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구민회관 한자반
전주 야외수업
2011.4.29 (금)
강남구민회관 한자반의 야외수업날이다. 강남여성센터 소속에서 구민회관 소속으로
바뀌고 나서 처음으로 갖는 야외수업이다.
오늘 교육장소는 전라북도 전주.완산지역이다. 아침 8시 정각에 45인승 관광버스가
만원을 이룬채 구민회관을 출발하였다. 노대홍선생님이 지난주에 사전답사와 시간계획
을 세워 예정대로 진행이 잘 되었다.
버스섭외와 점심식당 예약을 책임맡은 필자도 꽤나 신경이 씌였다.
평상시 명강으로 유명한 노선생의 버스내 사회 솜씨는 과연 전문 사회자 뺨친다.
반장의 수고에 대한 박수를 유도한다. 협찬자에게도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지금 이시간에도 돈 번다고 정신없는-사랑하는 남편에게 고맙다는 머리위 하트모양의
사랑인사를 하는 차례에서는 쑥스러워 하면서도 모두 즐거운 표정들이다. 모처럼 야외
수업은 어린시절 소풍가는 것 만큼이나 마음을 들뜨게 한다.
반장과 부반장팀이 준비한 떡과 물을, 그리고 이영자회원이 협찬한 바나나까지 한 보
따리를 받아들고 새벽 일찍 집을 나서느라 아침밥을 못먹은 회원들, 버스안에서 빈속을
채운다. 빗방울이 떨어져 은근히 걱정을 했으나 아랫쪽으로 갈수록 햇살이 화창하다.
정안휴게소에서 15분간 휴식을 취한후 버스를 곧장 전주로 향했다.
오목대(梧木臺)와 이목대(梨木臺)
처음으로 찾은곳은 전주 한옥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위의 오목대(梧木臺)
이다. 고려 우왕 6년(1380)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이성계가 개선길에
머물렀던 곳이다. 그후 태조가 머물렀다는 뜻으로 "태조고황제주필유지비(太祖高皇
帝駐畢遺趾)"라는 비문을 고종황제가 친필로 쓰고 비각을 광무4년에 세웠다.
이성계는 승전가를 부르며 개선 귀경 도중 전주에 있는 종친들을 모시고 승전축하연을
베풀었다. 이성계는 이 자리에서 한고조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고향에서 종친을 모시
고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불렀다는 대풍가(大風歌)를 불렀다. 이성계는 대풍가를 통
해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천하재패의 꿈을 은연중에 나타낸 것이다.
大風氣兮雲飛揚 큰 바람이 일어나서 구름이 날아오르다.
威加海內兮歸故鄕 위세가 해내에 떨치고 고향에 돌아오다.
安得猛士兮守四方 어디서 용맹한 무사를 얻어 사방을 지키게 할까
오목대에서 구름다리 육교를 건너 이목대가 있다. 이목대는 시조 이한(李翰)때부터 누대
에 걸쳐 살던 곳으로 발이산(發李山)자락이다. 이성계의 4대조 이안사가 이 곳에서 태어
나 진법놀이를 하며 자란 곳이다. 목조는 당시 전주부사와의 불화로 함경도로 옮겨갔
다.이것이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건국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곧 하늘의 뜻으로 여겼
다. 이 내용은 용비어천가 3장에 묘사되어 있다. 건물은 없고 고종황제가 친필로 쓴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의 문구를 새긴 비석과 비각이 서 있다.

오목대로 오르고있다.


오목대(梧木臺)

