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러움을 아는 측은지심
오래 전 이우에 사토시 전 산요전기 회장이 삼성그룹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 회장과 손잡고
수원 공장에서 TV 조립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우에 회장이 공장 안에 들어갔더니 마루 밑에 큼지막한 김칫독이 가득 놓여 있었다.
무슨 김치가 이렇게 많으냐고 묻자 호암이 대답했다.
"다 시골 출신 직원들이다 보니 끼니때마다 맛있는 김치가 먹고 싶을 것 같아 제가 직접 지시헤 준비한 것입니다."
호암은 인(仁)의 철학을 실천한 경영자 였다.
그런 측은지심은 일본 와세다대 유학시절, 우연히 읽은 《여공애사(女工哀史)》의 영향이 컸다.
가혹한 노동 환경에 시달리다 상당수가 폐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공장 직공의 애환을 그린 작품인데,
이 책의 작가 역시 14세부터 공장에서 일하다가 책이 출간되던 해에 28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1955년 호암이 대구에서 제일모직 공장을 건설하면서 가장 먼저 완공한 건물은 '진심(眞心)' , '선심(善心)' ,
'숙심(淑心)' 이라고 이름 붙인 여사원 기숙사 세 동이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스팀 난방 시설을 설치한 데다 목욕실, 세탁실, 다리미실, 휴게실을 두루 갖추어
최적의 생활환경을 마련했다. 당시 구내에서 공장이 그런 편리하고 쾌적한 기숙사를 갖추기는 처음이었다.
호암은 또 직원들에게 직장의 안정성을 느끼도록 하고, 나아가 사업가 마인드까지 심어주고자 했다.
호암이 따뜻한 인간애를 경여의 미덕으로 삼게 된 또 다른 일화가 있다.
한국전쟁으로 삼성물산공사가 완전히 붕괴됐을 때 일이다. 트럭 다섯 대를 구해 사우너들과 가족을 싣고
대구에 도착한 호암은 막막했다. 하는 수 없이 조선양조장으로 가서 신세를 지고자 했다.
조선양조장은 그가 1947년 서울로 올라오면서 사업을 맡긴 곳이었다. 조선양조장 경영진은 호암에게
그동안 모아둔 3억 원을 기꺼이 건네주었다. 호암은 이 돈을 들고 부산으로 가서 삼성을 재건할 수 있었다.
전란으로 인심이 황폐해진 때 은혜를 잊지 않고 의리를 지킨 옛 벗들을 보면서 호암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희대의 경영자로 추앙 받는 호암이지만 정작 경영서에는 흥미를 느껴 본 적이 별로 없다고 한다.
호암이 관심을 가진 것은 경영 기술보다는 그 저변에 흐르는 인간의 마음가짐이었다.
"나라는 인간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바로 《논어》다.
나의 생각이나 생활이 《논어》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해도 오히려 만족한다."
호암은 멋을 아는 사람이었다. 옷에 걸치는 의관에서부터 만년필, 허리띠 따위의 소품에 이르기까지
최고만을 고집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최고는 요즘 사람들이 집착하는 고급 브랜드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큰 부자가 되기 전이나 후에나 일본 도쿄의 '바로몽'이라는 양복집에서만 옷을 맞춰 입었다.
작고 허름한 양복점이어서 그리 비싸지 않았지만 양복장이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중국 상하이에서 양복점을 하다가
동경에 정착한 중국인이었는데, 호암은 그의 성실한 삶과 자세를 배우고자 했다.
미당 서정주는 조시(弔詩)에서 호암을 이렇게 추억했다.
"무한한 탐구만이 인생 그것이었던 사람 / 열백 번 쓰러져도 다시 일어날 줄 알던 사람 /
새벽 종달새같이 언제나 일찍이 새로운 발견에 게으름이 없던 사람 / 찾아 쌓아서는 또 골고루
나눌 줄도 알던 사람 / 이 나라 사람들의 한과 그 한풀이의 풍류에도 서툴지 않았던 그대 /
서러운 사람들과는 같이 서러워할 줄도 알고 / 춤과 노래판에서는 춤이고 노래일 소도 있었던 그대 /
그러나 매양 그 한과 설움을 이겨 내고 있었던 그대."