장 쓰기에도 불편함이 없을 만큼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그러나 동굴 밖은 나무숲 사이로 듬성듬성 보이는 얼룩무늬의 군 보호색 건물만이 눈에 들어온다.
입구엔 오래된 철문이 가로막고 있다. 안에 들어가 보면 240m 길이의 통로가 나온다. 벽면의 낙서들이 사방이 막혀 있는 굴 안의 깊은 흔적으로 남아있다.
‘총력안보’ ‘천하수안, 망전필위’ ‘○○○전역
2005.9.10’ 등 아직 없어지지 않은 군관련 모습들이 눈에 띈다.
‘의무실’ ‘통합민방위 종합상황실’ 등의 간판과 ‘총력안보 평화통일’ 구호도 걸려있다. 자연의 모습이라곤 한 틈도 찾기 어렵다. 시멘트로 둘러쳐진 이 곳 어디선가 들리는 물소리만이 신비스런 추억의 한 자락을 증명할 뿐이다.
기계실로 통하는 출입금지구역엔 사용처가 불분명한 낯선 기계들이 작동을 멈춘 채 을씨년스럽게 컴컴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섭씨 15도를 가리키는 온도계, 미동조차 없는 벌레, 벽 틈에서 세어 나온 물 자국들이 이곳이 30여 년 전 호수가 있었던 동굴임을 짐작케 해준다.
대전토박이 어르신들 얘기를 종합해보면 동굴 안에 호수가 있었다고 한다. 비록 10m 남짓의 짧은 거리였지만 배를 타고 굴을 여행할 수 있어 아이들에겐 인기였다.
하지만 유료였기에 부모들을 한참 졸라야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던 동굴이 어느 날 갑자기 출입금지구역이 됐다. 1973년부터 충남도가 군사안보용의 ‘충무시설’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호수가 없어지고 굴의 공간도 지금처럼 넓어졌다.
아이들 사이에선 ‘동굴 안에 수십 대의 탱크가 있다’ ‘전쟁 나면 대통령이 피난갈 곳이다’는 등 소문만 무성했다.
접근조차 할 수 없게 된 채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 속의 보문산 동굴은 고수동굴이나 협재동굴 이상으로 부풀려지기도 했다. 때론 꿈속의 전경처럼 아득해져 ‘정말 그곳에서 배를 타기는 했던 것일까’란 의구심마저 들게 했다.
대전시 중구가 지난해 말 충남도로부터 20억7300만원에 사들였다. 홍성으로 도청을 지어 옮겨갈 충남도가 대전지역에 갖고 있는 시설과 땅을 정리과정에서 판 것이다.
이제 동굴은 시민들에게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유력하게 검토 되고 있는 활용방안은 보문산개발사업 안에 넣어 관광코스의 하나인 복합체험실로 활용하는 것.
중구는 오는 8월말까지 시민들 의견을 들어 실현가능한 활용방안을 마련, 보문산 개발계획안에 넣을 방침이다. -아시아경제 2009.4.21.자 기사 참조
이렇게 해서 충무시설, 지하벙커로 사용되던 보문산 동굴을 아쿠아월드로 만들기로 하여 2009년 11월 3일 기공식을 하고 2010년 12월 31일에 개장을 했다. 현재는 대전아쿠아리움으로 운영중이다.
우리 일행이 머물며 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보물주머니 데크 오른편 아래쪽에 보이는 아쿠아리움이 바로 보문산 동굴자리였던 것이다.
5. 보문산공원 푯돌과 보문산 공원 건설기념비
보물주머니 데크를 나오면 바로 보문산공원 푯돌이 세워져 있다.
뒷면에는 1962년 4월 5일 대전시장 배무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잠시 뒤에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대전시장의 다른 비석도 볼 수 있었다.
보문사로 들어가기 직전에 보문산 공원 건설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앞면에는 시장 육군 대령 배무남 보문산 공원 건설기념비라고 적혀 있었다. 뒷면에는 이 비석을 세운 이유와 1962년 6월이라는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
특이했던 점은 시장이면서 육군대령이라는 점이었는데 이는 61년 5.16 군사정변 후라 군인이 시장직을 맡아서 하고 있던 상황임을 알 수 있었다.