오목대에서 내려다 본 전주 한옥마을

오목대 천장벽면에 걸린 대풍가
이목대 비각과비문/오목대 비각과 표지석
오목대 앞에서


간판이 너무 예쁜 예다원과 아리랑문화체험관
전주의 심벌 한바탕 전주 세계를 비빈다.
전주향교(全州鄕校)
전주향교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현재의 건물은 선조때 건립되었다
고 한다. 이 곳에서는 성균관과 같이 공자의 제자를 비롯한 중국의 유학자 7인과 우리나
라 18현 등 총 51인을 배향하고 있다. 대성전(大聖殿)에는 공부자(孔夫子)를 정위로 모
시고 顔子 曾子 子思 孟子를 중앙에 그외 공문십철(孔門十哲) 송조 6賢을 동.서벽에,
아국 18賢과 중국의 7賢 등 25位의 儒賢을 동.서무에 설위하고 있다. 그리고 계성사
(啓聖祠)에는 五聖의 考位를 모셔 총 51위의 先聖先賢을 모시고 있는 文廟이다.
'KBS드라마 성균관스켄달'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단다. 전국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향교로 소문나 있다.
전주향교는 홍살문을 지나 일직선으로 출입문인 萬化樓가 있고 내삼문 역할을 하는 일
월문(日月門)안으로 들어서면 성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 그리고 좌우로 동무,서무가
위치한다. 동무 서무 앞 뜰에는 400년 된 보호수 은행나무 두그루 하늘 높이 서 있다.
은행나무는 공자의 행단을 상징하는 나무로 전주향교에는 5그루의 은행나무 보호수가
있다. 대성전을 지나면 교육관인 명륜당이 자리한다. 명륜당은 강연장이고 기숙사가 동
재,서재로 양쪽에 위치한다. 명륜당 좌후편에 다섯 성인의 부모 위패를 모신 계성사가
있다. 전주향교 앞쪽은 전주천이 흐르고 있다.

전주향교 정문

전주향교의 정문 만화루

내삼문인 일월문

대성전

명륜당

400년된 보호수 은행나무

동무와 서무

서무인 경사제/계성사

명륜당,계성사,장판각으로 들어가는 입덕문
한벽당(寒碧堂)
찰한,푸를벽 - 차고 푸르도록 맑은 전주천을 내려다 보는 승암산 기슭 발산머리의 절벽
을 깎은 자리에 세운 누각이 한벽당(寒碧堂)이다. 옛 사람들은 한벽청연이라 하였고 전
주 8경의 하나로 꼽는다. 조선의 개국을 도운 공신이며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월당 최담
선생이 태조 8년(1404)에 별장으로 세운 건물이다.
월당 선생 유허비에는 ‘월당루’라 기록된 것으로 보아 시간이 지나며 ‘한벽당’이라고 명
칭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한벽’이란 이름은 이곳이 옥처럼 항상 맑은 물이 흘러 바윗돌
에 부딪쳐 흩어지는 광경이 마치 벽옥한류(碧玉寒流) 같다하여 붙인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한벽당(寒碧堂)의 편액글씨는 호남의 명핑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선생이 썼다.
한벽당 옆에는 한벽당과 어울리게 세워진 요월대(邀月臺)가 살짝 보이는데 요월대는 달
을 맞이하는 높은 누각이라는 뜻이다. 이 편액의 글씨는 석전 황욱(石田 黃旭)선생이 썼
다. 앞으로 흐르는 전주천과 정면의 남고산을 바라보는 풍광은 운치있는 한폭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전주천의 깎아지른 절벽 위의 한벽당 풍치는 많은 시인, 묵객의 발길을 멈
추게 하여 그들이 읊었던 시가 많이 전해 오고 있다. 그중 고려의 문신 주열(朱悅)은 차
마 한벽당을 그대로 떠날 수 없어 아래와 같이 노래하였다.
한벽루(寒碧樓)/주열(朱悅)
水光澄澄鏡非鏡(수광징징경비경) - 믈빛 맑아 거울이 거울 아니고
山氣靄靄煙非煙(산기애애연비연) - 산기운 자욱하여 연기가 연기 아니다.
寒碧桐凝作一縣(한벽동응작일현) - 한벽루 오동나무에 서린 한 고을
淸風萬古無人傳(청풍만고무인전) - 만고에 청풍을 전하는 이 하나 없네 !

