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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7장 9-14절
그들을 보전하사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시되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십니다. 그들은 누군가? 처음부터 아버지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에 속한 자들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저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결과 처음부터 아버지의 것이었던 저들, 그러나 세상에 속한 저들을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다고 말할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드러나지만 철저히 예정론을 바탕으로 한 말씀입니다. 즉 처음부터 아버지의 것이었다고 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대상 중 선택된 자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선택되었다고 해서 날 때부터 믿음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날 때부터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들 모두는 세상에 속한 자로 태어납니다. 죄인으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됨으로 인하여 참된 믿음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이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버지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럼 아버지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말씀을 주셨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아들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율법도 있고 복음도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깨닫게 하시고, 복음을 통해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이러한 모든 말씀을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셨다는 것이고, 아들은 이 말씀을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 참으로 알게 되고, 또한 아버지께서도 아들을 보내신 줄 믿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선민이라고 불리던 유대인들과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다수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부인했지만, 제자들은 그런 자가 아니란 것입니다.
물론 12제자 모두가 그러한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말씀하셨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말씀하시지만 12명 가운데 한 명은 제외됩니다. 그가 누구냐? 가룟 유다입니다. 즉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아버지의 것이 아닌 자로 있었던 겁니다. 아버지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들에게도 주실 수 없었던 겁니다. 당연히 말씀을 지키었다고 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합당한 열매로 나타나지 않았던 겁니다. 비록 주의 이름을 부르기도 했지만,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했지만,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기도 했지만, 주님께서는 모른다고 하실 수밖에 없는 자로 있었던 겁니다.
이제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본래부터 아버지의 것이었던 자들, 때가 되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데, 9절에 보시면 저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6절 이하 8절의 대상을 위하여 기도하시는데, ‘그들’을 위한 이 기도는 결코 ‘세상’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때 세상은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 세상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있지 못한 자들, 그들이 세상에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본래부터 하나님의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들, 그들만을 위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직접적으로는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 한 명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라는 것이고, 좀 더 확장해서 적용하자면 모든 사람이 아닌 오직 택자 가운데서도 참된 믿음에 이른 자를 위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보편성을 가지고 말하자면 단순하게 택자를 위한 기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시고 율법을 가르치셨지만, 그들 모두를 위해서 기도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예수님의 주된 관심은 오직 택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된 관심이 오직 택자에게 있다는 것은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관심도 오직 택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도 이런 면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인데, 모든 백성이 아닌 ‘자기 백성’ 여기에 모든 초점이 있는 겁니다. 창조로만 보자면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모든 만물이 섭리의 대상이지만, 구원과 관련해서 보자면 모든 만물이 아닌 오직 택자만이 주된 관심이고 섭리의 역사 속에 주된 관심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도 오직 택자만을 위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미 언급한 바가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는가?”란 질문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든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특히 요한일서 2장 2절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라고 할 때 우리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이 부분에 대한 주석에서 그것 자체가 유기자까지 모두 포함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모든 믿는 사람들과 지구 위에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그런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온 세상’이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더불어 교회 역사 안에서 오랫동안 주장되어온 것이 있습니다. 일단 칼빈 당시 보편적인 해석으로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설교 중에 언급된 바가 있는데(요3:16 설교 참고),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위한 충분한 고난을 받으셨지만, 그러나 오직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그것이 유효하다.”는 내용입니다. 성경이 온 세상을 위한다, 혹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한다는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속죄의 충분성과 유효성을 구분하여 해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칼빈 시대 보편적인 해석으로 있었다고 할 때 칼빈을 비롯하여 많은 개혁자들이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저자인 우르시누스도 이런 입장에 있었고(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p379), 도르트 신조에도 보면 이러한 내용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교리인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로 말미암은 인간의 구속에 대한 부분 제3장에 보면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은 죄를 위한 유일하고도 가장 완전한 희생이요 만족이다. 따라서 무한한 가치와 대가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온 세상의 죄를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하다.”
그러나 충분성과 유효성의 논리에서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수요일에 살폈던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뜻의 의논을 따라 작정하시고 작정하신 그대로 실행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아무리 무한한 능력을 지키고 계신다 할지라도 자신의 뜻에 반해서 그 능력을 행하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115편 3절은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시는 겁니다.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시지, 원하시지 않는데 능력이 있다는 것으로 그 능력을 펼치시지는 않습니다.
