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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궁극의 내 나라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2장 23절: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이 말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했기 때문에 아신다는 거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말을 착각하는 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지옥에 갈 것을 내가 안다’라고 하니까 인간이 ‘어떻게 압니까?’ 하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지옥 갈 사람으로 만들어 놨기 때문에 안다’라는 뜻으로 이해를 한다. 이런 생각이 맞는 것 같으나 뭔가 찜찜하다. 왜냐? 같은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누구는 지옥에 가도록 만들어 놓고, 누구는 천국에 가도록 만들어 놨다고 한다면 이치적으로 어떻게 되느냐?
이에 대해 인간이 하나님께 ‘어떻게 그렇게 불공평하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하나님께서 ‘나의 절대적인 권력으로 내 마음대로 그렇게 했다?’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절대자라고 해도 인간을 당신의 모양과 형상대로 인격자로 지어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 죽음 저 너머의 세계에 영원한 이해타산을 가지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시고 ‘누구는 내 마음대로 지옥에 가게 했다’라고 하는 식이 되기 때문에 인간을 인격자요 자유자로 만든 의미가 없어진다.
이렇게 되면 믿는 사람이 전도할 필요도 없고, 힘써서 예수를 믿을 필요도 없다. 왜냐? 지옥에 갈 자로 만들어진 사람은 아무리 예수를 믿더라도 지옥에 갈 것이고, 천국에 갈 자는 안 믿고 제멋대로 살아도 천국에 가게 된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해 잘 모르면 하나님을 오해하기 쉽다.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가 있는데, ‘예정’은 글자 그대로 하나님이 정하셨다는 거고, 하나님의 ‘예지’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다는 거다. 이 둘을 합쳐서 ‘하나님의 예정 예지’라고 하는데, 이것을 풀어서 말하면 하나님께서 정하셨기 때문에 그 결과를 미리 아신다는 거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 보자’ 하고 지켜보다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저 사람의 결과가 어떻게 되겠구나’ 하고 안다면 이것은 하나님은 미리 모른다는 말이 된다.
‘하나님의 예지 예정’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성경을 보면 이게 맞는 것 같기도 한 사건이 있기도 하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해서 아들 이삭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칼을 들어 아들의 목에 꽂으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서 ‘내가 이제야 네 마음을 알겠다’라고 하시며 이삭을 죽이지 않게 했는데, 이것을 겉으로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들을 죽이려고 하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마음을 몰랐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래서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예지 예정’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게 아니다.
‘예정’은 하나님의 주권과 단독으로 되는 거고, ‘예지’는 예정을 하기 전에 존재가 선행되어야 할 수 있는 거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정에 대해 오해하기를 하나님께서 어떤 사건을 이루시는데 하나님께서 여기에 동원되는 인간의 자유를 무시하고 억압과 강압적으로 당신의 예정대로 되게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거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하나님의 예정이 이런 것이라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공의가 없어지고,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도 없어지고, 예정도 없어진다. 이치에서 하나가 틀리면 예정도, 천지창조도, 구원도 다 없어진다.
그러면 ‘하나님의 정하신 뜻은 뜻과 미리 아신 대로’라고 하는 게 무엇을 두고 말씀하는 거냐? 모든 인간은 아담 이후로 모두가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다. 사람이 죄에 매이면 강압 억압 근심 걱정이다. 이런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 죄가 도말이 되고 죄에서 해방되어야 자유자가 된다.
기독교는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 근원적인 죄에서 해방되는 거고, 성경을 통해 무식과 무지에서 해방되는 거다. 진리교회에서 예배로 통해 진리이치의 말씀을 깨닫고 알게 되면 이 면에 자유가 된다. 알면 자유요 모르면 구속이다. 세상에서 사기꾼이 자기에게 속는 사람을 우습게 보듯이 예수 믿는 사람이 진리이치를 모르면 사단 마귀로부터도 우습게 여김을 받는다. ‘돈이다, 공짜다’ 하는 말에 눈이 뒤집혀서 피해를 본다면 이 사람은 무지다. 하나님을 모르면 이런 일을 당하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을 모르면 만물 아래로 내려 가지만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올라간다. 사람의 정신이 물질에 고착되면 이 사람은 물질 때문에 망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안 썩는 거, 영원히 가는 거, 불에 안 타지는 것을 귀로 먹는 거다. 자꾸 입으로 먹는 것을 먹으려고 한다면, 즉 물질을 가지려고 한다면 저속한 사람이다. 마음에서 ‘돈 돈’ 하면 가룟유다가 된다. 사람이 가치판단을 못 하면 자유가 없어진다. 성경은 산천초목과 과학의 이치를 통해 가치판단의 결과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에서 죄라고 할 때 눈에 보이는 죄에서 정죄가 되는 거냐, 자기 속에서 벌써 죄가 되어나오는 거냐? 후자다. 자기 마음에서 ‘내가 생명과를 먹어야지’라고 한다면 생명과를 먹기 전에도 죄가 아니다. 그런데 선악과는 먹기 전에 마음으로 ‘먹어야지’ 하면 그 즉시로 죄요 죽는다. 이러면 선악과를 먹는 것으로 계속 성장이다. 이건 죽는 거고,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이다. 이방인들은 이것을 모른다.