6. 대전지구전승비(일명 UN탑)
우리 일행은 등산로를 따라 걷다가 대전지구전승비로 올라갔다.
우리는 이곳에서 강사님께 6.25전쟁 당시 대전의 상황과 이 기념비를 세우고 이곳에 이전되기까지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강사님의 자료와 오늘 들은 이야기를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950년 6월 27일부터 7월 14일까지 18일간 대전이 임시수도였고, 7월 16일 수도이전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대구로 이전하게 된다.
7월 14일 대전에 피난령이 내려지고 미군 24사단장 딘 소장은 일본에서 출발한 기갑부대와 25사단이 한국에 도착할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금강을 보호막으로 지연전을 펼쳤다. 7월 16일에 금강방어선이 무너졌고, 7월 14일부터 21일까지 갑천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사방에서 공격해오는 공산군을 끝내 견뎌내지 못하고 대전을 공산군에게 내주고 말았다.
대전방어전투는 실패하여 딘 소장이 공산군에게 포로로 잡히게 되었고, 이때 김재현 기관사(대전역 동광장에 동상건립)가 미카-3 기관차(대전현충원 호국전시관)를 몰고 딘소장을 구출하기 위해 적진에 투입된다. 이때 투입된 특공대원은 33명중 32명이 전사하고 1명은 중상을 입었고, 증기기관차를 몰던 김재현기관사는 이때 순직하게 된다.
딘 소장은 공산군에 잡혀 북한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후 53년 9월 4일 석방되어 미국으로 돌아간다.
미국에서 딘소장에 대한 평가는, 비록 대전방어전투는 실패하였지만 미군 지원군의 도착 시간을 확보해 주었고 인천상륙작전까지 가능해졌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대전방어에 많은 희생이 따랐던 24사단 장병들의 공적을 빛내기 위해 대전에 세운 전승비가 바로 이 대전지구전승비이다.
대전전승비는 1959년 3월 31일에 딘 소장이 직접 3.5인치 로켓포를 메고 공산군 전차를 격파했던 대흥2동(구 대전문화방송국 앞)에 세웠으나 1975년 보문산공원으로 옮겼다. 현재 비가 세워져 있는 이 곳은 후퇴하였던 미24사단 소속 미국병사 3명이 북한군과 끝까지 싸우다 모두 전사한 곳이다.
7. 보문사와 후지츄 간장공장 스토리
일행은 보문사 경내를 잠시 둘러본 후 이곳이 어떤 의미가 있는 곳인지 후지츄 간장공장과는 어떤 사연이 있는 지 강사님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2008년 강사님이 잇츠대전에 실은 글을 보고 인연에 인연을 맺어 일본에서 80세의 한 할머니가 대전을 방문을 하였다고 한다.
그 분은 진미간장의 전신인 대전의 후지츄 간장공장 사장 쓰지 만타로씨의 따님이었다.
후지츄 간장공장과 만타로씨에 대해서는 대전근현대사전시관에 전시중인 자료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해보면 다음과 같다.
후지츄간장공장은 1909년 본정 2정목 14번지에 조부이신 쓰지 킨노스케가 처음 문을 열어 충남 최고의 브랜드로 만들었다. 2대 사장으로 취임한 아버지 쓰지 만타로씨는 경영을 잘해 후지츄간장을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게 만들었다.
이 할머니는 국내 상황이 심상치 않자 해방 직전인 1944년 일본으로 돌아갔고, 당시 심상소학교(원동국민학교) 4학년까지 다녔었다고 한다.
아버지인 쓰지 만타로씨는 해방 이후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그동안 일본의 식민통치와 그 정책에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은 곧 패망할 것”이라며 일본군 장교들과 설전을 벌였던 일과 일본의 패전 후 본국으로 돌아갈 때 한국인 종업원들이 부산항을 거쳐 일본까지 그를 배웅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사망 당시 유언으로 본인의 화장한 유골 일부를 자신의 젊은 시절을 불태웠던 대전에 묻어 달라고 하여 1970년대에 보문사 위쪽에 묻었다고 한다. 이 따님이 80세 할머니가 되어 죽기 전에 아버지가 그리워했던 대전에 와보고 싶었고, 아버지 유해를 묻은 보문산에 마지막으로 다니러 왔다는 사연이었다.