충분성과 유효성의 논리는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뜻, 의지를 간과한 것입니다. 도르트 신조의 표현처럼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은 죄를 위한 유일하고도 가장 완전한 희생이요, 만족입니다. 무한한 가치와 대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 세상의 죄를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 충만한가? 만약 하나님께서 그렇게 뜻하시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성경이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처음부터 택자와 유기자를 구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도 택자를 위함이요, 그의 죽음도 택자를 위함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그의 고난과 죽음은 누구를 위해서만 충만하냐? 능력적인 차원이 아니라 그의 뜻으로 보자면 택자만을 위한 고난과 죽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그 유효성도 오직 택자에게만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는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셍상을 위한 충분한 기도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대상은 택하신 자들 가운데 믿는 자들이요, 아직까지 믿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 속한 택자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까지 그가 행하신 모든 사역들, 그리고 앞으로 있게 될 그의 죽음과 부활 등 모든 것이 오직 택자만을 위한 일로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10절을 보시면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9절에서 내게 주신 자들은 다 아버지의 것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동일한 의미에서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직접적으로 열 한 명의 제자들, 택함 받은 사도들은 아버지께 속한 자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확장해서 적용하자면 모든 택자는 아버지에게 속할 뿐만 아니라, 때가 되어 참된 믿음이 주어질 때 아들에게 속한 자로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데, 이것은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고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6절에서 그들이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었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통해 영광을 받았다는 부분도 사실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영광을 받았다는 것은 이미 결과로 나타났다는 것인데, 그들에게서 나타난 결과는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5장 16절 말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측면에서는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정작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실 때 모든 제자가 다 도망하게 되는데, 무슨 선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심기신 믿음과 그 믿음에 합당한 고백은 거짓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다는 것은 이런 측면인 겁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받아야 할 영광이 없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할 때 알고 믿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알고 믿는 것에 대한 자라남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유효적 소명과 참된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으로도 영광을 받으시지만,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11절을 보시면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6절 이하에서 자신의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신다고 할 때 10절까지는 어떤 면에서 저들의 정체성과 관련된 부분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일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입니다. 소속이 어디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살아가는 곳은 어디냐? 이 세상입니다. 지금은 스승인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11절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것처럼, 그리고 이미 고별강화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아니하게 됩니다. 죽음과 부활 이후 승천하시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면 제자들도 따라 가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이 세상에 남아 있습니다. 남아서 할 일을 해야 합니다. 다만 할 일을 해야 하는 자로 남아 있지만 부족하고 연약함 가운데 있어서 엄밀히 말하면 그들 스스로만으로는 계속해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지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 드리지도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계실 때는 어떠합니까? 많은 부분 예수님으로부터 채움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받았고, 예수님의 능력도 보았습니다.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율법 해석이 있을지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수정이 가능했습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도록 보내시면서 능력까지 행하시도록 했지만 항상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실제로 간질병에 걸린 아이를 고치지 못해 쩔쩔 매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친히 그 아이의 병을 고쳐주심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던 겁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예수님께서 저들을 떠나 더 이상 함께 하실 수 없을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 저들을 맡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속한 자였으며,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소속이 되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시기를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하시는 겁니다.
