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집 잔치
우리 속담에 남의 집 잔치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한다'는 말이 있다. 남의 나라의 대권경쟁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인 것도 그런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체미 중에 겪은 미국의 가장 큰 행사는 뭐니 뭐니 해도 케네디와 닉슨이 각축을 벌인 35대 대통령선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8월에 접어들면서 내쉬빌 지방의 더위는 절정에 다달은 듯 싶었다. 그 더위 속에서 내가 마지막 학기의 수강에 골몰하고 있는데 주위에서는 대선(大選)의 열풍이 차츰 그 열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같은 과의 자유중국 출신인 우유땅(吳玉堂)군과 서로 편을 갈라서 가끔 뜨거운 논쟁을 벌였으니 말이다.
지금은 '대만' 이 보편화된 명칭이지만 그때 그들은 ‘Free China’ 즉 '자유중국'으로 불리워지기를 원했다. 그들의 비위에 맞추다 보니 그 말에 익숙해져서 지금도 나는 대만보다는 자유중국 쪽을 즐겨 쓰는 편이다.
대선이 시작되면서 이내 나는 닉슨 편을 들게 되었다. 닉슨이 두 번씩이나 부통령을 역임했으므로 그가 진짜 미국의 대통령감 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우(吳)군은 젊고 참신한 케네디를 열렬히 지지했다. 그때 일을 회상할 때 남의 집 잔치 운운한 모두의 속담이 머리에 떠올라서 쑥스러운 마음이 없지 않다. 우리는 서로 가까운 친구 사이였는데도 그 일로 하여 다소 소원해진 것을 생각하면 유감스럽기 이를 데 없다.
지난해 12월에 실시한 우리나라의 대통령선거 때도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정주영(鄭周永), 박찬종(朴燦鐘) 등 지지하는 후보가 달라서 서로 우정에 금이 간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선거가 무사히 끝났으므로 그 금도 이내 아물었을 것으로 생각은 되지만 이렇게 자신의 나라에서는 흔하게 있는 일이다. 그런데 남의 나라의 대선 때문에 외국친구끼리 사이가 벌어진 것을생각하면 아무래도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든다.
1960년의 케네디와 닉슨의 대결은 미국 대통령선거 사상 가장 박진감이 넘친 선거였던 것 같다. 그때 처음으로 두 후보 사이에 TV 대결이 실현되었고 또 매우 근소한 차로 결판이 난 때문일 것이다.
지난해의 미국 대선 때도 1960년 선거의 승패의 원인을 분석한 자료가 자주 거론이 되었다. 나는 그때 끝까지 그 결과를 지켜보지 못한 채 미국을 떠나게 되어 유감스럽게 생각되었다. 귀국하고 나서 두 달 뒤에 닉슨이 석패한 것을 알고 기분이 착잡했었다. 나와 우(吳)군이 편을 달리한 것은 고국의 사정이 서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 우리나라는 어렵게 6·25 동란의 휴전협정이 체결은 되었지만 휴전선은 항상 일촉즉발의 불안한 나날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의 공화당 정부는 우리나라의 방위에 적극적인 반면 민주당 정책은 소극적이었던 것 같다. 주한 미군의 감축은 물론 방위선의 후퇴 등이 매스컴에 자주 보도되어 우리의 마음을 썸뜩하게 했던 것은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6·25와 같은 참담한 전란은 우리 세대가 한 번 치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케네디가 당선이 되어서 미국의 소극적인 태도로 이북이 오판이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동란이 재발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이유로 하여 나는 마음으로나마 닉슨을 적극 지지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나나 우리 일행은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공화당 정부의 초청에 의해서 유학길에 오른 것이다. 나는 항상 그 일을 고맙게 여겨온 터이다. 그런 정서도 작용을 해서 나는 견학 여행길에 워싱턴에서는 마음먹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나가는 교회에도 나간 일이 있다. 그렇게라도 해서 나의 호의를 스스로 다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같은 교회인데도 별실이 있어서 나는 대통령과는 다른 방으로 안내되었다. 차례대로 들어가는데 본당은 이미 자리가 다 차 있던 것이다. 예배가 끝나고 나서 교회 밖에서 신도들과 다정하게 담소하는 대통령부처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가 있었다.
그의 온화한 모습에서는 5성장군이나 미국 최고의 통치자의 위엄 같은 것은 아무데서도 느낄 수가 없어서 뜻밖이었다. 원숙한 인품이란 바로 저런 것인가 하고 감탄했다. 국민들의 신망이 두터웠던 것도 그런데서 연유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이나 부통령을 비롯하여 미국 공화당의 수뇌부들이 우리나라의 방위에 적극적이라는 말이 파다했었다. 자기 나라에 도움을 주는 외국의 정치가들에게 호감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외국의 정치가들에게는 무조건 호감을 갖게 되었는데 일본에서는 다나까 가꾸에이 수상과 관련해서 낯을 좀 붉힌 일이 있다. 지금도 가끔 그때 일이 어두운 그림자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우리나라와 일본과는 오랜 세월 동안 묵은 감정이 쌓여 있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나라의 수상이었던 다나까 가꾸에이씨에 대해서 남다른 호감을 가져왔다. 지금은 록히드사건으로 정치가로서의 이미지에 많은 손상을 입은 것은 나라 안팎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내가 그에 대해서 호감을 갖는 것은 역시 그가 지극한 '친한파'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일본의 수상으로 취임했을 때 우리나라에서도 학력이 낮은 노가다 출신의 수상 운운하면서 매스컴이 떠들썩했던 기억이 난다.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뜻에서였다. 그는 최종학력이 고등학교에다 토건업자 출신으로 알려졌다. 일제시대 그가 조선 땅에도 건너와서 대전의 이연(理硏)공장에서 노무자로 취업했다는 풍문이 떠돌았었다. 그때의 친분으로 이 지방출신의 국회의원 김모씨가 주일대사로 부임했다는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 무렵 내가 우리 대학을 찾은 일본인 교육자 몇 사람을 만나서 다나까 수상의 이연공장 취업 건을 문의해 보았다. 그런데 다들 금시초문이라며 그렇지 않을 거라는 대답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누가 그럴듯하게 꾸며낸 말인지도 모른다. 그가 조선 땅에서 살았거나 말았거나 그것은 별로 따질 일이 아닐는지 모른다. 다만 우리나라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다니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몇 해 전에 내가 연수여행 차 일본에 들렀을 때다. 우리교포에게 다나까 씨의 근황을 묻자 그는 대뜸 "생명이 끝나가는저질 정치가" 운운하면서 그를 신랄하게 매도했다. 그뿐 아니라 그런 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고 해서 물은 사람까지 싸잡아서 비아냥을 했다.
