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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구하사 보게나"…..1977년 동해안에서 소대장근무 당시 휴가중인 분대장에게 보낸 편지
구하사 보게나
오랜만에 구하사 글 접하고 또한 즐거운 나날을
지내고 있다니 무엇보다도 반갑네.
이곳 戰友들 역시 염려에 힘입어 건강히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다네.
오랜만에 맑은 날씨를 보니 상쾌한 마음 금할 길이 없으며
휘영청 보름달이 저 푸른 바다위에 유난히도 밝게 비추이는 걸 보니
오늘 저녁도 보초근무 이상 없을 듯 하이.
그동안 소대에는 약간의 인원이 변동되었을 뿐 별일은 없고
신병이 일분초에 몇 명 왔지.
선창이도 귀대를 했고 혁진이는 이달 말차 제대 특명을 받았다네.
김창우하사가 우리 소초로 오게 돼서 한결 순찰 돌기에 수월해 질것이야.
구하사를 휴가 출발 시킨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귀대시간이 임박해졌으니
참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애.
같이 있는 동안 화기 소대장 밑에서 일하느라 고생 많았어.
그래도 구하사는 묵묵히 소초원들과 아무 trouble 없이 잘 이끌어 나갔지.
잠시나마 떠나 보내니 한쪽이 텅빈 것 같아 영 허전함을 절감하네.
반가운 소식하나는 병남이나 영환이가 소식 전했겠지만
2분초와 축구 시합에서 이겼다는 것이야.
소대장이야 어느 분초가 이기든 공정성을 유지해야 되지만,
1분초가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해준데 대해 아주 만족스럽네.
요즘 이곳은 나무심기나 꽃나무 가꾸기 등 꽤나 분주하다네.
구하사가 올 때쯤 되면 거의 완료 상태가 될듯해.
모두들 각 분초별로 단합을 하여 푸른 제복의 사나이들의
긍지와 명예를 위해 열심히 근무하고 있지.
고향에도 많이 바쁘겠네.
특히 농번기이기도 하지만 어느때 보다도 全 국민이 뭉쳐서
“전진”해야 할 시기이기 때문에 일선에서 근무하는 우리들은
후방의 힘차고도 약동하는 숨소리를 듣는 듯하네.
짧은 기간이나마 여러가지 좋은 추억 많이 남겨 보게나.
구하사 덕분에 소대장도 간접적인 휴가를 갈 수 있게
많은 얘깃거리 갖고 오도록 말야.
자! 03:00가 되었네.
여명이 트기 위해선 아직 1시간 이상이 남았지.
이제 아침 해안순찰을 돌 시간이네.
건강한 몸으로 복귀하기를 소대원과 더불어 기원하면서
건승을 비네.
해안에서, 소대장 중위 양 국 종
2.아들과 금연
1982년 9월 23일 오후, 1시 30분경으로 기억된다. 그날 나는 경기도 현리에 위치한 부대에서 당직근무 중이었다.
대위급 반장 5명이 순번대로 주말 당직근무를 서게 되니 적어도 5주에 한번씩은 당직 차례가 되었다.
“반장님, 일반전화로 사모님 전화입니다.”
당직병사가 무표정하게 전화를 건네 준다.
“저기요, 영걸이가 없어졌어요.”
아니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가?
“무슨 소리야? 두 돌도 안된 어린애가 어디를 갔다고? 이제 겨우 20개월이 안돼서 ‘엄마’, ‘아빠’ 정도만 겨우 하는 정도인데….”
평소 어머니 말씀이
“걸이는 널 닮아서 말이 느린 편이야.”
하기사 나는 네 돌이 지나도록 말이 신통치가 않아 혹시 언어에 장애가 있는건 아닌가 하고 주위 어른들 속을 태웠다고 한다.
“엄마(장모님)하고 머리하러 나왔는데 잠깐 사이에 없어졌어요.”
수화기 너머로 울음 섞인 목소리가 거의 혼이 나간 듯했다.
부대장님에게 급히 보고를 하고, 당직근무를 김대위에게 인계하고는 현리 버스정류장으로 급히 달려 나갔다. 이제 겨우 한달 남짓 된 둘째를 안고 있는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다.
둘째 영광이를 해산한지 한달이 지나서 모처럼 장모님과 같이 현리 시내로 머리(파마)를 하러 나왔는데, 영걸이가 미장원 문을 왔다 갔다 하더니 갑자기 안보이더라 는 것이다.
미장원은 현리 시외버스 터미널과 불과 20~30m정도 인접해 있었다. 말도 아직 제대로 못하고 걸음은 가볍게 뛰어 다닐 정도인 어린애가 갑자기 사라지다니?
일단은 현리 시내를 찾아보기로 했다.