전주천

한벽당 계단

한벽당

한벽당 현판/정자안 세손의 글

요월대

한벽대에서 본 절경
전주한옥마을-학인당(學忍堂)
한벽루에서 내려다 본 전주천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면서 전주천을 따라 걷는다.
전주천을 걷다보니 마치 무지개 모양의 예쁜 다리가 시선을 끌었다. 두개의 무지개모양
의 아치를 이루고 다리 위에는 큰 팔작지붕의 정자가 서 있어 한폭의 그림을 보듯 아름
답다. 이 다리가 남천교이다. 무지개다리,안경다리라고도 불린다. 이 다리는 전주한옥
마을로 진입하는 다리로 전주천과 함께 관광명소가 되고 있다.
전주천을 따라 양쪽으로 둘레길이 있어 걷는 사람도 많이 보인다. 전주천 북쪽은 바로
전주한옥마을이다. 1930년대에 형성된 교동, 풍남동의 한옥군은 일본식과 대조되고 화
산동의 양풍(洋風) 선교사촌과 학교, 교회당 등과 어울려 기묘한 도시색을 연출하고 있
다. 오목대에서 바라보면 팔작지붕의 휘영청 늘어진 곡선의 용마루가 즐비한 명물이 바
로 교동, 풍남동의 한옥마을이다.현재 995세대가 모여 있다. 한옥건물이 700여동이다.
또 한옥생활체험관이 있어 전통적인 한옥생활을 경험할 수 있다.
한옥마을 중 대표적인 가옥이 학인당이다. 학인당(學忍堂)은 조선 고종 때 승훈랑 영릉
참봉에 임명된 인재 백낙중의 옛 집이다. 백낙중은 효자로 이름난 분으로 돌아가신 뒤에
이를 기리기 위해 대문에 ‘백낙중지려(白樂中之閭)’라고 쓴 현판을 걸었다. 집 이름은
호인 인재(忍齋)에서 인(忍)자를 따 ‘학인당(學忍堂)’이라고 지었다 한다. 당시 일류 건
축가들이 지은 한식기와집으로 지붕 처리가 흥미로운데 지붕 끝부분의 둘레를 동판(銅
板)으로 싸 비바람을 막게 하였다. 궁중 건축양식이 민간 주택에 도입된 전형적인 예가
되고 있으며 전주 한옥 보존지역에 있는 대표적 건물 중 하나로 주목받고 있다.

천변의 그네타기에 청소년들이 모여 있다.

이곳을 지나는 자는 말에서 내리시오


남천교와 남천교 위의 청연루

강암서예관


학인당
경기전(慶基殿)과 어진박물관
경기전은 사적 제339호로 1410년(태종 10) 어용전(御容殿)이라는 이름으로 완산(完山)·
계림(鷄林)·평양 등 3곳에 창건하여 태조의 영정을 봉안했고, 1442년(세종 24) 그 소재
지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集慶殿), 평양은 영종전이라 했
다. 경기전을 제외한 나머지는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타버렸다. 경기전도 정유재란 때
불탔으나, 영정은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에 옮기어 보존할 수 있었다. 지금의 경기전
건물은 광해군 6년(1614년)에 관찰사 이경동(李慶仝)이 다시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중
건한 것이다. 경기전 입구에는 말에서 내리는 곳임을 표시한 하마비, 붉은 색칠을 한 홍
살문, 내삼문, 외삼문 그리고 초상화를 모신 전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각으로 들어가는 길은 가운데 왕이 가는 御道와 좌우의 문반길(東道)과 무반길(西道)
로 구분되어 있다. 경기전 안으로 들어가면 태조어진을 모셔놓은 진전이 있는데, 그 중
앙에 [丁]자 형의 돌출된 배향공간이 있다. 진전앞에서 바라보았을때, 그 돌출된 지붕
측면 널판지가 정면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나무로 된 조각품이 붙어 있다. 형상으로 보
아 틀림없는 한쌍의 거북이다. 한 마리는 목이 잘려나갔지만, 나머지 한 마리는 목이 온
전하게 남아있다. 거북은 잘 알다시피 수명장수를 상징한다. 그래서 비석 받침돌도 거
북이 형이다. 물론 불교에서 거북은 용궁 즉 부처의세계 내지 그곳으로 안내하는 인도자
이거나 불법수호자이다. 그리고 거북이는 물에서 살고, 진전이 목조건축인 점에서 특히
화재막이용 거북이일 가능성이 크다. 음양의 조화를 이루면서 화마를 피해 진전이 영원
하기를 바라는 염원의 발현인 셈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전주사고가 경기전 내에 위치하고 있다.
全州史庫-1439년(세종 21) 사헌부의 건의로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던 경기전(慶
基殿) 안에 설치되었다. 처음에 실록들을 여러 차례 옮겨 보관하다가, 1445년 12월 서울
춘추관, 충주·전주·성주(星州) 사고에 각 1부씩 봉안하게 했다. 따라서 세종실록부터 편
찬할 때마다 주자(鑄字)로 인쇄하여 각 사고에 1부씩 보관하도록 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모두 병화(兵火)로 불타고 4대 사고 가운데 전주사
고의 실록만 남았는데 전주사고의 실록원본과 교정본 및 새로 출판한 3부를 합해 5부를
서울 춘추관과 마니산·태백산·묘향산·오대산에 사고를 지어 봉안했는데, 전주사고의 실
록원본은 마니산에 보관되었다.
경기전 후면에 어진박물관이 있었다. 어진박물관에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 뿐만 아니라
세종,영조,정조,철종,고종,순종의 어진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철종의 어진은 장군복을
입고 있어서 독특하였고 여러 억측이 설왕설래하였다.
어진박물관을 끝으로 오늘 전주 야외답사의 오전일정은 모두 마친 셈이다.
경기전 후문인 서문으로 나와 경기전 담장을 따라 전동성당길 북쪽으로 3~4분 걸어가
면 미리 예약한 식당인 '전주한국집 본관"이 있다. 전주의 대표메뉴인 전주비빔밥과
이집에서 직접 제조한다는 모주를 맛보고 오후 첫 목표지인 완산 송광사로 향했다.

