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정리: 2005.7.19
06:00피아골 야영장-06:35직전마을-06:55표교막터-09:45문바우등-10:20느진목재-11:15왕시루봉-11:30출발-12:40샘터-13:55구산리
새벽 5시가 되자 눈이 절로 떠진다. 간밤에 기분이 고조되어 제법 술을 많이 마셨는데 몸도 마음도 거뜬하다. 북엇국에 밥을 말아 먹고 배낭을 꾸린다. 텐트는 새벽이슬에 젖어서 그냥 적당하게 접어 애마에 실었다. 6시가 되어 피아골 야영장을 출발한다. 아직 본격적인 휴가철이 아니므로 피아골은 고즈넉하다. 하지만 여름휴가가 시작되고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 말경부터는 사정은 달라진다. 수량이 풍부하고 풍광이 좋은 피아골은 인기가 있어 전국적으로 많은 피서객이 찾는 대표적인 명소이다. 연곡사 앞에서 부처님께 인사를 올리고 직전마을을 지나 사색하며 부드러운 길을 따라 표고막터까지 직행한다.
오늘의 루트는 문바우등. 표고막터에서 왕시루봉 능선 쪽으로 뻗은 지계곡을 따라 곧장 오른다. 지도상에도 나오지 않는 작은 지계곡이지만 그동안 비가 자주 내렸기 때문에 수량은 풍부하다. 길은 따로 있지 않아서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를 트레킹하며 거슬러 오르기로 한다. 계곡 주위로 흐릿한 길과 고로쇠 파이프가 설치되어 있는데 길을 기대하지는 않는 것이 좋다. 햇볕이 온종일 들지 않을 정도로 계곡이 깊어 바위에는 푸른 이끼와 음지 식물들이 정글처럼 무성하게 많이 자라고 있다. 이 계곡은 비 오는 날 절대로 접근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이렇다 할 폭포는 없으나 이름 없는 작은 징담(澄潭)과 소(沼)를 따라 산행은 진행된다. 곳곳에는 많은 비가 내릴 때마다 쓸려 내려 죽은 나무들. 상류 쪽에서 마구 굴러내린 바윗돌들이 즐비하게 계곡에는 널려있다. 흐르는 물을 피해 바위와 돌을 건너뛰며 한 시간쯤 걸어 올라가자 물줄기가 약해진다.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혹시 몰라 물을 빵빵하게 담았다.
오늘 날씨는 어제에 연이어 무척이나 뜨겁다. 오르다 보니 계곡이 양편으로 갈렸는데 우측의 계곡을 따른다. 좌측은 낮은 안부가 보였기 때문에 문바우등 쪽으로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류 쪽으로 계속 올라가니 물이 다시 흐르다가 끊기며 앞은 점차 험난해진다. 작은 돌무더기와 빽빽한 잡목들이 앞을 가로막는다.
어젯밤에 마신 적지 않은 곡차 탓에 갈증을 느껴 물을 자주 마신다. 작은 바위에 걸터앉아 쉬며 기를 쓰며 걸어 올라온 동쪽을 바라보니 농평마을이 나와 눈높이를 맞춘다. 울창한 숲길을 낮은 자세로 계속 치고 오르는데 반바지와 반소매를 입고 있어 다리와 팔에는 무수한 상처를 입었다. 정상적인 길을 따르면 커다란 체력 소모는 없으나 이렇게 길도 없는 곳을 방향만 잡고 등로를 만들어나간다는 것은 심리적으로도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표고막터를 출발한 지 3시간 만에 능선에 올랐다. 바로 주능 돼지평전에서 내려온 왕시루봉 능선길이다. 지금의 위치가 파악되지 않아 일단 노고단 쪽으로 방향을 잡고 바위에 올라보니 문바우등이다. GPS가 있다면 쉽게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는데 아쉽다. 원시림의 왕시루봉 능선은 태고의 신비를 가진 수해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온통 나무와 숲으로 빽빽이 덮어져 있어 조망이 시원하게 터지는 곳이 없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작열하는 햇볕을 피해 숲속 터널 산행을 한다는 것이다.
어제 새끼미재에서 갑자기 출현한 멧돼지에게 겁을 잔뜩 먹었기 때문에 숲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신경이 쓰이며 털끝이 선다. 최근 들어 왕시루봉 능선길은 거의 산님이 다니지 않았던지 길조차 온통 풀숲에 덮여 발을 헛딛기가 일쑤이다. 간간이 서쪽으로 형제봉 능선과 문수리 계곡이 보이는데 별다른 조망은 없다. 느진목재에 내려서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느진목재는 사거리인데 주변 곳곳이 수풀이 무성하여 전혀 생소하다. 전에 몇 번 이곳을 지나쳤지만, 오늘은 완전 다른 모습이다. 문수사 쪽도 그렇고, 피아골 내동마을 쪽도 온통 수풀에 가려 길이 보이지 않는다.