여기서 보전해 달라는 것은 온전하게 보호하고 지켜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또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서, 더 이상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로서, 그러나 여전히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자로서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붙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속한 자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서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세상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4절에서는 세상이 그들을 미워한다는 말씀도 하시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이미 요한복음 15장에서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8-19) 왜 세상이 하나님께 속한 자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를 미워하는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 속한 자와 세상에 속한 자는 모든 부분에 있어 다른 원리로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갈 때 세상은 하나님께 속한 자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를 미워할 수밖에 없지만, 그리고 그런 미움은 박해라는 실제적인 어려움을 주기도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붙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특히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해 달라고 기도하시는데, 이것은 아버지의 이름에는 그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림과 동시에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 속한 자로 정하셔서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다고 할 때 그 일에 있어서 보전되는 일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런 능력도 없고,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은 영광을 받기에 부족한 분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분으로 계시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해 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그 능력으로 저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붙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고백하는 것도 동일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1-3) 하나님은 한 마디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특히 구원과 관련하여 일하실 때 하나님은 한번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자들은 결코 그 구원에 있어서 포기하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인간의 경우 자주 구원의 길에서 이탈하려고 합니다. 죄가 그 대표적인 성격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늘 나타내십니다. 그래서 다윗이 고백하는 것처럼 푸른 풀밭에 누이게도 하시고,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기도 하십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소생시키기도 하시고, 그래서 의의 길로 인도하심으로 양 떼들을 이끄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없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주께서 함께 하시고, 친히 이끄십니다(시23:4 참고). 이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9)라고 기도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는데, 여기서 ‘우리와 같이’는 ‘아버지와 아들인 내가 하나된 것 같이’입니다. 성부와 성자만 하나가 됩니까? 성부와 성령도 하나가 되십니다. 또한 성자와 성령도 하나가 되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신다고 할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기록된 성경을 통해 계시하시되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한 하나님 안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라는 이것을 하나의 3분의 1이 성부고, 하나의 3분의 1이 성자고, 하나의 3분의 1이 성령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물리적으로 이해한 것인데, 하나님은 물리적인 분으로 계시지 않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할 때 한 분이신 하나님은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는데, 세 위격이라고 해서 셋이 다른 뜻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한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자로,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 비록 세상은 저들을 미워하겠지만 저들은 그런 세상 가운데서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풀어 설명하는 것이 요한복음 17장 20절 이하에서 볼 수 있는데,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17:20-23) 6절부터 19절까지가 직접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라면 20절부터는 그들을 통해 믿게 될 자들을 위한 기도인데, 여기서도 동일한 기도를 하시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기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은 요약적으로 말하면 믿음에 있어서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고,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는 그 일에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에베소서 4장에서도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내용으로 있습니다. 11절부터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1-15) 특별히 여기서는 말씀 사역자를 교회 안에 두신 이유로 설명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이 목적으로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온전함은 어디인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까지 자랄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은, 그것도 우리와 같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은 아무렇게나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가 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고처럼 모든 종교의 통합, 이런 하나됨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서 그분의 것으로만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안에서, 또한 그분의 것으로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믿음에 있어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고, 그런 믿음이 가지는 목적과 목표에 있어서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헤롯과 빌라도가 본래 원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재판하는 과정 속에서 친구가 될 수 있었는데, 그런 식으로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택한 백성의 하나됨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닌 세상에서 구별된 것으로서 하나됨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데,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기도를 하고 있는 시점에서 볼 때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세상적인 기준에서는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동일하게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징치적 메시아로 자신을 나타내심으로 로마를 물리치고 왕의 자리에 군림하게 될 것을 꿈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신 그런 의미의 하나됨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꿈을 함께 꾸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좌우편에 앉을 것인가로 싸우는 것이 그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 세상적인 의미에서의 하나됨일 뿐입니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는 하나가 되지만, 그 목적에 이르게 되면 얼마든지 등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신 하나됨이란 결코 반목이 없습니다. 같은 뜻, 같은 목적을 가질 뿐입니다. 세상은 자신의 영광을 위한 하나됨밖에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기도하고 계신 하나됨은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은 일절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여주신 것처럼 아버지의 영광만을 위해 있을 뿐입니다. 그 목적을 위해 하나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위해 믿음이 있는 것이고, 그 목적을 위하여 믿음에 있어 장상한 분량에 이르게 되는 일이 있는 겁니다. 거기에 싸움이 있는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나타날 뿐입니다.
12절에서는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시는데, 11절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여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이고, 12절은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있을 때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다는 내용입니다. 즉 지금 11절의 내용으로 기도하는 것은 결코 새로운 것을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12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지금까지 해 오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는 동안은 자신이 그들을 보전하여 지켰지만,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게 됨으로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께 요청을 하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계시는 동안 자신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여 지켰다고 할 때 무엇으로 그 일을 했는가?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7장 16절과 17절에서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는 것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이후 하나님께서 저들을 보전해 주시도록 기도한다고 할 때 저들을 보전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만이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보전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입니다. 물론 그런 도구가 효력이 있기 위해서는 고별강화에서 강조하신 것처럼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올라가시지만 올라가신 이후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미 그들 안에 있는 성령이 계시지만 그들의 복음 사역을 위해 성령의 가시적인 역사로서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고, 그 결과 성령께서 그들을 이끌어 복음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시게 하는 겁니다.