경기전 입출구

경기전 홍살문

노선생의 설명

丁자형 건물과 신도(神道)

神道 설명/처마의 거북 나무조각품

경기전 내부를 관람하고 있다.

태조의 어진을 모신 곳/아름다운 채색의 천장

태조 이성계 어진


조선왕조실록 保全紀蹟碑

전주사고(全州史庫)

어진박물관의 어진/태조,세종,고종

어진 봉안가마

어진을 모시는 행렬/반차도
송광사
송광사는 도의선사가 절터를 찾다가 영천수를 발견하고 터를 잡았는데 그때가 신라 진
평왕 5년(583)이었다. 그 후 폐사가 되어 주춧돌만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던 것을 고려
보조국사가 이곳을 지나다 大성지임을 아시고 표시를 해두었고, 순천 송광사를 개창한
후 제자들에게 본사를 복원·중창할 것을 부탁한지 수백 년이 지난 조선 광해군 15년
(1622:임술)에 웅호, 숭명, 운정, 득신, 홍신 등 보조국사 제자들이 덕림스님을 중창주
로 모시고 복원·중창하게 되었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올 것을 기원하
고 국난으로 돌아가신 일체 영가들의 왕생극락을 발원했던 곳이기도 하며 병자호란
때에 전주사고(왕조실록)를 지키기 위하여 승군 700명이 머무르는 등 민족의 역사적
영욕을 함께했던 호국도량이다.
송광사 일주문을 들어섰다. 대문을 달아놓은 특이한 일주문이다. 일주문은 현재의 위치로부터 3km 남쪽 밖인 나드리(무주, 진안방면 도로 입구)라는 곳
에 서 있던 것을 1814년(순조14년) 조계교가 있던 곳에 옮겼다가 1944년 해방되기 전
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이 절은 본래 白蓮寺(백련사)라 불렸으며 800동의 당
우와 600승려들이 살아 16방주(주지)가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대단했었다.
사찰에는 가람과 불법수호를 위해 금강문이나 천왕문을 두고 있다. 송광사는 금강문에
이어 천왕문도 연이어 서있다.
다포식 팔작지붕 모양을 한 금강문에는 那羅延金剛장사(아 하고 입을 벌리고 있어
아금강이라함)과 密蹟金剛(흠하고 입을 다물고 있어 흠금강이라함)의 두 장사가 문을
지키고 있다.
천왕문은 금강역사와 더불어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인 사천왕(四天王)을 모
신 전각이다. 외호신이란 불국정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는 신이라는 뜻이며,동,서,남,
북의 네 곳을 지키게 된다.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指國天王),서쪽을 수호하는 광목
천왕(廣目天王),남쪽을 수호하는 증장천왕(增長天王),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
天王)의 四大天王이 험상궂은 얼굴로 천왕문을 지키고 서 있다.
법당에 들어서면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이 바로 십자형 종루(鐘樓)(보물 1244호)이다.
십자형 종루는 이곳 송광사 종루가 국내 유일한 것이라 한다. 종루의 모양이 특이하고
아름다워 계속 시선이 간다. 종루 안에는 지옥의 중생을 구제한다는 범종(凡鐘)을 가운
데 두고 땅위의 네발짐승을 제도하는 북(鼓),물속의 생명체를 위한 목어(木魚),날짐승을
위한 운판(雲板)이 걸려 있다.
법당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대웅전이 보인다. 여늬 절과 달리 대웅전 앞뜰에 탑이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는 탑신앙이었으나, 탑대신 부처님을 모시는 전각을 세우기 시
작한 것이다. 5칸의 다포식 배흘림기둥의 대웅전 안을 들여다 보았다. 부처 세분을 모
셨는데 흙으로 구운 소조좌상(塑造坐像)(보물제1274호)이다. 소조좌불로는 국내 최대
크기(5.4m)라고 한다. 주불인 석가모니불과 협시불로 약사여래불,아미타여래불의 삼
세불 (전,현,미래)이며, 불상 복장에서는 병자호란 때 중국 심양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
세자,봉림대군 두 왕세자의 무사귀국을 비는 발원문이 나왔다고 한다.
이 좌불들은 국가 위기 때 땀을 흘렸다 하여 유명하다.
대웅전 천장에는 부처의 진리를 찬탄하며 부처에게 음성과 춤공양을 올리는 11점의
비천상이 그려져 있다. 한국민중예술과 불교미술이 한데 어우러진 한국최고의 아름다
운 천장벽화이다. 천장벽화는 대웅전 네벽면에 그림설명과 함께 그려져 있어 자세히
감상할 수 있었다. 대웅전 또한 보물(제 1243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가모니와 16위의 나한 그리고 후면에 500나한을 모시고 있는 나한전,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전,지장보살을 모신 지장전, 명부전,삼성각을 둘러본 후 종루 앞으로 모였다.
단체사진은 역시 아름다운 종루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 최상으로 여겨졌다.
이로써 오늘 야외수업은 모두 마친 셈이다. 원래 예정에 있던 전동성당은 시간이 모자라
부득이 빠졌는데 좀 아쉬운 감이 있었다.

