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에서 말하는 ‘성령운동’은 거친 물살에 몸살이 났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그 반응이 상반되고 논란도 크다. 어떤 사람은 성령운동 때문에 한국 교회가 신앙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고 비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성령운동이야말로 오히려 한국 교회를 살리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도대체 성령운동이란 무엇인가? 왜 그것이 ‘운동’(movement)이라는 말로 규정되어야 하는가? 한국 교회의 성령 이해는 과연 성경적으로 건강한가?
성령운동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한다.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 하나님에 비해 성령 하나님은 왠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취급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성령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편견도 적잖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령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으로서 창조에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 살리는 영으로서 함께 사역하신다. 다만 그의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가 중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의 독자적 인격성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 그분은 구약에서 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셨고, 신약에서 그리스도와 인간을 중재하셨다. 이는 성령 하나님의 중요한 특성, 즉 ‘화해의 영’으로서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특히 성령은 그리스도의 구원사건과 교회의 자기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령은 사람을 살리고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영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성령운동의 부정적 현상 때문에 성령론이 외면된 측면이 있다. 이는 성령운동의 신비주의적 성격이나 은사주의가 건전한 신앙을 훼손하고 있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혼합주의에 입각해서 본질을 왜곡하는 토착화가 시도되면서 성령 이해의 파행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성령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이해는 시대의 요청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신학의 패러다임은 시대별로 신론에서 기독론을 거쳐 성령론의 순으로 전개되어갔다. 좀 더 열린 시각을 가지되 성경에 근거한 성령 이해가 필요하다.
나아가 21세기의 다원화된 사회에서 성령의 역할에 대한 기대는 자못 크다: “[성령은] 다원화된 세계 속에서 수평적인 사고를 하게 하므로, 열려진 마음으로 세계를 향하게 하고 또 자아 중심 세계 속에서 함께 서로를 향하여 공동체적 사고를 하게 하고... 사랑과 연합과 연대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한다.” 수직적 사고의 틀이 전통적 신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제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수평적 사고를 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랑의 공동체를 구현해나가는 것이 우리 시대의 최대 관심사가 될 것이다. 특히 성령론은 교회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성령에 대한 이해가 교회사역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밀접하게 연관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 내재성을 역동적으로 구현하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회중주체적 조직신학], 47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