생명과인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눈으로 보암직한 세상 것을 자기 기준으로 세우고 있으면 이건 선악과다. 가인은 예배의 장소에서 선악과를 먹는 사상으로 말씀을 들으니 피 없는 제사가 나오게 된다. 이 가인의 후손이 번창했지만 노아홍수 때 하나님의 심판으로 물속에서 다 죽었다. 그 후에 하나님을 섬기는 셋의 후손에서 노아도 나오고, 노아의 세 아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후손이 나왔다.
성경에 여러 가지 역사를 보여주는 것은 표면적인 역사 이면의 것을 깨닫게 하려는 거다. 그런데 성경의 역사만 알고 이면적인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게 된다. 그 예를 보면 아프리카 사람들이 표면으로 보면 함의 후손들인데, 아프리카 사람들이 피부가 검은 게 저주를 받아서 그런 거냐? 성경을 이런 식으로 보는 것은 큰 실수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한다면 복음을 받은 사람은 다 피부가 희냐? 흑인도 예수 믿는 사람이 많다. 아프리카의 에디오피아도 복음을 받았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하시는 이면의 뜻을 알아야 한다.
죄가 무엇이냐? 생명과는 안 먹고, 영생과는 안 먹고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는 거다. ‘영생과’란 다르게 말하면 죽지 않는 생명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안 죽는 생명이다. 이 성질은 부활성이다. 그래서 죽더라도 되살아난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에는 부활성이 들어있다. 우리는 말씀 속에서 안 죽는 생명을 먹어야 한다. 안 죽는 생명을 먹으려면 안 죽는 지식을 먹어야 한다. 세상의 지식은 죽는 지식이라서 이 지식을 따라가면 죽는다. 이러면 물질 이해타산으로 살게 된다.
인격자인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는데, 이 자유로 선악과를 먹으면 그 뒤에는 심판이 따른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의 자유로, 자기 주관성으로 선악과를 따먹었다. 영원하고 변동 변질이 안 될 것을 먹어야 하는데 썩고 죽을 것을 먹었다. 시간 속에서 변질될 것을 먹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나온 지식은 다 땅의 것이라서 여기에서 나오는 윤리 도덕성도 시간 속에서 변질이 되고 사람을 죽는 곳으로 이끈다. 예수 믿는 우리는 땅에 살면서 생명과를 먹는 지식을 기준으로 땅의 지식을 자타의 이룰구원에 활용이다.
‘골리앗’이란 강하고, 크고, 많고, 세상적으로 크다고 하는 모든 것을 상징한다. 다윗은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 그런데 블레셋에서 제일 크고 제일 강하다고 하는 골리앗을 이스라엘 앞에 자랑스럽게 내놓았다. 이 골리앗이 선악과를 먹은 지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욕하고 짓밟으니 다윗은 생명과를 먹은 지식에서 의분이 나서 골리앗을 쳐서 눕힌 거다. 세상사람들은 아무리 잘 살아도 하나님께서 데리고 가면 그걸로 끝난다. 그런데 사람들이 재산을 가지고 자랑하고 싸운다. 그러나 이런 것은 생명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부터 생각했다. 이분의 마음을 생각해 봐라. 그런데 오늘날 거짓된 종들은 교인들에게 물질성의 교훈을 준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으로서 신령한 양식을 먹어야 하는데 물질성을 먹으면 믿음성이 죽는다. 이렇게 믿는 사람치고 하나님의 지식이 있는 자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하면 할수록 자기는 자꾸 옳음으로 커진다. 진리와 성령으로 인격과 성품이 하나님으로 온전히 닮아나간다. 그다음에는 변화 부활을 받게 되는데, 정신과 사상을 세상 것에서 천국의 것으로 바꾸는 게 변화요, 이렇게 변화된 것은 천국에 올라갈 때 신령성으로 되어서 올라간다. 주님으로 실상화 된 게 천국으로 올라가는 게 부활이다. 그리고 변화 부활을 받아서 신령천국에서 올라가서 하나님과 영원히 존귀 영광중에 누리게 된다. 이것을 거역하거나 등한시하거나 모르게 되면 자기를 지으신 인간창조의 목적에서 이탈되어 사는 것이니 사망성이다.