종남산 송광사

일주문에 대문이 달려 있다. 일주문 안으로 금강문이 보인다.

사찰에 관한 설명

금강문

두 금강장사(아,흠금강장사)

천왕문

천왕문을 지나 법당안으로 들어서면 미륵보살의 화현 포대화상이 환하게 웃으며 맞이한다.

십자형 종루

종루에 대한 설명에 경청

대웅전 앞우측뜰에 높다란 탱화걸이가 설치되어 있다. 야단법석을 마련할 때~

대웅전

법당내로는 최대크기의 소조좌불/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약사여래,아미타여래불을 협시불로-
  
  
천정화를 대웅전 벽면에 설명과 함께 그려놓았다.

나한전/삼성각

관음전/지장전

종루와 대웅전을 배경으로 단체사진


종루 앞에서
야외수업에 덤으로 스케줄이 잡힌 딸기밭으로 향했다.
유기농 딸기밭 비닐하우스가 끝없이 전개되었다. 그 중에서 우리가 방문한 네개의 비닐
하우스 동은 다른 딸기밭과는 전혀 달랐다. 얼마전 KBS 6시 내고향 프로에 소개 되었다
고 하는데 딸기나무 키를 키워 서서 딸수 있게 하였고 먼지 흙이 전혀 묻지않아 물로
씻지않고 그냥 따 먹을 수 있게 하였다. 따는 방법 설명이 있은 후 농장(비닐하우스) 안
으로 들어가서 제한없이 따먹게 했다. 처음 생각에는 아마도 딸기밭이 작살 날것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먹는 양이 그리 많지 않았다.
불과 20~30개?. 미리 예약해둔 2kg들이 60박스가 금새 팔린다.한박스에 만원이라니 가
격도 모두들 만족한다. 두번째 스케쥴은 강경 젓갈판매장이었다. 대부분 여성동지들이
라 젓갈에 관심도 많고 구입량도 많았다. 남자들은 잔치국수만 얻어먹고 구경만 하다
밖으로 나와 강둑에서 강풍경을 감상하였다. 강둑에서 현지의 한 노인을 만나 강경과
군산하구독, 강경 젓갈시장의 변천과정 등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오늘 수업에 대한 복습과 함께 야외나들이를 모두 마무리
지었다. "한바탕 전주 - 세계를 비빈다"는 켓치프레이즈를 내건 전주 완주여행은 개인적
으로도 추천할만한 맛과 멋의 도시였다.

딸기밭

2kg포장/서서 딸기를 딴다.

젓갈시장/먼저 잔치국수를 대접한다.

강경-서천-군산을 잇는 다리가 보인다. 군산하구둑으로 강경쪽 금강은 큰배가 들어오지 못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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