분명한 것은 성령이 말씀을 사용하심으로 그들을 보전하여 지키시는데, 그 결과는 멸망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구원의 완성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12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모든 제자가 아닙니다. 거기에 가룟 유다는 제외됩니다. 그래서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특히 멸망의 자식인 가룟 유다에 대해 성경을 응하게 함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미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18절입니다.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이때 성경을 응하게 한다는 말씀은 시편 41편 9절의 내용입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즉 가룟 유다의 배신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예언되어 온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예언되었다는 것은 좀 더 근원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정하셨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작정하셨기 때문에 작정하신 하나님이 불의하시다고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2장 22절은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작정대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는데, 그 배경에는 가룟 유다의 배신이 있고 그 배신은 성경이 예언한 바를 성취하는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작정하신 하나님이 불의하시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파는 그 사람에게 화가 있다는 것은 그의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잘못이 아니란 것입니다.
결국 12절은 택하신 제자와 유기하신 제자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룟 유다를 사도로 세우셨지만 유기자이기 때문에 그를 보전하여 지키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택자로 불러 사도로 세우신 나머지 제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보전하여 지켰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또한 그들을 떠나시면서 동일하게 지켜 보호해 주시도록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런 모든 기도는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 13절입니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주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택하신 자기 백성이 멸망에 이르지 않고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까지 지고자 하시는 겁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지금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신 겁니다. 그들로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기 위해 이러한 기도를 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가장 기뻐해야 할 것은 세상에서 잘 되고, 세상에서 이름을 알리고, 다른 사람이 우러러볼 만한 그러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구별된 자로서 말씀으로 보전되어 멸망에 이르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신자가 많은 부분 넘어지는 자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은 세상에서 잘 되고, 세상에서 이름을 알리고, 다른 사람이 우러러볼 만한 그런 사람이 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세상에서 못난 사람으로 살고 싶겠습니까? 물론 못난 사람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할 수 있다면 주의 뜻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최선을 다한 어떤 결과로서 열매들이 있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의 뜻 안에서’입니다. ‘주의 말씀을 따라서’입니다. 주일도 어겨가면서 시험치고 잘 되는 그런 쪽이 아니란 것입니다. 여러분, 주 뜻 안에서, 주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면 생각보다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의 말씀 안에서 보전이 되고 있다는 것, 그래서 멸망이 아닌 구원의 완성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선택하시면 결국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구원의 완성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완성에 이를 때까지 보전되면서 가고 있는가? 아니면 주의 백성인데도 내 마음대로 사는가? 만약 후자라면 거기에는 주의 기쁨이 없습니다. 주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말씀으로 보전되는 데 있습니다. 보전되어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데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주의 말씀으로 보전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주의 뜻 안에서, 주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주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시면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왜 세상이 하나님께 속한 자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를 미워하는가?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주어 말씀대로 살아갈 때 세상은 하나님께 속한 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미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원리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저들과 다른 원리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말씀의 원리를 따를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말씀의 원리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말씀을 따르는 자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과 같은데, 세상은 바로 이런 사람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이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세상을 사랑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내려놓는다면 세상은 여러분을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세상은 결코 여러분을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기에, 세상에 속한 자이기에 반드시 미워하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다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도 세상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았고, 그 결과 십자가를 지신 것 아닙니까? 우리가 이런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되었다고 할 때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연약합니다. 얼마나 부족합니까? 이 연약함과 부족함 때문에 말씀 앞에서 몸서리 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주께서 기도하고 계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우리는 보전하십니다. 지키시고 보호하셔서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택자는 바로 이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런 기도의 내용 속에서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지금도 이렇게 기도하시지만 기도하신다는 것 때문에 우리의 마땅한 의무를 소홀히 해도 괜찮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말씀으로 보전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계신다면 실제로 그렇게 역사하실 것이지만, 그런 역사가 나타나도록 우리는 우리 자신을 늘 말씀으로 비춰보면서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가면서 연약한 우리를 좀 더 강하게 붙들어 가야 합니다. 말씀에 대하여 듣기만 하고 들은 바를 실천하도록 애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안에 채워가는 일에 힘써야 하고, 그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붙들어가도록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