나는 발끈하며 한국교포가 친한파의 정치가를 그렇게 매도할수 있느냐고 불쾌하게 쏘아붙였던 것이다. 교포인 그가 바로 저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나까 씨의 생명이 다해 간다는 말은 심장계통의 질환으로 투병 중인 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도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의 재기를 간곡히 기원하고 있다. 이야기가 옆으로 많이 흘렀는데 우(吳)군이 케네디를 지지한 연유도 그의 나라의 사정과 관계가 깊었던 것이다. 그는 원래 대만 태생인데 그 당시 자유중국은 대륙에서 망명한 국민당 정부가 집권했다고 한다. 그런데 집권층과 대만의 원주민들 사이에는 감정의 골이 꽤 깊었던 것 같다.
망명과 침략은 그 성격은 판이하게 다르지만 일제시대 우리는 조선 땅에 건너온 소수의 일본인에 의해서 지배를 받았다. 그 당시의 자유중국의 실정이 식민지 시대의 우리와 비슷했던 것 같다. 그런데 미국의 공화당 정부가 자유중국의 국민당 정부를 적극 지원해서 우(吳)군은 그런 관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가 케네디를 지지한 연유는 순전히 공화당 정부에 대한 반발 때문인 듯싶었다.
지금은 자유중국의 사정이 그때와는 판이한 것 같다. 38년이라는 세계 최장의 계엄령도 풀려서 경색된 정정(政情)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고 한다. 남의 나라 일이지만 반가운 마음 그지없다. 만일 자유중국도 우리와 같은 전란을 겪었다면 우(吳)군의 생각도 많이 달라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리 빈대는 미워도 초가삼간은 태울 수 없는 것으로.
그러나 나와 우(吳)군은 서로 나라의 사정이 달랐으므로 피차 아전인수 격인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남의 나라의 대선을 놓고 투표권도 없는 주제에 우리가 서로 감 놔라 배 놔라 한 것을 생각하면 가소롭기 이를데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이 남의 집 잔치라는 생각을 못하고 잠시 착각에 빠졌던 듯싶다.
그 뒤 우리는 체류기간이 만료되어 대선의 결과도 지켜보지 못한 채 9월 초에 서로 씁쓸한 작별을 했다. 나는 한국으로 직행했고 우(吳)군은 자유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두 달 뒤에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서 미국의 대선 결과를 알게 되었다. 우(吳)군이 지지한 케네디 후보의 당선이 확정되었다는 사실을.
두 후보가 근소한 차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패자 측에서는 소송을 하거나 찍자를 붙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나의 착잡한 기분과는 달리 우(吳)군은 그의 고국에서 얼마나 흐뭇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나는 다소 머쓱해지는 기분이 없지 않았다. 승부의 세계가 다 그런 것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1961년 1월 케네디는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미30여 년이 지났지만 그때 남긴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서 무엇을할 수 있을 것인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할 수 있을까를 자문해 봅시다." 운운하는 취임사는 지금까지도 가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케네디 대통령이 자유중국에 대해서 어떤 정책을 폈는지는 내가 들은 바 없다. 더구나 그가 임기 중에 흉탄에 쓰러졌기 때문에 더 알 일도 없게 되었다. 그 테러의 배후규명이 쉽지 않았는지 지금까지도 심심찮게 논란이 되고 있는 것 같다.
한편 케네디 후보에게 고배를 마셨던 닉슨은 그 뒤 주지사 선거에서도 낙선을 했다고 한다. 잇단 패배로 그는 이제 정계의 복귀가 가망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 같은데 1968년의 대선에서 극적으로 승리해서 정계에 복귀했다. 오뚝이 같은 정치가, 불굴의 정신의 소유자 등 찬사도 많이 나돌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1972년에 대통령에 재선되었지만 도청사건에 연루되어 1974년 8월 8일에 하야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닉슨은 임기 중에 사임한 미국 최초의 대통령이라는 불명예까지도 뒤집어 쓴 것 같다.
친한파로 알려진 닉슨과 다나까 두 사람이 다 같이 실권자의 자리에서 도중하차한 것은 유감스럽기 이를데없다. 앞서 어떤 재일교포의 비아냥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지만 그런 일이 아니더라도 이런 글을 쓰기가 조심스럽다. 애국자연 한다는 비아냥을 들을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국'을 잘 먹는 편이어서 농담 삼아 '애국자'를 자처한 일은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애국자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다.
우리는 가끔 퇴임 후나 만년의 처신을 서툴게 해서 지탄을 받는 경우를 본다. 이제 노생도 '애국자' 까지는 과분하지만 우리 사회나 나라의 일을 '남의 집 잔치' 보듯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隨筆文學, 19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