왕시루봉. 천왕봉에서 바라보면 남서쪽으로 완만하고 길게 뻗어내려 독특한 모습을 자랑하는 왕시루봉. 구례 벌판에 높게 우뚝 솟아 자신의 건재함을 산님들에게 알리며 유혹하던 왕시루봉. 14연대 반란사건 이후 빨치산들의 요새가 되었던 왕시루봉. 오늘도 역시 이름값을 단단히 한다. 느진목에서 잠깐이면 될 줄 알았던 왕시루봉은 예상외로 지치게 계속 오름길이다. 노루목에서 반야봉으로 오르는 것처럼. 화개재에서 토끼봉을 오르는 것처럼 힘겹다. 몇 차례의 휴식과 물을 마시고 왕시루봉에 올랐는지 모른다. 지리 산꾼들이여. 나 왕시루봉을 결코 우습게 보지 말아라. 왕시루봉은 그렇게 묵묵히 자신을 과시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거의 파김치가 되어 왕시루봉 정상에 오르니 11시 15분. 느진목에서 거의 1시간이나 걸렸다. 꽤 먼 거리였나 보다. 왕시루봉 조금 남쪽에 조망이 트이는 바위가 있는 곳을 아는데 거기서 쉬기로 하고 걸음 품을 좀 더 팔기로 한다. 망바위에서 바라보니 평화로운 농평마을과 당재, 그리고 토끼봉 능선에서 뻗어 내린 뒷당재. 덕평 능선. 그리고 그 너머 천왕봉까지 시원스럽게 조망이 된다.
왕시루봉 하산 길. 구례에서 바라보면 왕시루봉 능선이 얼마나 기세가 대단한지 알 거다. 까마득히 올려다보이는 정상에서 섬진강 강가로 부드러우며 한편으로는 고집스럽고 완강하게 뻗어 있는 그 능선은 얼마나 근사하던가. 따라서 하산 길은 여유를 갖고 내려서야 그 기대를 충분히 충족시켜줄 것이다. 왕시루봉 하산 길에서 바라본 섬진강이 아름답다. 하동포구를 향해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섬진강 물줄기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며 눈부시다.
섬진강을 빤히 내려다보며 하산 길은 이어지는데 바닥이 온통 수풀로 덮여 길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감각적으로 찾아 나서야 할 정도로 수풀은 우거졌다. 발밑을 보지 못해 앞으로 고꾸라져 전에 다친 발목에 다시 충격을 받아 눈물을 찔끔 흘렸다. 또한 작열하는 태양은 얼마나 나를 괴롭히는지. 계속해서 목이 타들어 가 물을 자주 먹었다. 하산 길의 첫 헬기장은 온통 잡초로 우거져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하였고, 그 넓은 구릉 자리는 온통 잠자리 떼가 하늘을 덮고 있다.
초원과 억새지대를 지나 소나무 숲으로 내려서야 나는 뜨거운 더위로부터 간신히 해방되었다. 샘터에서 시원한 물을 바닥이 나도록 많이 퍼마셨다. 구례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 주었던 하산 길의 왕시루봉 능선은 지친 나에게 지루했으며 예상외로 그리 길 줄 몰랐다. 아마 햇볕과 기록적인 무더위 때문이었리라.
드디어 왕시루봉 길을 통제하는 철문을 내려서니 시멘트 포장도로. 시간은 일과 중 가장 뜨거운 오후. 이글거리며 올라오는 지열과 내리쬐는 태양열에 오늘도 산꾼은 완전히 K.O직전의 그로기 상태가 되었다. 걷다가 도저히 더위를 이길 수 없어 패배를 순순히 인정하고 체육공원의 커다란 바위에 몸을 숨긴 채 퍼질러 앉아 숨을 껄떡거리며 두렵게 타오르는 태양열을 피하여야 했다. 명곡 ‘아침이슬’ 의 노랫말처럼 한낮의 찌는 더위는 완전 나의 시련이었다. 아쉽게도 잠깐의 쉼 때문에 구산리 버스정류장에서 피아골로 들어가는 버스를 간발의 차로 시야에서 놓쳐 1시간을 지체하였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태양은 아직도 중천에 걸려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어 무조건 길가의 냉콩국수 집에 들어가 얼음과 국수를 씹으며 배고픔과 더위를 쫓으며 고행의 산행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