여단장님이 수색병력을 보내주셨고, 사단에서도 수색 대대 병사들이 나와서 현리 시내, 하수구, 화장실, 개천 등을 위주로 대대적인 미아 수색작전(?)을 벌였다.
현리에서 운영하는 청소차까지 동원되어 확성기로 영걸이 인상착의를 방송하며 온 시내를 샅샅이 뒤졌지만 밤9시가 되도록 행방이 묘연했다.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혹시 유괴 또는 납치? 개천이나 하수구에 빠져 이미 죽은 것은 아닌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런 와중에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서 파출소장을 하고 있는 형에게 전화를 해서 큰애를 잃어버렸는데 혹시 서울로 갔을지도 모르니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 부근 좀 알아 보라고 했다.
밤11시가 다 되어 이미 주변은 완전히 깜깜해지고, 청소차 방송도 진작에 중단되었다.
여단 참모장님을 비롯한 참모들이 이구동성으로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찾아보자고 한다.
기가 막혔다.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걸이를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수색병력들도 이미 다 철수하고, 걱정해 주던 참모들도 귀가하여 혼자 남아 별 생각을 다하고 있는데, 눈앞에 현리 중앙교회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래, 이판사판이니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나는 독실하지는 않았지만 주말마다 율길리 여단군인 교회에서 예배를 빠뜨리지 않고 있었다. 교회는 텅 비어 있었지만 실내등이 있어 단상 뒤에 위치한 십자가와 길게 늘어 있는 좌석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무조건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우리 큰 아들 영걸이를 꼭 찾아서 돌려주십시오.”
“간절히 기도를 드립니다.”
“아~멘.”
그런데 갑자기 나도 하느님께 약속을 드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걸이를 찾아 주시면 하느님께 무언가 답례(?)를 해야 하는게 아닌가?
내가 약속을 할 수 있는건 세가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 담배, 여자를 끊는다는 약속.
이중에서 한가지만 약속을 한다면? 제일 만만한게 담배를 끊는다는 약속이 가장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제 아들을 찾아 주시면 즉시 금연을 하겠습니다.”
몇 번이고 다짐을 했다.
임관해서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으니 피운지 약 6년정도 됐나 보다.
다음날은 일요일인데 아침부터 군지원 병력이 나와서 시내 곳곳을 뒤지는 것은 물론이고, 시 외곽까지 수색 범위를 넓혀 하천 등지를 수색했지만 이렇다할 성과(?)가 없었다.
오전 11시쯤 되었을까? 가평경찰서 형사과 담당계장이 나와서 수사 지원을 하겠다고 대화를 요청했다.
“혹시 군생활 하면서 원한살만한 일을 한적이 있나요?”
“그런적 없는데요.”
“잘 생각해 보세요,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점이 있으면 말씀해 보세요, 이런 경우엔 조그만 단서라도 수사에 도움이 됩니다.”
형사는 원한에 의한 유괴 또는 납치 쪽으로 수사방향을 잡으려는 듯이 보였다. 20개월 밖에 안된 어린애가 갑자기 사라졌으니 그런 의심이 들 수밖에…
한참을 형사와 질의응답식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옆에서 운전병이
“반장님, 서울 형님한테 전화가 왔답니다. 급히 전화를 달라는데요.”
옆에 있는 가게에서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제 저녁에 마장동 파출소 야간 근무자에게 영걸이 인상착의를 얘기했는데, 파출소 숙직실에 어린애가 한명 자고 있다고 해서 오전에 데려 왔는데, 일단 와봐라.”
전방에 있다 보니 형님은 아직 걸이를 본적이 없어서 얼굴을 잘 모르고, 큰 애는 아내를 닮아 형으로서는 긴가민가하는 입장이었다.
더욱이 아내가 당황을 해서 걸이가 입은 티셔츠 색깔을 틀리게 말을 해서 전화상으로 영걸이가 맞는지 확신이 안 섰지만, 일단 느낌이 좋았다.
찦차로 아내를 태우고 등촌동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만감이 교차했다. 형이 데리고 있는 애가 걸이가 맞는지, 맞다면 그 어린 것이 어떻게 현리에서 서울까지 가게 됐는지, 몸은 괜찮은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등촌동 불고기집에 들어서니 형 내외하고 그 옆에서 고기를 먹고 있는 영걸이가 보였다.
반갑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영걸아”, 라고 부르니 그냥 천진스럽게 웃기만 하고,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어제 저녁 마장동 터미널에서 아랫도리를 내놓고 바지가 들어있는 비닐봉지를 꼭 쥐고 있는 어린애가 터미널에서 왔다 갔다 하길래, 어떤 가게 아주머니가 파출소에 신고를 했단다. 파출소에서도 울지도 않고 잘 놀길래 우유하고 빵을 줬더니, 잘 먹고 쓰러져 자더란다. 울면서 보채고 하면 미아 보호소로 보내는데, 이렇게 되면 말 못하는 어린애를 찾기가 더욱 힘들어지는데, 귀엽기도 하고 잘 자길래 숙직실에 옮겨 놨다고 하더라.”
