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나 지리산의 흑돼지들도 순수 토종 돼지는 거의 없고 교배종들이다.
우리 집에서도 돼지를 길렀다. 가축은 소와 돼지, 염소, 양, 토끼, 닭, 개, 고양이가 있었다. 물론 돼지는 팔거나 잡아 먹기 위해서 였다. 특히 시집을 가지 않은 고모 둘이 있어 시집 보낼 때에 대비함이기도 했다.
돼지 우리는 뒷삽작에 있었고, 원형의 푸세식 화장실에 가까웠다. 집 뒤 골짜기 논 밭으로 일하러 갈 때나 소 먹이러 갈 때, 혹은 나무하러 갈 때 지나쳐가는 곳이었다.
초등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나무로 엮은 목책으로 우리를 두르고, 목책형의 문을 달았다. 큰 나무 말뚝을 박아서 목책을 지지하도록 되어 있었다. 넓이는 2.5미터 × 2미터 정도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목책 우리이다 보니 돼지가 우리를 탈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 마다 우리를 보수하고, 돼지를 우리로 몰아 넣었다.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 블록이나 시멘트가 시골에도 보급되면서 우리집 돼지 우리의 시멘트 시대가 열렸다. 우리의 대부분을 시멘트 블록으로 두르고, 입구는 예전처럼 목책형 문이었다. 여물통도 나무 여물통에서 시멘트 여물통으로 바뀌었다. 맨 땅이던 바닥도 시멘트를 발랐고, 우리 절반 쯤을 덮고 있던 지붕도 초가 이엉을 걷어 내고 슬레이트를 얹었다.
돼지 우리를 더러운 곳의 총칭으로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집이 더럽고 청소가 되어 있지 않으면 "돼지 우리 같다"고 하지 않은가? 우리 집 돼지 우리도 지저분하고 더러웠다. 돼지의 똥과 오줌이 범벅이 된 바닥은 헝상 더러웠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바닥 전체에 새 짚을 깔아주면 잠자는 곳은 돼지가 깨끗하게 관리하는 것이었다.
돼지 우리를 치울 때마다 깨끗한 자리가 있다는 것은 참 신기했다. 후에 돼지가 깨끗함을 좋아하고 공간을 구분해 사욜한다는 것을 알았다.
고학년이 되어서는 가끔 돼지 우리 청소를 했다. 쇠스랑으로 짚과 돼지똥을 걷어 내어 두엄더미로 나르고, 쌓아서는 퇴비로 만들었다. 치우는 일이 끝나면 바닥을 물로 씻어 내고 새 볏짚을 깔았다. 우리 바닥을 약간 경사지게 만들어 돼지의 오줌이 우리 밖의 통에 모아지도록 되어 있었다. 그 오줌은 가끔씩 퍼내어 밭에 뿌려 거름이 되게 하였다.
(3)편에 계속)
태장군은 해맑은 얼굴로 새 직장으로 출근하고 돌장군은 어침 현장 한바퀴로 아침을 달린다. 도장군은 내일 충주 오천에 비 예보 있으니 오천 원정 구르메는 우의를 준바 하랍신다. 황대장은 신대호수공원을 돌며 연속 출정 신기록을 계속 이어 간다.
아침 8시 반에 집을 출발하여 거제도 본가에 왔다. 금산에 들러 장뇌 산삼 1년생 모종을 인삼영농조합에서 샀다. 내일부터 산에 심을 예정이다. 산청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뚝배기 흑돼지 불고기가 먹을 만하다. 팽장군은 어제 산청에서 올라가 길이 반대로 엇갈렸다.
본가 도착 후 산에 갔더니 온 산에 나물이다. 동고 표고버섯도 많이 나왔다. 마눌님 오면 같이 따야갰다. 확실히 거제는 미세먼지가 적다. 멀리까지 잘 보인다. 호장군이 거제의 공기질 자료를 보내준다. 그래도 초미세먼지 있으니 오랜 야외활동 자제하랍시네.
탸장군은 알바 직장에서 정규직 상근으로 취업되어 내일 오천 원정에 참가할 수 없게 되었다. 아쉽겠다.
구르메 일기 6년의 기록에 대하여 한국기록원(KRI)의 공식 인증을 알아 본 바 500만원의 인증비를 내어야 한단다. 과감히 인증 포기. 실속을 차려야지.
제2기 인생학교 졸업행사가 역삼동 우리집 식당에서 있었다. 허선행 동기회장이 월급쟁이로서의 마지막 월급도 기념하여 한턱 쏘았나 보다. 식후 행사로 체육시간 당구도 한 게임 했네.
첫댓글 60년대 코흘리게 좋은 시절의 추억
돼지 우리를 더럽게 관리하면서 엄한(?)돼지더러 '더럽다'는 인식을 하는 게 사람이란 존재...
비단 돼지 뿐이랴...ㅜ.ㅜ
나의 연속출정 신기록 공식인증이 주가 아니라 도대장의 빠뜨리지 않는 우리 구르메의 기록인증이 가치있다는 내용이네!
그렇지 30구르메의 활약상을 6년간 매일 기록하여 유지한 것이지...
14년은 상도, 15년은 사진일기, 16년은 18명이, 17년이후 옥도가...
ㅎㅎ. 요새는 총명함이 맛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