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테의 돈으로 세상 읽기 89
아이들이 걱정이다
격동의 한 해를 접는다. 광장은 분별없는 열기로 불타고 민생의 부뚜막은 차갑게 식어간다. 분노와 증오만을 배설하는 언어의 난폭함은 모든 언론의 사명이 되었다. 대통령이 수괴로 불리고 저주의 굿판은 때와 장소가 없다. 거칠어지는 사회 갈등과 문화를 정화할 방법은 딱히 보이지 않는다.
미래가 암울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때는 어린아이들까지 광장에 끌고 나와 대통령 모형에 몽둥이를 휘두르게 했다. 국회에서는 여성 대통령의 나신을 그려놓고 전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젠 이런 야만과 폭력이 낯설지 않은 한국 사회다. 모두 정치 모리배들의 활약상 덕이다. 누굴 탓하거나 한탄할 것 없다. 그들을 권력의 활극 무대에 등장시킨 장본인은 국민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懷疑)는 역사가 깊다. 플라톤은 그의 저작 『국가』에서 민주주의의 무질서한 자유를 경계했다. 다수의 의견이 항상 올바르거나 정의로운 것이 아니지만 민주주의는 다수에 의해 지배된다. 더 큰 문제는 대중의 지력이다. 민주주의는 대중의 의견에 의해 지도자가 선출되므로, 무지한 군중은 어리석은 지도자를 선택하기 마련이다. 그가 철인정치를 내세운 이유다.
오늘의 한국은 불행히도 플라톤의 기우를 비켜나지 못했다. 과도한 포퓰리즘은 정치인들을 연극배우로 만들었다. 숙의민주주의는 광장 민주제로 고착되었고 천민 민주주의로 전락했다. 젊은이들은 광장에 모이는 것이 깨어있는 시민으로 생각할 정도다. 심지어 외딴 시골 마을까지 결사반대라는 현수막이 길을 막는다. 죽기를 각오할 일이라는데 정작 죽었다는 사람은 없다. 이젠 헌법 위에 뗏법이 있다는 자조조차 시들하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대중의 열정은 쉽게 선동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민주주의는 다수의 독재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선동은 광장정치에서 폭발적 에너지를 얻는다. 물론 시민이 광장에 뛰쳐나올 수 있다. 자신의 의견을 아무도 대변하지 않는 소수자의 신문고는 광장이다. 이쯤에서는 광장의 시민들에게 물어야 한다. 그대들은 사회적 약자인가, 억울한 일을 당한 시민인가? 그대들은 사회로부터 소외된 소수의 이방인인가, 아니면 차별받는 시민인가? 그도 아니면 그대들의 신념이 옳다는 것을 촛불이나 태극기로 증명할 수 있는가?
정보는 왜곡되기 쉽다. 문제는 의도적으로 정보를 왜곡하는 경우다. 나치 독일의 선전 장관이었던 요제프 괴벨스는 "거짓말도 계속 반복하면 진실이 된다"고 했다. 눈만 뜨면 사실을 왜곡하거나 편향된 정보가 귀청을 때린다. 학자들은 정보의 편향된 유통과 집단 극단화가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위협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개인이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만을 소비할 경우, 극단적인 견해가 강화되면서 사회적 합의와 협력은 점점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한국은 확증편향의 사고체계가 강화되는 사회로 가고 있다. 무엇이든 극단적이고 자극적이며 대립적이다. 한쪽에서 대통령의 목을 비틀고 맞은 편에선 야당 대표의 구속을 외친다. 누가 어떤 정보를 어떻게 주었길래 그들이 광장의 일상적 평화를 빼앗는지 괴벨스가 무릎을 칠 일이다. 왜 그들은 특정한 정보와 주장만을 반복적으로 소비하며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는지 신기하다. 무지에는 완성이 없다고 하는데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렵다.
인간의 사고체계는 어릴 적에 고착된다.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5~12세 사이에 세상을 보는 창문이 만들어지고 사춘기에 색이 칠해진다. 우리나라 30, 40대는 어릴 때 IMF라는 가혹한 경제 질서를 경험했다. 실직한 아버지의 민망한 얼굴은 아직도 그들의 가슴속에 멍울로 남아 있다. 모든 불의와 불평등은 기업가들의 탓이요 기존 질서 탓이다. 20대에 들어서는 청년들에게 세월호 사건은 큰 충격이었다. 언론은 24시간 여과 없이 침몰하는 선박을 화면에 띄웠다. 같은 또래들이 수장되던 뱃머리의 풍선은 그들의 뇌리에서 평생 지워지지 않을 무력감과 절망과 공포의 풍선이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부정적인 사고의 존재다. 나쁜 뉴스는 좋은 뉴스보다 훨씬 빠르고 널리 전파된다. 이유가 있다. 풀숲이 흔들리는 것은 시원한 바람 때문이 아니고 사자가 숨어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 이런 자연계에서 약자의 생존방식은 무리를 짓는 것이다. 우리 DNA에 박혀있는 공포유전자가 집단의 무리를 통해 안위(安慰)를 얻으려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어떤 이슈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의견이 많다. 특정 세대가 기존 질서에 저항하려는 태도가 강한 데도 이유가 있다. 그들은 풀숲의 사자를 만났고 상처를 입었다. 떼를 지어 촛불을 들어야만 사자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저곳에 있는 사자는 사파리에 있는 사자라고 알려줘도 믿지 않는다. 광장에는 상위의 집단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일러주는 것도 무의미하다.
세상에는 쓰지 않기 위해 가두어 둔 말들이 있다. 판도라 상자만큼이나 열어서는 안 되는 단어들이다. 당연히 상자를 닫아두는 데는 인내심을 요구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참을성이 없다. 탄핵이라는 단어는 까다롭고 무겁고 빛을 보지 말아야 하는 말이지만 이제 일상적 용어가 되었다. 망각의 영역에 있어야 하는 언어가 부유하여 먼지처럼 떠돌면 영혼이 탁해진다.
우리 어린아이들은 탄핵이란 단어에 밑줄을 긋고 자라게 생겼다. 조금이라도 풀숲이 흔들리면 광장으로 달려갈 것이다. 그렇게 만든 것은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그 중심에 대통령이 있다. 야당 또한 자숙해야 한다.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국가의 안녕과 발전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자문해 보기 바란다.
정치적 안정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여야는 지금과 같은 국론 분열과 극단적 대립으로 얼마나 많은 사회적 비용이 지출되는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너그럽게 정량적 손실은 민주주의의 한계라고 자위할 수 있다. 어린아이들을 병들게 하는 일들은 여기서 멈춰야 한다. 적개심은 아이들의 창문을 어둡게 색칠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