미루어 보건대 미장원 옆 버스터미널 버스 앞에서 알짱거리는 걸이를 보고 차장이 손님 애기인줄 알고, 서울행 버스에 태워 마장동까지 데려갔는데, 도중에 부모가 없는 것을 알고 마장동 터미널에 내려놓고 그냥 가버린 것으로 추측되었다. 어떻게 이런 무책임한 행위를 할 수 있었을까?
현리에서 잃어버린 어린애를 24시간이 지나서 서울에서 찾은 것이 기적에 가깝다고들 한다.
다음날 출근해서 여단장실에서 차를 마시는데,
“양대위, 고생 많이했어. 그래도 애를 찾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자, 담배한대 피워.”
“아닙니다. 어제부터 저 담배 끊었습니다.”
“혼자 오래 살려고 담배 끊었어?”
여단장님이 농담을 건넨다.
“그게 아니고요, 아들을 찾아 주시면 담배를 끊겠다고 하느님께 약속을 했거든요.”
라고 하며 저녁에 교회에서 기도한 내용을 말씀드리니
“아들과 관련한 약속이니 당연히 금연 해야겠네”
하시며 다시는 담배를 권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술을 마시거나 속상한 일이 생길 때면 담배를 피우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까지 여전히 담배를 안 피운다.
“걸아, 고맙다! 네 덕분에 아버지가 담배를 끊어서 더욱 건강한 삶을 살게 됐다.”
3.경호관, 열쇠 이리주게!
지금부터 정확히 42년전이니 1979년 9월 중순경으로 기억된다.
전날 신민당 총재 경선에서 친정부 성향인 이철승과 정통야당인 김영삼이 당권 경쟁을 벌여 김대중계가 김영삼을 지원하면서 김영삼이 총재에 당선되었다.
당시 김재규가 부장으로 있던 중앙정보부는 이철승을 은밀히 지원하여 박대통령에게 이철승의 총재 당선이 확실하다는 정보보고를 마친 상태였다.
마침 나는 청와대 본관 대통령 집무실이 정면에서 빤히 보이는 소접견실 앞에서 경호 근무를 서고 있었는데, 전임 경호관이 근무지를 인계하면서 하는 말이
“지금 집무실에 실장님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 비서실장과 같이 들어 갔는데 분위기가 좋지 않다. 근무 잘 서라” 라고 한다.
아닌게 아니라 근무지를 인수받고 10여분이나 지났을까, 위의 세명이 집무실을 나오면서 다들 흥분된 상태였다.
김재규 “내가 김영삼이 XX를 권총으로 쏴 죽일꺼야.”
차지철 “김형, 참으쇼, 각하말씀도 있으시니 대책을 강구해야지”
하면서, 내가 근무하고 있는 소접견실로 쑥 들어가서는 문도 채 안잠그고, 서로들 격앙된 목소리로 전날 있었던 김영삼 총재가 당선된 것에 대한 성토를 하는게 아닌가. 내용인 즉슨 김재규가 지휘하는 중정에서 정보판단을 제대로 못해 친여 성향인 이철승이 떨어지고 김영삼이 당선되자 박대통령이 김재규 부장을 심하게 힐책한 모양이었다. 김계원 실장은 옆에서 가만히 듣는 입장이고, 주로 차실장이 거드는데, 김부장이 제대로 된 정보를 입수 못해 각하께 허위보고를 드렸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고, 시종일관 반말 비슷하게 질책을 하는 목소리였다.
김부장은 씩씩거리며 계속해서 김영삼을 죽여버리겠다고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육두문자도 섞어가면서…
일개 경호관인 내가 들어야할 내용은 도저히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자리를 이탈할 수도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갑자기 차실장이 접견실 문을 빠끔히 내다보더니
“경호관, 저쪽으로 자리를 옮겨” 하면서 문을 쾅 닫았다.
10.26 사건이 나기 약 1개월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육군 행정학교에서 ROTC 후보생 훈련 교관으로 근무하다가 대통령 경호실에 경호관으로 선발되어 근무를 시작한지 약 1개월이 지날 무렵이었다. 당시 계급은 육군중위로 약관 25세에 불과한 청년 장교였다.
그 당시 경호실은 차지철 경호실장이 장악하고 있으면서, 막강한 권력과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는 위치였다.
주말마다 각계 주요인사를 모아 놓고 국군의 날 행사를 방불케 할 정도의 열병과 사열식을 거행했다. 전차와 장갑차도 10여대 이상씩 참여시켰다.
물론 나와 같은 말단 경호관은 시키는 일만 하는게 고작이니 권한(?) 같은 거는 누릴 새도 없었다.