이 할머니는 어릴적 보문산은 일본인들이 많이 찾는 공원이었고, 특히 현재의 보문사는 대전 일본인 유지들의 공동 별장이었다고 한다. 할머니도 아버지를 따라 이 별장에 자주 놀러왔었는데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건물의 모습이 거의 그대로라고 신기해했다고 한다.
특히, 만타로씨가 일본에 건너간 후 대전을 그리워하며 직접 그린 그림을 가지고 왔는데 강사님이 이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1950년 8월 5일이라고 적힌 8절 크기의 그림엔 대전이 그립다는 문구가 적혀 있고 만타로씨의 서명도 있다.
강사님은 이 그림이 식장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것으로 추정되고, 충남도청, 목척교, 대전역, 대전형무소, 보문산 골짜기, 멀리는 계룡산의 모습까지 너무 자세히 표현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아마 사진을 밑에 놓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린 것 같다고 했다.
8. 을유해방기념비
을유해방기념비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기념하여 1946년 8월 15일에 1주년 기념일에 세운 비이다. 이 당시에 한글로 새긴 비석은 흔치 않았는데 이렇게 한글로, 이렇게 깊게 새긴 비석이라는 점과 한국전쟁 당시 비석은 사격연습용으로 많이 쓰여서 비석들마다 여기저기 총탄 자국이 나있기 일쑤인데 이 비석은 너무나 깨끗하다는 점 등이 다른 것들과는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남한쪽이든 북한쪽이든 이념과는 상관없이 대전부민들이 힘을 모아 광복을 맞은 기쁨에 세운 이 비석에는 함부로 할 수 없는 무엇인가 있었을 것 같다.
<비석 전면>
을유팔월십오일기렴 解放記念碑(해방기념비)
<비석 뒷면>
1945년 을유 8월 15일은 일제가 패망하고 우리 민족이 해방된 조국광복의 날이다 이날을 기념하고 조국의 무궁한 자주독립과 번영을 기원하면서 대전시민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우다 이비를 중건하여 1987년 7월 29일 이곳 보문산공원에 안치하다 도암 정진상 세우고 청곡 윤길중 쓰다
<비석 왼쪽 측면>
단기 사천이백칠십구년팔월십오일(서기 1946년) 세움 대전부민일동
<비석 오른쪽 측면>
1946년 8월 15일 대전부민의 뜻을 모아 대전역 광장에 해태석 한쌍과 건립
1950년 9월 6.25 사변으로 도양
1957년 5월 해태석 한쌍 동작동 국립묘지에 기증
1960년 6월 6.25 사변후 대전역 광장에 재건
1971년 8월 보문산공원에 이전
1987년 7월 대전시비로 보수
대전광역시가 대전부인 시절에 세운 비인데 이렇게 대전부라고 기록된 것은 흔치 않다고 한다.
을유해방기념비를 어느 분이 쓴 것인지 기록이 없어 궁금했는데, 중부대학교 정보보호학과 이병천교수님의 홈페이지에서 이 글을 찾아서 내용을 첨부한다.
「1945년(을유년)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이 되자 대전시내 유지들이 모여서 뭔가 해방을 기념할만한 일을 하자고 의견을 모았으며 이에 따라 해방 1주년이 되던 1946년 8월 15일 해방기념비를 만들어 대전역에 세웠다. 당시 명필로 이름이 높았고 대전역 앞에서 “이문사(以文社)”라는 인쇄소를 운영하시던 조부, 동초(東樵) 이기복(李基福) 선생께서 비문을 쓰셨다고 한다. 당시에는 대부분 한문으로 비석을 세우던 시대였지만 해방을 맞아 순 한글로 기념비를 세우자고 뜻이 모아졌는데 조부님께서는 비문을 한글로 쓰는 것이 처음이기에 한참을 사양하시다가 썼다고 한다. 해방을 기념하는 비석을 당시로서는 큰 규모로 큰 비용을 들여 대전시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세운 것인데 지금까지 전국에 남아있는 8.15 해방 기념물 중에서 매우 큰 가치가 있는 유물이라고 한다. “기념”을 “기렴”으로, “대전시민”이 아니고 “대전부민”으로 표시한 것이 당시의 언어를 반영하고 있어서 이채롭다.」
즉, 을유해방기념비는 이병천 교수님의 조부이신 동초 이기복 선생께서 비문을 쓰신 것이다.