지금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은 자기의 주관성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살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에서 이탈된 삶이니 사망이다. 이 소원 목적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연관적으로 살면 살수록 사망이 더 커진다. 그런데 문제는 마지막 시대가 될수록 교회마저도 이런 정신으로 산다는 거다. 계:에서 영의 눈으로 이런 정신을 보라고 각종 싸움을 말해 놓았는데, 이것을 ‘눈에 보이는 3차 세계전쟁이니, 핵전쟁이니’ 하고 있으니 이게 될 말이냐? 성경을 영적으로 보아야 사람이 현재에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지는 거지 역사적 물질적으로 보면 글자대로 다 맞힐 수도 없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사람이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이 말씀이 ‘언제 전쟁이 나고, 언제 지구가 불에 탄다’ 하는 예언대로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거냐? 믿는 우리에게 언제 전쟁이 나고, 언제 지구가 불에 타고 하는 게 큰 건지, 현재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을 정해놓았다는 게 큰 건지? 좁혀서 말하면 지구가 불바다가 되는 날을 정해놓게 큰 건지, 현재 내가 죽고 사는 게 큰 건지? 자기 몸 안에서 되는 게 크냐. 자기 몸 밖에서 되는 게 크냐? 자기 몸 안에서 되는 게 더 큰 거다. 현재에 자기가 잘못되면 영원히 잘못될 수 있다. 내가 현재 인간창조의 목적대로 가고 있다면 이 사람은 희망이 있는 거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심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는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자기의 소원과 목적과 취미를 가지고 끌려가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예수를 죽이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 이것은 선악과를 따먹고 그 정신으로 사는 사람은 그 성향이 진리를 죽이는 일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다. 오늘날 예수를 믿는 우리도 진리를 살리는 일에 동참이 아니면 죽이는 일에 동참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생각하는 사고가 진리에 적극적이 아니면 이 사람은 예수를 죽이는 일에 슬슬 따라가거나, 구경자가 되거나, 적극적인 동참자가 된다. 남이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가 된 것만큼 스스로가 그 길로 간다.
오늘날 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일에 구경꾼이냐, 그냥 따라가는 사람이냐, 로마군인이 ‘너는 누구냐?’ 하면 금방 달아날 수 있는 자리에 있느냐? 자기가 신앙하는 자리가 있는 거다. 이것은 남이 정해준 게 아니라 자기가 예수님을 어떻게 믿고 깨달았던 그 수준대로 자기는 그 자리에 가 있는 거다. 자기의 이런 자리를 알고 말씀 깨달음으로 자기의 위신을 높이고 영능의 실력을 높여라. 이러려면 옳은 길이라면 적극적으로 가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은 가치판단이 명확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세상사람들이 하는 것을 따라가면 안 되고 말씀을 깨달아서 깨달은 말씀대로 가야 한다. 예수 믿으면서 세상을 따라가다가 망하면 세상이 자기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진리로 가지 않는 형제들을 애타게 돕지 말아라.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면 자기가 진리를 죽이는 일에 주도적인 세력이 될 수 있다. 이럴 때는 자기의 자유로 악에 동원이 되는 거다.
‘미리 아신 대로’라 함은 자기가 진리생명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것보다 돈을 더 좋아하고, 세상과 세상 것을 더 좋아하면 네가 너의 영생을 팔게 되고, 너의 구원을 팔게 되고, 사람을 팔고, 스승을 팔고 네 양심의 고통에 의해 네가 죽게 된다는 거다. 이것은 못된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거다. 예를 들면 ‘네가 칼을 가지고 장난하는 것을 보니 사람을 찌르겠구나’라고 하듯이 사람의 정신과 사상의 근원을 아는 사람은 이게 보여진다.
어려서부터 몽둥이를 휘두르고 남의 장독대 부수기를 잘하면 어른이 되어서 마치 누가 이 사람을 불러서 시킨 것처럼 자기가 자원하여 스스로 악한 일에 동원되어서 자기가 주격이 되든지, 주도적인 세력이 되든지 해서 사람들에게 ‘나를 따르라’ 하며 사람을 해치는 일을 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사람들이 동원되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이 벌어지겠구나’ 하는 것을 미리 안다. 지금 자기의 잘못된 성격과 성질을 고치지 않으면 어떤 사건에 끌려가기 이전에 자기 스스로 자원이 되어서 악한 일에 동참이 된다. 그러니 자기를 잘 살펴라.
자기는 사람들이 모여서 무슨 말을 하면 자기도 그 자리에 끼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냐? 그리고 자기는 어떤 말에 귀가 솔깃해지느냐? 자기의 성격이 어떤 일에 행동이 빠르냐? 누구든지 자기 속에 든 대로 나오게 된다. 그래서 남을 못 속인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기가 책임을 지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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