고참 경호관이라 해도 대통령을 직접 대면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궁정동 행사나 지방 초도순시와 같은 외부 행사시 대통령 주변 10~20m 이내에서 근접 경호를 하는 수행과 경호 요원을 제외하고는…
Y.S 대통령 시절에 구 청와대 본관을 헐고, 그 옆에 현재의 청와대를 한국 전통가옥 형식으로 신축했지만, 내가 경호실에 근무할 때만 해도 청와대 건물은 조선 총독부 건물을 바탕으로 한, 일제가 건축한 일장기 형태를 띈 직사각형 모습이었다.
1층 대통령 집무실 옆으로 정원으로 나갈 수 있는 작은 문이 있고, 그 밖에도 외국귀빈을 영접하거나 외교행사를 할 때 사용하는 대접견실, 대회의실, 소회의실, 소접견실, 영부인 접견실, 주방, 경호관 대기실 등이 배치해 있고, 2층에는 서쪽으로 비서실장과 비서실 요원 사무실이, 칸이 막힌 상태에서 동쪽에는 대통령 가족이 거주하는 침실 등, 거주공간이 있었는데, 큰영애(박근혜), 작은영애(박근영) 방이 각각 있고, 대통령 침실이 별도로 있었다.
대통령은 아침 05시 50분이면 아래층으로 내려와 후정으로 가서 검도와 가벼운 산책으로 운동을 하면서 일과를 시작했는데, 어느 날 경호초년생인 내가 후정으로 나가는 문을 지키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어쨌든 박대통령을 직접 대면하게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2층 침실 문 앞에는 철제 셧터가 설치되어 있고, 역시 후정으로 나가는 문에도 철제 셧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후정으로 나가는 출입문 열쇠를 들고 있다가, 대통령이 나갈 때 문을 열어 드리는 것이 내가 수행해야할 임무였다.
2층에서 셧터가 올라갈 때 거의 동시에 후정 셧터도 올려야 불필요한 소음을 줄일 수 있을 터였다. 하도 오래된 셧터라 드르륵 하는 소리가 귀에 거슬릴 정도였다.
전날 근무 일정을 통보를 받은 이후 계장으로부터
“각하 잘 모셔라. 열쇠 잘 간수하고”
라는 다짐을 받았고, 전날 저녁에 출입문 여는 연습을 수차례 했기 때문에, 언제 이층 셧터가 올라가는지만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아침 05시 52분이 되니 이층에서 ‘드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거의 동시에 반사적으로 후정 셧터를 올렸다. 정적을 깨뜨리는 셧터 합창소리에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뚜벅 뚜벅 2층계단을 내려오는 대통령 발자국 소리에 신경을 쓰다가 정신없이 90도로 인사를 하고, 열쇠구멍에 열쇠를 꽂고 우측으로 돌리는데, 문이 안 열렸다. 순간 당황해서 급히 이리저리 돌려봐도 문이 미동도 안 했다. 각하는 이미 내 뒤에 다가와서 발걸음을 멈추었는데…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경호관, 열쇠 이리 주게!”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두손으로 열쇠를 건네고는 옆으로 비켜섰다. 대통령은 천천히 후정출입문에 다가가 자물쇠에 열쇠를 꽂고는 한번에 여는 것이 아닌가.
“수고해”. 하시면서 열쇠를 건네 주곤 후정으로 나가셨다. 사실 후정 자물쇠는 옛날식이라 열쇠길이가 10cm정도 되는데, 제법 묵직해서 열쇠구멍에 정확히 꽂으면 잘 열리는데 그날따라 너무 긴장한 탓에 실수를 한 것이다.
대통령 심기까지도 경호해야 한다고 수시로 강조하는 차지철 실장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나는 물론이고, 직속 상관인 경호과장, 계장까지 가혹한 문책이 뒤따랐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매일 아침 독대를 통해 일일보고를 하러 오는 차실장에게 일개 경호관의 실수를 얘기하기에는 너무 측은해 보였을까?
박대통령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입을 닫아 주시는(?) 덕분에 중간에 보직이 해임되는 참사(?)를 면할 수 있었지만,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상황을 생각하면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다.
“경호관, 열쇠 이리주게” 하시던 박정희 대통령의 나직한 음성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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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국종이, 3편의 글을 써서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만 해도 이렇게 세월이 빨리 흘러갈 줄을 몰랐는데...
구하사에게 보낸 글에서 국종이의 따뜻한 부하사랑을 알 수 있고, 아들을 찾고자 담배도 끊을 정도로 아들을 사랑했고, 국가의 영웅 박정희 대통령을 측근에서 경호하였다는 것이 자랑스럽네요. 나도 국종이 옆에서 같이 지냈으니 물론 자랑스럽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