9. 송병선순국비
문충공연재송선생병선순국기념비
단기 4298년 을사 12월(1965년 12월)
문충공 연재 송병선 선생(1836-1905)은 1905년 12월 30일 을사조약 폐기와 을사오적 참형을 주장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음독 자결하셨다.
그 을사년이 다시 돌아온 1965년 을사년에 송병선 선생 순국 60주년 기념으로 이 비를 세웠다.
연재 송병선 선생은 우암 송시열의 9대손으로 태어나 조선이 근대로 이양되는 과도기에 태어나 봉건질서의 붕괴와 외세의 침략을 목도하면서 기울어져가는 국가를 되살리기 위한 성리학자로서의 고민과 갈등, 그리고 행동양상을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이다.
송병선은 1867년 옥천 이지당에서의 강회활동을 시작으로 1905년 충청지역은 물론 전라, 경상도 등지에서 유림들과의 접촉을 통해 위정척사운동의 여론 확산을 도모하였다. 그 결과 송병선은 143명의 사우들과 대전, 영산, 금산, 무주, 거창, 영동, 지례, 서천, 군산 등 여러 지역 1,100여명의 문인들을 규합할 수 있었고, 이는 송병선의 영향력이 일부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대한매일신보는 그의 죽음에 대하여 “산림의 선비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는 것이다. 송병선은 유림의 종장으로 국가의 사표가 된지 20여년이 되었다”고 평하였다. 당시 송병선의 사회적 위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송병선이 죽자 고종황제는 문충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고종황제의 어명에 의해 1908년 충북 영동에 그를 기리는 문충사가 세워졌다. 문충사는 송병선 순국 60주년 기념사업으로 1965년에 그의 출생지이며 순국지인 대전 보문산으로 이전하였다가, 1966년 다시 동구 용운동(356-1)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송병순(1839-1912)은 송병선 선생의 동생으로 한일병합때 순국한 인물이다.
송병선.송병순 형제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사우인 문충사는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되었다.
건물 입구쪽에 홍살문과 충신정려각이 세워져 있고, 경내에는 문충사, 용동서원과 외삼문이 있다.
2016.10.22. 최장문 선생님의 답사강의 및 자료 참고하여 허혜경 작성
|
첫댓글 단풍이 물들어가는 가을날. 울림샘들과 함게 걸을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특히. 허혜경 간사님께 감사. 을유년해방비 서예가, 딘소장 사진 등 제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내용까지 찾아서 답사후기를 작성해 주신것... 감동입니다.
대전문화유산 울림. 카페를 보면서 찌릿... 소규모 사단법인으로 알고 있는데 대전문화관광부 못지 않은 많은 일들을 하고 있네요. 감동입니다.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님이 워낙 열정적이셔서요~ ^^ 답사 너무 감사했습니다.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과 자료 덕분에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강의셨습니다. 다음에 또 좋은 기회에 뵙겠습니다.
일정이 겹치지만 않았다면 넘 참여해보고픈 시간이었는데 아쉽지만 이리 상세한 후기로 조금이나마 달랩니다^^ 최장문선생님도 역시나! 이십니다!!
일부 오류 문장들을 수정하였습니다. 이미 이 글을 보신 분들은 다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허혜경님
대전도시재생지원센터 이해리입니다.
대전문화유산답사에 대해 올려주신 자료 잘 보았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대전도시재생지원센터가 도시재생뉴딜 사업지 추진을 위해 마을자원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대사동에 있는 자원을 표와 사진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허혜경님의 시장육군대령배무남공원 건설기념비와 송병선순국비 사진을 사용하고 싶어서 연락드립니다.
마을자원이 다 조사가 되면 책으로 발간할 예정인데, 비매품으로 나올 계획입니다.
사진 밑에 출처는 꼭 밝히고 사용할 예정입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답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